§구멍 난 필름을 본 적이 있다.
마지 못해 인화한 사진 속에는 모두 똑같은 모양의 얼룩이 같은 위치에 나 있었다. 나의 기억이 꼭 그랬다.
내게 난 얼룩은 소녀의 형을 띄었다.
햇빛에 필름이 상하듯이 언젠가부터 나타나서는 내 모든 기억의 한편에 존재했다. 도무지 마음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녀는 별난 아이였다.
그 나이쯤이면 밖에서 한참 뛰놀거나, 일을 게을리하고 싶은 나이일 텐데, 무언가 시키면 아무리 시간이 걸려서도 착착 해두었다.
그리고 표정이란 게 없어서, 도통 웃거나 울질 않았다. 대신 쳐진 눈꼬리에 상시 우울감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게 의젓함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는 그 모습이 꼭 나와 곂쳐보여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깨어질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사십 평생 한 장소에 오래 몸 담그는 일 없이 수도사처럼 견문을 넓혀 온 나이다. 그러기에 깨친 사실이 하나 있다.
하늘은 무정하다. 신도 그렇다.
지금 그 아이가 내게 오고 있었다.
"마리?"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품에 안긴 아마릴리스는 불안하게 날 올려다봤다.
"필로?"
"마리가 오고 있어."
"그게 누군데?"
잠깐이나마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눈망울에는 으레 거절을 두려워하는 연약함이 떠올랐다.
"제발 가지마."
"가야만 해."
"어디로, 왜?"
리즈는 실로 영악했다. 그녀는 일순 내 안에 스친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너의 가족이 되면 안 돼?"
사랑은 이토록 잔인했다. 나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피했다. 그러자, 리즈는 내 얼굴을 손으로 잡아 돌렸다.
"사랑해본 적은 있어?"
"나는 사랑하지 않아."
"거짓말. 너는 나를 사랑해."
동공이 불안하게 떨려왔다. 심장은 맥동하고, 때아닌 오한이 척추에 흘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팠다.
"그렇지 않아."
"그걸 알았기에 네게 고백했던 거야. 그걸 알았기에 지금까지 기다린 거야. 필로, 이 얼간아. 지금도 봐."
리즈의 두 손이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내게서 눈을 못 떼잖아."
이제껏 알지 못했지만 리즈의 눈빛은 비 오는 밤의 먹구름을 닮았다. 또는 탁류가 흐르는 템스 강의 굽이처럼도 보였다. 모두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누가 되었건 타인이야."
리즈는 호소했다.
"이제는 너의 삶을 살아. 나하고 함께."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도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하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고개 저었다.
"아니, 그녀는 나의 일부야."
"일부, 무엇?"
대답하지 못하고, 나는 그녀를 뿌리쳤다.
"마리!"
그리고, 여인은 홀을 들어 올린다.
"실로 그렇다."
우리는 멍하니 둘 사이에 나타난 제복 차림의 여성을 응시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 팔은 기품 넘치게 상승했다.
"의무는 개인을 초월한다. 훌륭하다, 병사여. 또한, 유감한다. 지금 떠났다면 짧은 여생이나마 누렸을 것을."
리즈는 곧장 반응했다.
그녀의 소매에서 보지 못한 권총이 빠져나왔다. 얼마나 연습했는지 나조차 반응하기 힘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리즈는 여인을 겨누었다. 그때, 여인의 홀이 혼탁한 빛깔을 풀어놨다.
"충성, 지배."
자홍색 성운, 은하수, 그리고 자외선으로 이뤄진 우주의 물결파였다. 색채는 불결하게 점멸하며, 가로등 불빛은 흐릿한 회갈색으로 가라앉았다.
리즈의 손은 제자리서 헛돌았다. 끝내 발사한 탄환은 무고한 밤하늘 어딘가로 녹아 사라졌다.
"내게, 뭘 했지?"
여인은 제자리서 그 장면은 관망할 따름이었다.
"혼란스러울 테지. 일생 연마한 기술은 배반하고, 체화한 지식은 증발하였으니, 시대는 바야흐로 개인의 종말이다."
그녀는 동정하는 투의 말을 한없이 무감정하게 했다.
"당신, 누구야?"
"나는 베일 장막 이면을 들추는 자이다. 또한, 이치와 합리의 화신이기도 하지. 헌데 눈먼 그대는 무엇이길래 내게 맞서지?"
리즈의 동공이 한없이 불안하게 떨렸다.
"필로."
그녀는 다급히 내게 속삭였다.
"도망쳐."
"리즈."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틀렸어. 내가 누군지 점차 흐릿해져.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여인은 한 걸음 다가섰다.
"시대로부터 도망칠 텐가?"
홀에서 뿌려지는 형형색색의 별빛이 안개처럼 드리웠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불가분의 권력이다. 또한, 필연적인 진보다."
"아니, 나는, 너를 안다."
여인은 걸음을 멈췄다.
"튜더 회장. 빅토리아 여왕. 그게 네 이름이지."
빅토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홀에 박힌 보석을 문질렀다.
"줄곧, 의아하게 여겼지. 방책은 통했을 터인데, 어떻게 그대만은 몇 번이고 기억을 되찾아서는."
나는 계속해서 호신용 엔필드 권총을 꺼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손은 끊임없이 헛돌았다. 끝내는 안주머니가 어딨는지도 알 수 없어졌다.
"그대는 하나가 아니군. 그걸 위해 그대는 뭘 바쳤지?"
빅토리아는 물었다.
"이 방책은 내게도 부담이 크다. 나날이 희미해져, 반쯤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지."
"튜더라는 이름은...."
"설령 모든 걸 잃더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있는 법이지."
"그깟 왕관 말인가?"
여인은 답하지 않았다.
"고작 권력을 위해, 그게 무수한 비극을 낳은 이유인가?"
"하찮음."
여자는 경멸스럽게 중얼였다. "국가는 개인과 논담하지 않는다. 개인 역시 그렇다. 다만, 따를 뿐이지." 여자는 말 한다. "강력한 의지 앞에는 충성만이 머문다." 아마릴리스 손에 권총 들다. "진정한 충심에는 복종이 깃드는 법." 그녀 손 움직인다. 큰 소리, 번쩍이는 빛, 아프다. 빨간색. 피. 흐르다. "그러기에 충성, 그러기에 지배." 여자 막대기 빛. 나 권총 들다. "쏘라, 병사." 파도를 지배하라. 파도를 지배하라. 파 도 를 지 배 하 라. 나는 손잡이. 장갑. 권총. 방아쇠. 철. 검정. 손가락. 방아쇠. 총. 여자. 빨강. 아픔. ☹. 검정. 하늘. ☛. ☁. 강. 비.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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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일이다.
그 당시 나는 밤잠을 설치곤 했다. 전쟁터에서의 습관은 언제라도 나를 깨웠고, 그때마다 있지도 않은 다리가 쑤셨다. 이런 날에는 특히 독한 위스키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적은 어둠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하물며 나는 시인이 아니다. 술병은 언제라고 내 옆에만 있지 않았다. 매번 욕설을 내뱉으며 침대에서 기어나와야 했다.
다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달빛이 그리 별났을까.
낯선 아이가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그 자태가 간절하고 위태로워, 나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뒤에서 기다렸다.
"아멘."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뭘 빌었지?"
아이는 날 돌아봤다.
"말해봐."
"아무것도요."
나의 재촉에 소녀는 답했다.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무거운 대답이 돌아올 수 있을까. 나는 지레 겁먹어서 뭔가 더 물었다.
그때 뭐라 물었더라. 그리고, 이 소녀는 누구길래 내 기억 속에 이토록 특별하지? 기억해야 해. 잊어서는 안 돼.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모든 기억을 걷어낸 자리에는 한 구의 시신만이 있었다.
그 시체는 지금 내게 속삭였다.
"...주인님?"
셜리 마리, 너니?
방아쇠를 당기자, 탄환이 지평선을 향해 날았다.
"사소한 방해다."
빅토리아는 불쾌하단 듯이 내뱉었다. 그 시선 끝에는 소녀가 있었다.
"아니, 여기서 폭력은 끝이다."
"충성, 그리고 지배."
홀이 다시금 우주의 이채를 불러왔다. 나는 다시 한 번 상실의 고통을 겪었다. 자아는 이미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내 안의 나를 정의하는 것은 하나뿐이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미 나이다.
"나의 이름은 필레몬 허버트."
"나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여왕이다."
뜻하지 않게, 나는 빛에는 산소가 없단 사실을 깨우쳤다. 그 안에서 나는 익사해갔다.
"나는 살아있는 권위다! 일개 개인이 무엇으로 나와 맞설 텐가!"
가슴을 부여잡자, 썩은 핏물이 울컥거리며 쏟아졌다. 몸이 내 것이 아닌듯이 무거웠다.
"도덕."
나는 자리에 섰다.
"그리고 엔필드."
빅토리아여, 안녕히.
총구가 불을 뿜자, 빛이 스러지며 여왕의 몸이 바닥으로 꺼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구멍 뚫린 자신의 몸을 봤다.
"과거는 모두 침체하고, 나 자신조차 흐릿해졌을 때, 나는 인간의 저변에서 보았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나를 만드는가."
입에서는 마른기침과 피 가래가 쏟아졌다.
"시체가 있더군. 그게 나야. 나의 본질, 나의 죄."
도덕은 죄에서 비롯된다.
"셜리 마리. 내가 그녀를 죽였어. 그녀가 나의 죄다."
"나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
"나는 복종하지 않는다."
우주가 옅어진다.
"나는 국가다!"
"나는 복종하지 않는다."
색채가 돌아온다.
"나는, 여왕이다!"
"나는 복종하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나는 권위 그 자체이다! 무엇도 위에 없는 지엄한 법이다!"
"아니, 존재한다. 나다, 나 필레몬 허버트다. 인간이다. 그 어느 인간도 권위보다 낮지 않다. 네가 찾는 지고함은 모든 개인에게 존재한다! 망령이여, 인간을 지배하려 들지 마라!"
비가 그치면, 또 내일이겠지.
"권위여, 내게 복종하라!"
마법은 깨어졌다.
현실에 버려진 여인은 붉은 강을 기었다.
"나는, 나는... 무엇이지? 내 이름, 내 기억."
그녀는 떠는 손으로 목에 건 로켓을 열었다. 그리고, 사랑스럽게 웃었다.
"당신, 여기 있었군요. 내 사랑, 앨버트."
튜더는 이제 없었다.
광적인 망상에서 시작한 학살, 전쟁, 비극... 광몽狂夢은 일단 여기서 멈췄다. 모든 권위를 벗겨 낸 후에 여인은 끝내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는 망령이었다.
빅토리아는 죽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주인님!"
마리가 내게 온다. 환청은 아닐 테지, 어찌나 감사한 일인가. 그녀가 내 앞에 앉았다. 나는 온힘으로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내가 죽으면."
"말하지 마세요."
나는 고개 저었다.
"듣게. 내가 죽으면, 아서에게 가. 그리고, 그에게 전해. 튜더 회장은 죽었다고. 런던에 리즈가 있다고. 뉴욕 42번가. 지구의 시간은 반복, 대기권의 위성. 앨런 블랙을 찾아. 그리고, 명왕성, 앨리스. 전부 기억했어?"
마리는 끄덕였다. 과연 영리한 아이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마음 쓰였어."
"이제 그만 말하세요."
"새벽에, 네가 기도하는 걸 봤지. 무얼 빌었느냐 물었을 때, 내게 뭐라 했었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고요."
"왜, 그러면 왜 기도했지?"
마리는 힘껏 내 손을 쥐며 답했다.
"감사해서요."
무채색의 기억에 빛깔이 돌아왔다.
이제야 전부 떠올랐다. 소녀는, 마리는 내게 그리 답했다. 그녀는 때로는 웃었고, 때로는 울었다.
그 다음 날부터, 나는 새벽에 깨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 집 문을 열고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소리가 들리면 몸을 뒤척이고 다시 잠들었다.
하늘은 무정하다. 신도 그렇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멋진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