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3)
할렐루야, 할렐루야....
멀리서 불린 찬송가가 높은 천장과 기둥 사이를 오가며 울렸다. 그 아래 형색이 초라한 노인이 석회암 바닥 위로 옷을 끌며 걸어왔다.
"하늘에 계신 나의 주."
매 걸음에는 인고가 담겼다. 그만큼 신중하니, 영원처럼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몸 위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다채색의 빛이었다.
"나의 아버지."
단어 하나를 뱉을 때마다 마른 입술의 균열이 하나씩 늘어났다. 여든 남짓한 노인은 이미 생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존재였다.
"나의 신이시여."
노인은 꺼져가는 숨소리로 간신히 기도문을 읊었다. 할렐루야, 그의 입술이 닫히기도 전에 우렁찬 찬송가가 그 위를 덮었다.
"키리에 엘레이손." 할렐루야, 할렐루야. "크리스테 엘레이손." 할렐루야, 할렐루야. "키리에 엘레이손." 할 렐 루 야 할 렐 루 야.
그가 묘비 앞에 무릎을 꿇자, 적막한 사원에 둔탁한 충격음이 메아리쳤다.
"정녕 거기 계시옵나이까?"
노인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닫는 것조차 버거워,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이 순간, 그는 신의 존재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를 굽어살피며 가엾이 여기시옵나이까? 혹여 그리 하시면 부디 여기 길 잃은 어린 양을 불쌍히 여겨 목자를 보내주십소서. 그것이 어렵다면 한 줄기 계시라도 은혜주소서."
성당 바닥의 빛과 기둥이 만든 그림자, 지저귀는 새 소리와 돌에 묻은 내음, 모두 주님의 기적이다.
"부디, 부디, 내리소서."
노인은 흐느껴 울었다. 그저 두려워 떠는, 한없이 작은 인간이다.
"내리소서, 내리소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 ... .
달그락, 달그락.
나는 창밖을 보며, 하염없이 수저를 저었다. 이미 다 식은 우유죽의 기름막이 나무 수저 손잡이를 타고 올랐다 내려갔다.
"마리, 또 주인님이 편식해!"
"뭐, 아니야."
토미, 이 요망한 꼬맹이가 왜 아침부터 내 침대 옆에 붙어 있나 싶더니, 보아하니 마리가 붙여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마리는 방에 들어오며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조금이라도 드셔야죠."
"약이 독해서 그래."
"주인님은 약도 안 드시잖아요."
변명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얌전히 죽 한 숟갈을 떠먹었다. 내가 의식불명의 중태에서 각성한 것은 이틀 전이었다.
듣기로는 꼬박 일주일을 넘게 누워 있었다고 하니, 욕창이 생기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간이 잘못됐어. "
"소화 잘 되라고 먹는 죽에 케첩을 넣을 수는 없잖아요."
나는 흠칫했다. 내가 귀를 먹기라도 했나, 마리는 직전의 발언에 대한 어떤 해명도 없이 계속 말했다.
"박사님 말로는 식욕이 없는 게 정상이래요. 그래도 영양은 보충해야 하니까 억지로라도 먹게 하랬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침대에서 땀 젖은 담요를 차곡차곡 접었다.
"잠깐, 자네, 아직도 박사랑 연락하나?"
마리는 손을 멈췄다.
"오해하지 말고 듣게. 내 말은."
"설마, 주인님. 제가 설마 박사님이랑 놀아난다고?"
나는 모른 척 헛기침했다.
"세상에, 지금까지 그걸 염려하신 거에요?"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그 자식은 영 마음에 들질 않는단 말이야."
마리는 깔깔, 아마도 깔깔이라 부르는 게 맞겠지. 어쨌거나 세차게 웃었다.
"그런 걱정 마세요. 그리고, 프랑켄슈타인 박사님은 기혼자세요. 또, 대단한 애처가고요."
"그래, 그렇단 말이야?"
"저한테는 항상 아내 얘기를 들려줬어요. 이름은 앨리자베스라고 하더군요. 박사님은 여기 안 계신 동안에는 스위스 본가에 머무르신다는 거 같아요. 우리끼리 얘기인데, 조금 공처가이신 거 같죠?"
프랑켄슈타인이 기혼자라, 그러고 보면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인데.
나는 새삼 지금껏 그에게 너무 무관심했단 걸 깨달았다. 애초에 그는 대체 뭘 위해 학술회에 있는 거지?
그때였다.
"마리, 손님 왔어!"
"이런, 저는 가볼게요. 손님은 줄리엣이 데리고 올 거에요. 주인님 안 계신 동안 제가 가르쳤거든요."
그러고 마리는 접은 이불을 품에 안고는 방을 떠났다.
그날부터 손님은 번갈아 찾아왔다.
대게는 나쁜 소식과 동반하는 통에 바로 잊었지만, 그중에는 나름 기억할 만한 이도 몇 명 있었다
"튜더 회장이 죽고, 왕립학회의 음모는 고발되었습니다. 법원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제출된 게, 아버지가 모아온 자료였습니다."
이브는 담담히 말했다.
"압류, 체포에는 윌슨 형사님이 힘 써주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복직하기로 하신 거 같더군요."
"자네가 원하던 일 아닌가?"
나는 물었다.
"예? 그렇지만...."
"그런데 자넨, 고생 끝에 목적을 달성한 사람치고는 별로 후련해 보이지 않는군."
"아니, 저는... 아마, 그런 거 같습니다.
이브는 멋쩍게 웃다가, 그나마도 관두었다. 그녀는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는 귀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곤?"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배를 타는 일 빼고는 뭐든 할 겁니다."
나는 창밖을 봤다. 흰 구름이 푸르른 망망대해 위를 느긋이 흘렀다.
"바다는 좋아. 인생에서 두 번 선상 생활을 했는데, 지금도 가끔이면 그때가 그리워져."
"저도 그렇습니다."
이브는 진지하게 끄덕였다.
"하지만, 허버트 씨도 떠나진 않으시잖아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가볍게 웃어 대답했다.
"타지에서 고생 많았어. 가서 잘해보게."
"그간 도움을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내가 돕고 싶어서 한 건데 뭘. 자네도 내 목숨을 살렸으니 비긴 걸로 하세. 그래서, 오늘 바로 떠날 건가?"
"아, 아니요. 한동안은 런던에서 신세 진 사람들을 돌아보려고요."
떠날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이브는 그 자리서 머뭇거렸다. 이렇게 보면 딱 제 나잇대 아가씨 같았다.
"용건이 남았나?"
"예, 은랑백 말입니다."
두통이 일었다. 나는 양 엄지로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한숨처럼 말했다.
"복잡한 문제야."
"압니다."
"아니, 자네는 몰라."
"하지만, 오해는 풀 수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서 그래."
이브는 서서히 깨달은 것처럼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 말은."
"물론, 어떤 악의를 품고 해친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그녀의 부친, 조부의 죽음과 무관하다면 거짓말이겠지. 내가 책임질 문제야."
그녀는 한참 단어를 골랐다. 그러고도 자신이 없어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해소할 수는 없나요?"
"가능 여하를 떠나, 나는 그게 옳은 일인지 확신이 없네."
이브는 고개 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때로는,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법이야. 그녀에게 원망과 분노를 절제하면 뭐가 남을까? 빌어먹을. 망할 금주. 여기가 미국인 줄 알아!"
습관적으로 입에 물병을 털어 넣었지만, 그저 맹물 맛만 났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뚜껑을 닫았다.
"제가, 제가 살릴게요."
"자네가?"
"저는 간호사입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살리는지 압니다."
"그래, 자네는 살을 봉합할 줄 알겠지. 어떻게 뼈를 붙이는지도. 하지만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잖나.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는 이제 가족에 돌아가야지."
나는 이브의 표정을 보지 않았다. 봤다 한들 내가 할 말이 바뀌지도 않았다.
"자네는 마음 가는 대로 하게. 나라고 그 불쌍한 처녀가 무고하게 죽게 둘 생각은 없어."
"허버트 씨는요?"
"한동안 내 주변만 캐게 둬야지. 내가 건재한 동안, 엉뚱한 짓은 안 할 거야. 너무 엇나가지 않기만 빌어야지."
이브는 한참 거기 서 있었다. 나라면 뭐라도 더 말했을 텐데, 참 의젓한 아이였다.
"감사했습니다."
요즘 주변에 강직한 젊은이만 있는 통에, 나 같은 노인이 설 자리가 없다. 나는 술맛이 나지 않는 줄도 알면서, 수통만 연거푸 기울였다.
한편, 과거에서 찾아온 손님도 있었다.
"이제 일어났나, 잠꾸러기?"
"알트, 자네가 어쩐 일인가."
나는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가, 통증으로 인상 쓰며 다시 누웠다.
"어째 너하고는 병상에서만 만나는 거 같아."
그는 예의 없이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외모만 그런 줄 알았더니, 하는 짓거리까지 영락없이 못 배워먹은 대학생이었다.
"사실,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리즈."
"죽었다면 나로서는 더 편했을 텐데. 밀수는 편하거든."
교양을 아는 리즈는 그처럼 침대에 오르는 대신, 의자 하나를 끌어 침대 곁에 놓고 거기 앉았다.
"어째 나보다 더 반가워하는 것 같은데."
아서는 시답잖은 불평으로 툴툴댔다. 어째 그만은 대학 시절보다 못나진 듯했다.
"그래서, 결국, 다시 모였군. 위대한, 뭐랬더라. 사자 대가리 클럽이었나. 재결성한 건가?"
"어째, 필로. 우리 회장께서 몽유병이 있으신가 봐?"
둘이 나란히 저들의 난해한 화법을 구사하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내 말은, 끔찍하게 피곤했다.
"정리하지. 내 상태를 악화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은 아물어 가는 상처를 다시 찢는 거야. 제발 그렇게 하고 떠나주겠나?"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나. 기껏 신경 써 병문안 온 사람한테. 물론, 자네가 싫어할 만한 얘깃거리도 두엇 가져오긴 했지."
아서는 주머니서 접어놓은 신문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말로 듣겠어, 아니면 직접 읽겠어?"
"상대가 자네 둘만 아니었다면, 들려달라고 했겠지. 내놔."
나는 신문을 받아서 펼쳤다.
"어딜 보면 되나?"
"일부러 그 기사를 보게끔 접어줬잖아!"
"몰랐지, 말을 하던가!"
"이봐,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일머리가."
아서는 도로 신문을 뺏어가더니, 차곡차곡 접어서 기사 한 면만 보이게 해서 줬다.
"대체 왜 그래야는데?"
"환자의 안정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지만, 자네가 잠든 사이에 많은 게 바뀌었어, 많은 게."
그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포기하고 얌전히 기사를 읽었다.
사건 일자는 튜더 회장이 사망한 당일 새벽이었다. 런던 북서쪽 구릉에서 태양이 황도를 역행하여, 새벽 내내 도시 전체가 백야 현상처럼 환히 빛났다는 허황한 내용이었다.
그런 한편, 주민 일부는 벌링턴 하우스, 즉, 왕립 학회 건물에 천사가 내려앉았다는 기이한 제보를 하기도 했다. 혹자는 같은 날 죽은 튜더 회장을 하늘로 데려간 것이 아니냐며, 그녀의 시성을 두고 종교적인 담화가 벌어지기도 했다.
"학장."
특정 단어가 한숨을 대체할 수 있단 사실은 이때 처음 알았다.
"알트에게도 간단히 들었지만, 그렇게 위험한 자야?"
"시도 때도 없이 밤을 밝혀대면, 전 도시적인 불면증을 일으킬 수 있을 테지."
"자신을 신이라 여기는 광인이야."
나는 아서를 무시하며 답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인데."
"하지만 성공했단 소리는 못 들어봤겠지."
"아하."
리즈는 짧게 탄성했다.
"이백 년이야. 한 사람이 두 세기에 걸쳐 하나의 목표에 매진하고 있지. 이미 그가 실제로 어떤 존재였던, 이미 그는 망집이거나, 염원하던 존재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지. 내가 아는 한, 그는 무너지지 않았어. 그렇다면...."
"혹은, 어마어마하게 성능 좋은 가로등이나."
"아서 프랑크, 집중 좀 해!"
"숨도 못 쉬게 하는군. 너야말로 중요한 걸 놓쳤잖아."
나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아직도 기억에 누수가 있나? 나는 분명 많은 게 바뀌었다고 했지, 많은 게."
"이런, 이게 끝이 아니군."
"지금껏 떠든 대로, 왕립 학회는 빼앗겼어. 엄밀히는 원래 주인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해야겠지만. 학살의 주모자들은 체포되었지만, 시간을 조금 번 수준일 테지. 한편, 튜더 회장의 지지기반이 하나 더 있었지. 공식적으로는 거의 무관했지만, 왕립 지리 학회 말이야."
아서는 수염 한 올 없이 말끔한 턱을 쓸었다.
"드 블랙스톤, 서던&미들랜드 철도, 중앙 런던 전기 조명, 세 개 회사가 후원을 자청하고 나섰어. 물론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는지는 뻔하지. 문제는 이거야. 안 그래도 기업에서 돈 한 푼 안 되는 지리학자들을 뭣 하러 데려갔나. 물어보나 마나 아니겠어."
"아프리카."
"나는, 남극이라 하려 했지. 전인미답의 경지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했네그래."
그는 휘파람 불었다.
"세실 로즈와 만난 적 있네. 그는 아프리카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신문과 별로 다르지 않은가 보지? 날짜 말고도 그들이 맞추는 게 있을지는 몰랐네."
아서는 재밌다는 듯이 답했다.
"그리고, 자작원. 그들이 숭배하던 존재, 또한 튜더 회장에게 힘을 빌려준 '백작 부인'의 다른 이름은 '아프리카의 주인'이었고..."
허나, 튜더 회장은 동시에 이름조차 부르기 꺼려지는 악신의 메시아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둘이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현 영국 왕실의 조상은....
나는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착상에 경악했다.
"그리고, 별로 놀랍지도 않겠지만, 이게 마지막이야."
아서는 그런 내게 오려낸 인쇄용지를 한 장 건넸다. 내용은 단순했다.
「Ⅶ」
"그럴 리가!"
나는 외쳤다.
"튜더 회장은 모로 보나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였어. 그녀가 죽었으면 숫자가 내려야지, 오를 게 아니라."
"다른 변수가 있는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오라클은 그날 이후 변함 없이 같은 숫자를 출력하고 있어. 어쩌면 우리가 균형을 깨트린 탓일 수도 있지. 런던에 암약하는 두 세력은 전에 없던 수준으로 노골적이야. 속도 경쟁을 하는 것처럼... 지금 상황을 정리하자면."
아서는 어깨를 툭 치고 일어났다.
"누워서 쉴 시간도 얼마 안 남았다는 거야."
그는 그답게 쾌유를 빌며 방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단 듯이, 자연스럽게 뒤돌아 보며 물었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묻지만, 최근 이상한 징조를 보지 못했나?"
나는 이게 본론임을 직감했다. 그처럼 계획적인 변사가 할 말을 잊었다는 건 말이 안 될 테니까. 나는 일부러 붕대를 더듬으며 능청 떨었다.
"글쎄. 한참 자고 일어나니까, 내 몸에 총알 모양 성흔이 남아 있던데. 이런 것도 징조로 쳐주나?"
"됐어, 잊어버려."
"이번에는 내가 하나 묻지. 혹시 런던에 커다란 성당이 있다면, 어디겠나?"
그는 곧장 답했다.
"글쎄, 웨스트민스터? 왜, 이제야 착한 아이가 될 생각이 들었나?"
"아니, 그냥."
아서는 결코 흘려 듣지 않았다. 그러나 더 묻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불안하게 여기면서도, 일단 함구했다. 확실하지 않은 추측을 입에 담지 않는 신중함이 내 장점이다.
"잠깐, 알트. 둘이서 사적인 대화를 나눠도 될까?"
그 순간, 리즈는 갑자기 제안했다.
아서는 우리 둘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짧게 끝내."
"어차피 남은 용건도 없잖아."
"그게 맹점이지. 누군들 기다리는 걸 좋아할까."
그는 방에서 나갔다.
리즈는 날 돌아보며 속삭였다.
"안 기다릴걸."
"당연하지."
그녀는 낮게 웃으며 침대 가장자리를 돌았다.
"그새 중년이 다 됐네, 자기?"
"불장난은 하룻밤으로 충분해. 더 바라지도 않아."
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아서가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내일이면 뉴욕으로 돌아갈 거야."
그녀는 상반신을 기울여, 내 쪽으로 몸을 기댔다. 나는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몇 번이나 내게 학술회 가입 권유를 했어. 하지만, 알잖아. 내가 저기서 뭘 하는지. 아마 알트도 그걸 알고 내게 제안했을 거야. 그답지 않게 미련이 없더라고."
리즈의 얼굴은 점점 가까워졌다. 도무지 멈출 기색이 없었다. 그녀의 입술은 서서히 느려지더니, 내 귓가에 멈춰서는 달싹거렸다.
"그리고, 네 얼굴도 보기 싫고."
아마릴리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두 번이나 찬 여자의 키스를 바라다니,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그런 적 없네."
"아하, 왜 이리 솔직하지 못하실까?"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까, 알트가 나가면서 한 말. 그거 무슨 뜻인가?"
나는 말 돌릴 셈으로 다른 질문을 꺼냈다.
"무슨 징조, 그런 얘기 있었잖나."
"런던에 백야 현상이 일어났을 때, 황도 아래 사는 주민들은 어떤 형태로든 모두 성령 체험을 했다나 봐."
"그리고?"
"여기도, 그 경로였거든. 알트는 그 일로 꽤 걱정했어. 네가 전에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난 멀쩡해."
"전에도 그리 말했다더라."
리즈는 웃으면서 자리서 일어나더니, 급히 정색하며 말했다.
"아서를 조심해."
"뭐?"
"학술회를 권유받으면서, 그에게 여러 가지를 들었어. 멸망을 계산하는 기계장치 오라클,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이교도 조각상, 런던 이면의 조용한 전쟁, 우주를 닫는 계획과, 그는 숨겼지만 내가 발견한 출생의 비밀까지."
"리즈!"
"알아, 내 잘못이야."
그녀는 한쪽 뺨에 공기를 채우며 한숨 쉬었다.
"하지만, 의심해본 적 없어?"
"무슨 말이지?"
"그래, 물론 우리 중에 제대로 나이를 먹은 건 너밖에 없지. 하지만 걔는 생물학적인 의미로, 인간이 아니잖아. 그에게는 미래를 계산하는 기계가 있고, 규모는 작아도 역사적인 수준의 인재만 모은 비밀 결사를 지휘하고 있지. 반면, 우주를 닫는다는 표현은... 계획으로서는 너무 막연하고,"
"리즈, 아서야. 아서 프랑크."
"미안, 내가 조금 과민했어."
우리는 서로 마주 봤다.
나는 적막을 깨고 물었다.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나?"
"나, 내일 떠나는 사람이야. 알고 하는 부탁이지?"
"그래."
그녀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내게 다가왔다.
"말해봐."
"묘비명 하나를 확인해줬으면 해."
나는 리즈에게 내가 품은 의문을 넌지시 건넸다.
그리고, 그녀는 방문 앞에 섰다.
"그러면, 작별인가?"
"설마 이보다 나은 결말을 바래?"
나는 웃으며 고개 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충분해."
리즈가 다시 문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나는 각오를 굳혔다.
"리즈."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고마워."
"그 말을 언제 하나 했지."
그리고, 뒤돌아 보지도 않고 방을 나섰다.
리즈는 약속을 지켰다.
나는 심부름꾼을 통해 한 통의 쪽지를 받았다. 손으로 적은 메모였다. 벽에 대고 급히 옮겨 적었는지, 벽면의 질감이 우둘투둘하게 남아 있었으나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용은 이랬다.
『자연과 자연법칙은 밤의 어둠에 숨겨져 있었으나,』
『주께서 가라사대 "뉴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도시는 바뀌었다.
어디선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분명 뭔가 바뀌었다. 나는 병상 위에서, 심장이 박동칠 때마다, 단지 그 사실만을 불안하게, 강하게 느꼈다.
셜록 홈즈와 앨리스 리들이 실종되었다. 나는 다시는 그 둘을 보지 못했다.
바야흐로, 런던 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