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보르조이 호텔
고백하건대 나는 대단한 미식가는 아니다.
영국에서 삶은 미뢰와 불공평한 타협을 본다는 뜻이기도 한데, 내가 정말로 흥미가 있었다면 스스로 요리부터 배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건 순전히 내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덕이다. 대부분 경우 나는 태운 빵 위에 구운 콩을 얹는 걸로 만족했고, 그럼에도 좋은 음식이 필요한 날에는 늘 프랑스 식당을 찾았다.
하나 놀라운 사실은, 마리가 그런 낮은 기대마저 왕왕 배신한다는 점이었다.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운 적도 없는 소녀에게 뭘 탓하겠느냐만, 매번 출처를 알 수 없는 지나치게 향토적인 조리법을 내보이곤 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런던, 이 미식의 고장에도 퇴화는 있는 법이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종종 나는 더 열악해지는 외식 환경에 경악하곤 했다.
사카린, 그 중심에는 이름이 있었다.
아마릴리스 출국 이후의 일이다.
앞서도 한 번 언급했지만, 내가 깨어나고 어디서 어떤 식으로 소문났는지, 각계 여러 손님이 연일 물밀 듯이 찾아왔다. 그 탓에 나는 멀쩡히 걷기도 전부터 수두룩하게 숙제를 쌓아놓게 되었다.
한편, 그중에는 전혀 예상 못 한 인물도 한 명 껴 있었다.
본래 야윈 몸에 양복까지 맞지 않고 헐렁해서 족히 두 배는 더 말라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혈색은 썩 나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죽어가던 환자랑 비교해서야 뭐하겠느냐만,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생기 넘쳐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박사님."
그는 벗은 모자를 가슴 쪽으로 끌며 인사했다.
"이거 놀랍군."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상반신만 침대 등받이에 기댔다.
"내 몸이 성치가 않아서 침대에서 맞는 걸 용서하게."
"아니요, 제가 눈치껏 쾌유하고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그는 특유의 외국물 먹은 발음으로 사과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특별한 그림을 찾았길래 왔나?"
청년, 노엘 어거스틴은 서먹하게 뒷목을 긁었다. 헐렁한 양복 소매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게, 사실은 그림 사업은 관뒀습니다."
"어쩌다가?"
"그게, 제가 적성에 안 맞았던 거 같아서 말입니다."
"언제는 또 자신이 있다면서."
그는 멋쩍게 웃었다.
"그게, 제가 판 것 중에 모조품이 있었다는 모양입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기가 막혀서 해줄 말이 없었다. 물론 나라고 미술에 조예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알음알음 모아온 업계 평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한동안 고소장을 피해서 외국에 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간 못 찾아뵌 겁니다."
듣기에도 꽤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제법 태연했다.
"그거 유감이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괜찮은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거든요."
"아니, 벌써?"
어거스틴은 당당히 말했다. 내가 그와 알고 지낸 것은 카타콤 사건 이래지만, 어째 만날 때마다 직업이 바뀌어 있었다.
아버지 밑에 있을 적에는 한없이 소심하게만 보였는데, 이제 보니까 순 모험가가 따로 없었다. 어쩌면 자유분방한 기질을 알아본 부친이 적절히 눌러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데?"
"사카린 사업입니다."
그는 은연한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투로 답했다.
"사카린, 자네까지 그러기야?"
최근, 나는 그 단어를 듣기만 해도 신물이 났다.
비록 내가 런던 요리인의 도전 정신을 비하할 요량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들은 방향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
그러니까, 너무 달았다. 설탕으로 범벅하던 시절만 해도 꽤 버거웠는데, 요즘에는 어디든 사카린이었다. 어디서 한 번 잘못 외식하면 그날로 뼈가 삭았다.
"그런 말 마시죠. 요즘 제일 각광받는 사업입니다."
"그래?"
"전 세계에서 영국만큼 설탕을 많이 소비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미국 남부에서 방대한 사탕수수 산업이 시작된 이래, 대미 무역은 적자로 돌아선지 오래죠. 그러기에 사카린입니다. 정부에서는 대안 사업으로 사카린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넓은 밭도, 적합 기후도, 방대한 노동력도 필요 없으니까요. 그냥 공장만 있으면 됩니다. 현대의 연금술이라 할 수 있죠."
나는 가만히 듣던 중에 툭 내뱉었다.
"자네 그거 아나? 연금술이란 단어가 붙은 것치고 사기가 아닌 게 없어."
"단어를 보지 말고, 본질을 보시죠."
어거스틴은 눈을 연신 깜빡였다.
"국가에서는 이미 사카린 사업에 대규모 투자 안을 추진 중이고, 저는 시의적절하게 올라탔습니다. 중요한 건 그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는 자못 뻔뻔스러웠다. 전에 봤을 때보다 배짱이 들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문제는 초기 투자금이 말입니다."
내가 눈을 마주치자, 어거스틴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대로 노려보며, 대놓고 엄포를 놓았다.
"변명해보게."
"생각하시는 그런 게 절대 아닙니다. 돈 빌릴 목적이었으면 제가 박사님이 아니라 은행을 방문했겠죠."
"제대로 알고 있어 다행이네. 그런데 왜 나한테 왔나?"
어거스틴은 세계 어디서도 통용되지 않을 법한 손동작을 하며 말했다.
"아시듯이 제가 박사님께 빚진 게 여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좋은 사업을 하나 같이 해보자는 거죠. 또, 듣자니 아이를 여럿 맡으셨다면서요. 수입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그건 사실이지."
나는 헛기침했다.
"맨입으로 빌리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같이 이름 걸고 사업 하나 해보자는 것이죠. 투자 설명회까지만 같이 방문해 보시죠."
어거스틴은 열변했다. 나는 그의 순수한 의도를 느끼는 한편, 그처럼 어설픈 인물이 이용이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뿐이라면 거절하고 대화를 마쳤겠지만, 사실 어거스틴이 들고 온 화제는 마침 내가 우려하는 것 중 하나였다.
이제는 꿈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아마릴리스와 보낸 밤, 그녀는 내게 런던의 맛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워낙 모호한 화법이었지만, 의미 자체는 분명했다.
런던의 식문화는 바뀌었고, 거기 인위적인 간섭이 있으리란 추측이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의 부자연스러운 사카린 열풍 또한 그 일환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대답했다.
"염두는 해보겠네. 하지만 내 몸이 지금 이래서야."
"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제야 당황하며 말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설명회까진 아직 시간이 꽤 남았거든요."
"그게 언제지?"
그는 답했다.
시간은 흘러, 몽중의 일처럼 막연한 봄과 여름의 경계가 지났다.
런던의 8월,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그야 그럴 것이, 도시에서 계절감이란 하나같이 불쾌한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올여름은 끈적한 습기를 제외하고는 꽤 수월했는데, 이유인 즉슨 해충의 수가 현격히 줄은 덕이었다. 어쩌면 내가 풀어놓은 그리니치의 벌레들 때문일까, 나는 막연히 추측해 보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하튼, 런던 생태는 차치하고, 회복 속도는 예상보다 더뎠다.
나이 탓인지, 예전 같았으면 진작 다 털고 일어났을 텐데, 예정일이 다 되도록 겨우 혼자 걷는 게 한계였다. 그걸 빌미로 마리는 유난히 시끄럽게 굴었다.
"몸도 성치 않잖아요. 절대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마세요."
"내가 언제는 그랬나?"
"한 번이라도 안 그러셨으면 제가 이만큼 걱정을 안 하죠. 주인님은 자기 돌볼 줄도 알아야 해요."
전날부터 이런 식이었다.
나는 참다 못해서 약속 때보다 한참 일찍 뛰쳐나왔다. 후회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공기가 뜨거워서 숨쉬기도 벅찼고, 혈관은 점차 달아올랐다.
그늘에 피신해서 시간을 죽이자니, 웬 자동차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
"자네 차인가?"
나는 어거스틴의 도움을 받으며 거기 올라탔다.
"설마요. 빌렸습니다. 투자자 신분으로 가는데, 굳이 없어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보자니 그는 볼품없는 정장은 어쨌는지, 멋들어진 턱시도를 빼입었다. 과연 옷이 날개라, 전보다 한결 나아 보였다.
"훨씬 낫네그래."
"그렇습니까?"
그는 뿌듯한지, 괜히 가슴의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벼락부자 티가 덜 빠진 청년이었다. 나는 턱을 괴었다.
목적지는 나도 잘 아는 장소였다. 차로는 그리 머지않다. 다만, 거기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서서히 심란해졌다.
그야 그럴 테지, 다름 아닌 보르조이 호텔이니까.
런던처럼 역사 깊은 대도시에는 으레 그렇듯이 의심스러운 신비학이 자리잡기 마련이었다. 올드코트 대학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음지 한편에서 수수한 이익과 계몽을 챙기는 소규모 단체는 엄연히 실존했다.
그중 보르조이 호텔처럼 각별한 장소는 달리 없었다.
블룸스버리 구석, 두 고층 건물 사이에 숨겨진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이 역사 깊은 숙박지는 드물게도 신비주의 철칙을 깨고 양지를 겸하고 있었다.
이는 호텔주 메리안의 균형에 관한 절묘한 철학에 근거했다.
시설의 절반은 양지였고, 절반은 음지였다. 일각에서는 두 계의 교두보, 혹은 신비학의 입문처로 여겨지는 만큼 엄선된 투숙객 절반은 호기심 품은 문외한이었고, 남은 절반은 뒷세계의 주민이었다. 정례적인 경매에는 절반은 정교하게 꾸며진 위조품이었고, 나머지 절반만이 진정 가치 있는 유물이 올랐다.
이토록 완벽한 허와 실 사이에서 호텔은 존재했다.
더군다나 소문에 따르면, 메리안 여사의 특별한 인맥 덕분에 호텔은 두 경찰 지구의 경계선 위에 있어 경찰이 들어갈 수 없는 건물로도 알려져 있었다.
이러다 보니, 나도 한때는 이곳을 수상하게 여겨서 들쑤신 적이 있었다.
그렇게 알아낸 바, 분명 호텔에는 여럿 불쾌한 비밀이 숨겨졌지만, 당장은 별반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뿐더러, 내 배회를 불쾌하게 여긴 메리안 여사는 엄숙하게 경고를 보내었다.
결국, 나는 관두었다. 다만, 하나 분명한 사실은 이랬다.
그러기에 더욱 보르조이 호텔에는 특별한 사연이 모이기 마련이다. 그 누구도 여길 이유 없이 방문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점을 속으로 명심하였다.
호텔은 어두운 그늘 아래에 묻혀 있었다.
어거스틴은 몇 번이나 주소를 확인한 뒤에야 차를 완전히 멈췄다. 길가에는 우리 것 외에도 썩 괜찮은 승용차가 여러 대 주차되어 있었다.
"여기군요."
그는 좀 전과 비교해 확연히 긴장한 티가 났다. 이는 호텔이 가진 마력 중 일부였다. 건물이 머금은 습기를 보면, 어떤 담력 좋은 인사라도 음산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도움을 받아 차에서 내렸다.
어거스틴은 건물 바로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나의 말 없는 재촉에, 이내 굳은 결심을 다진 표정으로 비장하게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우리가 안으로 들자, 자욱한 담배 연기가 우릴 반겼다. 나는 기침하고 말았다.
홀에는 몇 사람의 신사가 소파에 앉아 재떨이를 하나씩 두고 줄담배를 피워댔다. 우리는 데스크로 향했다. 메리안 여사는 충혈된 눈으로 거기 앉아 있었다.
"당 호텔은 예약 손님만 투숙 가능합니다."
"우리는, 저, 설명회에 참석하러 왔습니다. 사업이요."
어거스틴은 어수룩하게 답했다.
"그러면 잠시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그럼요, 기꺼이요."
"담배는 피워도 좋지만, 바닥에 잿가루를 흘리지는 말아주십시오."
그는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메리안의 분위기에 벌벌 떠는 게 눈에 보였다.
"괜찮습니다. 피지 않아서요."
그리고 그는 삐걱거리며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로 가서 앉았다. 나는 말없이 그를 따르려 했지만, 메리안이 지나치는 내게 말했다.
"여기는 혈기 넘치는 투견을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본 적은 없지만, 저 친구가 투견 소리 들을 만큼 잘 싸우진 않을 겁니다."
나는 태연히 답했다.
"아뇨, 허버트 씨. 당신 말입니다."
"제가 그리 어리게 보입니까?"
그녀는 꺽꺽 소리 내며 웃었다.
"그럼요. 나처럼 오래 산 여인은 압니다. 기운 자체가 한창때인 거죠. 사냥개, 젊고, 사납고... 당신과 엮여서는 좋을 게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 알겠습니까? 여기서는 누구의 피도 흘리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바닥을 더럽히는 걸 싫어합니다."
"노력하지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나저나 왜 그렇게 뭐가 떨어지는 걸 싫어합니까?"
그녀는 말없이 눈짓했다. 바닥에는 양모 융단이 깔려 있었다.
"빨기 힘들거든요."
"다들 그만큼 알기 쉬운 이유를 대면 좀 좋겠습니다."
나는 수긍하고, 그녀에게 묵례하고 떠났다.
어거스틴은 내가 옆에 앉자마자, 내 쪽으로 머릴 기울이며 낮게 속삭였다.
"아주 무서운 주인이군요. 혹은 종업원이신지."
"메리안 여사라고 하지."
"아시는 분입니까?"
"건너 건너서."
잠깐 말이 끊겼다.
"아까 두 분께서 무슨 얘길 했습니까?"
"카페트."
"아, 과연."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어거스틴은 얕보이지 않으려고 짐짓 대범한 척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초조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뻔히 보였다. 나는 그를 잠깐 신경 쓰다 말고, 말없이 바닥을 노려봤다.
당장은 긁어 부스럼일 테지, 당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