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80화 (180/232)

§180. 부유한 나날

알다시피 지금 19세기에는 세계가 한껏 좁아졌다.

런던 거리에서도 심심찮게 타 대륙 사람을 보게 되는 지금, 누가 되었건 카리브 해 출신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사실을 아는 건, 비단 점쟁이라도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순리를 아는 내게는 사뭇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하나 헷갈리는 점은, 그게 남국의 온화한 기류 때문인지, 아니면 대륙과 떨어진 이래 영원히 시간이 멈춘 탓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분명 이 지방에서는 부와 계급, 연로함 따위와는 무관하게 모든 이가 오직 타고난 신분에만 만족하며 사는 향토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들에게 섬이란 굳이 떠날 장소도 아니었거니와, 오히려 바다 저편으로 떠나는 이를 '라 가비오타 아르겐테아' 혹은 '아베 데 파소'라고 부르며 괴짜 취급했다. 재갈매기, 혹은 철새라는 것인데, 제 발로 온화한 섬을 떠나려는 이들이 어떻게 보였는지 쉬이 짐작할 만한 호칭이었다.

크리스토퍼 제임스, 자칭 사카린 박사의 특이한 이력은 여기서 시작했다. 그는 윈드워드 제도, 마르티니크 섬의 지주 계층으로 대대로 바나나 농장을 해온 부농 가문 출신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드물다 못해 기형에 가까운 습관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수평선 너머를 상상하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그의 부모는 어떤 장애가 있지는 않은지, 섬에 몇 없는 왕진 의사를 집에 묵게 하며 머리에서 어떤 신체 결함이라도 발견하고 싶어 했다.

어찌 되었건, 제임스는 정상이었고, 끝내 꿈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가까운 미국으로 유학했지만, 배움에 대한 갈망은 그를 본국 프랑스로 이끌었다. 제임스를 유명인으로 만든 바나나 향 추출은 이 시기의 일로, 그는 1889년 파리 혁명으로 피난할 때까지 그곳에서 연구와 사업을 병행했다.

제임스가 영국을 선택한 건, 전혀 의외롭지 않은 사실이었다. 미국 유학 경험으로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했고, 화학 산업에서 파리를 앞서는 도시는 런던이 유일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향후 8년간의 행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달리 그가 증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런던의 뭇 화제가 그렇듯이 대중의 관심사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여기부터는 순전한 망상이지만, 이 사건이 제임스에게는 충격이 되었을지 몰랐다. 그의 고향 마르티니크나, 아메리카, 파리에서 명성이란 항구적인데, 여기 런던에서는 차가운 침묵과 무관심만을 받았을 테니 말이다.

제임스가 보이는 단맛 성분에 대한 집착이나, 지금은 잊힌 옛 별명을 재활용하는 행위 등도 그 여파라 하면 설명하기 한껏 수월했다.

진위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는 긴 침묵을 딛고 사카린 박사로 재기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한 장군 같은 걸음으로 공장을 개선했다.

"여기 브릭턴 마을 주민은 모두 여기서 일합니다."

그는 자랑스레 말했다.

"런던의 게으른 노동자들과 달리, 여기서는 낮은 임금에도 아무 불만 없이 일합니다. 대대로 집이 여기 있고, 물과 빵도 부족하지 않으니 불평할 여지가 없는 거죠. 어찌 보면 마을 전체를 구매한 셈입니다."

설명을 듣던 신사 중 한 명이 아는 체하며 말했다.

"리치먼드 모델이군. 그가 모레턴을 사들였을 때와 똑같은 방식이야."

"잘 아시는군요. 규모는 훨씬 작지만요."

나는 그 이름이 듣기 거북해서 헛기침했다.

"실제로 이 방식을 택한 데는 비용 절감 외에도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런던과 달리, 시골 마을은 외부인을 적발하기 용이하죠. 노동자들이 서로 이웃이기에, 기술 유출에 대한 리스크가 결정적으로 낮아지는 셈입니다."

그 또한 사실이었다.

나는 잠깐 제임스를 의심했다. 런던 곳곳에 숨겨진 대량의 비행기가 모레턴에서 생산되었다는 것은 경찰 관계자조차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곧 관두었다.

제임스가 정말 노란 외벽 회사의 관계자라면, 이처럼 민간 투자를 유치하며 궁색하게 사업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애초에 그의 발상 자체가 유별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달리 진심으로 수상히 여겼다기보단, 누구라도 의심하고 보는 것이 이미 몸에 밴 습관이었다. 그런 면에서 여러 재능을 가진 나이지만, 경찰만큼은 소질이 없다 할 수 있었다.

나라면 길거리의 모든 사람을 검문하지 않고는 못 배길 테니까.

"사카린 공장 자체는 여기저기 있지만, 이만큼 시설을 갖춘 건 여기가 국내 유일합니다. 아직도 시설 전체가 가동되었다고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 언제쯤이면 제대로 돌아가겠나?"

가만히 따라오던 목장주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곧, 완전히 최적화될 겁니다."

제임스는 답했다.

"그리고, 도시는 완전히 바뀔 겁니다. 제가 약속드리죠."

나는 야심 찬 장담을 들으며, 멀리 뜬 구름을 봤다. 희고 검은 구름이 언덕 위로 꼭 산맥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러고, 석 달이 흘렀다.

그간 거리에선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잎은 시들었고, 낮에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뀐 건, 계절만이 아니었다.

사카린 박사의 호언이 아주 근거 없지는 않았는지, 한때는 다소 도전적인 주방에서만 보이던 사카린이 지금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사실 이조차 겸손한 표현이었다.

모든 식료품점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 사카린 입고!'라는 푯말이 내걸렸고, 반나절이 채 가기 전에 '품절!'이라는 문구로 바뀌었다.

골목마다 사카린을 특별히 싼 가격에 판다는 제안을 해오는 청년들이 있었는데, 호기심에 맛을 보니 설탕과 값싼 소금을 섞은 물건이었다.

어쨌거나, 이 달콤한, 그보다는 쓴맛이 감도는 흰 가루가 당대 최고의 유행인 것만은 분명했다.

다만, 외식 사정은 형편없이 나빠졌다.

무지막지한 양의 설탕 범벅에 시달리는 일은 줄었지만, 때깔이 멀쩡한 음식에서도 여지없이 끔찍한 단맛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모든 게 달았다.

달콤하다는 말이 내게는 더는 긍정적인 의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단맛은 쓴맛 이전에 찾아오는 짧은 이상 현상쯤인 듯싶었다.

이 또한 일시적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결국, 나는 불쾌한 진실과 맞닥트리게 되었다.

어쩌면, 런던에서 정상적인 미각을 가진 사람은 나뿐인지 몰랐다.

아니, 사실 하나 더 있었다.

나는 그를 알아보고 곧장 말 걸었다.

"혈색이 좋아지셨습니다."

"아, 당신은."

이번 사업의 공동 투자자인 목장주는 날 보더니 깍듯이 인사했다. 평생 길든 습관으로 그의 고개는 남들보다 무거운 모양이었다.

"함께 걸을까요?"

우리는 공터 부근을 나란히 가로질렀다.

"좀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아주 좋죠."

목장주는 애써 기운 내며 답했다.

"별로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아니요, 정말, 정말로 좋습니다. 돈 문제가 상당히 해결되었으니까, 이제야 겨우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지 뭡니까."

나는 캐묻는 대신 넌지시 물었다.

"전보다 마르셨습니다."

"그게,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요."

그는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제가 못 배워 먹어서 그런지 뭔지, 도통 달기만 한 게 뭐가 좋다는 건지...."

"저도 그렇습니다."

여하튼, 비록 식문화는 비극적일 만치 퇴행했지만, 수중에 들어온 배당금을 생각하면 썩 만족스러운 교환이었다.

나는 한동안 기분이 좋았다.

이 자리서만 은밀히 밝히건대, 이런 주택난에 어엿한 저택을 구하는 일은 쉽지는 않았다. 자연스레 나는 한두 가지 위험한 업무에 관여해야 했고, 그러고도 큰 빚을 지게 되었다.

한때 안정적이라 여긴 노후는 막연하고 불안한 것이 되었는데, 그런 우려가 이번에 완전히 불식되었다.

그간 내가 사카린과 친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 우리 사이의 몇 가지 불쾌한 악역쯤은 잊어줄 만큼 경기는 호조였다. 따로 세어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 받을 군인 연금보다 많은 돈이 수중에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연금 자체가 쥐꼬리만 한 것은 뒤로 해주더라도 말이다.

벌이가 괜찮으니 씀씀이도 따라왔다.

빈손으로 귀가하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주로 아이들 것이었지만, 때로는 마리의 선물을 사기도 했다. 그 또래 취향은 몰라도, 반짝이는 장신구를 싫어하는 소녀가 있을 리 없었다.

그때마다 마리는 미묘한 반응을 돌려줬는데, 아마 수줍음을 감추는 저만의 방법인 듯싶었다.

허나 그렇다 한들, 내가 돈 관리가 헤프다는 오해는 하지 않길 바란다. 비록 영락하였지만 나는 귀족으로 교육받았고 풍족한 만큼 타인에게 베푸도록 배워왔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평소에도 주변을 잘 돌봤지만, 왠지 마리는 날 의심스럽게 봤다.

"주인님이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자꾸 사와요?"

"이번 달에는 돈 나올 구멍이 있어서 그래."

나는 능청떨며 답했다.

사실 이번 투자에 대해, 나는 그녀에게 한마디 언급도 해두지 않았다. 공연한 심술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마리야 사서 걱정하는 성격 아니던가.

그리고, 내가 돈 쓰는 일에 아주 시끄럽게 굴기도 하고. 그래서 이만하면 잘 둘러댔다고 생각했는데, 마리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대학에서도 경질되셨잖아요."

사실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서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아니다.

"그간 아프셔서 일도 못하셨으면서 당최 어느 구멍에서요?"

마리는 매섭게 추궁했다.

"내가 수입이 나쁘지는 않아."

"가계부는 제가 쓰는걸요. 살림 꾸리는데 주인님 벌이가 얼마나 빡빡한지 아세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때마다 나는 훌륭한 인품을 여실히 드러냈다.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자네가 신경 쓸 게 아니야."

확 성질 내며 돌아서려 하자, 마리는 날 보며 불안한 소리로 물었다.

"또, 위험한 일을 하시는 건 아니죠?"

나는 다시 그녀를 보며 무겁게 깐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그래."

"네?"

"지금까지와는 비할 바 없이 위험한 일이지."

내가 진지하게 답하자, 마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 위험할 만치 벌고 있어."

마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날 올려다봤다.

"지금, 지금 농담한 건가요?"

나는 그런 그녀를 두고 자리를 떠났다. 여하튼, 나는 이 무렵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호텔 보르조이.

기록적인 성공 이후, 공적이건, 사적이건 모임은 연일 이어졌다. 장소는 항상 같았다. 그리고 모임에는 언제나 만찬이 곁들여 졌기에, 호텔 홀에서는 음식 냄새가 빠지는 날이 없었다.

나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여전히 거동이 불편하기도 했고, 보르조이 호텔 자체가 꺼림칙해서 기피하기도 했다.

다만, 정례 회의만큼은 참석했다. 적잖은 돈을 담아둔 이로서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럴 때면, 매번 같은 자리에서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앉은 메리안 여사가 내 등 뒤로 말을 던졌다.

"소스, 설탕, 바닥에는 아무것도 흘리지 마세요. 그리고, 뛰지도 말고요."

들를 때마다 규칙이 하나씩 늘어났다.

나는 그녀를 지나 홀 안으로 들어갔다. 달리 늦지도 않았는데, 투자자 상당수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몇몇 발견했다. 재무국 소속 감찰 올리버라든지, 어거스틴이라든지 말이다.

대부분은 내가 들어오고도 눈치채질 못했다. 거하게 차려진 만찬을 나누는 이들에게는 풍족한 여유가 흘러넘쳤다. 나는 음식을 나누는 이들을 피해, 홀의 변두리를 지나 자리에 착석했다.

딱히 허기지지도 않았고, 목을 축이기에 포도주의 단맛은 어울리지 않았기에, 나는 앉은 자리에서 수통을 꺼내 입을 적셨다.

마리 몰래 채워둔 독주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지친 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홀로 시간을 죽이고 있자니, 세찬 박수가 날 깨웠다.

돌아보니 시간에 딱 맞춰 제임스가 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은 기립해서 손뼉 쳤다.

제임스는 수줍어하며, 좌석을 지나 저번과는 달리 홀 정면에 섰다. 그는 한결 여유로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시작에 앞서, 우선 축하합시다."

그의 손에는 밑바닥만 간신히 채운 잔이 들렸다.

"금월, 설비에 투자한 금액을 회수했습니다. 그러고도 잠재 수익은 엄청납니다. 지금의 열풍은 일시적일 테지만, 수요 자체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이 바로 19세기의 이사벨 여왕입니다."

짧은 침묵. 다시 한 번, 우렁찬 박수.

"모든 게 예견한 바입니다. 설탕은 이제 사카린의 대용품쯤 되었죠. 실제 시장 비중은 비할 바도 아니지만, 어쨌건, 인식은 정반대입니다."

그때, 입술을 기름칠한 신사 한 명이 탐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듣자니 사람들이 사카린을 더 원한다던데?"

"사실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지 않나?"

제임스는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답했다.

"공장은 문자 그대로, 밤새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시장 수요를 따라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죠. 불운하지만, 우리는 지금 순간에도 돈을 흘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신사는 자기 주머니에 뚫린 구멍을 발견한 사람처럼 안타까워했다.

"해결책은 있나?"

"지금 시설로는 안 됩니다. 공장을 확충해야죠. 정제 시설을 갖춘 대학과 연계하면 원료 공급도 늘릴 수 있습니다. 산술적으로 생산량이 2배 이상 확증할 사업안입니다."

"그러면 뭘 기다리나?"

"문제는 언제나 똑같죠. 시간, 아니면 돈이요."

이번에는 전처럼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나를 비롯해 그 자리 모두가 망설임 없이 투자금을 내놓았다.

그렇게, 누구나 호황이 영원하리라 믿었다.

어쩌면, 너무 무지했던 걸까? 낙관 속에서도 끝은 차츰 다가왔다. 전조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독자권 없는 해외 수입 기술, 소자본 기업군의 시장 과점,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

끝내 찾아온 파국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사카린 쓰지 마세요, 대신 설탕의 350배 단 돌체를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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