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미각 신화
한편, 이 무렵 나는 기분이 꽤 처졌다.
많은 날에는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싫었다. 변덕스런 우울증의 원인은 신체에 있었다. 전과 같으면 너끈히 걸어 다닐 만큼 재활에 열과 성을 다했건만, 몸이 도저히 내 것 같지가 않았다.
아침마다 짓무른 노환이 무겁게 눌러왔다. 그런 무기력한 며칠을 보내면서, 나는 본의 아니게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늙었단 말이야?"
허황한 혼잣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도무지 쉴 틈이 없던 인생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여러 중요한 사실을 잊고 지냈다. 세월은 내 뜻과 무관하게 흐르며, 신체는 늙어가며, 사람은 결코 시간을 이길 수 없음을! 그런 당연한 섭리마저 망각하였던 것이다.
어느덧, 내 나이는 마흔둘이었다. 같은 시대를 향유한 이들은 저마다 높게, 혹은 넓게 쌓아올린 인생의 봉우리에 앉아, 느긋하게 저무는 황혼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만이 땅바닥에 붙어서 바삐 뛰다니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주절거렸다.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누군가는 해야지만, 그게 우연히 나일 뿐이야.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지."
성찰은 길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다 낫지 않았지만, 권태는 여름 감기와 함께 시들었다.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여하튼, 회복은 여전히 더뎠다.
그 때문에 전처럼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일은 줄었고, 멀리 외출하는 경우는 보르조이 호텔에서의 정례 회의 정도가 다였다.
고맙게도 매번 어거스틴은 기꺼이 내 운전수 역할을 자처했다. 매번 그는 다른 차를 몰고 왔기에, 나는 도로 위를 오가는 차량을 유심히 살펴야 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는 같은 차를 타고 왔는데, 나는 거기에 의구심을 품고 물었다. 그러자 어거스틴의 얼굴에는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윽고 인위적인 떳떳함으로 매몰했다. 스스로 켕기는 게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게, 사실 자차입니다."
"자차라니?"
어거스틴은 넌지시 가슴을 쭉 폈다.
"얼마 전에 구입했습니다. 프로이센 왕국산에 구형이긴 하지만, 잘 굴러가죠."
나는 놀라며 물었다.
"자네에게 무슨 돈이 있다고?"
"왜 이러십니까, 박사님도 꽤 쥐셨을 거 아녜요."
"그러기야 하다지만, 자네는 사업을 따로 한다며?"
청년은 눈을 돌렸다.
"사실 관뒀습니다."
"관두다니?"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껴서요."
나는 그의 면상을 빤히 봤다. 나쯤이면 이만한 청년의 치기 어린 생각이야 훤히 들여다보였지만, 내가 그의 아버지도 아니고서 일일이 훈계할 자격은 없었다.
그저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은데...." 하고 낮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불현듯 그의 소매가 전처럼 헐겁지 않단 사실을 눈치챘다.
"자네 조금 살쪘어."
"그런가요?"
어거스틴은 전에 들은 적 없다는 듯이 의아해했다.
호텔 보르조이.
손님 신분으로 수차례 드나들며 깨달은 바지만, 호텔은 절묘한 균형 한복판에 서서는 도저히 안정되는 일이 없었다.
이는 천칭의 법칙과 빗대면 딱 알맞은데, 얼핏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천칭조차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미시의 세계에 접할수록 격렬한 떨림을 간직한 것이다. 그처럼 호텔은 어떤 때는 햇빛 아래서 모래사장의 고운 흙모래처럼 반짝였고, 그러다 어떤 때면 늪지대 위에 세워진 건물처럼 칙칙한 곰팡내만 풍겼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여주인 메리안 여사뿐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항상 그녀가 기이한 호텔의 법칙에서 벗어난 존재인지, 혹은 그녀 자신이 천칭의 중심점이기 때문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천칭은 호텔 앞에 올 때마다 날 혼란스럽게 했다.
한편,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어거스틴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주로 내가 참석하지 않은 회의에 관한 것이었는데, 가장 큰 관심사는 돌체였다. 그런데 정작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아, 그런 게 있었죠."
"그런 거라니? 그간 있은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영 미덥잖은 말투로 이런저런 일화를 풀어놓았다.
첫날에는 누구도 기사를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전과 같은 호조는 아니었지만, 사업은 여전히 성장세였다. 모임은 연일 이어졌다지만, 처음 돌체가 언급된 것은 첫 기사부터 일주일이나 흐른 뒤였다.
나는 어거스틴의 입으로부터 제임스의 몇 가지 도발적인 문구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돌체는 우리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같은 상투적인 표현부터, "그들이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낼 무렵에, 우리 상품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처럼 의미심장한 표현까지 말이다.
"그러니, 공연한 걱정이란 거죠."
어거스틴은 태평했다.
허나, 명심할진저, 파문은 곧바로 닥치지 않는 법이다.
자연 철학에 능하다면 뭇 삼라만상, 인간이라 한들 우주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단 사실을 알 터이다. 하물며 인계에서 난 경제 원리가 어찌 큰 이치에서 엇나갈 수 있을까.
수면에 떨어진 조약돌이 만든 파문이 곧장 파도가 되지는 않듯이, 물살 치는 낙관 속에서 일어난 파국은 차츰 크고 선명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즈음부터 나는 제임스의 역량과, 사업의 안정성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랬던 것은 나뿐이었는지, 대부분 투자자는 여전히 향락적인 생활을 영위했다.
듣자니 적지 않은 수의 투자자는 아예 호텔에서만 숙식하며, 하루 일정이라곤 모임 참석밖에 없는 나날을 보낸다고 했다.
호텔 입구부터 홀까지, 외부에서 들여온 만국의 향신료가 융단처럼 이어졌고, 아예 전속 요리사가 붙었다는 괴담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런 게 바로 퇴폐야."
나 자신도 적잖은 지분을 가졌지만, 그들 행태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네 돈이잖아요."
반면, 어거스틴은 그 꼴을 보고도 별 감흥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청년은 요점이 뭔질 몰랐다.
"여하튼, 마음에 안 들어."
그렇다고 내 생각을 일일이 설명하기는 귀찮았던 탓에, 나는 투박하게 일축하고 말았다.
다시, 호텔 보르조이.
나는 하차하고, 살짝 놀랐다. 어거스틴이 운운한 향신료 길 따위는 물론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길가부터 붉고 노란 가루가 과자 위에 뿌린 설탕 가루처럼 그어져 있었으니 말이다.
실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홀 안에서 흐른 강렬한 이국적인 풍취가 로비까지 풍겼다.
"가시죠."
어거스틴은 전과 달리 꽤 익숙하게 안으로 향했다. 뒤따르던 나는 메리안 여사의 끈질긴 시선에 발을 멈췄다.
"청소가, 쉽지는 않겠습니다."
"호텔에는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
겉치레로 꺼낸 인사를 무시하고, 메리안은 대뜸 말했다.
"장소는 항상 같았지만, 한때는 아델, 여리고, 노스 블룸스버리, 올드 런던... 지금에야 보르조이이지만요. 필요에 따라서 이름은 매번 바꿔왔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당신이 재미 볼 만한 사업이 아닙니다."
그 말에, 나는 카운터에 팔을 올려놓으며 비아냥댔다.
"사업에도 소양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요."
늙은 여인은 그런 내가 우습다는 듯이 답했다.
"저는 그저 본질을 볼 뿐입니다. 당신처럼 건실히 살아온 사람이 욕망을 상대하는 장사로 이득을 볼 리가 없지요."
마귀할멈 같으니, 예언에 가까운 경고였다.
꼭 그리 될 것만 같아, 나는 불길함에 몸서리쳤다.
"유념하지요."
나는 그녀를 지나쳐, 홀 안으로 들어갔다.
홀에서는 전처럼 음식 냄새가 풍겼다. 다만, 이전보다 그 정도가 심해서, 나는 뭔가 썩은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얼굴에 윤기가 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체중이 불어난 게 어거스틴만은 아닌지 몰랐다. 입술에는 하나같이 기름이 묻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홀로 빼빼 마른 목장주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일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욱 앙상한 얼굴이었다. 수입이 좋으니 살림은 더 나아졌을 턴데, 어째선지 먹기는 전보다 못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나는 지나쳐서 어거스틴을 잠깐 찾다가, 관두고 조금 멀리 떨어진 빈자리를 향해 나아갔다.
분명 약속시간에 딱 맞춰 왔을 텐데, 긴 식탁에 상차림 된 만찬 요리는 겉이 푸석푸석 마르고, 표면에는 식은 기름이 떠서 굳은 데다가 부분부분 뜯어 먹은 흔적도 있어 도저히 손대고픈 마음이 안 들었다.
나는 착석했다. 날 찾아오는 건, 어거스틴이 할 일이 되었다. 잠시 후, 그는 요리 몇 점이 담긴 접시를 들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에 껄끄럽게 봤던 음식이었다.
"자네는 그게 들어가나?"
"네?"
"아니, 됐어."
접시 가장자리에 굳은 기름을 보며, 나는 혼자 진절머리 쳤다.
그리고, 제임스가 도착했다.
웅장한 박수 소리, 전보다는 조금 못했다. 그를 통해, 나는 사업이 아주 원활하지는 못하리라 짐작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어떻게 된 겁니까?"
살찐 신사가 벌떡 일어났다가, 갑자기 늘어난 중력에 적응하지 못하고 허우적댔다. 우습기보다는 위태로운 장면이었다.
"다들 상황이 어떤지 압니까?"
"그렇게 걱정할 단계는...."
"아니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음 달이면 분명해질 거요! 이젠 사람들은 아무도 사카린을 찾지 않아요, 어디서나 돌체라고요!"
"일시적인 현상이겠지."
"그러면 사카린은, 사카린도 지나가는 유행일 뿐이었나?"
참견이 참견을 부르고, 어느덧 투자자 사이의 말싸움이 시작됐다. 제임스는 가까스로 그들을 달래고 말을 꺼냈다.
"압니다, 여러분이 무슨 불만을 품었는지요."
제임스는 아우성을 달랬다.
"이게 돌체입니다."
그는 품에서 자루 하나를 식탁에 올려놨다.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나도 개인적인 호기심은 있었기에, 손가락으로 찍어 혓바닥에 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헛구역질하며 내뱉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입을 위스키로 씻어야 했다. 사카린 때와 똑같이 단맛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나는 두 상품를 구별할 수도 없었다.
"인정합니다. 돌체는 지금 우릴 압도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억측과 달리, 상황은 쉽게 뒤집혔다.
선점 효과에 대한 신화는 물거품처럼 녹아내렸고, 사업은 여전히 성장했으나 연일 부정적인 보도만이 따라왔다. 몇몇 성미 급한 투자자는 연단의 제임스를 끌어내리려 했지만,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다들 만류했다. 회의 분위기는 전보다 침통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시죠. 이번 패배는 우리의 이론을 더욱 확고하게 증명해준 셈입니다. 돌체가 더 달았기에, 사람들은 그쪽에 이끌린 겁니다. 되돌릴 방법도 명백하죠. 새로운 상품, 기술이 필요한 때입니다."
제임스는 차분했다. 적어도 그러려고 하는 것은 분명했다.
"무슨 뜻인가?"
"돌체보다 달게, 설탕의 400배 단 향신료를 만들면 됩니다."
전부터 느껴졌던 믿음은 더욱 확고해져, 심지어는 경건하게도 보였다. 모든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불안과 공포 속에서 탄생한 맛의 신화는 그 안에 단단히 뿌리박혔다.
"많은 투자가 필요할 겁니다. 연구에는 비용이 들고, 새 공정에 맞춰 공장도 다시 지어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성공할 시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습니다. 산술적인 성취까지 따진다면, 사실 그 이상이죠."
도무지 신뢰할 상황이 아님에도, 제임스의 확고한 태도는 지지를 돌려놓기 충분했다. 전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주저하면서도 투자금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슈퍼 사카린이란 이름을 붙일 겁니다."
제임스의 얼굴 옆면에는 잘 아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리고, 박사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어떤 마술을 부렸는지, 그는 이 주 만에 산술적으로 설탕의 400배 단 화학조미료가 완성해냈다. 이미 누구도 맛으로는 구분할 수 없었기에, 슈퍼 사카린은 아무 검증 절차도 없이 시장에 출시되었다.
결과는, 이제는 별로 놀랍지 않지만, 슈퍼 사카린의 승리였다.
겨우 돌체를 넘어선 슈퍼 사카린은 다시금 우리에게 부를 안겨줬지만, 전처럼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불안 속에서도 향락은 통제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은 이미 폭식으로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리고, 그마저도 잠깐이었다.
정례회의 중, 날이 제법 쌀쌀했는데도 한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정오 신문이 구겨져서 들려 있었다.
"큰일이요."
우리는 그가 펼친 신문을 다가가서 살폈다.
『단맛 경쟁을 끝내다, 설탕보다 430배 단 블루 슈가 출시!』
분명, 우리는 새파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