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84화 (184/232)

§184. 죄짓다

비가 많이 오는 밤이었다. 나는 바다 꿈을 꿨다.

세차게 창문을 때리던 빗소리는 광활한 태평양의 폭풍우로 바뀌었고, 땀으로 젖은 침상은 가라앉는 나룻배가, 이럴 수가! 물이 언제 여기까지 차올랐지? 어떻게 이때까지 몰랐지?

나는 뒤집힐세라 흔들리는 배를 붙잡고 비명 질렀다. 소리는 귀까지 닿지 않았다. 공간에 삼켜진 것이다. 나는 입 벌린 채로 거친 파도에 삼켜졌고, 그대로 가라앉았다.

입 안에선 짠맛이 감돌았다. 옆으로 부서진 배 파편이 보였다.

그토록 소란스러웠던 수면과 달리 물 아래는 조용했다.

천천히 침강하면서도 나는 고독하지 않았다.

바다는 넓지만 비어 있지는 않았다.

첨벙, 첨벙.

얕은 물가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침몰한 프린세스 앨리스 호의 130명의 승객이었다.

위병으로 죽은 탓인지 그들 얼굴에는 누런 반점이 따개비처럼 붙어 있었다.

그들에게 작별하고 조금 더 가라앉자 3월과 4월을 만났다.

지브롤터 해전에서 잃어버린 두 명의 전우였다.

물에 빠져서는 다시 보지 못했었다.

파도가 친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만나니까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가까이 가서 체온을 나누고, 말 한마디 나누고 싶었지만, 익사자에게는 말이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별로 없어, 수압은 무정하게 날 재촉했다.

깊이 내려갈수록, 어둠이 내 세상을 조여왔다.

바다는 더는 아름답지 않다.

대신 추웠다.

나는 이제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 본다.

찰랑, 찰랑.

해구 절벽에는 지구의 역사가 새겨져 있었다.

잃어버린 뮤 대륙의 수도, 수몰한 소돔과 고모라, 더니치...

지구에서 가장 깊은 밑바닥에는 고운 모래로 된 모래사장이 놓여 있었다.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하얀색이었다.

그러기에 찾지 못했으리라.

올리브 잎새를 문

까마귀 뼈를,

헐겁게

묶인

편지

잠에서 깨었을 때, 침대는 평소보다 많이 젖어 있었다. 입에서는 짠맛이 났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기운 넘쳤다.

지중해 파도처럼, 철썩, 철썩!

1897년 11월 14일, 새벽.

새벽 겨울에는 배도 드물었다. 이유는 불가사의했다.

한파가 오면 뭍에서야 사람이 게을러졌겠거니 한다지만, 고작 찬 바람에 위축하기에는 바닷사람만큼 억척스러운 이들도 없었다.

해안 바위처럼 거친 사람들이다. 풍파에 가파르게 깎일지언정,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기에 고난이 고될수록 고집스레 바다로만 향했다. 수년간 바다에서 지내 그 사실을 아는 내게는 이들조차 항해를 꺼리는 시기가 있단 게 퍽 놀랄 일이었다.

한편, 내가 지금 어떤 성찰을 했는지, 지금 이 장소에서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세상에는 어떤 놀라운 사실에도 감동을 느끼지 않고, 오직 이윤만을 따지는 부류가 더러 있기 마련이었다. 몹시 불쾌한 사실은, 나 역시 그들 무리 중 하나라는 점이었다.

런던항 외각에는 폐창고가 몇 있었다.

2년 전, 템스 강의 흐름이 바뀌고는 버려진 곳이었다. 수십 년간 버텨온 건물들이 사람 손이 끊기고 고작 수년만에 얼마나 녹슬었는지, 이제는 누구도 다가오지 않는 흉흉한 지역이었다.

그런 건물 중 하나에 대여섯 명의 남자가 얼쩡거렸다.

그중 넷은 항구 사람이라 해도 손색없는 차림새였고, 나머지 두셋은 누가 봐도 바닷일과 무관한 사람이었다. 뻐끔뻐끔 피워대는 담뱃불이 연안 앞바닥의 고깃배처럼 이따금 반짝였다.

나는 흘깃 항구의 길목을 바라봤다.

가로등마다 수상한 그림자가 하나 내지는 둘씩 깔려 있었다. 인상이 희미한 작자들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려 했지만, 어찌 된 게 사람이 등불보다 옅어서는 여의찮았다.

잠시 그렇게 뜸 들이고 있자, 바다 쪽에서 부자연스러운 물살 소리가 들렸다.

기껏 해야 두세 명 타면 차는 소형선이었다. 불조차 켜지 않고 조용히 노질해서 다가오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도 수상쩍었다.

원양을 다니기에도, 이렇게 물살이 거친 근해에도 어울리지 않은 작은 배였다. 어쩌면 멀리서 해안선을 돌아왔건, 본선을 멀리 정박시켜두고 쪽배를 내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봐, 좀 당겨줘!"

배에 탄 사람이 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제야 물가에서 서성이던 넷이 다가가서, 뱃사람이 던진 밧줄을 계선주에 묶었다.

여러 장정이 붙어서 힘을 쓰고도 한참 걸려서야 배를 항만에 딱 붙일 수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두 명은 정박이 끝날 때쯤에야 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가래침을 뱉어 끄고 설렁설렁 다가갔다.

배에서 올라온 사람을 총 네 명이었다. 그들은 실은 짐 상자 고리에 밧줄을 걸고, 이번에도 도합 여덟 명이서 끙끙대고서는 겨우 뭍으로 올려놨다.

나는 조금 늦게, 이 무렵에 배 쪽으로 다가갔다.

늦게 도착한 다른 두 남자의 시선은 바닷물에 아랫부분이 축축하게 젖은 소나무 상자에 꽂혔지만, 내 눈은 왠지 아무도 타지 않은 선체로만 꽂혔다.

멀리서는 몰랐지만, 흠결이 많은 배였다. 파도가 높게 칠 때마다 뒤집힐 듯이 치솟기도 했지만, 한시도 가라앉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박사님."

그때, 검은 바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벽에 닿아 부서질 때마다, 그럼에도 바닷물이 땅에 쏟아질 때마다, 그 모든 곳에서 목소리는 들려왔다.

"박사님, 박사님." 하고는... 나는 홀린 듯이 바다를 응시했다.

"박사님. ...박사님."

옆을 보자,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 그래."

나는 상자에 다가섰다.

"뒤로."

한 사람이 상자 틈새로 쑤시개를 꽂아넣고 힘껏 누르자, 상자 윗면이 쩌억 소리와 함께 뜯어졌다. 쾌쾌한 모래 먼지 냄새가 났다.

또 다른 사람이 상자 안에 손을 넣었다.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이상한 긴장감이 돌았다. 잠시 후, 다시 그 손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이단적인 종교 상징물, 연도를 가늠하기 힘든 고문서가 각각 들려 있었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상자 안의 내용물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전부 진짭니다. 스페인의 침묵원이라면 아실 테죠."

배에서 오른 남자가 비굴하게 헤헤 웃으며 말했다.

밤바다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이 으레 그렇듯이 합법적이진 않았다.

영국 관세청의 깐깐한 세금 물림은 악명이 높다. 하지만 그 목적이 화물 검사에 있다는 것까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는 보편사무국의 검열 과정 중 일환으로 진품 여부를 떠나 이런 괴문서나 종교 상징물은 세관을 통과하지 못했다.

허나, 신비에 대한 수요는 언제나 있었고, 합법적인 수입 경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소 융통성 있는 방법으로 수요와 공급을 조율했다.

이른바 밀수였다.

"박사님."

"침묵원은 비었다고 들었는데."

나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물건을 들여오는 일이야 누구나 한다지만,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고, 그중에 인정 받을 만한 경력을 가진 이는 더욱 적었다. 그게 내가 여기 있는 이유였다.

나는 자문이었다. 항상 그랬던 건 아니지만, 처음도 아니었다.

"이베리아의 악명 높은 내전이 터지자, 종교 시설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에도 불구하고 수도사들은 일제히 남아메리카로 떠났지. 그리고 개장된 수도원에서는 그들을 유명하게 한 검은 샴을 필두로 마흔두 장의 악보가 발견되었고."

참고로, 수도사들이 사라진 이유로는 많은 가설이 있지만, 내 생각에는 그저 소음이 싫었던 거 같았다.

"박사님, 침묵원이 뭡니까?"

"스페인의 수도원이네. 묵언 선언을 하고, 일생 말하지 않는 조건으로 입회하는 극단적인 종교 단체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것보다 더한 이단 교회였고. 특정 주파의 소음이 천국을 증명한다는 믿음으로, 이를 재현하려 했기에...."

나는 정말 중요한 사실을 빼놓고는 아는 것만 말했다. 한때, 내가 상대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고자 열심히 연구했던 시절이 있었고, 올드코트의 장서와 뒷세계의 연줄은 지식욕을 충당할 만큼 충분했다.

"모든 악기와 악보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소리가 난다지. 주로 나쁜 의미로."

"그러면 더욱 좋지요. 사람들은 원래 피 묻은 일화에 끌리니까요."

대부분은 잡동사니였다.

우선, 내게는 진품을 가려내는 능력이 없었다. 뒷세계의 무수한 소문이 죄다 그럴싸한 헛소리일 뿐인지, 아니면 이들이 위조품만 가져오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진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지식을 과시하고, 그들이 좋아한다는 점만이 유의미했다.

잠시간 내용물을 살피던 내가 침묵하자, 코트 입은 남성이 다가왔다.

"박사님."

한 번씩 가까이서 보면 이들과 밤에 일하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이런 살벌한 얼굴로 박사님이라며 살갑게 굴다니!

그가 정말 나를 존중한다는 착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세 번째 일하면서도 아직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게 진품이라면 말이지."

"무슨 뜻입니까?"

"이건 위조품이야. 적어도 재질의 연식과 다른 것만은 분명하지."

나는 가죽끈으로 제본한 양피지 책자 한 권을 들춰보며 말했다. 그러자 느슨하던 공기가 단숨에 무거워졌다.

피 냄새 조금에, 역한 쇠 냄새. 짐승 같은 그들에게야 어울리는 냄새였다.

"우선 변색 상태가 균일하지 않아. 원래는 다른 공간에서 보관하던 낡은 양피지를 짜기워 고문서처럼 보이게 위조하려 한 거지. 당시에는 얼추 비슷하게 보였겠지만, 세월이 쌓이면 이렇게 차이가 드러나지."

나는 아예 상자를 헤치다시피 하나씩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이 부분은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아마 16세기부터 17세기 사이에 만들어졌을 테지. 당시는 마녀의 시대라 불릴 만큼 유럽 전역에 가짜 고문서나 마도서 따위가 난립했고, 그 시기 위조품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거든."

선원이 입을 벙긋거렸다. 아마 욕설이 나오다 만듯했다.

"트집 잡는 거잖아. 말로는 누가 뭐라 못해."

"내가 조예가 없어서 그렇지만, 당시 문법과 종이의 연식까지 비교해보면 자명해질 테지. 시간은 다소 걸리겠다만, 전문가 손에 들어가면 금방이지. 그러니까, 고객 말일세."

나는 태연히 말했다.

"선생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우리야 물건이 진짜건, 가짜건 팔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 파는지가 달라지지."

처음 말은 날 향한 것이었지만, 뒷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가격을 다시 책정해야 할 것 같다만."

"지랄."

조금 전까지 굽실거리던 남자가 욕설을 뱉었다.

"온갖 개고생을 하고, 500해리를 건너서 왔는데 흥정을 하겠다고? 그러면 우리도 시발 못 팔겠는데?"

두 무리가 서로 말없이 대치했다. 모두가 약속한 것처럼 옷 속에 손을 넣었다. 뒷일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모르는 일도 아니었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그리 해왔던 걸, 도구의 도움으로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낼 뿐이었다.

그때, 멀리서 있던 망꾼이 다급히 외쳤다.

"사무국이야!"

모두 일제히 분주해졌다.

선원들이 상자를 집어 올리자, 밀수꾼이 다짜고짜 총을 겨눴다.

"물건은 두고 가."

아무도 망설이지 않았다. 총성이 터지고, 바닥에 상자가 쓰러지며 물건이 쏟아졌다. 그중 일부는 의사를 가진 것처럼 바다로 굴러떨어졌다.

사람들도 굴렀다. 열 명이 일제히 사방으로 굴러다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꼭 바람에 나부끼는 종이 쪼가리 같았다.

내 목숨을 구한 건 몸에 밴 옛 습관이었다.

나는 첫 발포음에 바짝 엎드렸다.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대니, 귀가 멍해지고 방향감각이 흐릿했다. 그 자세로 나는 기어서 악다구니 통에서 빠져나왔다.

어두운 그늘에 이르러서, 간신히 뒤돌아본 부두에선 여전히 투박한 불꽃이 계속되고 있었다. 심지어 사무국 요원들이 가세하며 소란은 처음보다 확산한 듯했다.

나는 더는 돌아보지도 않고 달아났다.

한쪽 팔에는 빼돌린 악보 한 부가 성경처럼 소중히 들려 있었다. 이것의 이름은 보자마자 알았다. G를 위한 젬베 악보, 전에 아서에게 부탁받은 물건이었다.

이런 식으로 손에 넣게 될 줄은 몰랐으니 큰 소득이었다.

나는 뻔뻔한 생각에 놀랐다.

이게 소득이라면 얼마나 가치인가. 범죄에 가담하고, 사람이 몇몇 죽고, 그에 비하면 이 일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이럴 만한 가치가 있었나.

대답할 수 없는 아우성이 자꾸만 속에서 맴돌았다.

이랬어야 했나, 꼭 이랬어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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