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85화 (185/232)

§185. 표준 규격

"잘 다녀오셨어요?"

그날따라 마리는 누구보다 먼저 나와서 맞이했다. 나는 이 영리한 아이의 마음씀씀이에 속으로만 쓴웃음 지었다.

"좀... 어떠셨어요?"

"뭐, 다 똑같지."

나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그 끔찍한 밤으로부터 일주일이 다 되어 가지만 연락은 없었다. 그들 모두 저주받은 구렁텅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내가 물건을 빼돌렸다는 걸 모르는지,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다만, 나쁜 소식은 영 다른 곳에서 왔다.

파라 함장의 부고였다.

워낙 느닷없이, 아무 전조 없이, 불현듯이, 갑작스럽게 나타났기에, 나는 이 일에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렇지 않을 수도 몰랐다.

마지막 방문 때 그가 병에 걸려 있다든가, 내게 유언처럼 의미심장한 문구를 전했거나, 필자의 자기만족으로만 점철된 감상적인 산문집의 신파처럼 사후에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든가 했다면 말이었다.

하지만 편지에는 오직 세 문장, '1897년 11월 5일 새벽, 고인께서 고통 없이 작고하여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장례식은 고인의 생전 의향대로 일가친지만 초대하여 소박하게 진행하려 합니다. 참여 바랍니다.' 라는 내용만 적혀 있었다.

생전 그의 재치를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모욕적으로 느껴질 만큼 관습적이었다. 만약 그였다면, '이제는 슬슬 새 양복을 구하길 바람.' 정도의 추신은 달아뒀을 것이다. 그래, 분명 그랬으리라!

그럼에도 나는 괜찮을 수 있었다.

지인이 죽는 일에는 통달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나는 부고와 관련된 일에는 이미 달인이다. 여기서 하나둘쯤 더 떠나보내도 대수로울 리가 없었다.

사실, 나는 내 상태에 대해 짐작 가질 않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지구의 음지에서 벌어지는 사악에는 누구보다 전문가이면서, 바로 옆에 있는 꼬마 마리마저 아는 일을 나 혼자 모르는 것이다.

초대장에 적힌 문구는 모두 사실이었다.

오늘 방문한 장례식은 소박했다. 자리에는 열 명 조금 넘는 사람만 있었는데, 군과 관련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와 스콧 빼고는.

우리는 서로 알아보고, 멋쩍게 웃으며 시답잖은 인사만 나눴다. 아마 그는 자기 외에도 군인이 몇 명은 더 있을 줄 알았다는 모양이다. 우스운 노인이었다.

종국에는 불쌍한 함장은 완전히 잊혀서, 스콧과 나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더 했다. 육군의 분위기가 흉흉하든지, 지리학회에서 탐험대 규모를 배가하는 안에 승인했다든지 하는 내용이었다.

"아직도 네게 권했던 제안은 유효해."

떠나기 직전, 스콧은 그렇게 말했다.

"윗사람이 되더니, 아주 막무가내야."

그러자 그는 웃으며 답했다.

"다리하고 같이 기억도 날려 먹었나? 네가 사람을 얼마나 굴렸는데. 그래도, 아쉬워. 네 다리만 멀쩡했다면, 우리 입장이 반대였을지도 모르는데."

"어쩐 일로 겸손을 떠시나?"

"이 친구가 좋은 말을 해줘도 의심만 많아서. 겸손이 아니야. 종군하고 이십 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자네만 한 군인 재목을 본 적이 없어."

당시에는 그냥저냥 들었는데, 정작 스콧이 돌아가고는 그 말이 줄곧 맴돌았다.

나도 다리만 무사했다면 군대에 남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군인 재목이 무엇인지 만큼은 알기 어려웠다. 고함을 치는 것? 허기에 익숙한 것?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

아니, 의미는 분명했다. 공교롭게도 나는 얼마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으니까.

살인이다.

...아, 그래, 불쌍한 파라 영감. 내가 그 사람 얘기를 빼먹을 줄이야. 스콧이 돌아가고도, 나는 장례식에 계속 남았다.

누구와도 면식이 없는 나는 불가피하게 주례를 들어야 했다. 기이한 태생으로 인해 신앙 없는 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오늘 설교는 무언가 특이했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서 와서, 다시 돌아갈지니, 삶은 끝이 아니요, 또 다른 시작이니, 가치 있는 삶과 죄 없는 죽음은 중함을 비교하기 어려우니, 고인께서는 진정 누구보다 어려운 길을 걸었으니 남은 자는 번민하지 말지어다. 믿음 속에는 죽음조차 온전히 우리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장례식 주례 신부의 설교치곤 힘 있는 내용이었다.

교양 외에는 신학을 배우지 않은 나야 자세히 모르지만, 장례식만은 여럿 다녀본지라 흔한 내용이 아니란 것만은 알았다.

당시에는 의미를 몰랐지만, 돌아오는 길에 유족끼리 속삭이는 내용을 엿듣고 알게 되었다.

"하여튼, 그 사람도 경망스럽게 밧줄 같은 걸 숨겨둬서."

"그런 말 하지마. 노인 혼자 사니까 외로웠던 거겠지. 그렇게 본가에 오시래도."

사연을 알고 본즉슨, 보험사 직원이 조사하다가 자살용 밧줄을 발견하고는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인은 그와 무관했다.

단순한 병사였다.

고령의 노인이었으니까, 또 최근 일교차가 격했으니까, 지병인 천식이 폐렴과 합병증을 일으켜서 폐에 물이 차서 겨우 며칠 앓다가는 가버린 것이었다.

어디에나 있는 죽음, 오히려 군인 신분으로는 호상이었다.

"방에서 조금 쉬어야겠어. 아침부터 먼길 다녀와서 여간 피곤한 게 아니야."

"그러세요. 식사는 차려 드릴까요?"

"됐네, 그보다는."

나는 하려던 말을 말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자네 볼일 보게."

그러고는 홀로 방에 들어왔다.

이런 때에 위스키가 필요하다니, 실제 심정이야 어쨌거나 괜한 오해만 살 게 뻔했다.

나는 방에서 차분하게 생각했다.

흔한 죽음이었다. 배후를 고심하는 게 우스울 만큼 흔했다. 설령 그 밧줄이 목을 매달았다 해도 그랬다.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리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이런 두루뭉술한 표현을 쓰는 건, 딱히 당시의 상처 때문에 외면하고자 하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다! 그저 내가 그분의 사인을 모르는 탓이지.

그렇다고 달리 그분께서 불가사의한 죽음을 당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단지, 어머니께서 그날부터 말이 없으셨고, 나 또한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세상 일이 의외로 그런 법이었다. 그나마 내가 아는 것은 얼떨결에 들은 장례사의 위로 덕분이었다.

그가 말하기론 어디선가 매달렸다는 듯했다.

그게 침소였는지, 혹은 어느 뒷골목이었는지, 아니면 교수대였는지 그 장소까진 듣지 않았다. 다만, 그는 런던에서 아주 흔한 일이라고만 했다.

흔하다니, 죽음에 흔하다는 형용사가 가당키나 하던가?

하지만 그가 옳았는지 몰랐다. 당시 신부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미 돌아가셨는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는 죽음에 한해서는 나보다 전문가였다.

우리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내가 겪은 시간을 아는 자는 이제 손꼽게 드물었다. 피치 못하게 나는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떻게 죽을 텐가. 흔하게, 아니면....

1897년 11월 20일.

메르세네프 씨는 죽은 것이라면 뭐든 모았다. 때로는 산 것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어떤 도덕도 적용하지 않기로 악명 높았다.

3년 전, 런던 박물관에서 일어난 강도 사건의 도난품이 그의 저택에서 전시되어 있을 때도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이 일로 여섯 차례나 그를 귀찮게 했던 박물관장은 저택을 방문한 날부터 다시는 전시물을 되찾으려 시도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내가 가진 믿음직스럽지 못한 정보망은 최근 흥미로운 소문을 전해줬다. 메르세네프 씨의 수집품에 브리타니아 외경이 추가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작원의 잃어버린 유물이자, 아서의 계획에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래, 갖고 있지."

겨우 만난 메르세네프는 순순히 털어놓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었나? 허버트 경, 양도라니?"

"양도가 아닙니다."

나는 어렵사리 말문을 텄다.

"정당한 값을 치룰 겁니다. 제 벗인 프랑크 백작이 말입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상응하는 물건을 구해 오겠습니다. 혹은, 번거로운 심부름이라도 하죠."

메르세네프는 진저리를 쳤다. 그의 희끄무레한 수염이 닭볏처럼 쫑긋거렸다.

"자네 이력은 흥미롭게 봤네. 그래서 나는 자네를 위해 시간을 낸 거야. 그런데 정작 와서 지껄이는 소리라곤 순...."

그는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듯이 허공을 향해 손을 수차례 저었다.

"지브롤터에서 오백 명이 탄 전함에서 모두가 고함을 질러서 귀는 먹먹하고, 상관의 누런 이빨이 성나게 지껄이는 모습만 보고 함포실로 뛰어들어가서, 또 아래는 더욱 시끄러워, 포수들이 시꺼멓게 탄 팔을 걷어 포구를 밀어서는 팔십 문이나 되는 대포에서 일제히 육백 파운드 대포알이 불꽃처럼 터져 나가, 귀에서는 따뜻한 핏물이 흐르는 와중에 명중탄에 배가 기울고 바다로 떨어진 선원들은 부표를 붙잡으며 들리지 않는 아우성을 서로 내지르고...."

메르세네프는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시체처럼 푸르딩딩했다.

"그리고 또 사르데냐에선 푸성귀 위를 뒹굴며, 허기와 공포 속에서 몇 날 며칠을 벌레를 씹으며 연명하다가는 결국 적군에게 발각되어 나무와 바위를 끼고 근거리 총격전을 벌이며, 소리 지르는 상대 안면의 근육 움직임까지 보이는 거리에서, 난생처음 본 상대에게 살의를 품으며 돌격해서...."

그는 말을 멈추고 날 돌아봤다.

"나는 자네가 이보다는 현명할 줄 알았어."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이권은, 무엇도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인지 자신이 없었다. 안면 근육이 수축하고, 눈 주변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인상 쓰고 있을지도.

"무슨 우악스러운 말씀을."

"자네가 내게 그따위 말을 할 처지가 되나? 자넨 군인이었을 텐데."

그는 몸까지 휙 돌려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강직하게 버텨서 마주 봤다.

"이제는 상관없는 얘깁니다."

"멍청한 척일랑 관두게. 내가 골동품 몇 점을 훔쳤다고 치지. 그런다고 인명을 훔친 자네 발끝에나 미치겠나?"

"옛날 일입니다."

"죄라는 게 구두에 묻은 진창처럼 말하는군. 그렇게 가볍게 씻어지는 것인가?"

뻣뻣했던 고개는 시간에 눌려 수그러졌고, 동공 초점은 흐려졌으며 호흡은 거칠어졌다. 반면 모닥불에 반사되는 메르네세프의 왜소한 그림자는 점차 비대해져서, 어느덧 벽면 전체를 삼켰다.

"내심 흠모마저 품었건만, 이렇게 한심한 작자인 줄 알았다면 만나보지도 않았을 거야!"

이어지는 메르세네프의 불같은 축객령에 나는 쫓기듯이 밖으로 나왔다. 정처 없이 계단을 내려와, 정문을 지나자, 첫눈이 오고 있었다.

반쯤 녹아서 눈이라 불러주기도 망신스러웠다. 눈조차 되지 못하고, 비도 아닌 무언가, 런던에서 첫눈은 보통 쌓이지 않는 것이었다.

바닥에는 흥건한 진창이 뭉쳐 있었다. 질척이는 길가를 걷자, 구두 틈새로 찬물이 스며들었다. 안뜰을 지나자 벽면에는 얼어 죽은 거미가 매달려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험상궂은 경호원이 다가와서는 안내를 빙자하여 추방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생각이 깊어서 어떻게 집까지 당도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튿날, 발가락이 아파 보니까 붉게 부어 있었다. 동상이라 했다.

그후에 나는 뒷골목 인맥을 동원해서 사람을 수소문했다. 할 일 없는 한량, 일을 가릴 처지가 안 되는 절박한 전문가, 범죄 조직의 가담자가 모였다. 평소에는 친하게 지낼 생각조차 않는 불명예스러운 이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담합하여, 대담하고도 은밀한 계획을 꾸몄다. 머지않아, 메르세네프 저택에는 서너 명의 도둑이 침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기사를 읽는 내 수중에는 저택에서 사라진 도품 중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 무렵부터 발가락은 더 아프지 않았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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