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86화 (186/232)

§186. 리츠 호텔만 한 관짝

할렐루야, 할렐루야....

초라한 노인이 웅장한 성당 기둥 사이로 걸어왔다. 석회암 바닥의 먼지가 오후 햇살에 비쳐 사장의 모래알처럼, 혹은 금싸라기처럼 성스럽게 반짝였다.

나는 즉시 깨달았다. 언젠가 보았던 꿈이다.

그리고, 이건 나의 꿈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천천히 걸어가는 노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늘에 계신 나의 주."

모로 보아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었다. 나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죽음을 앞둔 자는 얼마나 하찮은가. 또, 얼마나 추한가.

"나의 아버지. 나의 신이시여."

노인에게 다른 점은 없었다. 순간의 착상에 의존하는 꿈치고는 한없이 정제된 과정이 반복되었다. "키리에 엘레이손." 그리고, "크리스테 엘레이손." 재차, "키리에 엘레이손." ...나는 노인에게 흥미를 잃었다.

다른 점은 내게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나는 노인에게 흥미를 잃고, 성당을 거닐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황금으로 지어진 것처럼 찬란한 공간이었다.

영국 고금의 명사들이 잠든 여기 묻히는 것보다 큰 영광은 없을 것이다. 나는 문득 노인이 기도하던 묘비가 궁금해졌다. 분명 리즈에게 들었던 것 같지만, 꿈의 마력인지 잊고 말았다.

나는 그 앞에 섰다.

"필레몬 허버트 VC, 여기 잠들다."

나라고? 나는 다시 읽었다. 분명 그건 내 이름이었다.

그런가, 여기는 내 무덤인가. 나는 이미 죽었는가. 이상하게도 마음은 차분했다. 생전에도 이만한 평화를 누린 적이 없을 정도로....

그 옆에도 여러 묘비가 줄지어 있었다. 미처 몰랐지만, 나는 서서히 걸어가서 읽었다.

"엘리시안 허버트, 여기 잠들다."

모르는 이름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다음 묘비명을 읽었다.

"아서 프랑크, 여기 잠들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다음 묘비명을 읽었다.

"셜리 마리, 여기 잠들다."

그리고, 다음.

"배즐 허버트. 에드먼드 허버트. 앨리스 플레전스 리들. 셜록 홈즈. 어거스틴 브라운. 로버트 스콧. 피터 윌슨...."

조금 전까지 신성하게 보이던 풍경이 삭막하게 바뀌었다. 여기는 지상에 내려온 천국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묘지였다.

나는 뒷걸음질치다 무언가에 닿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정 값진 죽음은 무엇인가."

내가 부딪힌 노인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풍모와 달리, 꼿꼿하게 버티고 서서 날 바라봤다. 웅얼거리던 발음도 지금에는 선명하고 강하게 귀에 꽂혔다.

"그들에게는 있었는가?"

"너는, 누구지?"

나는 무심코 물었다.

"에드워드?"

"사람의 죽음에도 값어치를 매길 수 있다면, 일생 모든 순간에 값을 매긴다면, 죽음에는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또 죽은 후에는?"

노인은 답하지 않고 물었다.

"에드워드, 아니야. 그놈이라면 들킨 순간에 당당하게 조롱했겠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 이유를 아는가?"

"그렇다면 그 말고 이런 수작을 부릴 자는...."

노인, 아니, 아이, 아니, 남자, 아니, 여자도 아닌 자는 가로었다.

"우리의 하늘에 천국이 없는 탓이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 ... .

꿈에서 깨었을 때, 내게 남은 궁금증을 하나뿐이었다.

엘리시안 허버트가 누구지?

...아무래도 내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괜히 몸을 들썩이거나,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런 모습이 퍽 이상하게 보였는지, 옆에 앉은 줄리엣이 "왜 그리 안절부절못해요?" 하고 물었다. 나는 괜히 "안절부절못한다고? 누가 안절부절못해!" 하며 발끈해서 답했다.

아차 싶었지만, 나의 공연한 화풀이가 이제는 낯선 것도 아니었는지,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반응이 없어서 내가 초조할 지경이었다.

한편, 나는 일일이 아이들 반응을 살필 상황도 아니었다. 도축장의 새끼 양과 같았다. 일생 방문해서는 안 되는 장소에 억지로 끌려온 듯했다. 불안한 고갯짓은 이윽고 아무것도 없는 내벽의 벽돌에 이르러서야 겨우 멈추었다.

이유는, 내게 신앙이 없기 때문이었다.

성 주드 성당 내벽에는 벽돌 틈새마다 세월을 짐작게 하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검소할지언정 초라하지는 않았다.

연단에서는 호프먼 신부의 설교가 계속되고 있었다.

"...미가의 가르침에 아마 여러분은 이렇게 답하실 겁니다. 아니요, 신부님. 저는 음행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기를 치거나, 거짓 우상을 숭배하지도 않습니다. 허나, 이스라엘의 백성들, 시몬의 딸들도 같은 대답을 했을 겁니다...."

성당은 마치 울림통 같았다. 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신부의 목소리가 꼭 징소리처럼 묵직하게 들렸다.

향간에는 소문으로 떠돌지만, 분명 사실이었다.

나는 열렬한 신자가 아니다. 외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대체 몇 년 만에 안식일 예배를 찾았는지, 나조차 계산이 잘 되질 않았다. 익히 십수 년은 되었을 터였다.

물론 내게도 매주 성당을 찾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 또한 믿음보다는 사회적 시선 때문이었다. 그나마의 가식도 상류사회에서 방출되며 모두 털어내곤 누구보다 성당을 멀리하며 지냈다.

그런 이유로 내게는 언제나 불신자 딱지가 붙어 다녔다.

하지만 나에게도 변명은 있다. 경건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고도, 나는 기이한 태생 탓에 도무지 신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조차 주님의 안배라 믿어 넘길 만큼 신앙심이 있었다 해도, 그간 겪은 사건들은 족히 날 무신론자로 만들었을 터였다.

그런 내가 여기 성당에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내 옆에 앉은 천덕꾸러기들, 이름을 붙여보자면, 줄리엣과 프레디라 불리는 것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설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호기심을 숨기지 않으며 사방에 어수선한 시선을 흩뿌리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수순으로, 경건한 신자들의 시선은 보호자인 내게 향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들의 자유로운 탐구 정신을 저지할 역량도, 여유도 없었다.

전자는 그들의 자유분방함과, 이윽고 상실된 가장의 권위 때문이었고, 후자는 터무니 없게도 냄새 때문이었다.

어릴 적을 회상하게 하는 향 냄새가 벽 층층이 묻어났다.

"아버지께서 매주 우리를 데리고 성당에 왔지."

"아버지? 주인님네 아버지?"

반응을 바라고 꺼낸 말은 아니었는데, 조금 떨어져 있던 프레디가 곧장 물었다. 나는 살짝 놀라고, 낮게 속삭였다.

"그래, 우리 세 형제가 같이 있는 시간은 그때뿐이었어."

"아저씨가 가족 얘기하는 거 처음 들어."

"그치?"

나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겨우 이해했다. 그러고 보면, 남에게 한 번도 이런 얘길 한 기억이 없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부끄러워져서 괜히 딴청부렸다.

"그랬나?"

"그리고?"

"그뿐이야. 이제 조용히 하고 신부님 말씀이나 들으렴. 성당에서 떠드는 건 아주 막돼먹은 짓이야."

뒤이어 "주인님 먼저 했으면서...." 같은 소리도 들렸기에, 나는 엄한 시선으로 입 다물게 하고 주변 신도들에게 꾸벅 사과했다.

"...하물며 이스라엘에 횡행한 성전 창기는 더욱 당연했을 겁니다. 성애와 풍요를 동일시하는 미신 풍습의 잔재라고 이해하는 게 옳습니다. 이렇듯이, 미가는 단지 여러분께 음행하지 말라, 거짓 우상 숭배하지 말라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을 옳다 믿으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신부의 설교는 계속되었다. 대부분 귓가에 머물지 못한 소리였다.

드문 일이었다. 말로 상황을 망친 경험은 많다지만, 그게 나의 못된 심보에서 우러난 게 아니라, 평소라면 비치지 않을 심층에서 역류했다는 점이 달랐다.

그나마 들은 게 애들이기 망정이지, 망신은 둘째치고 위험할 수도 있었다.

분명 인정할 때가 되었다.

나는 지쳤다.

사십이 넘긴 해부터 몸은 급격히 연로했으며, 그나마 활력도 저번 부상 이후로 사그러들었다. 이따금 전까진 몰랐던 강렬한 피로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육신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사람 사이의 일에 지쳤다. 나는 상처를 때우는 방법을 잘 알았다. 정성껏 마음속 깊은 곳까지 꼼꼼히 독한 술로 소독했다. 대개 위스키면 충분했고, 아주 가끔 많은 양이 필요했다.

그렇게 낮부터 술독에 빠져 보내는 게 여간 꼴 보기 싫었는지, 마리가 애들 데리고 성당이라도 한 번 가보라며 닦달한 게 계기가 되었다.

이제 와 신앙에서 평안을 찾을 만큼 기특한 마음씨가 남았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 대체 뭘 바라고 이런 낯선 소굴에까지 기어들어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죄짓지 말지어다. 죄지었던들 회개할지어다. 용서받을지어이! 주께서 축복하고, 또 지키시길, 아멘!"

딴생각에 정신이 팔린 와중에, 어느샌가 호프먼 신부의 설교가 끝났다. 그가 축도를 외자, 신도들이 "아멘!" 하고 화답했다.

그러고는 한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아이들을 시켜 성금함에 돈을 집어넣게 하고, 다른 신도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내가 늑장 부리는 걸 기다리기가 지루했는지, 아이들은 먼저 나가서 정문 쪽에서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허버트 씨."

모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호프먼 신부였다. 신기하게도 직전까지 그의 연설을 들었으면서, 전혀 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혹시 알아본 게 불편하십니까?"

호프먼은 목소리 높낮이 변화가 거의 없이 미안한 기색을 드러내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나는 고개 저었다.

"아니요, 익숙합니다. 그래서 어쩐 일로."

"혹시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나는 멀뚱거리며 그의 얼굴을 봤다.

"고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게 죄스러워서...."

"아."

그제야 나는 탄성을 뱉었다. 그가 바로 파라 함장의 주례 신부였다. 하나 의아한 점은, 여기가 그가 살던 교구가 아니란 점이었다.

"생전 고인과는 인연이 있어서."

신부는 의문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대단한 우연이군요."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는 허버트 씨가 여기 교구에 사시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말없이 물었다.

"워낙 유명인이시니 교인들 사이서 작게나마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방향에서 주목받았다는 사실을 알자, 괜히 민망해서는 핑계 댔다.

"제가 그렇게 성실한 신자는 아니라."

신부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격언처럼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내놓았다.

"저는 성당 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그거."

나는 무심코 말 꺼냈다가, 입을 달싹거리며 겨우 한 마디 뱉었다.

"그거 인상적이군요. 하지만 자물쇠는 중요합니다. 보통 작은 사고는 열린 문 너머에서 일어나기 마련이거든요.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경찰 일을 도우면서 경험으로 배웠죠."

이상하게 긴장한 나는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신부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나는 곧장 사과했다.

"제가 너무 참견했나 봅니다. 미안합니다, 내 딴에는 직업병이라."

"아니요,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짧고 상투적인 인사를 나누고는 성당 밖으로 나왔다. 그새 지루해졌는지 아이들은 저들끼리 몸싸움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긴장했는지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생전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었다. 그것 또한 기이한 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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