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88화 (188/232)

§188. 물을 피하라 하셨다

광상은 계속되었다.

비가 올 때면 여지없이 심해로 가라앉았다. 어리석게도 바닥이라 생각했던 모래사장은 극히 표면에 불과했고, 지금 나는 밤마다 끝없는 어둠 속으로 침강하고 있었다.

발버둥을 친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직 영원한 어둠과 아무것도 없는 수중뿐인데. 내가 뭘 하든, 하지 않는 것과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한편으론 이런 의문도 들었다. 만약 내가 지층을 거스르고 있다면, 길고 긴 인류의 역사마저 하룻밤의 꿈으로 그쳤는데, 과연 이 밑바닥에서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한편, 어떤 날에는 다시 사원으로 끌려갔다.

내가 웨스터민스터라 확신했던 그 공간은 매일 밤마다 서서히 모습이 바뀌어, 이제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었다. 공간은 뒤틀렸고, 구조는 비현실적이었다.

모순적이게도, 나는 혐오와 경탄을 동시에 느꼈다. 모든 벽면에는 빼곡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 인명이었다. 기일은 모두 같았다. 1899년.

이미 빛이 들어올 장소도 없었지만, 실내는 여전히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하지만, 금에서는 푸른 빛이 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잠에서 깨면, 커튼조차 가리지 못하는 눈부시게 찬란한 햇빛이 창 너머로 쏟아지고 있었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에 따라 하루는 크게 바뀌었다.

바다 꿈을 꾼 날에는 온종일 음울하고 폭력적인 충동으로 가득했고, 성당 꿈을 꾼 날에는 환희에 젖었다가 공포스러운 망상에 사로잡혀 벌벌 떨기를 번갈아 반복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변덕에 그쳤지만, 꿈을 꿀 때마다 그 정도가 심해져서 스스로 변화를 자각할 정도가 되었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말리지 말게! 이놈들을 꺼내야 해!"

하루는 빵칼로 다릴 찔렀다. 피는 얼마 나지 않았다.

"이것들이 내 거죽 안에 있어, 쓸모도 없는 다리! 모조리 꺼내야 해!"

당시에는, 그리고 지금도 나는 진심으로 그리 믿었다.

내 거죽 안에서 내가 아닌 신령적인 존재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끼인 상처로 매일매일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다만, 방법이 잘못되었다.

뜯어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때 흘린 핏물로, 상처 틈새로 뭔가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분명 그날이 기점이었다. 나의 꿈에서만 일어나던 변화는 도시 곳곳에서 징조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 ... ... .

"붕대 갈아 드릴게요."

그 사건 후로도 마리가 날 대하는 태도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실은 의아했기에 물었더니, "이런 일도 자주 겪으니까 결국에는 적응하더라고요." 하는 심술 맞은 대답만 듣고 말았다.

나는 흔들리는 커튼을 바라보다가 마리를 보며 물었다.

"마리."

"네?"

"오늘 아침에 비가 왔던가?"

왼다리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붕대를 풀어내던 밀랍 손이 관절 인형처럼 뚝 멈췄다.

"아니요. 쭉 맑았는걸요."

"어제는?"

"어제도요."

"그래."

그렇다면 내 눈에 보이는 저건 뭘까. 그날 이후로 방 안에 물이 차올랐다. 문을 닫아도 큰 소용은 없었다. 마루는 이미 상해서 곰팡이로 덮여 있었다. 바닥에 고인 물은 연일 조금씩 차올라서 발목을 적시고 있었다.

흙탕물처럼 흐린 물이었지만, 분명 웅덩이 속에는 무언가 살고 있었다. 생물 진화의 초기 원생 형태를 띤 생물이었다. 태고의 바다에 살던 것들이다. 수는 많았고, 그 때문에 온종일 찰랑거리는 소리가 거슬리는 점 외에는 아직까진 아무 해도 끼치지 않고 있었다.

날씨 뿐만이 아니었다.

도시는 나날이 기괴해져 갔다. 하늘 절반은 오색찬란하게 빛나며 때때로 금문이 흐릿하게 비쳐 보였고, 나머지 절반은 밤에도 본 적 없는 칠흑과 붉은 빛무리가 어른거렸다.

모두 내 안에 있던 것이다. 내가 도시에 흘려보낸 것이다.

시간조차 가늠되질 않았다. 지금이야 견뎌내고 있지만, 언젠가 미쳐버릴 테고 그때까지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내겐 단서가 하나 있었다.

꿈에서 깨어날 무렵, 흐릿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떤 꿈이건, 그 내용은 항상 같았다. "성 미카엘을 쫓아라." 그 의미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을 여럿 알았다.

"나가야겠어."

"그 다리로 어딜요?"

"다리? 무슨 다리? 이십 년 동안 하나면 족했는데."

아무래도 마리는 탐탁하지 않아 보였기에, 나는 미리 선수 쳐서 못 박았다.

"동행은요?"

"내가 수발이 필요한 노인처럼 보이나? 나는 전쟁터에서 다리를 자르고도 귀국할 때 혼자 배에서 내린 사람이야. 늙은이 취급은 택도 없지."

그녀는 싫은 기색을 내면서도, 마지 못해 코트를 내게 입혀줬다. 나는 모자를 쓰며, 현관으로 나가 신발장에서 장화를 지팡이로 끌어왔다.

"이 날씨에 장화를요?"

"바닥이 젖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미리 생각한 변명을 읊었다.

"하지만, 요 며칠은 비가 내린 적이 없는걸요."

마리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나는 며칠이나 바다 꿈을 꾸었는데. 설마 그 정도로 내 인식이 뒤틀려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겼다.

"조금, 젖은 곳에 갈 거라서 그러네. 문단속 잘하고, 늦을지도 몰라."

"어디로 가시는 지라도 말씀해주세요."

그날따라 마리는 끈질기게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답했다.

"성당, 아니면 프랑크 저택."

그리고는 문을 닫았다.

바깥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누구 하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고, 아무도 발등까지 차오른 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장화를 신고, 비바람을 피해 코트를 동여맨 내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행인은 간혹 있었다.

교구 성당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가까운 길목을 찾아 골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로 앞쪽 길 한복판에 선 누군가를 보고는 서서히 걸음을 늦췄다.

쏟아지는 빗방울 아래 우산을 쓴 청년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 모든 구름은 수난은 나의 꿈속에서 비롯한 것인데, 마치 그도 같은 걸 보고 겪는 것처럼 비를 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자는 흐릿하고 어두워서, 꼭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처럼 특이한 존재는 달리 없었다.

나는 이름을 불렀다.

"에드워드."

"이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청년은 말했다.

"그중 부르는 사람은 당신뿐이죠."

"요 며칠간, 아니, 그전부터 이상한 일이 끊이질 않았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나는 담담히 고백했다.

"내가 겪는 부진과 모든 모순적인 감정들, 이게 모두 꿈이라면 더 설명할 것도 없지."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는 비웃듯이 물었다.

"아니."

나는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품에서 나온 권총 총구가 곧장 그의 가슴을 노렸다.

"하지만 자네가 내 앞에 나타날 만큼 용감한 줄은 몰랐군."

달칵.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신에서 기대했던 포성은 들리지 않았다. 몇 번을 반복해도 공이 헛도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자네 수작인가?"

에드워드는 질끈 눈 감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 뜨자 불투명한 인상으로 돌아갔다. 접힌 종이를 펼치는 것 같았다.

"아니요. 물건을 너무 막 다루신 것 아닙니까?"

"염병할."

나는 욕설을 뱉으며, 권총 약실을 열었다. 지난 다년간 혹사한 탓인지, 헐거워진 경첩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 모양이었다.

"불운하다고 생각합니까? 기회를 놓쳤다고요?"

에드워드는 한 걸음 다가왔다.

"튜더 회장 때는 아주 쉬웠겠죠. 그녀는 노련했지만, 어째선지 인간에 구애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 허무하게 죽은 겁니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그림자는 점점 불어났다. 심야와 같았다. 밤의 어둠이란 것도 결국에는 지구의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던가.

"당신도 언젠가 이해할 겁니다. 이름을 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인체의 투쟁으로 절 막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무 준비 없이 마주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물며 가진 거라곤 망가진 권총과 지팡이뿐일 때는 더더욱이 그랬다.

"리들과 뉴먼은 도시를 떠났군요."

"그래, 지금은 나도 모르는 곳에 있지."

나는 바로 답했다.

"쫓아봐야 의미 없을 거다."

"말뜻을 곡해하시는군요."

"충고는 고맙지만, 내 판단은 정확하네. 너 같은 살인자를 대할 때는 특히나 예리해지지."

"당신이 내게 살인을 논합니까? 염치도 없습니다."

에드워드는 조소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우리 날이 아닙니다. 당신께는 좋은 일이죠. 이번에는 관에 누운 시체보다 나은 배역이 있습니다."

"나더러 네 종노릇을 하라고?"

나는 에드워드의 표정을 읽으려고 애썼다. 쉽지 않았다. 그에게는 얼굴이 없는 탓이다.

"위험한 것 좋아하지 않습니까? 철의 녹을 벗겨 내는 것처럼, 생명을 깎아내면 쌓인 죄가 씻어지기라도 하는 양."

"네놈의 간교함에 속아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간교함? 당신은 도덕을 대변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에드워드는 말했다.

"이전 생에는 누가 배신자였나? 누가 아서 프랑크를 살해했나?"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무슨 뜻이지?"

"가라, 미카엘의 방위로 가라. 그곳에서 시성하라."

에드워드의 속눈썹 끝에 걸린 물방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끝이었다.

골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칙칙한 회색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산 쓴 청년도, 불길한 그림자도 더는 없었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며, 후두두 빗물 떨어지는 소리말 곤 들리는 게 없었다. 나는 벽면에 기대 한쪽 장화를 벗어서 물을 빼냈다. 눈이 없는 원생생물이 발치로 쏟아졌다.

성당에는 호프먼 신부가 부재중이었다.

안에 들어 가 잠시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도중에 신도 몇몇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날 발견하고는 도로 나갔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거리를 봤다. 신학에 뛰어난 소양을 지닌 아서라면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불어난 강물 때문에 길이 막혀서 런던 시내를 벗어나는 건 어려워 보였다.

물론 저것은 내게만 보였지만, 저 물에 가라앉아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결국, 나는 귀가했다. 내일은 비가 그치길 바랐지만, 그럴 리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적어도 호프먼 신부에게는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비가 오면 어떻게 될까. 지금도 하수구를 역류해서 발목까지 차오른 수위가 단숨에 어디까지 높아지게 될까. 잠긴 부분이 잠기지 않은 부분보다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내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게 아닐까.

그날 밤에도 심해의 꿈을 꿨다.

이는 해저의 지식이다. 익사자가 말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들은 깊게 가라앉아, 해저의 비밀을 엿본 대가로 평생 금언하게 되었다. 한때 우리 조상들에겐 공공연했지만, 이제는 해수로 호흡할 수 없는 인류이기에 알 수 없게 된 진실이었다.

운 좋게도 나는 그 일부를 죽지 않고 알았다.

생자의 몸으로 사자의 지식을 익힌 것이다. 이는 명백한 금단이었고, 필연적인 대가가 따랐다. 새벽 비 내린 다음 날,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물안개 낀 날이면 물가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분명 익사자는 아니다. 그들은 말하지 못하니까.

그건 심해의 목소리다.

철썩, 철썩.

...파도소리가 난다. 갯벌에는 오탁한 진흙이 들끓었다.

나는 행성의 침몰을 목도하고 있었다. 차마 섬이라 부를 수도 없는 좁은 갯벌만이 마지막 뭍이었다. 거기 주저앉아 땅바닥으로 가라앉으며 끝없는 망망대해를 관망했다.

저 바다처럼 하늘도 검게 물들어서 수평선은 모호했다. 얕은 대기층을 뚫고 머나먼 우주에서 내리쬐는 자외선의 희미한 자색 빛무리만이 유일한 공간의 지표였다.

심해 깊은 곳에서 산소 없는 물살이 칠 때마다 앉을 공간은 서서히 줄었다. 시간조차 무상한 공간이다. 하나, 무존재와 영원의 무엇이 그리 다를까. 결국에는 모든 존재가 상실한다면, 시간 따위는 가령 하루가 되었건, 수년에서 수 초에 육박한다 할지언정, 그 자체만으로 허무하고, 또 무한한 것이다!

이 순간, 소멸의 경계에 놓인 나와 우주, 그리고 영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산 것은 반드시 죽기 마련이고, 우리는 죽음에 둘러싸여 살기에 어쨌거나 행성은 가라앉게 되었다. 필경 나는 이후의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가련한 영혼은 어찌 될까. 차가운 외우주 어둠 속에서 헤매는 행성에서, 수 킬로미터나 되는 얼음 아래 수중에 갇혀 시간마저 얼어붙는 종말까지 우주를 떠돌까, 아니면 그보다 간단하고 정적인 존재의 소멸을 겪게 될까.

무엇도 한없이 두려웠다. 이 순간, 나는 저들에게 공감했다.

별조차 꺼진 우주에는 나 이외에도 산 것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저들더러 살았다고 하기엔 그게 꼭 생명을 향한 모욕처럼 역겹게 들렸다. 차라리 바다에 버려진 마네킹조차 저들보다 생기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저들조차 측은하게 여겼다.

그들 처지라고 나보다 나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 묶인 나처럼 저들 역시 우주의 고아였다. 시간의 끝이 다가온다. 그러기에 차분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가 오면, 그때가 오면... 아아, 데이곤! 데이곤!

썩은 짠내가 코밑까지 엄습하여 질식하게 되자, 나는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었다. 망망대해의 조난자가 폐에 들어찬 물을 뱉어내듯이, 입에서는 습기 찬 단어가 연거푸 흘렀다.

"철썩! ...철썩!"

잠에서 깨었을 때, 몸에는 해초가 감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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