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청람
하늘에는, 물 번진 수채화처럼, 층층이 덧댄 구름이 경계 없이 흘렀다.
푸른 기류를 따라 솜털이 흰 궤적을 그렸다. 메마른 하늘에선 비 한 방울 내릴 기미도 없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아득해졌다.
구름 높이를 잴 때는 해발이라는데, 지상에선 고작 버킹엄과 빅 벤 사이 거리에 하늘과 바다가 있는 셈이었다.
나는 도무지 지상과 하늘의 단위가 같다 여길 수 없었다. 저기 구름은 아련해서 정말 거기 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정말 그리 가깝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거리의 노간주나무 챙이 바닥에 붙을 듯이 했고, 구름 틈새로는 희고 차가운 햇살이 쏟아져, 창가에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처음에는 비가 그친 줄 알았는데, 손을 뻗어보면 잔비가 손바닥에 쏟아졌다. 잘 보니, 서쪽 하늘은 쾌청한데, 동쪽 하늘은 먹구름이 덕지덕지 끼였다.
나로서는 썩어가는 해초 따위보단 이쪽이 신경쓰였다.
하지만, 마리는 달리 생각하는 듯했다.
묵묵히 해초를 치우는 그녀 뒷모습에선 숨겨지지 않는 초조감이 보였다. 내게 아무런 기억도 없다는 대목을 듣고는 줄곧 그랬다.
그녀의 긴장이 전해졌는지,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아이들도 덩달아 겁을 집어먹었다. 덕분에 집안 분위기는 아침부터 말할 지경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내게는 사람 달래는 재주가 없다.
하지만 오늘처럼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나는 불안한 아이들에게 위로 한 마디 없이 집에서 내쫓고, 마리에게는 방에 들어오지 말라며 엄포를 놓고는 방 안에 틀어박혔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이유가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앰플에는, 붉은 빛깔이 비치는 액체가 들어 있었다. 커튼을 닫고, 등불도 켜지 않아 반사광은 아니었다.
나는 따로 챙겨둔 해초 진흙에 손가락을 담갔다가, 앰플 표면에 갖다댔다. 그러자 빛은 더욱 화사해져, 선혈처럼 붉은색을 띄었다.
"아름답네요."
방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셜리 마리!"
놀라서 돌아보니, 어느새 열린 문 너머로 그녀가 있었다. 명확한 거부 의사를 담은 호명에도 마리는 거침 없었다.
"내가 들어오지 말라 했잖나, 아이들은?"
"주인님께서 내보내셨죠."
마리는 성큼 내 곁에 다가왔다.
"뭔가 숨기시는 게 있으세요."
"그렇지 않아."
나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피차 거짓말인 줄 알았기에, 별 소용은 없었다. 나는 앰플을 감추려 했지만, 마리는 곧장 흥미를 보였다.
"그건 뭔가요?"
"뭐처럼 보이나?"
"반짝이는 액체에 대해선 들어본 적 없어요."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
"유리 공예품 같은 건가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었기에, 나는 눈을 끔벅거렸다. 다시 보면, 보석처럼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허나, 사연을 아는 내겐 그저 불길할 뿐이었다. 이건 핏물이었다. 누군가 죽으며 흘린 핏물이 수년째 고여 있는 것이었다.
"마리아선."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했다.
"작명자는 비평형인광 물질이라 했지만, 나는 그렇게 부르네. 본래 무색무취한 투명체지. 다만, 어떤 조건 하에서만 이런 식으로 빛나게 되네."
내가 손아귀로 앰플을 덮자, 손 틈새로 빛이 점차 옅어졌다.
"어떤 조건이란, 피에르선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에 노출될 때를 말하네."
마리는 곤란한 듯이 침묵했다.
"피에르선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광선이 아니야. 아주 제한적인 상황에만 검출되지. 주로... 영적이고, 신화적인, 그런 조건 속에서 말이네."
"마법이요?"
"그래, 그거."
나는 굳이 따라 말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해악이야. 빛은 인간의 몸과 정신에 영구적인 장애를 일으키지. 피에르선에 닿으면 그때부턴 되돌릴 수 없네."
내가 말한 충격적인 내용에도, 마리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물론, 그녀는 표정을 짓지 못하는 몸이었다. 잠자코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라고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쫓아내셨군요."
"하나 정정하자면, 자네도 쫓아냈지."
"하지만, 제게 해초를 치우게 하셨잖아요."
"이 사실을 더 빨리 알았으면, 그것도 못하게 시켰을 거야."
"그러면, 주인님은요?"
"내 이름이 거기서 왜 나오나?"
"왜 나오면 안 돼요?"
쉽게 답하려던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감당할 수 있으니까."
"저도 그래요."
"아니, 자네는 그냥 착각하는 거야."
나는 마리에게 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뭘 잃을지 상상해본 적 있나? 사물의 가치를 따질 줄은 알고? 눈금이 맞지 않는 저울과 같지. 처음부터 기울어 있어. 자네를 탓하는 건 아니네. 젊음이란 그런 거니까. 하지만 젊을 때는 항상 뭐든지 더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낙관하는 거야.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나는 아니지. 이런 게 연륜이고, 자네에게는 없는 거야. 알았으면 나가서 볼일이나 보게."
나는 일장연설을 쏟아내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럼에도, 마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지금 내 말 못 들었나?"
"여길 치우는 것도 제 일이에요." "허락한 적 없네."
"지금까지 제가 청소했잖아요." "멋대로 그러던 걸, 내가 방조했던 거지." "그러면." "오늘부터 아니야. 유치하게 굴지 말게."
"주인님이야 말로요!"
잠시 후, 마리는 달래듯이 속삭였다.
"저는 괜찮을지도 몰라요. 봐요, 평범한 사람이랑 다르잖아요."
"이게 모른다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니까!"
갑작스런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시선을 낮췄다. 귓가에는 거친 숨소리와, 삐걱대는 관절 이음부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 그때까지 방에 아무도 들여 보내지 말게. 자네도, 가급적 멀리 떨어져 있고."
"어디 가시게요?"
마리는 따지듯이 물으면서도 행거에서 코트를 가져다줬다.
"밤중에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울 거에요."
"장화를 신으면 돼."
나는 옷에 팔을 찔러 넣으며 답했다. 현관에 나올 때도 마리는 내 뒤를 쫓아왔다.
"제가, 제가 따라가게 해주세요."
주저 앉아서 신발을 신으려던 나는 손을 멈췄다.
농담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야 어떤 괴팍한 늙은이와 달리, 마리는 말을 쉽게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대답 없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도와드리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 잘할 수는 없어."
여전히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마리가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부축해줬다.
나는 마저 말했다.
"이건 진담이야."
"저도 그래요."
전혀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더는 언쟁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문을 열었다.
"돌아오면 다시 얘기하지."
밖으로 나오자, 얼음장처럼 찬 공기가 피부를 때렸다. 잿빛 하늘에선 구슬비가 뚝뚝 내리고 있었다.
체온이 뚝 떨어지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좌우를 두어 차례 둘러보고는, 힘차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길바닥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기껏 닦아둔 장화에는 진흙이 질퍽하게 들러붙었다. 비조차 개운하지 않게 오는 도시다. 런던 날씨가 이런 탓인데, 마리는 언제나 내가 신발을 막 다룬다며 불평했다.
성당은 멀리 있지 않았다.
건물이 보이는 곳에서부터 불안감이 스멀스멀 엄습했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앞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뿐이라면, 흔한 안식일의 풍경일 테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나는 인파 중 일부를 알아봤다. 사람 얼굴이라면 닥치는 대로 외우는 습관이 없었더라도 눈에 익었을 열성적인 신도들이었다.
어쩌면, 그들도 날 알아봤을지 몰랐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더 멀리서도 들렸던 음성이 부자연스럽게 낮아져다. 그들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며 쉬쉬했다.
"잠시, 실례합니다."
나는 그들을 지나치려 했지만, 아무도 선뜻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뒤로 물러나야 했다. 내가 인상쓰며 따지려던 참이었다.
한 청년이 마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무슨 뜻인가?"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이번에도 답은 시원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동공이 분주하게 서로 부딪혔고, 입술은 건조하게 쩍쩍 갈라졌다.
노골적인 배타성의 발현이었다.
특히나, 나는 직업상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봤다. 경험상 이런 경우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게."
뭔가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호프먼 신부님께서 실종되셨습니다."
나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연인즉슨 이랬다.
전날, 내가 방문했을 무렵부터, 신부는 부재중이었다는 것이다. 이걸로 벌써 이틀째라 했다.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청년은 말했다.
"신부님께선 어디 멀리 가실 때면, 언제나 심부름꾼을 하나 붙여서 언제까지 오겠노라 일러두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딜, 얼마만큼 다녀오는지 따위의 단서를 일절 남겨두지 않았다고 했다. 의아한 일이었다.
비록 짧은 인연이었지만, 나도 신도들이 느끼는 우려를 이해했다.
무엇보다 밤새 성당 문을 열어두는 데도 고매한 사명감마저 풍기던 그였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실종되는 것은, 내가 품은 인상과도 다른 것이었다.
"평소 연고지 등, 들를 만한 곳도 없나?"
나는 애써 무관심한 척 물었다.
저들이 품은 경계심은 보통 것이 아니었고, 이미 청년을 비롯한 일부는 이것저것 캐묻는 날 꺼리는 눈치였다.
"어쩌면 동쪽, 동쪽이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들어본 중에 가장 막연한 방향 지시인데."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신부님께서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동쪽으로 가야 한다고요. 아니, 아닐 겁니다. 이번 일과는 상관없겠죠."
정작 말하는 청년 그조차 자신이 없어 보였다.
그게 어떤 신학적 비유인지, 문자 그대로의 뜻인지 몰라도, 여기서만 런던은 서쪽보다 동쪽으로 넓었다.
"탑이야."
그때, 한 노인이 갑작스레 끼어들었다.
"탑?"
"아뇨, 죄송합니다. 우리끼리 하던 얘기입니다."
청년은 수습하려는 듯이 말을 흐렸다. 아무래도 어색했기에 더 묻고 싶었지만, 그래도 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뜻밖에도 상황을 진전시킨 것은 노인이었다.
그는 노골적인 취급이 언짢았는지, 발끈하는 것처럼 일부러 말을 이어나갔다.
"런던에서 탑이라면, 런던 탑 말고 어디겠나."
"하지만, 왜 런던 탑입니까?"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말을 받았다. 결국, 청년은 마지못해 뒤로 물러섰다.
"신부님께선 거기 교도 신부셨지. 줄곧 미련이 남으셨던 게야. 그리고, 결국, 변을 당하신 거지."
처음 듣는 얘기였다.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알면 알수록 특이한 이력을 지닌 신부였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노인의 주장은 무리에서 주류는 아닌 듯싶었다.
사람들은 당장에라도 노인이 입을 닫아줬으면 하는 분위기였고, 그와 합을 맞추는 내게도 눈치를 보냈다. 하지만 흘려 듣기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나는 눈치 없는 척하며 물었다.
"교도 신부입니까?"
"그래, 옛날에는 탑이 감옥이었거든. 아마 자네도 알 테지만."
"런던에서 나고 자랐다면 모를 리가 없죠."
"어느 시대나 똑같군. 부모들은 탑으로 애들을 겁주고, 그리고, 무수한 괴담... 정작 끔찍한 일이 터지고는, 다들 불길하게 생각해서 입에 담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엄숙하게 끄덕였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여깄는 놈들은 말로만 걱정한다 하고, 아무도 그곳을 찾아볼 생각은 않아."
노인은 뒤에 있는 무리를 찌릿 노려봤다. 결국, 나와 대화하던 청년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만 하세요. 런던 탑이 폐쇄된 건, 벌써 2년 전입니다. 볼일이 있으셨다면 그전에 방문하셨겠죠. 게다가, 그곳은 출입금지 아닙니까? 신부님께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밤에 몰래 방문할 만한 장소가 아닙니다."
그들의 언쟁이나 듣고 있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면 누군가 가서 확인해 보면 되는 일 아닙니까?"
내가 앞으로 나서자, 노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봤다.
"자네가 하겠다고?"
그는 다소 절제되면서도, 한없이 깊은 호기심을 담아서 내 다리와 지팡이를 번갈아 힐끗거렸다.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수십 년간 나는 이런 시선에 퍽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견뎌내는 법도 잘 알았다.
"오늘 밤까지 아무도 돌아오지 않거든, 그때는 직접 오지 말고, 소방대라도 보내시죠."
"그렇게 위험한 일이라고 보나?"
"반대입니다. 돌아오지 못한다면 위험한 일이겠죠."
나는 뻔뻔하게 답했다.
"이건 나쁜 의도 없이 묻는 건데, 자네가 그런 일의 적격이라 보나?"
노인은 남을 배려하는 게 어색한 투로 물었다.
"제 다리가 어떤지는 저도 압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누군가는 해야 하고요."
"뭐...."
그는 어물쩍 말을 흘렸다.
"저는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합니다."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로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져서, 빨리 자리를 떠나려던 참이었다.
문득 떠오른 질문에, 나는 혹여나 하는 심정으로 고개 돌렸다. 본래는 신부에게 물으려 했던 질문이었다.
"그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성 미카엘의 방위가 어딥니까?"
그러자 그들은 짜기라도 한 양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쳐다봤다. 나는 무슨 못할 말이라도 했나, 몸에 긴장이 들어갔다.
앞으로 나선 건 처음 말하던 청년이었다.
그는 지금껏 대화한 자신이 마저 답해야 한다는 소소한 사명감을 품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러나?"
"아니요, 워낙 절묘한 질문이라, 정말 모르고 물으셨습니까?"
"무슨 뜻이지?"
청년은 말했다.
"동쪽, 성 미카엘의 방위는 동쪽입니다."
(끝)
템스 강은 동쪽으로 흘렀다.
나는 그 옆의 길을 걸었다. 한때는 유유자적하게 이 길을 따라 걷기를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2년 전부터는, 저 구정물을 볼 때마다 꺼림칙한 마음이 들어 그러지 않았다.
그런 만큼, 내가 굳이 여기를 걷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세인트 주드 교구에서 런던 탑까지 더 빠른 길이야 있겠지만, 나더러 탑까지 가라면, 특히나 어두운 밤일수록 이렇게 강을 따라갔을 터였다.
가스등처럼 희미한 불빛을 쫓기에는, 밤이 어두운 도시 아니던가.
반면, 강물이 굽이치는 둑마다 세찬 급류를 만들어 부딪히는 소음이란 어느 누구의 길 안내보다 뚜렷한 것이었다.
"어잇, 어잇!"
강변에서 구령 소리가 들려 내려다보니, 목수 둘이서 밤중에 부서진 선착장을 고치고 있었다. 근래에는 큰비가 오고 나면 흔히 보이는 풍경이었다.
그들 아래로는 높아질 대로 높아진 수위가 당장에라도 범람할 듯이 콸콸 흘렀다. 꼭 주둥이를 위로 쭉 뺀 육식 동물 같았다.
두 목수는 강둑에 걸어둔 굵은 밧줄 하나로 몸을 지탱하며 위험천만한 묘기처럼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저기 삼켜진다면 밧줄이 아무리 굵다 한들 무슨 소용 있을까.
나는 불온한 상상을 관뒀다.
신부가 강에 빠졌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었고, 설령 그렇다 해도 수색을 관둘 변명까지는 못 되었다.
잡생각이 많은 탓이었는지, 나는 거리 풍경이 바뀌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를 일깨운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비였다.
빗줄기는 점점 굵고, 촘촘해졌다.
내 착각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우의 입은 사람 하나 없던 거리였는데, 어느샌가 사방에서 검은 우산이 펴져 있었다.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통금, 통금이요!"
분명 기껏해야 소나기나 내리나 싶었는데, 거리에는 무슨 폭우라도 내린 다음처럼 하수구에서 구정물이 역류하고 있었다.
악취도 악취였지만, 고도가 낮은 길목은 전부 막혀서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 길목마다 종지기 하나씩 코를 막은 채 통행을 막고 있었다.
그 탓인지 길폭은 점점 좁아졌다.
나는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며 앞으로 걸었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기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꿈이라도 꾸는 듯하군."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갈수록 비가 더 많이 오잖아. 더 어두워지고."
막히지 않은 골목도 몇 있었지만, 그쪽으론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랬다. 지역 주민 사이에선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길이었다.
여기서야 아무도 없어 보이지만, 실은 저곳에는 청년들이 도사렸다. 꼭 먹잇감을 기다리는 거미처럼,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거미처럼 천성이 게으른 생물도 없었다.
어부로 치면, 망만 펼쳐두고 고기가 잡히길 기다리는 셈이었다. 내가 낚시는 잘 몰라도 뭐든 낚으려면 미끼를 걸고, 챔질하기도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끈질김만은 그들의 미덕이다. 날씨의 변덕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얼어 죽는 순간까지 제 둥지에서 멀어지질 않았다. 그러기에 종종 거꾸로 매달려 얼어 죽은 거미 따위를 보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떤 밤, 그런 끈기가 보답 받았는지도... 어젯밤은 비가 왔으니까, 한껏 시야가 좁아진 신부가 부주의하게 골목에 발을 들이는 순간, 휙! 밧줄이 사각에서 목을 낚아챘을지도! 런던에서는 흔한 죽음이라 하지 않던가.
나는 재차 고개를 털었다.
비가 와서 그렇다. 본래는 먼지 구덩이 속에 덮여 있어야 할 옛 기억을 물로 씻어내는 탓이었다. 나는 원망 섞인 눈으로 하늘을 노려봤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했다.
런던 하늘이 둘로 갈라져 있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가운데 깊은 절벽처럼 파인 균열을 중심으로, 하늘은 완전히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었다. 서쪽 하늘에선 눈부시게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었고, 동쪽 하늘에는 전보다 두터워진 먹구름 아래로 비바람이 불었다.
나는 여전히 악몽을 꾸는가. 내 피에서 흐른 저주가 이 도시를 기어코 집어삼킬 셈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런던이 진정 오늘 망한단 말인가?"
동쪽 하늘에서, 나는 가장 깊고 어두운 구름이 한 점으로 모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방향은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해서, 나는 어떤 배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필 어째서 저곳이란 말인가.
"런던 탑."
나는 고개를 털고, 힘겹게 앞으로 걸었다. 밑창에 진흙이 달라붙어서 걷기조차 버거웠지만, 가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