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런던 탑
나도 런던 탑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다.
실제로 어떤 해를 입은 건 아니었지만, 내 딴에도 한창 조사하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아주 유명한 사건이었고, 내게 사적인 의뢰가 수차례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1896년 초입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으로, 나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로 정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을 때는 늘 그렇지만, 맹세컨대 나는 결코 무성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손에 닿는 수단이라면 뭐든지 동원했다. 그렇지만, 끝내 나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사건은 모든 면에서 완전히 종결되어 있었던 탓이다.
정부 각처에서는 관련 문서를 전부 파기했고, 당시 인쇄된 런던 지역 신문에는 예외 없이 큼직한 먹칠이 칠해져 있었다. 심지어, 런던 탑에 당시 수용되었던 죄수, 근무 중이던 병사와 간수 명단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조사한 것은 똑똑히 기억했다. 런던 탑 사건으로 죄수들을 태우고 떠난 세 척의 범선 이력이었다. 그 결과 알아낸 것은, 그들이 다신 영국으로 귀항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조사는 여기서 종결됐다.
내가 어떤 결론을 도출하기 전에, 런던 대화재라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고, 가뜩이나 위기감을 느끼고 물러날 계기를 찾던 내가 완전히 발을 빼면서 흐지부지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단서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각 정부 기관에 그토록 깊게 침투한 기관이 무엇인지, 또 그들이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요컨대 그림자 정부였다.
공동처럼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선명하게 윤곽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게, 바로...."
나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고개 저었다.
"이런 내 꼴을 보게. 미친놈처럼 홀로 중얼거리고 있잖아. 그것도 거리 한복판에서 말이야. 아버지께서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용서하지 않으셨겠지. 아버지 당신께선 언제나 묵묵한 신사였으니까."
우려와 달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가 많이 온 탓일까. 그렇다고 해도 좀 전까지 거리를 가득 채웠던 그 무수한 인파가 다 어디 갔단 말인가. 말 그대로 홀연히 사라졌다. 하나하나 모든 점이 이상했다.
"가장 큰 의문은, 어쩌다 내가 이렇게 혼잣말하는 버릇이 들었는지야."
잠깐 생각하던 나는 곧바로 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이런 일이 있을 때면, 항상 누군가 동행하고 있었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내게는 늘 인복이 있던 셈이야. 항상 내가 뭔가 깨우쳐서 그들에게 설명하고...."
나는 홀로 실소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진가 보군. 하늘을 보면, 오늘이 런던이 망하는 날이 분명한데, 하필이면 이런 날에 날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가만히 서서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면, 신부께선 주님이 세상을 만들 때, 하늘 위에 물을 가뒀다고 말했다. 과연, 균열에서는 폭포수처럼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럼 저 하늘이 더 갈라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된다면, 하늘에 가둬 둔 물이 모두 지상으로 쏟아진다면, 그때도 고작 강이 범람하는 수준에서 그칠까?
무심코 돌아본 수위는 전에 본 적 없이 높이 차 있었다.
거리에도 물은 차올랐다. 이제 나는 인도를 걷는지, 아니면 저도 모르게 도랑물에 발이 빠진 채로 걷는지 헷갈렸다.
축축함을 느낄 발이 하나뿐이란 점이 이때만은 위안이었다.
길가의 모든 배수구에서는 거무튀튀한 구정물이 역류하고 있었다. 온갖 생활 쓰레기가 오물 속에 섞여서 넘실거렸다.
그곳에서, 나는 눈이 마주쳤다.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저토록 역겹고, 무감정한 눈깔이 달리 있을 리 없잖은가. 그것, 어인은 머리 윗단만 내놓고, 숨을 생각조차 없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뭐냐."
나는 말을 뱉었다.
"네놈은 강 밑바닥에서 쓰레기와 함께 뒹굴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추위 속에 얼어붙은 줄 알았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런던 대화재 이래로 저것과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머리로는 저들이 한때 제이콥 섬 주민이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저들에게선 인간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이빨, 오직 이빨 만은 사람의 어금니처럼 뭉툭했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이깟 비 때문에 도시가 물에 잠길 거라 말하려는 거냐?"
서서히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나와 달리 그것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오랜 수중 생활로 언어마저 잊은 건지, 어쩌면 말뿐인 위협을 비웃는 건지도....
하지만, 원래 그랬던가?
어인이란 게, 저렇게 무생물적이었나? 아니,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은 생물 특유의 역겨운 활기로 맥동 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저것은 어떤가. 차라리 내 악몽 속, 검은 바다에서 따라온 존재라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정말 그렇다면?
그 가능성을 떠올리자, 입에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나는 바닥에 토하면서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품에서 꺼낸 권총이 놈을 향했다.
"네놈들 수작대로 될 성이냐, 썩 꺼지지 못해!"
달칵, 하지만 총성은 없었다.
"그건, 꿈이 아니었지, 젠장할!"
나는 욕설을 뱉었다. 반면, 그것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는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권총 총신을 냅다 집어던졌다.
"우습게 보고 자빠졌어!"
허공을 가른 총신은 허무하게 웅덩이에 첨벙 빠졌다. 그래도 위협만은 전해졌는지, 그것은 총과 함께 조용히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나는 그걸로 쫓아냈다고 착각할 만큼 미숙하지 않았다.
저항할 수단 하나 없는 외다리 전직 군인과, 발 끝까지 차오른 물 속 어디라도 제 영역처럼 누비고 다니는 괴물들... 아니나 다를까, 열 걸음도 걷기 전에, 사방에서 습하고 역한 숨결이 느껴졌다.
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저들이 어떤 속셈인지 몰라도, 당장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뒤따라올 뿐이었다. 나는 내몰리듯이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만 향했다.
"제깟 놈들이 뭘 안다고. 지금이나 실컷 신 내라지. 비는 언젠가 그치는 법이야. 그리고, 하늘도 곧 개겠지.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야."
그러면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럴 때 옆에 아무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윌슨처럼 스콧처럼 믿을 수 있는 전우라면 좋겠지만, 그런 사치스런 소리 할 때는 아니야. 브레이버리 놈이 칭얼대는 소리까지 그립군. 브라운이라도 괜찮은데. 하지만, 마리는 안 돼. 그 아이는 너무 어려."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자, 고여 있는 물이 넘쳐 흘렀다. 이래서는 차라리 밖으로 뒤집어놓고 다니는 게 나았다.
"자꾸 아까부터 나약한 생각만 들잖아. 몸이 늙었다고 정신까지 쇠약해질 셈이야? 돌이켜 보면, 대체 내가 언제 남의 도움이 필요했지?"
체온이 낮아진 탓인지, 가만히 두면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힘껏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다릴 자르고도 홀로 하선한 사람이야. 그깟 비가 뭐라고, 그래, 비가 뭐라고!"
이따위로 죽을쏘냐, 어디 이따위로....
끝없이 이어지던 혼잣말이 우뚝 멈췄다.
할 말이 떨어진 탓은 아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걷는 와중에, 내 눈앞에 나타난 웅장하고 쓸쓸한 건축물 때문이었다.
탑은 강 한복판에 띄워져 있었다.
런던 탑을 설명할 때면 빠지지 않는 단어가 몇 있다.
흉흉한, 끔찍한, 공포스러운 따위가 그것이었다. 본래는 왕실 권위를 상징하던 탑은 첫 죄수가 수감된 이래, 소기의 건축 목적과 달리 영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 감옥으로 알려졌다.
그 족적은 역사서 군데군데 남아 있어, 불운한 헨리 6세를 비롯해 무수한 귀족과 왕족이 탑의 찬 돌바닥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도시 한복판에 세워진 감옥 요새는 무지한 시민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했고, 그에 관한 괴담이라면 어디서든 들어볼 수 있었다.
고작 2년 전, 1895년 겨울의 사건 전까지는 말이었다.
하루아침에 수감된 죄수와 간수들이 죽어나가자, 탑은 신속히 폐쇄되었다. 차례차례 당국 조사관이 투입되었고, 나오는 사람이 없는 와중에 시민들의 불안감은 극도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결국, 의회에서는 이번 사건이 원인 불명의 돌림병 유행이라 매듭짓고, 모든 병자를 호주로 추방하라는 지침을 발표했다.
관료적 미로라는 악평마저 일반적인 런던 행정 체계로서는 이례적일 만큼 신속한 조치가 이뤄졌다.
419명의 죄수, 75명의 병사, 6명의 장교, 8명의 조사관은 하룻밤 사이에 완벽하게 퇴거를 마쳤다. 탑에서 런던 항까지 거리는 새벽 내내 통제되었고, 이들은 각기 세 척의 클리퍼 범선, 동방 호, 흰갈매기 호, 신기루 호를 타고 출국했다.
그후, 탑은 빈 채로 방치되었다.
음울한 상상이란 영국인의 천성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비극에 매몰되기보단, 은밀한 미소를 머금으며 아릿한 배덕감을 즐기곤 했다.
그후 버려진 탑에 대해 소문이 여럿 피어났다. 급하게 떠난 탓에 여전히 요새 안에선 버려진 시체가 썩어가고 있을 거란 고전적인 괴담부터, 사실 전염병 따윈 없었을 거란 근거 없는 음모론까지!
공포는 반대로 모험을 불렀다.
겁 없고, 인생을 주체하지 못하는 귀족 청년들부터, 그외에는 달리 어떤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은 고아까지, 여러 탐험대가 시내의 요새에 침입한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 결국에는 누구도 런던 탑의 이름을 부르거나 방문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탑이 지금 여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강 위에... 실제로는 강변의 요새였지만, 범람한 강물에 외벽 하부가 완전히 잠긴 탓에 그렇게 보였다.
탑의 벽면에는 거센 빗줄기로 층층이 물결이 쳐서는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미동 없이 굳건했다.
과연, 이래서야 신부가 들어갔다면, 돌아오지 못한 것도 이해는 되었다. 배라도 띄우지 않고는 드나들지 못할 정도의 침수였다. 그렇다고 쪽배를 타면, 그대로 템스 강의 급류에 빨려 들어가서 바다까지 끌려갈 기세였다.
나오는 방법이 없는 만큼, 내가 들어갈 방법도 요원치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지금 런던을 둘러싼 폭풍우 기류는 분명 탑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이 안에서 뭔가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면, 거기에는 내가 있어야 했다.
"그날도 이랬지."
문득 2년 전 일이 떠올랐다. 제이콥 섬이 가라앉은 그날, 이렇게 빗속에서 서두르던 내게 경관 하나가 말을 걸었고....
"거기, 어르신!"
회상이 어찌나 생생한지, 내 귀에는 무슨 환청까지 들렸다. 아니, 환청이 아니었다. 눈이 번쩍하더니, 나는 환한 빛 속에 갇혔다.
"거기는 위험합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고 보니, 저렇게 거친 템스 강에도 배가 있었다.
런던 소방대에서 운용하는 네 척의 철갑선 말이다. 이쪽으로 탐조등을 비추는 소방대원에게 딱히 악의는 없어 보였다.
"우연치고는 상황이 너무 절묘하군."
요 며칠 새에 이런 생각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런던에는 우연이란 없었다.
어떤 내가 알지 못하는 인력이 나를 탑으로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기회는 기회지. 이봐, 여기야! 조금 태워다 줘!"
"갇히셨습니까? 지금 가겠습니다!"
내 말을 왜곡해서 들은 소방대원들이 배를 가까이 댔다. 나는 부축을 받아서 선상으로 올라왔다.
"기껏 건져줘서 고맙네만, 내친김에 하나만 더 부탁하지."
"가까운 뭍이라면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오히려 저 물 한복판에 가줬으면 하네."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대원을 보며, 손을 뻗어 런던 탑을 가리켰다.
"기왕이면, 저기 성벽 위가 좋겠어."
죽음에는 흔히 차갑다는 형용이 따라붙지만, 장담컨대 죽음 따위가 이만큼 추울 리 없었다.
안전을 이유로 몇 차례나 만류하던 소방대원은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성벽 위에 내려다 주었다.
그들을 배웅하고, 천천히 안뜰로 내려온 나는 하반신부터 물속에 담갔다. 심장이 놀라지 않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성 안뜰도 침수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외벽 측처럼 아예 건너지도 못할 수위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살이 약했다.
하지만, 이 추위는,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각오했다는 말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가슴 높이까지 올라온 강물을 지나는 동안, 나는 수없이 죽음의 문턱을 오갔다.
빗발치는 총탄 세례 속에서도 살아남은 작자가, 강물에 동사라니? 누구 말마따나 아주 형편없는 죽음이 될 뻔했다.
간신히 도착한 본 건물, 화이트 타워 정문은 잠겨 있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아, 아니군. 그저 수압 때문에 문이 걸렸을 뿐이잖아.
나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추위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문이 열리자, 당연하게도 안뜰의 물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또 당연하게도, 서 있는 걸로 한계였던 나는 급류에 휘말리고 말았다.
물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들이닥쳤고, 나는 일어설 수도 없었다.
간신히 진정이 되었을 무렵에는, 가슴 높이까지 차올랐던 물은 고작 무릎 높이쯤에 그쳤고, 나는, 나는 죽을 뻔했다!
몸을 벌벌 떨면서, 간신히 계단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놀라운 생존본능이란... 나는 젖은 코트를, 그리고 허리띠를, 조끼와 셔츠, 바지를 모조리 바닥에 벗어 내동댕이쳤다.
체온이 더 떨어지는 건 막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건 아니었다.
나는 코트 속을 마구 뒤졌다. 담배조차 피우지 않지만, 이런 일이 있을까 챙겨둔 성냥이 있을 터였다. 철제 성냥갑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어디론가 기도하면서 열어보자, 대부분 머리에 물이 묻어서 쓸 수 없었지만, 딱 한 개비 뒤집어 놓은 놈이 아직 건조했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더 좋아야 했다. 성냥 개비로 몸을 녹이려는 시도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비극적인 우화로 부정되지 않았던가.
나는 떠올렸다. 그래, 총알, 총알에는 화약이 있지!
급하게 코트를 뒤지는 몸뚱이를 보고, 머리가 뒤늦게 한마디 했다. 멍청한 놈! 아까 던져버렸잖아!
여기서 또 운이 따랐다.
나는 운 좋게도, 바닥에서 권총을 주웠다. 아, 웨블리 리볼버, 군 보급품이군! 그게 왜 여깄을까? 솔직하게,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안에 총알이 남았는지만 궁금했다.
약실에서 탄약을 쏟아내자, 발포된 적 없는 탄환이 손 위로 떨어졌다. 나는 그 이음부를 단검으로 쑤셔서 균열을 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힘껏 탄약을 잡아 돌렸다.
가죽 장갑이라 해도 젖은 탓인지, 몇 번이나 손이 헛돌아댔다.
"제발, 제발!"
완력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고, 또 여기에 목숨이 달렸다. 온 힘을 쏟자, 눈앞이 핑 돌며 캄캄해졌다. 머리에 피가 쏠린 탓이었다.
그때, 뚝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가락이 부러진 줄 알았다!
하지만 뜯어진 건, 총알의 접합부였다. 닥치는 대로 목제 선반을 쓰러트리고, 그 위에 화약을 쏟아부었다.
"제발, 붙어라!"
만에 하나 젖을세라, 장갑까지 벗어 던지고 불을 붙였다. 흔들리던 불꽃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벌써, 세 번째 행운이군.
나는 불이 꺼지지 않게 조심하며, 그걸 화약 위에 떨어트렸다.
소박한 툭 소리가 나더니, 불길이 선반을 태우며 살아났다.
"후우...."
겨우 몸의 떨림이 점차, 점차 가라앉았다.
온기가 돌아오자, 간신히 여유가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던 실내 정경에 눈이 향했다. 직전의 추태를 되돌아보면, 자연스럽게 여러 의문이 떠올랐다.
우선, 무엇보다, 왜 권총이 이런 데 떨어져 있지?
물론 1895년까지 군대가 머물렀던 탑이니, 총이 남아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지만, 그 장소가 너무나도 별나지 않은가. 계단 한가운데라니.
물 위에는 뭔가 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그 형체가 서서히 뚜렷해졌다.
"이런, 사람이잖아!"
나는 깜짝 놀라 외쳤다.
그렇다고 맨몸으로 저 얼음장 같은 물에 뛰어들 수는 없었기에,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쓸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못 박힌 선반 일부를 잡아당겼다.
가능할까 싶었는데, 의외로 손쉽게 뜯어져 나왔다. 멀리 팔을 뻗어서, 못으로 떠 있는 사람의 옷을 걸어 잡아당겨서 내 쪽까지 끌고 왔다.
짐작한 대로, 그는 죽어 있었다.
차가운 물 때문에 체온은 없었지만, 사망 시각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익사자 특유의 징후가 약한 덕이었다.
"죽은 지는 얼마 안 됐군. 외상은 없고, 저체온증이나 익사인가?"
혹여나 그의 신분을 증명할 물건이 있나 품속을 뒤져보았다.
나는 세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우선 하나, 그는 비를 피해 성에 숨어든 부랑자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둘, 그렇다고 민간인도 아니었다. 손끝에 익숙한 감촉이 닿았다.
권총이었다.
그리고 셋, 그는 군인도 아니었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 실내를 둘러보고,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이게 무슨 개 같은...."
물에는 수십 구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