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194화 (194/232)

§194. 잠자리가 풀잎에서 떨어진 밤

루이스 대주교의 장례는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영국 성공회의 장으로서 오랫동안 존경받았다고는 하나, 근래 본 적 없이 성대한 국장이었기에 쇠락할지언정 여전히 교구의 힘이 건재하다며 과시하는 듯했다.

나는 신자도 아닐뿐더러, 교구 이권을 둘러싼 사달에도 관심 없었지만, 번잡한 도시 한복판을 거스르는 기묘한 장례 행렬에는 피치 못하게 눈이 갔다.

전근대적으로 치장한 교인들이 운구하는 대주교의 관은 열려 있었다. 고인은 거기 누워 생전 그대로의 옷차림으로 잠든 것처럼 실려가고 있었다.

낯에서 다 빠지지 않은 수분이며, 연륜을 헤아릴 법한 짙은 나이테를 보자니 분명 천수를 누린 상판이었다.

"가엾으시지."

"하늘도 무심하시게."

그런데도 대열의 사람들은 울며 안타까워했다. 한 어머니는 제 아이에게 위로처럼 건넨 설명이 야릇하게 들렸다.

"훌륭하신 분이니 분명 천국에 가셨을 거야."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

그런 간단하고, 자명하여, 한 치 의심의 여지도 없는 거짓말에 속지 않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우리는 증명했다.

지킬 박사는 오르페우스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신화처럼 저편에서 사자를 되살리되, 저승의 형체에 한해서는 엄숙주의를 고집한 것이다.

그러지 않았어도 묻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어찌 감히 물을 수 있겠는가, 천국이나 지옥을 보았는지, 베드로의 심사를 받았는지, 노질하는 카론 뱃사공의 나룻배에 탔는지.

지금 인류는 무구한 꿈에서 깨어나고 있다. 수천 년간 사람들 눈을 가려온 거짓말은 이제 거대한 파도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

어찌나 잔인한 시대냐!

일전에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이런 문구를 들었다.

'우리는 구원받은 마지막 세대이다.'

나는 이게 단순한 우연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구도자는 모두 한길로 모인다고도 하지 않던가. 우주의 법칙을 깨닫고 절망한 이가, 세간을 꿰뚫어 보는 투의 말을 남긴 것도 의아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여러 사건으로 깨친 나는 그 말이 참 절묘하다고 느꼈다.

지금 시대에는 불경한 의심으로 그칠 테지만, 다음, 다다음 세대에는 더욱 뚜렷할 것이다. 죽음이란 어떤 과정이 아니라 무자비한 종결이라고. 삶을 평가받는 고결한 심판은 없다고.

하늘에는 천국이 없고, 땅에는 지옥이 없다.

그러면, 그런 시대에는, 값진 죽음이란 무엇일까.

1896년 12월 2일.

약속 장소에 도착한 나는 사설탐정 블랙을 발견하고, 잠깐 멍하니 그 모습을 관망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블랙은 그런 내 모습을 잠깐 수상하게 보더니, 제쪽에서 먼저 다가와서 인사 한마디 없이 대뜸 불평을 늘어놓았다.

"뭘 기대하셨는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그가 무례하다며 탓하지 않길 바란다. 누구라도 런던 하수도를 전전하고 난 직후라면, 아니, 그걸 감안하면 그는 되려 정중한 축에 속했다.

"아무것도?"

"찾으신 게 오물 묻은 속옷이나, 썩은 양배추만 아니라면, 네."

블랙은 딱 잘라 말했다.

"원래 제가 이런 일 하지 않는 거 아시잖습니까."

"칭찬까지 바라는 줄은 몰랐지."

그는 우스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데이곤은, 검은 바다로 돌아갔다.

런던 어디에서도 어인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배수로에서 멀리 들려오던 첨벙거림, 밤마다 침대 맡까지 다가왔다가 멀어지던 뚝뚝거리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하수도 뚜껑을 지날 때마다 뒤늦게 찾아오던 비린내, 뇌 구석을 간지럽히던 그리운 광증... 한때 맑았던 템스 강물에는 다시금 역겨운 악취가 올라왔다.

런던 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그치고 나서, 그날 밤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보편사무국이 체류했던 시절의 흔적이나 핏자국, 익사체, 쓰레기 섬, 강은 모두 포용했다.

대부분 죽은 것이었지만, 하나 정도 산 것도 강으로 흘러갔다.

오베르토, 그는 미친 듯이 탑을 뛰어 내려가서 강에 뛰어들었다. 찬물에서 물장구치며 질주하는 그의 뒷모습은 영락없이 광인의 그것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가 돌아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그는 처음부터 사라지질 않았다. 모든 게 예상보다 빨랐고, 또 급작스러웠다.

그가 돌아온 건, 그날 밤으로부터 불과 이틀 뒤였다. 그는 더는 오베르토라고 자칭하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도 아니었다.

"우리끼리 하는 말입니다만."

블랙이 슬며시 내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못 느끼십니까?"

"뭘?"

나는 이어질 말을 짐작하면서도 일부러 딴청부렸다.

"요즘 도시 말입니다. 원래도 꽤 이상했지만, 최근에는 정도가 심합니다. 그 망할, 천문대 이후로, 점점 말입니다."

그가 암시하는 계몽에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예견된 일이었다.

1895년, 모든 일이 시작되었을 때에 비해, 세상은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누구라도 적잖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모든 괴리와 직면하게 되어 있었다.

하물며 탐정처럼 세간 눈이 닿지 않는 음지를 들춰대는 직군이라면, 오히려 그는 늦은 편이었다. 특유의 넉살 떠는 성격이나, 속물적인 본성으로 득을 본 셈이다.

어쩌면 그 행운이 다한 걸지도.

"어딜 보십니까?"

"아, 그래."

블랙은 내 시선을 쫓듯이 슬쩍 뒤돌아 봤다.

"자네 말마따나 도시는 위험한 상태네. 어쩌면, 예상보다 더 긴박할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상황이 아니야. 자네는 돈벌이니 뭐니 하겠지만, 지금은 농담에라도 입에 올릴 때가 아니지."

누군가 말을 빌리자면, 앎은 해악이다.

나 또한 철저히 은폐하는 쪽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순순하게 털어놓았다. 딱히 그의 안위에 무관심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숨기려는 시도 자체가 의미없기 때문이었다.

"어디에나 귀가 있다고 여기게. 말 그대로, 당장에라도 듣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게."

내가 그렇게 티를 낸 것도 아닌데, 블랙은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몸을 떨어트렸다.

정말 눈치가 빠른 청년이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특히나 그는 남들보다 곱절은 위험한 처지였다.

"유감이지만, 한동안은 작별해야겠습니다."

블랙은 손가락을

"그래?"

"선생님 주변은 너무 위험해서요. 저야 알다시피 선량한 모범 시민 아닙니까."

"퍽이나."

사람 사이에는 인력이 있듯이 척력 또한 있다. 모로 보아도 맞는 점이 없는 우리는 원래부터 서로 밀어내게 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작별에도 미련이나 인사말은 없었다.

"자넨 어쩔 텐가?"

마지막 질문은 순수하게 호기심에서 나왔다.

"런던을 떠나는 게 좋을 거야. 간다면, 미국이 좋겠지."

블랙은 대답하지 않았다.

답을 기다리던 내가 먼저 지쳐서 돌아서려 할 찰나였다. 그는 퇴장하는 극 배우처럼 한 손만 살짝 올리며 허공에 대고 말했다.

"불안한 사람은 지갑 끈도 헐거워지죠."

결국, 나는 기가 차서 너털웃음하고 말았다.

그는 백도, 흑도 아니었지만, 어중간한 흑백 따위보다 짙은 회색이었다. 아마도 나와 같은 것들이 몽땅 죽고도 살아 있을 것이다. 뚜렷한 죽음보다, 흐릿하지 않은 삶... 그게 뭐가 그리 나쁠까!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던 청년이었지만, 이때만은 순수하게 그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하나, 차마 끝까지 말하지 못한 사실이 고리처럼 마음에 걸렸다.

그는 혼자 있지도 않았고, 혼자 떠나지도 않았다. 그는 보지 못하지만, 줄곧 그의 곁에는 올드코트의 불가시한 괴물이 따라붙어 있었다.

이제 학장은 대학 안에만 숨어 있지 않았다.

나는 골목에서 나왔다. 벽 그늘을 지나자, 눈이 따갑도록 햇살이 내리쬐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어제오늘 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런던에선 벌써 일주일째 쾌청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맘때면 늘상 하늘을 가리던 우중충한 안개 구름 따위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저번 폭우가 벌써 꿈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거리 외벽,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칠해진 물때가 그날 일을 회고해 주었다.

일순이라고는 하나, 저 높이까지 물이 차올랐던 것이다. 런던 침수가 목전에 놓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끝내 현실이 되진 않았다.

"이는 모두 사람이 죄짓기 때문이다!"

광장을 지날 무렵, 우렁찬 목소리에 발이 멈췄다.

"본래 런던은 수 일 전에 가라앉게 되었지만, 자애로운 주께서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기에 모든 물을 거두셨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여, 사람 그 자체가 바뀌지 않고서는 언젠가 다른 식으로 런던은 망하리라!"

그는 상자를 쌓아놓고, 시대착오적인 소피스트식 강변을 늘어놓았다.

런던은 냉소적인 도시이다. 열정에는 필히 그에 상응하는 무관심과 조롱을 돌려주는 곳이었다.

"나는 구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불타는 세 쌍의 날개, 태양처럼 찬란한 광륜을 가졌으니 틀림없는 성 미카엘의 잔상이었다! 여기서 나는 요나처럼 경고한다!"

예상과 달리, 인파는 진지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했다.

"그럼 뭘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한 사람이 물었다.

"성금이라도 내야 합니까?"

"대답은 스스로 알 것이다. 그야, 누구라도 아는 것이니."

그는 버럭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얼마 전부터 이런 무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유라면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오베르토였다.

오베르토, 아니, 호프먼 신부는 금방 다시 나타났다.

내가 알던 사실과 달리 보편사무국 또한 건재했다. 하지만 그 형태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개개인의 눈에는 총기와 열광이 가득 차 있었고, 입에서는 제사 때 쓰는 향 냄새가 상시 흘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이제 숨지 않았다. 움직임에는 극적인 활기와 자신이 차 있었기에 거리에서 만나도 곧장 알아볼 수준이었다.

태도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교권 복권을 주장하며, 일거에 준동하여 국회의사당을 점검했다. 총화기로 무장하고, 특수 훈련받은 요원들은 손쉽게 국회 경비를 제압하고, 군대가 동원되기까지 반나절 가량을 항쟁했다.

이 사태로 런던 사회가 받은 충격은 컸다.

과격한 방식에는 비난 여론이 따랐지만, 그 이상으로 동조 세력이 부풀어 올랐다. 호프먼 신부 일당이 주장한 목가적 공동체 사회, 선한 종교 따위의 비현실적인 개념이 도시화에 지친 소외 계층의 향수를 자극한 것이었다.

재판이 유예되는 하룻밤 사이에 지지자들은 법원 앞에서 농성을 벌였고, 끝내 2차 파동을 감당할 수 없던 법원에서 호프먼 신부를 비롯한 40인의 주동자를 방면했다.

풀려난 호프먼은 곧장 광장으로 향해, 물 없는 분수대에 올라서서 즉흥으로 7,000여 단어의 연설을 쏟아냈다.

수천 명의 군중이 시대착오적인 열광에 빠졌고, 군대가 직접 해산 명령을 한 후에야 겨우 사태는 종결되었다.

그날 이후로 도시의 시간은 역행했다.

눈앞에 작은 손이 불쑥 나타났다.

"아저씨, 튤립 받으세요."

아직 볼에 젖살이 안 빠진 아이였다. 고아는 아닌 듯했고, 차림이 멀끔하니 어디서 수행하는 학동 같았다.

나는 아이가 팔에 건 꽃바구니를 보곤, 마지못해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물었다.

"값이 얼마지?"

"괜찮아요. 그냥 받으세요."

그렇게 말하며, 아이는 내 손에 주황 튤립을 쥐여 주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손가락으로 동전을 굴리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얼마라고?"

"어르신께서 무료로 나눠주고 오라 하셨어요. 대신에 심부름 삯을 준다면 마다하지 말고 받으라 하셨고요."

이 대목에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런던에서 이런 자비로운 마음씨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나는 준비했던 동전을 아이의 손에 올렸다.

"감사합니다!"

아이는 쾌활하게 인사하고는 다른 통행객에게 다가갔다. 나는 잠깐 제자리에 서서 일이 돌아가는 걸 지켜봤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신사, 목수, 굴뚝공,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아이에게 용돈을 주며 튤립을 하나씩 받아가는 것 아닌가.

반쯤 차 있던 꽃바구니가 동나기까지는 반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아이의 주머니가 동전으로 무방비하게 부풀었건만, 당사자를 포함해 아무도 거기에는 신경조차 쓰는 기색이 없었다.

너무나도 밝고 아름다워, 도저히 현실의 것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손에 쥔 튤립을 봤다. 갓 꺾어낸 꽃잎에는 아직 이슬처럼 생기가 맺혀 있었다.

빛에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는 법이다.

상자 위에서 열변하던 광인과, 튤립을 나눠주던 학동은 아주 달랐지만, 본질 자체는 같았다.

학장의 눈부신 그림자가 점차 도시에 드리우고 있었다.

천국이 가까웠다.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용무란 게 이런 것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나왔는데 이미 해는 중천에서 꺾여 내려오고 있었다.

그림자는 길어지는데, 발은 계속 갈지자를 그렸다. 이미 완연한 겨울 날씨였는데도 이마에선 줄창 땀물이 흘렀다.

'벅스턴 하우스'

어느 연립 주택 앞에 도착한 나는 1층 명패와 주소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이미 아는 이름이었는데도 괜히 쪽지 꺼내서 확인하고 나서야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나오더니, 날 보고는 "아, 당신이." 같은 말을 하며 길을 텄다.

"들어오세요. 아버님께서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어요."

나는 복도를 걸으며, 습관처럼 관찰하려다가 일부러 관뒀다.

대신 상상을 했다. 주로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벅스턴 노인의 친딸일까, 아니면 시집온 걸까. 큰 가족이 살기에는 좁은 집이지만, 어디서도 아이 기르는 집 같은 티가 나진 않았다. 하기사 그녀 나이 정도면 자식들이 어련히 제 몫을 할 테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지.

복도가 좁은 관계상, 몽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기에요. 아버님, 저번에 연락 오신."

나는 슬쩍 모자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연로한 노인 한 명이 앉아서 물끄러미 날 응시했다. 입은 옷이나, 구두 상태 따위를 확인하는 그런 종류의 시선이 아니라, 오직 내 안면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닮았군, 정말 닮았어."

한편,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내가 그를 보고 든 감정은 의구심이었다. 도저히 그가 아버지뻘의 인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로 이런 초라한 노인이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살았을까 하는 맥락 없는 의심이 피어났다.

내 안에서 아버지는 냉동되어 있었고, 나는 맞은 편의 노인보다는 거울 속에서 많은 공통점을 느낄 수 있었다.

"자네 연락을 받았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네."

노인, 벅스턴 남작은 생전 아버지의 지인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마지막이기도 했다.

흐릿한 아버지의 잔영은 이제 눈앞의 연로한 노인의 명줄에 달려 있었다. 죽었을 때처럼 데롱, 데롱하고, 각오를 굳히게 된 계기도 그 때문이었다.

"허버트, 허버트. 허버트. 다시 불러보는 날이 올 줄은."

그러는 그에게선 반가운 기색보다는, 갑자기 유령을 마주친 듯한 당혹감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인제서 꼭 나를 봐야겠다면 자네 아버지 일이겠지."

"그렇습니다."

벅스턴은 맞은 편 자리를 가리켰다.

"앉게. 앉지 않고서는 뭐든 시작하지 않는 법이야."

나는 힘겹게 자리에 앉았다.

"그 다리."

"아."

최근에는 미리 알거나, 알던 사람들만 만난 탓인지, 정면에서 묻는 게 도리어 신선했다. 나는 조금 늦게 반응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야 그랬겠지."

반면, 노인은 어떻게 왜곡했는지 다 알았다는 듯이 자꾸만 주억거렸다.

"사진이 말이네."

"사진입니까?"

"그래, 사진. 처음 나왔을 때는, 화가들이 모두 새 직업을 알아봐야 한다고 아우성이었지. 버튼을 딸깍 누르면 화가는 몇 시간이나 들일 작업이, 수 초만에 더 정교하게 그려졌으니까. 하지만, 시간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어."

"예에."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달리는 말을 그린다고 쳐도, 화가는 그 순간을 상상해서 그릴 뿐이야. 말을 몇 번이나 더 보고, 저 말이 달린다면 근육이 어떻게 되겠거니 지레짐작해서 되새기지. 하지만, 사진기는 달라. 누군가의 상상으로 왜곡하지 않은 뚜렷한 상을 담아내지. 그게 결정적인 차이야. 하지만, 끝내 화가가 없어지는 일은 없었어. 웬 줄 아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홀로 말을 이어나갔다.

"기억이 사진처럼 정교하지 않기 때문이야. 시간이 갈수록 기억은 흐려지고, 뿌예지고... 더 아름다워지지.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현실을 담아내는 사진 따위는 처음부터 쓸모가 없던 거야."

그는 애수 젖은 얼굴로 말을 흐렸다.

"내게 뭘 듣고 싶을지 몰라도, 이미 옛날이야. 너무 오래되었지. 전부 기억한다고는 못하겠네. 하물며, 허버트, 그 친구 일이라면 더...."

"무슨 뜻입니까?"

"우리 사이서도 자네 아버지는 각별한 사람이었거든."

그러고서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의 애틋한 표정과는 상이한 것이었다.

"그는 참으로 선진적인 인물이었지. 지금에야 일하는 귀족이 드물지 않다지만, 당시에는 자네 아버지처럼 빨리 적응한 사람이 없었어."

나는 눈살을 접었다.

이 도시에서 말은 언제나 여러 뜻을 가졌다.

"벽돌공을 했다지."

"아버지 일에 그렇게 관심 많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럴 때마다 쉽게 발끈하고, 또 말을 가리지 못하는 게 나쁜 천성이었다.

내가 미처 후회하기도 전에, 벅스턴은 호방하게 웃었다. 시들어가는 노인의 숨소리치고는 크고 걸걸한 것이었다.

"생긴 것만 닮은 게 아니라 행동거지까지 판에 박았네."

오히려 그처럼 뻔뻔하게 구니, 도리어 머리에서 열이 식었다.

"제가 말입니까?"

"처음 듣는 얘기인가."

새삼스럽지만, 나는 아버지가 나처럼 화내는 적을 본 기억이 없었다.

첫째 형님에게는 유했고, 둘째 형님과 나는 착실했기에 훈계로도 화낼 일이 없던 집안이었다. 아버지 당신의 분노는 언제나 언짢음의 연장이었다.

보고 들은 적도, 심지어는 알려 한 적조차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묻고자 하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벅스턴은 눈썹을 들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어찌 돌아가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는 눈을 껌뻑였다.

"아버지가 어쩌다 돌아가셨는지도 모른다고?"

"부끄럽게도."

"그래, 그건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야."

나는 눈 돌리지 않았다. 벅스턴은 차차 세월을 거슬렀다.

"실로 의연한 죽음이었네. 사고였다지. 일터에서...."

집에서 나올 무렵, 꽃은 벌써 시들어 끝에서부터 변색하고 있었다.

그날 밤에는 바다 꿈을 꿨다.

작은 어선 끝에 걸터앉아, 주황빛 바다에서 저녁놀 지는 서쪽으로 천천히 흘러만 갔다. 이건 온전하게 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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