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죽은 신에게 묻다
우린 대화 없이 대학 건물에서 계단 몇 개를 오르고 내렸다.
해리스가 요령껏 학생들이 적은 길목만 골라 다닌 것쯤은 진작 눈치챘지만, 그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는 이유만은 알 수 없었다.
비록 말수가 많던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침묵은 다소 의도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장신에서 나오는 큰 보폭으로 앞만 보고 걸었고, 나는 힘겹게 그 뒤를 쫓았다.
사실은 한참 전부터 꽤 뒤처졌지만, 도무지 천천히 가자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발이 느린 편도 아닐 텐데, 일부러 빨리 걷는 게 아닌가?
어쩌면 그는 원래부터 남들보다 빨리 걸었는지도 몰랐다. 달음박질도 빨랐으니까 걷는 속도도 그럴 테지, 달리 내가 느린 것이 아니라.
내 호흡이 살짝 거칠어졌을 쯤에, 해리스는 뒤돌아 보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멈췄다.
"아까 말입니다."
내가 옆에 도착하자, 그는 나지막이 운을 떼었다.
"장군님께서 한 말은...."
우물쭈물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왜 그가 내내 입 다물고 있었는지 깨닫고 실소했다.
"여태 그걸 신경 쓴 건가?"
"뭐...."
"저런 말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만."
"배려는 그 사람이 약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거야. 쓸데없는 배려만큼 얕잡아 보는 것도 없어."
아직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해리스는 기가 죽어서 뒷목을 쓸었다.
"저건 뭐지?"
나는 창밖을 보며 물었다.
이곳도 성 헨리 8세 칼리지처럼 건물 중앙에 넓은 뜰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잔디밭 대신에 농작물과 일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밭입니다. 감자와 완두콩을 재배하죠."
"고작 저만큼이 다인가?"
"보기에는 저렇지만, 여깄는 천 명을 부양하는 밭입니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지만... 나야 모르지.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으니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돌로 지은 용수로도 지나고 있었다.
"허술해 보여도 있을 건 다 있군."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듣자니 아슬아슬하게 완성했다더군요."
헉슬리의 지시로... 나는 콧김을 뿜으며 혼잣말했다.
"공산주의자란 말이지."
"어떻게 들릴지는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장군님은, 공산주의는 훌륭합니다. 누구나 일하고, 똑같이 배급받죠. 이상적인 평등 사회입니다."
내 말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해리스는 필사적으로 옹호했다.
"이상적이라."
분명 헉슬리는 단시간에 대단한 성과를 이룩했다.
그는 고립된 환경에 닥칠 수 있는 문제를 다방면에서 섬세하고 철저하게 대비했고, 극한 속에서 천 명의 학생을 통솔하면서도 카리스마를 잃기는커녕 외부인의 지지마저 얻어냈다.
재능이 있다 해도, 군 경력과 혁명가 시절의 실전 경험 없이는 불가능했을 업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지금 처지를 이상적이라 여길 수 없었다.
외려, 그 반대 아닌가?
"좋은 참고가 되었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지?"
나는 해리스를 어르며 물었다.
"아까부터 오르고 내리고 했지만, 이제는 내려가는 것 같은데. 대학에 지하가 있었던가?"
"우리 칼리지에는 없었죠. 저희가 알기론... 하지만, 여기는."
해리스는 말을 더듬었다. 우리는 다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외부 창도 없고, 아까 보았던 밭보다 낮은 길이었다.
"제 말은, 거기는 지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여기가 고층이죠."
"말이 정리가 안 되잖나. 제대로 말해보게."
"그러니까...."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가까운 곳에 배수관이 지나는 게 분명했다. 해리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근차근 말했다.
"아까 장군님께 들으셨겠지만, 여기는 케이시즘의 원류입니다. 이곳에서 뉴턴과 학장은 보편 사무라는 기지를 걸고 함께 연구했죠. 그리고, 그것은 학장에게는 묻고 싶은 과거였을 겁니다."
나는 바닥을 보고 깨달았다.
"문자 그대로 말이군."
"네, 학장은 이 일대에 시멘트를 부었습니다. 무게 때문에 지반이 침식했고, 수도원 일부가 지하로 가라앉았죠. 십이사도 칼리지는 그 위에 세워졌습니다."
혹여나 싶어 지팡이로 바닥을 긁자, 끝에 지팡이 끝에 흰 석회 찌꺼기가 뭉쳐 굳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어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네."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어떨 때는 끔찍하게 냉정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이렇게 우스운 꼴을 보이기도 해. 이중성이 사람만의 특성이라면, 누구도 그가 인간적인 존재란 걸 부정하지 못할걸."
"그라니, 누구 말입니까?"
"누구겠어, 오' 제럴드 그 양반 말이네."
내 말에 해리스는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양 깜짝 놀랐다.
"뭘 그리 당황하나. 감히 추측하건대 그자는 지반 침식도 예상 못 했을 거야. 이곳은 최근에 파냈나 보지?"
"어, 그 말대로입니다. 우리는 건물 안에서, 지하로 파 내려가며 당시의 유산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직도 시멘트가 안 말랐잖나. 그가 여길 개조한 게 150년 전이었단 사실을 기억해내고 눈치챘지."
해리스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한 눈치였다.
"요즘처럼 쉽게 굳고, 단단해지는 시멘트가 대중화된 건, 고작 100년 전의 일이야. 그전에 쓰던 기경식 시멘트는 표면이 공기와 닿아 있어야만 제대로 굳었지. 이 정도는 교양 아닌가."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시멘트를 무식하게 들입다 부었으니, 아직까지도 안쪽이 마르지 않은 거야. 덕분에 파면 파는 족족 파였을 테고,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렇게 깊이 파낼 수 있었던 거지. 모든 비밀을 묻고 싶었을 학장에겐 퍽 유감스러운 일이로군."
말하면서 나는 점점 자신을 얻었다.
케이시 오' 제럴드는 그 많은 사건이 있음에도, 여전히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기반으로 행동할 뿐이며, 무지한 곳에서는 철저한 무식자였다.
"분명한 건, 학장에게는 건축가의 소양이 없네."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하자, 해리스는 딱 잘라 부정했다.
"보자 하니, 내가 모르는 게 또 있나 보군."
"육혜 시계의 설계도와, 대학 도면 사이에 기하학적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까?"
그는 대뜸 물었다.
"처음에는 우리도 몰랐습니다. 헉슬리 장군님이 도표로 나타내고 나서야 알았죠. 올드코트 대학은 조금 고친 수준이 아니라, 건물 전체가 학장의 역작입니다. 장인의 수공품이나 예술가의 작품처럼 정교하죠."
해리스는 단순히 비유할 셈이었겠지만, 그 말은 내가 생각하던 본질과 일맥상통했다.
"대학은 학장의 역작입니다.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모든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정교한 기계장치... 어떤 의미로는 육혜 시계가 대학의 축소판인 셈이죠."
"그래... 그런데, 그건 이상하지 않나?"
"네?"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지 않나 하는 말이네."
내 생각에, 학장은 건축가보단 예술가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지나칠 정도의 완벽주의를 고집했는데, 꼼꼼하다는 표현보다는 편집적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예전 같았으면 당연하다고 생각했겠지. 학장은 신에 가까운 존재이고, 그의 완벽성은 의아한 게 아니니까."
나는 말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는 신과 견주는 힘을 가지고도, 고작 에드워드 같은 존재 때문에 홈즈가 제 뜰에서 활개치도록 방관하고, 튜더 회장에게는 왕립 학회를 빼앗기고도 수십 년이나 수수방관했지. 나는 그게 물리적인 제약 때문이라 생각했어. 그가 대학밖에 나오지 못하는 게 약점이라고, 하지만 얼마 전, 런던이 침수하기 직전까지 가 보니, 그것 또한 아니었지. 그는, 그저 안뜰에서 나오길 꺼린 거야."
나는 계속 말했다.
"신성을 벗겨 낼 수록, 케이시 오' 제럴드라는 인간이 보여. 그는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이 엄연히 나뉘어 있고, 자신의 분수를 파악하는 데도 망설임이 엿보이지. 그건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어."
"그 말은 꼭...."
해리스는 말을 더듬었다.
"꼭, 학장이 겁먹었다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그래, 그렇게 말하고 있네."
그는 도리어 자기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헛웃음 지었다.
"그건, 웃기네요. 그런 대단한 존재가, 대체 뭘 두려워할까요?"
"글쎄,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학장은 이상주의자이다. 그리고, 그는 결코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자가 두려워할 만한 게 무엇일까.
나는 조금만 더 생각하면 닿을 것 같아서 말없이 숙고했다. 해리스도 그런 내게 말 걸지 않아서, 우리는 계단 한복판에서 말없이 멈춰 섰다.
"아!"
계단 아래에서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진이었다.
"진짜, 너무 늦어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잖아."
"미안, 얘기가 길어져서."
그녀는 우릴 향해 곧장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진이 기다리고 있단 걸 깜빡 잊었습니다."
"아니, 내게 사과할 것은...."
나는 갑자기 의아해서 물었다.
"잠깐, 자네는 진이라고 부르나?"
"네?"
"그리고, 진은 자네를 타미라고 부르고?"
"으, 제발 영감님처럼 굴지 좀 마요."
진은 질색하며 내 말을 끊었다. 아주 무례했다.
"그리고, 지금 학생 연애에 참견할 때가 아니잖아요."
"그 말대로, 지금이 미풍양속을 따질 때가 아닌 걸 다행으로 알게."
"그래서, 어디까지 설명했어?"
그녀는 아예 날 제쳐놓고 해리스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대학 지하에서 발굴하고 있다고."
"고작 그거 설명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교수님, 이제부턴 제가 설명할게요. 그러니까, 보편 사무 얘기는 들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지, 정확하게 남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지하에서 발견한 자료를 종합해서 대략 무엇인지는 알아냈어요. 아마도, 그건 신비를, 악을 막아내는 계획이었을 거에요. 초기 연구 대부분은 여기서 이뤄졌고, 덕분에 연구 부산물도 많이 남아 있죠."
우리는 다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진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사교계였다면 경박하다는 악평이 따랐을 정도로 빠르게 말했다.
"현재 십이사도 칼리지를 지키는 주술도, 그 일환이에요. 처음 올 때 십자가 보셨죠?"
"그래, 그게 뭔지 궁금했지."
"딱히 기독교적인 의미는 없어요. 대신 수학이 있죠. 직각과, 상수로 나타내는 길이. 균일하고 정밀하죠. 미지와는 상극에 있고, 대칭에는 힘이 깃드는 법... 어려운 얘기죠?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무사한 걸 보면 효과가 있어 보이지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십자가가 꽤 많이 쓰러져 있던데."
"학장 짓거리죠. 처음 한두 달 동안에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그 후로는 지붕이 무너지거나, 조각상이 떨어져 나가면서 십자가에 맞고 있어요. 우연일 리는 없고요. 다시 세우고는 있지만, 야외 작업을 하려면 안전한 길만 따라 걸어야만 해요. 탈출은 어림도 없고요. 까다롭고, 위험하니까 하고 싶은 일은 아니죠. 보통은 돌아가면서 해요."
"과연, 그래서."
나는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 진이 왜 그렇게 놀라며 날 데려왔는지 겨우 이해했다.
"웃기죠?"
그녀는 갑자기 말했다.
"뭐가 말이지?"
"그렇잖아요. 함께 연구하던 친우의 무덤을 헤집고, 자신이 부정하던 힘 그 자체가 되어, 이제는 신이 되려고 하죠. 우리는 그의 연구물로 그를 막아내고 있고요."
확실히 그랬다. 학장이 되찾은 보편사무국이 변했던 것처럼, 그는 처음과는 너무나도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광狂이란 변화이다.
이빨이 돋기 위해서는 살을 찢어야만 하듯이, 변화는 언제나 출혈을 수반한다. 무엇이 그를 미치게 했으며, 그는 뭘 잃었는가.
"위대한 배신."
"네?"
"예전에, 아주 비슷한 표현을 들었어. 그게 어디였는지가...."
앞서 가던 진이 발을 멈췄다.
나 역시 짐작하고 있었기에 적당히 간격을 두고 멈춰 섰다. 좀 전부터 아래에서 보이는 불빛 덕에 목적지에 도착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여기에요."
그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공기 중에 석회 가루가 눈에 보일 정도로 떠다녔다. 바닥에는 엎드린 학생들이 전등 없이 걸어둔 기름등 불빛에 의존하며 무른 시멘트를 긁어내고 있었다.
이런 열악한 노동 환경과, 시종 학생들이 보인 무기력한 태도가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학장과 뉴턴의 고향이자, 모든 게 시작한 장소요."
나는 꼭 거대한 개미 굴 안에 들어온 듯했다. 아니면... 뱀의 위장이라든지. 시멘트를 건물 실내 모양으로 파낸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시멘트 속에서 원형을 간직한 가구들이 반쯤 모습을 드러냈고, 서랍 일부는 열려 있었다. 위에서 본 편지 따위가 어디서 났는지 익히 짐작이 갔다.
"우린 그저 광산이라 부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