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런던이 부른다
달그락, 달그락.
마지막 돌무덤을 치우자, 겨우 밖이었다. 나는 상반신만 끄집어낸 후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찬 공기가 혈액을 타고 흘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입 다물었다.
호흡을 멈추자, 다시금 이산화탄소가 차올랐다. 열과 한은 담금질의 법칙이다. 달아오른 것은 식혀야 하고, 고통을 참아낼수록 단단해진다. 하지만 그건 철을 위한 것이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아껴야 했다. 그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늘은 춥다. 밤은 푸른 빛을 띈다.
"... ... ."
나는 호흡하지 않으며, 몸을 바닥에서 끌었다.
돌더미 사이로 불완전한 반신이 드러났다. 끝에는 뭉개진 왼 다리가 보였다. 뼈가 드러나는데도 통증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괴사한 것이었다.
사고 때문은 아니었다. 돌에 깔리기 훨씬 전부터 죽어 있던 부위이다. 탄화된 다리 일부가 석탄처럼 부스러지고 있었다.
"... ... ."
나는 기어서 선로 위에 올랐다.
선로는 열기에 뒤틀리고, 일부 녹아 있었다. 나는 탈선한 기관차에 올랐다. 기껏 예열한 보람도 없이 무쇠 차체는 차게 식어 있었다.
보일러 안에는 타다 남은 찌꺼기와 검댕이 눌어붙어 있었다.
준비한 연료를 소화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불 꺼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벌써 수십 년간 쓰지 않던 것이었다.
거기에는 내 잘못도 적잖이 있었다.
석탄이 필요했다.
심장이 뛰게 하려면, 석탄이 필요했다. 피 흐르는 사륜 바퀴에서 불티를 내려면, 차게 식은 폐에 회백색 증기를 채워 넣으려면, 모세 혈관 구석구석까지 불이 닿게 하려면, 열기를 위해서는 석탄이 필요했다.
런던이 부른다.
런던이 부른다.
런던이 부른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목재는 우리에게 오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책은 빈번하게 도착했다. 열을 내는 방식에 대해 늘 고민하는 내게는 꽤 감사한 일이었다.
조금 더 부차적인 용도로써는 반대에 가까웠다.
어쩜 나는 불을 동경했는지도 몰랐다. 불은 언제나 순간이었고, 책이나 지혜 따위의 것은 항구했다. 그리 보면 나는 충동적인 듯하면서도, 일관적인 삶을 고수해온 셈이다.
그러기에, 앞서 양해를 구한다.
내 얘기는 두서없을지도 모르며, 감정이나 깨달음처럼 모호한 개념을 전하고자 급급할지도 모른다. 또한,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는 적절한 방식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나는 이 이야기를 가장 진부한 서두로 열려 한다.
모든 일은 수상한 방문자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순경모 쓴 노인이었다.
구식 경찰처럼 차려입었지만, 그의 옷이 아닐 거란 사실은 쉽게 알아봤다. 제 것이 아닌 듯이 헐거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나 낡았는지, 옷에서는 염색 물이 다 빠지고, 재봉질이 보일 만큼 해어져 있었다.
"누구십니까?"
나는 경계하며 물었다.
"줄곧, 찾았습니다."
그는 쉰 소리로 말했다. 지독한 구취였다.
새삼스럽지만 나는 사람이 단숨에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쳤다. 노인은 이미 반신이 죽어서 송장내까지 흘렀는데,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나는 세게 문 닫으려는 충동을 억눌렀다. 그리고, 혐오감을 담아 말했다.
"잘못 찾으신 거 같습니다. 여기는 저 혼자 삽니다."
"자, 우주에, 어서 우주로!"
노인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집안에 뭔가 호신구로 쓸 게 있었는지 물색했다.
"신고할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필요 없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고꾸라지듯이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 길로 공중전화에 달려가서 신고했고, 도착한 소방관은 내게 사망자 수속 방식을 알려줬다.
약식 과정이 끝나고, 짧은 조사가 있었다.
"실례지만, 어떤 일을?"
"소각로에서 일합니다. 주로 뭔가를 태우거나 합니다."
"여기 사신지는."
"십 년 가까이 됩니다."
소방관은 이것저것 물었고, 나는 필요한 만큼만 답했다.
"이번 일은 죄송합니다."
나는 소방관이 사과하는 모습은 처음 봤기에 깜짝 놀랐다. 어쩌면, 런던에서 처음인지도 몰랐다.
"어째섭니까?"
"모르셨습니까. 저 사람, 전직 경찰이었습니다. 경찰 폐합 중에 해임되고 머리가 이상해졌죠."
가장일 거라는 짐작과 달리, 그는 진짜였던 모양이었다.
"혹시 그에게 뭔가 들었습니까?"
"네?"
"뭐든지, 아무거나."
나는 답했다.
"아니요, 전혀."
"그렇군요."
소방관은 미련 없이 물러났다.
"뭔가 이상한 징조가 있으면 연락하십시오."
"징조요?"
"뭐든지, 아무거나."
그가 떠나려는 순간에, 나는 갑자기 절박해져서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저 말입니까, 아니면."
나는 고개 저었다.
"피터 윌슨이라는 자였습니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날 보며 답했다.
모든 소동이 끝나고, 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돌아섰다.
마지막에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완전히 의심받고 말았다. 그리고 알다시피, 런던에서는 소방관과 적도, 친구도 되지 말아야 했다.
오늘은 이제 생각하기 싫었다.
나는 라디오를 켜고, 주파를 맞췄다.
...알려드립니다. 프랑스 국회가 점거되며, 프랑스 제9 제국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관례대로 제국 관계자는 모두 단두 처형되었습니다. 새로 건국한 프랑스 제17 공화국에서는 이번 혁명으로 본국과의 전쟁 양상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 천명했습니다....
시시한 소음, 그래도 사람의 목소리다. 소음의 형태를 한 목소리.
나는 기름통 뚜껑을 열고, 호스를 등유 난로에 이었다. 통의 절반 정도 기름이 없어지고 난 뒤에야 호스질을 멈췄다.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로마의 일출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국경을 맞댄 양국 간의 갈등이 격화하는 와중에 버킹엄 궁에서는 2달 만의 침묵을 깨고 짧게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기름이 타는 냄새와 함께 실내에는 아래서부터 열이 차올랐다. 숨 쉬기가 힘들 정도가 좋았다.
...검은 전쟁 승전 10주년을 맞아, 미합중국 정부에서 2주간 문호 개방을 실시했습니다. 이어지는 노래는 미국에서 온 가희가 부릅니다....
나는 창문을 살짝 열었다. 돌아보면 아지랑이가 올라오고, 앞에는 찬 바람이 들어오며 열층을 형성했다. 나는 항상 그 경계가 어딘지 궁금했다.
...우린 다시 만날 거예요....
침소에 올라, 전등을 껐다. 바깥이 밝아서 그다지 어두워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커튼을 치고 돌아왔다.
...어딘지도, 언젠지도 몰라요....
방 안에 겨우 어둠이 찾아왔다. 기껏 일어났던 보람도 없게, 눈을 감자 다시 밝아졌다.
...그래도 어느 밝은 날 우린 다시 만날 거예요....
매번 보는 빛무리였다. 언젠가부터 보이게 되었다. 그건 때때로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했지만 사라지진 않았다.
상사는 이런 증상이 있으면 말하라고 늘 당부했지만, 아직 그에겐 말하지는 않았다. 눈이 멀면, 소각로에서 쫓겨나기 때문이다.
...계속 웃어요....
처음에는 반대여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이제는 눈이 멀도록 불가에 남던 사람들이 이해가 되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소각로에서 일하는 게 좋았다.
소각로에서 가까울수록, 따뜻한 꿈을 꿨다. 짐을 나르는 날에는 언제나 추웠다. 요즘은 한 번씩 소각로를 떠나는 상상도 해봤다. 그런 상상만으로 오한을 느꼈다.
...파란 하늘이 먹구름을 몰아낼 때까지....
나는 천천히 잠으로 떨어졌다.
항상 소각로 꿈을 꿨다. 그게 오늘은 달랐다.
우선, 모양이 이상했다. 그건 소각로라기엔 작고, 또 닫혀 있었다. 이건 아주 큰 차이였다. 나는 한 번도 소각로가 닫힌 모습을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불은 있었다. 조용히 귀 기울이면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는 레버가 걸려 있었다. 손잡이를 만져 보니 뜨거웠다.
나는 조금 다뤄보고는 어떻게 쓰는지 전부 이해했다. 열을 다루는 물건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었다.
문을 열자,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 있었다.
언제나 태우는 점은 같았지만, 태우는 물건이 달랐다. 그건 오로지 타기 위해 존재했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책도 잘 타지만, 그건 달랐다.
잘 타는 것은 본연의 성질이지, 순수한 용도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목재도 같았다. 반면, 내 눈앞에 있는 그것은 단지 타는 것 외에는 어떤 쓰임새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매료되었다.
옆에 놓인 삽을 쥐어서 퍼 넣어 보기도 하고, 난로 안을 헤집어 놓으면서 공간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퍼서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으면 열기가 강해진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삽으로 누르자, 산소가 막힌 탓인지 불길이 확연히 약해졌는데 나는 이 일로 죄책감마저 느꼈다.
레버 또한 환상적이었다.
보일러 문을 여닫을 때마다 열층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했다. 결코 눈에 보이지 않던 열층이 지금에는 내 손으로 움직였다.
나는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눈이 건조하게 메마르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대신에 이 광경을 잊지 않고자 눈이 멀도록 응시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나는 뒤돌아 봤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여자인가 싶었지만, 다시 보니 역시 남자였다. 검은 단발머리와, 그보다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헐거운 프록 코트 안에는 꽃무늬가 들어간 하얀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입을 법한 옷은 아니었다. 꼭 옛날 사람 같은 옷차림이었다. 다갈색 반바지에, 긴 부츠,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이런 데서는 그을음이 묻기에 십상이었다.
그는 페도라를 위로 들며 인사했다. 나는 꾸벅 고개 숙였다.
"여기가 이번 당신의 무덤입니까?"
남자는 사람 같지 않은 소리로 물었다. 차라리 가축이 교배하며 내는 소리가 우연히 사람 목소리와 겹쳤다면 이렇게 들렸을 터였다. 나는 도저히 이런 표현으로밖에 그걸 형용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였습니까?"
"아니요."
"들불이 아니라? 그런 잡다한 불로 뭔가 깨우칠 수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도 제법 오래 살았지만, 아직도 산 채로 묘소를 정하는 것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매번 질리지도 않고 찾더군요. 우직하달지, 우둔하달지."
잠깐 보일러 쪽을 돌아보자, 거기에는 내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삽으로 내 머리를 쪼개두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섬뜩함이 엄습했다. 나는 남자를 돌아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나는 옆으로 뛰어내렸다.
낙하하며 올려다보자, 그는 웃는 얼굴로 날 보며 말했다.
"밤이 끝나고, 우린 곧 다시 만날 겁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우웁!"
토사물이 역류했다. 곧장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도로 들어갔을지도, 나는 토하면서 달렸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힘껏 당겨도 열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어깨로 부딪혀서 창문을 깼다.
"허억, 허억...."
겨우 산소가 들어오고, 나는 고개마저 창밖으로 내밀고 숨 쉬었다.
질식했던 신체에 산소가 돌아왔다. 마비되었던 뇌가 움직이며,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창문이 열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창이 잠겨 있었다.
내가 열어두기를 잊었던가? 아니면, 잠결에 닫았다고? 닫았다고는 해도, 잠금까지 걸 수는 없을 텐데.
세상이 고요했다.
켜고 잤던 게 분명한 라디오는 꺼져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래 생각하지 못했다. 내 안에서 일어난 어떤 변화 때문이었다.
이런 감각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조금 전처럼 내 안에 산소가 적었던 적이 없었다. 대신 거기에는 탄소가 있었다. 숨결이 거칠었다. 아직도 산소가 부족한 탓일까.
나는 직전 꾸었던 꿈을 회상했다.
불안과 고양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건 저산소증이 원인으로 보게 된 환상일까, 아니면 현실과 미래에 관한 내적 시사?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변화를 만들었다.
어쩌면 시시한 일생에서는 결코 깨우치지 못했을 금기이다. 망상, 몽상, 유혹... 무엇이라 부르던 명백한 광기의 시작이다.
그건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를 태운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속옷이 축축했다. 토사물이 묻은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다.
인생 최초의 몽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