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안녕 고래
마일 엔드까지 오는 길에는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다만, 런던 시를 벗어날 때에만 낡은 간판과 함께 있으나 마나 한 철망이 놓여 있었다. 간판에는 '시외에서는 어떤 생활도 보증할 수 없음'이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적화부단에 관해서는 몇 가지 괴담처럼 들은 말이 있었다.
수십 년 전, 정부에서 시행한 '열 단절(Thermsegregation)' 정책에 반발하여 런던 외곽의 마일 엔드 구시가지를 점거하고 무장 투쟁을 해오는 폭력 단체라고 했다.
숫자 관념이 없는 내가 어째선지 그 해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1895년이라 했다. 모든 일은 1895년에 시작했다.
당시에 올드 마일 구시가지는 빈민, 이민자, 그리고 특히 장례업자가 많은 지역이었기에, 처음에는 '올드 마일의 장의사들'이라 불렸다고도 했다.
그 말대로 텅 빈 신시가지를 지나, 구시가지로 들어서자마자 묘지가 나를 반겼다. 살던 고향을 떠나서 제 발로 묘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범한 집 사이에 촘촘히 묘비가 박혀 있는 풍경은 기괴했다. 억센 덩굴처럼 자란 묘지가 거주구까지 침범한 모양새였다. 어떤 사연으로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정말 기이한 점은, 그러고도 집에선 사람의 숨결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무덤과 사는 사람들, 이것도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내에서 종이 울렸다.
종소리에 놀란 까마귀 떼가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검은 깃털은 하늘에 녹아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통행객이 없는 길이었다. 나는 곧장 난관에 부닥쳤다.
뒷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천성이었다. 어떤 일의 인과를 유추하지 못하다 보니, 자연스레 계획을 세우거나 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행동은 충동적이거나 반복적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여기까지만 오면 어떻게든 궁금증이 풀릴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지만 실마리조차 보일 기미가 없었다.
그때였다.
나는 무언가로부터 후두부를 가격당했다. 뭔가 깨닫기도 전에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 ... .
... ...꿈은 꾸지 않았다.
처음 보는 장소였다. 뭔가 힘없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눈만 깜빡이고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나는 묶여 있었다.
발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덜컥 열렸다.
노령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움직여 그녀를 봤다.
낡은 옷을 입은 데다, 그닥 깔끔하지도 않았지만 태도가 워낙 당당했기에 나는 절로 그녀가 여기서 '작업반장' 같은 사람일 거라 짐작했다.
"겁먹지 않네."
"아니요, 무섭습니다."
나는 덧붙였다.
"정말로요."
"그런 점을 두고 말하는 거야. 지금 관찰하는 거니?"
나중에야 알았지만, 내 시선을 지적한 말이었다. 당시에는 알아듣지 못했기에 나는 꾸준히 그녀를 응시했다.
"얼마 전에 내 친구가 죽었어."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갑자기 말했다.
"걔도 너처럼 사람을 뚫어져라 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아무 데나 보는 건 아니야. 꼭 눈을 봤지. 너는 어딜 보고 있니?"
나는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눈초리 주름을 접었다.
"왜 여깄니?"
"몰라요."
"네가 너를 모르면 누가 알아?"
그러고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괜찮아. 너 같은 아이는 많아. 노란 외벽 회사가 도시를 장악하고, 런던은 이상한 곳으로 바뀌었거든."
"머리를 부딪쳐서... 그 뒤로는 기억이 안 납니다."
"뭐? 거기서부터 설명해야 해?"
그녀는 살짝 당황한 말투로 설명했다.
"당연히 우리가 한 일이지. 넌 납치된 거야. 여기는 마일 엔드 구시가지 병원(Mile End Old Town Hospital)이고, 물론 수십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은 그냥 우리 저택이야."
나는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디서도 못살 만큼 가난해졌어? 아니, 그건 아닐 테지. 시내에선 좋건 나쁘건 계급 변동이란 게 없으니까. 범죄라도 저질렀어? 아니면 자살 희망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망설이던 찰나, 나는 생각이 나서 목을 움직였다. 그러자 헐거운 붕대가 풀어지며 화상이 드러났다.
"어머, 불장난이라도 했니?"
"오늘 패딩턴 역에 있었습니다."
내가 한 말이 뭐가 웃긴지, 그녀는 말 그대로 깔깔 웃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감정 표현이 뚜렷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귀여운 복수라도 하려고?"
나는 고개 저었다.
"궁금했습니다."
"학구열이라. 요즘 시대에는 드문 것이네. 뭐가 그렇게 궁금했지?"
"석탄이요."
발음하자 입에서 불꽃이 튀었다.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거 뭐야?"
"몰라요."
여인의 표정이 묘해졌다.
"너는 불이구나."
내가 불이라고? 나는 그 말에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설레는 말이었지만, 선망이 커질수록 허무감도 커졌다.
나는 불이 아니다. 불이 될 수도 없다. 평생 소각로에서 지낸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불이란 뜨거운 것이며 온기조차 타고나지 못한 나와는 다름을, 불이란 무엇이든 포용하며 타오르는 것이며 같은 사람조차 안지 못하는 나와는 상극의 존재임을.
"들어 알기는 했지만, 사람이 있다면 정말 어디서든 불이 피는 법이구나."
심란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혼잣말하며 감탄했다.
"아마 혼란스럽겠지, 그럴 테지. 하지만 잘 찾아왔단다. 여기는 섬에서 유일하게 불이 지펴졌던 장소이니까. 우리도 틀림없이 불이야."
나는 끄덕였다.
"압니다."
"꽤 확신하고 말하는구나."
"오늘 저를 태운 불이니까 압니다."
그녀는 다릴 꼬았다.
"너는 깨어나서 한 번도 여기가 어딘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되었는지도 물어보지 않는구나. 풀어 달라든지, 보내 달라든지,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고 말이야."
"그보다, 석탄이 알고 싶습니다."
여인은 혀를 찼다.
"사람 같지 않게 말하는구나."
낯선 표현이었다.
"남작이 자주 하던 말이야. 사람이 사람다워야 한다고, 그는 그 말처럼 살았지. 모든 충동에 솔직하게, 아주 정열적인 사람이었어."
나는 고개 저었다.
"유령남작, 들어본 적 없어?"
"전혀요."
"하긴, 네 나이대 정도면 모르겠구나. 남작은 적화부단의 창립자야."
여인의 얼굴 반쪽에서는 애수가, 반쪽에서는 고독이 묻어났다. 비슷한 감정 같으면서도 섞이지 않는 게 기이했다.
"오면서 봤겠지만, 여기는 한때 묘지였어. 시내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시체를 매장하려고 살던 사람마저 쫓아냈지. 열 단절이 시작되고 상황이 악화일로를 걸을 때, 이곳에서 불을 피운 게 바로 남작이었어. 관리 위원회는 그를 두려워했지. 그래서 그가 죽자마자 모든 흔적을 말소했어."
무슨 말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파리의 불을 옮겨 붙이려고 했거든. 거의 성공할 뻔했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명을 깨닫고 관뒀지. 나는 반대했지만...."
그녀는 기쁜지 슬픈지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날 봤다. 아마도 주름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전혀 관심이 없구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석탄이 알고 싶어요."
이제는 확실히 웃는 표정이 되었다.
"우리가 왜 적화부단이라 불리는지 알아? 어떤 물건을 훔쳤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걸로 열을 나눠서 사람들을 살렸지."
나는 화부가 뭔지 몰랐다.
"그게 석탄이야."
"석탄!"
"너는, 참 솔직하구나. 나는 좋아해. 하지만, 런던에서는 결코 미덕이 아니지. 런던에서는...."
그녀는 말했다.
"사실 물으려고 한 건 따로 있지만, 말하다 보니 어쩌다 알게 되었네. 패딩턴 역에서 검은 돌을 주웠지? 그건 아주 위험한 물건이란다. 돌 자체는 별로 대단할 게 없지만, 녹색 문자는 별개야. 사람을 뒤틀거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늙었나 봐. 조금 쉬어야겠어. 거칠게 데려와서 미안하지만, 아마 너는 여기 밖에서는 못 살거야. 적임자를 보낼 테니 여기서 일을 배우렴."
그녀가 하는 말은 대부분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처음 내놓은 추측은 장렬히 빗나갔는데, 작업반장이 하는 말은 대부분 해라, 하지 마라, 같은 것이라 무엇보다 알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는 이제 불씨 같은 건 필요 없는데."
정작 묻고 싶었던 석탄에 대해서는 짧은 언급뿐이었고, 더 물을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그런 혼잣말만 남기고 방을 나갔다.
나는 홀로 남겨진 채,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잠시 후, 방 안으로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사람'들'이었다. 키가 큰 남자와, 작은 남자, 그리고 작은 남자보다 작은 여자였다. 작은 남자는 작다고는 하나 그리 작지 않았고, 작은 여자는 보편적인 만큼만 작았다.
그중 작은 남자가 날 보자마자 깜짝 놀라 외쳤다.
"뭐야, 그거. 화상?"
그러고 보니 붕대가 풀어진 채였다. 공기에 닿지 말라 한 게 기억났다. 한 번 의식하고 나니 계속 따끔거렸다.
"저기, 나 기억해?"
"기억할 리가 없지. 뒤에서 바로 후려쳤으니까."
"불가항력이야. 그걸로 원망하지 말자고."
작은 남자와 더 작은 여자는 날 사이에 두고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큰 남자는 묵묵하게 구속을 풀어주었다.
"진짜 말이 없구나."
"버니랑 좋은 친구가 되겠어. ...아니면, 끔찍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관계가 되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두어 번 몸을 휘청거렸다. 오래 포박되어서인지 다리 혈류가 정상이 아닌 탓이었다.
누워만 있을 때는 몰랐지만, 세 사람은 신장 차이 외에도 차이가 많았다. 옷 색깔도, 표정도, 모든 게 런던 시내와 달랐다.
"나는 알리사, 얘는 잭, 네 뒤통수를 후려갈긴 사람이지. 그리고 여기 말 없는 떡대는 버니."
작은 여자는 자신과 작은 남자, 큰 남자 순으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그리고 뭔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내가 가만히 있자 지친 표정으로 손 내밀었다.
"그래, 친하게 지내기 싫겠지. 악수라도 하자."
"나는 악수 못해."
"그래?"
그녀는 뒤돌아서 속삭였다.
"저기, 쟤, 이상하다고는 들었지만, 진짜 상상 이상인데."
"보통 그걸 면전에서 말하나?"
"장담컨대 쟤는 아예 신경 안 쓸걸. 그런 애야. 촉이 왔어."
뒤에서 둘이 다 들리게 속삭이는 동안, 버니라는 큰 남자가 처음으로 입 열었다.
"좀 전에 백작한테 들었겠지만, 너는 여기 살아야 해. 우리에게 따라줘."
나는 그게 싫었다.
"왜?"
"우리랑 만났으니까 그러지."
작은 남자, 잭이 끼어들었다.
"불이 나는데 불씨의 크기는 상관이 없어.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큰불로 번지지. 관리 위원회는 그걸 잘 알아. 그래서 소방대로 상시 감시하고 있는 거야. 네가 여깄는 것도 이미 들켰을걸."
나는 내가 이해한 걸 정리하려 입 열었다.
"그러니까."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관리 위원회는 우리 주적이고, 너는 우리 동료로 찍혔다고. 그게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상관없이 죽을 거야."
숱한 설명 끝에, 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노란 외벽 회사 말이야. 관리 위원회는 최고 운영 회의의 명칭이야, 일단 표면상으로는 그래."
내 표정을 보더니 이번에는 알리사가 끼었다.
"왕실이 버킹엄 궁전으로 후퇴하고, 국회 의사당에서 마지막 의원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사실상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감독하고 있어. 나라에서 보면 우리는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가 같은 거야."
그녀는 계속 말했다.
"뭐, 사실은 다들 살려고 하고 있을 뿐이지만."
"배신자 남작 때문에 말이지."
"잭!"
"사실이 그렇잖아."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그들이 품은 적개심만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째서 적화부단이 그리 터부시 되는지 간신히 이해했다.
"돌아가서 일을 해야 해."
나는 말했다.
"여기서도 일은 많아."
"내 일...."
그게 아니었다. 아무 일이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전하고 싶었지만, 언변이 따르질 않았다.
"처음 오면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시내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한 가지 일에 집착하는 거야?"
"평생 그걸 했으니까, 다른 걸 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거야. 가여운 사람들이지."
그들은 멋대로 말했다. 그게 아닌데.
그 후 별수 없이 나는 그들과 함께 지냈다.
납득되지 않는 점이 여전히 많았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았고 대답도 듣지 못했다. 다만,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만큼은 체념할 정도로 알려주었다.
썩 만족스러운 생활은 아니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했다. 지금에라도 소각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기에는 다가서기만 해도 팔등의 털이 타들고, 살가죽의 수분이 모조리 증발하여 가마에서 구운 도자기처럼 갈라지게 하는 그런 커다란 소각로가 없었다.
때문에 나는 항상 무기력했다. 대부분 사람과 같이 말이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처음 만난 네 사람처럼 특별한 사람은 더 없었다. 주민 대부분 시내에서 보았던 사람들과 다를 게 없었고, 더 무기력하게도 보였다.
시체 취급에는 금방 익숙해졌다.
여기서는 대수로운 일조차 아니었다. 어쩌다 자고 일어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죽어 있고는 했다. 시체는 만져도 화상 입거나 하지 않아서 편했다.
한 번은 잭과 함께 시체를 치우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어.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희망이랄 게 남아 있었거든. 10년 전부터 그마저 잃었지만."
잭은 불평했다.
"파리의 불이 마지막 기회였어. 여기는 이제 잔불이야."
그는 가끔 이런 식으로 남작 욕을 했다.
여기는 모든 게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열이 부족했다.
밤이 되면, 밀폐된 장소에서 작은 난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체온을 나누는 식으로 추위를 견뎠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알리사가 밤중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피하지도 않지만, 다가오지도 않는구나."
그녀는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백작한테 들었어. 석탄을 찾으러 왔다면서."
"알아?"
"너 은근히 열받네."
"석탄은?"
내가 거듭 묻자, 알리사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답했다.
"아, 그래, 그런단 말이지. 나도 백작한테 들었을 뿐이지만, 원래 영국에서는 석탄을 썼다더라고."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그게 남작이 죽고 나서, 어째선지 관리 위원회에서 석탄 사용을 금지했다는 거야. 대신 모든 기기를 기름을 쓰는 걸로 교체하고."
"어리석어."
"제일 이상한 점은, 그러고도 브리스톨에서 매일 대량의 석탄이 런던에 운송된다는 거야. 백작은 그걸 알았고."
그녀는 내 옆에서 뒹굴었다.
"사실, 나는 내가 맞게 하는지 모르겠어. 백작은 대단한 사람이야. 물론 나보다 맞는 판단을 하겠지. 하지만 매번 그렇게 공들여서 석탄을 탈취하는데, 우리는 이렇게 등유 난로 하나에 기대서 벌벌 떨면서 자잖아. 그건, 조금 공정하지 않지 않아?"
알리사는 벌떡 일어나며, 내 위로 상반신을 들이밀었다.
"아, 모르겠다. 다른 애들한텐 이런 말 했다는 거 비밀이야. 어차피 너는 말도 안할 테지만."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저 이대로 현재를 즐기는 게 좋아."
그날 나는 뺨과 목을 크게 뎄고, 알리사는 다시는 밤에 찾아오지 않았다. 체질이 알려져서 좋았던 점으로는 난로 옆에서 자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난로를 껴안고 잤다.
백작이 호출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백작을 방문했다가, 먼저 온 알리사와 잭을 알아보고는 뜻밖이라 생각했다.
둘에서 버니까지 포함해서 셋은 자주 뭉쳐 다닐 뿐더러, 집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명확히 붕 뜬 존재였기에 공통점이 보이지 않았다.
백작은 한참 뜸들이다가 말했다.
"내가 오늘 죽겠구나."
"농담이죠?"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남작이 어떻게 죽었는지 말한 적 없었지."
"살해당했다면서요."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어디서는 말하지 않았지. 왠지 아니?"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침묵.
"알면 안 되기 때문이야. 아는 순간, 언제라도 같은 이유로 죽게 되지. 그래서 말하지 않은 거란다. 그러니까 나도 말하지 않을 거야. 다만, 한 번은 가까스로 모면했으니까 그 사이에 유산 정리를 할까 해서."
그녀는 죽음을 말하는 사람치고는 더없이 평정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던 듯했다.
"어쩌면 너희는 마지막 불이야. 그런 너희에게 전해두고 싶은 게 있다."
"하지만, 버니가 없잖아요."
알리사는 불안한 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꺼졌으니까."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보여줄 게 있어. 따라오렴."
백작은 우릴 지나쳐서 천천히 걸었다. 나이에 비해 언제나 빠르고 당찬 걸음이었는데, 오늘은 확연히 노인태가 났다.
"너흰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연구를 했단다. 태양이 사라진 이유, 밤하늘이 어두운 이유, 바다가 썩은 이유, 노란 외벽 회사의 급격한 부흥... 그리고, 모두 밝혀냈지. 모든 것은 하나의 전제로 성립해."
동행하는 두 사람의 불안감이 느껴졌다. 오히려 죽는다는 백작은 산책하는 사람처럼 사뿐했다.
"지구의 시간은 반복하고 있다."
"어, 그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렴. 예측이 맞는다면, 앞으로 최소 50년 안에 시간이 돌아갈 거야. 그러면 지구는 다시 900년, 1700년, 1800년을 재개하는 거지."
잭은 나처럼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 기억은 남지 않겠지만. 개인의 관점에서는 두 번째 기회처럼 느껴지겠지. 그런데 그게 반복되고 있는 거야. 끊임없이, 끊임없이. 이 우주에서 오직 지구의 시간만이."
백작은 말했다.
"끝내 태양조차 식어 사라지고, 밤하늘에서 별이 꺼지도록 수십억 년, 수백억 년 동안 반복한 거야. 우리는 우주의 시간에서 버려졌다... 그게 우리가 내린 결론이야."
그녀의 담담한 선언에,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나는 전혀 이해하질 못했다.
잠시 후, 우리는 지하실에 도착했다.
병원 설계상 지하에도 넓은 공간이 있을 법한데, 전혀 사용하질 않아서 의아하게 여겼던 적이 있었다.
백작은 본 적 없는 열쇠로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내가 갈망하는 냄새가 흘렀다.
나는 뛰었다.
어두운 실내에는 패딩턴 역 기차에 실린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양의 석탄이 쌓여 있었다.
나는 환희에 비명 질렀다.
"남작이 죽고부터 모은 양이야. 많지는 않지만, 증기 기관차를 움직일 정도는 되지.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우선 본론은 이거야."
그건 어떤 기계장치처럼 보였는데, 절반 정도가 파손되었고 표면의 철판은 거의 타 있었다.
안테나와 비슷한 것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지만, 형체로 보아서는 도저히 그런 용도로 쓰기 어려워 보였다.
"인공위성이야."
"네?"
"사람이 인위적으로 사출하여 지구 궤도를 공전하게 한 인공 천체. 적화부단의 진정한 사명은 이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어떤 인물에게 온전하게 전달하는 거야."
백작은 힘 있게 선언했다.
"우리는 실패했어. 이제 너희에게 맡길게."
타다 만 철판에는 인명이 세 개 적혀 있었다.
피터 윌슨
아멜리 에식스
필레몬 허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