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지구 최초의 꽃이 기다린 풍경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불 붙은 보일러는 천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감동에 벅차올랐다. 열에는 적절한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일하던 소각로는 꺼진 적도 없거니, 다시 점화하는 광경을 본 적도 없었기에 몰랐던 사실이다.
"맞게 하고 있는 거 맞아?"
잭은 줄곧 옆에서 순수한 감동을 방해했다. 그는 촐싹대며 불안한 소리를 거듭했다.
"역시 오래되서 안 움직이는 거 아니야?"
"예열 중이라 그래."
나는 그를 보지 않고 말했다.
"뭐든지 태울 것을 더 가져와 줘. 이런 데서 석탄을 낭비할 수는 없어."
"아, 알았어! 버니, 너도 가자!"
"나도 갈게!"
"아냐, 너는 거기서 불이 꺼지지 않게 봐!"
"그런 일이라면 얘 혼자서도...."
"아, 아무튼!"
잭은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 듣지 않고 뛰쳐나갔다. 버니는 우릴 돌아보며 사과했다.
"미안."
그리고 그를 쫓아 나섰다. 나는 그가 왜 알리사에게 사과했는지 몰랐다.
"그래, 원래 저런 애는 아니야. 쟤도 불안한 거야, 그래서 의심이 늘어나고... 미안해."
알리사는 알리사대로 영문 모를 말을 했다.
나는 피어나는 불에 다가갔다. 보일러 겉면에 올린 양 손바닥을 통해서는 상승하는 온도가 느껴졌다.
"그거 안 뜨거워?"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숨을 쉴 때마다 유독한 일산화탄소가 체내에 스며들었다. 어째서 일산화탄소는 유독한가, 그에 관해서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그걸 알려면 불이 간직한 비밀을 알아야 했다.
나처럼 이산화탄소와 일산화탄소의 법칙, 산소와 물, 탄소가 만드는 절묘한 삼중주에 대해 통달해야 했다. 어느 과학자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만, 불이 직접 내게 속삭여준 비밀이다.
연소에 관해서는 나 만한 전문가가 없었다. 어느 과학자도 불과 대화하여 체득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응용도 할 줄 알았다. 불이란 곧 생명이 순환하는 이치와도 맞닿아 있다고 밝혀낸 것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숨 쉬지만, 호흡이란 참으로 연소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사람은 매 순간 타오르고 있으며, 살기 위해서는 불타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에는 산소가 필요하다. 이산화탄소도, 일산화탄소도 아닌 산소를 연소해야만 한다. 그런 형편이니, 불에는 불만큼 유독한 존재가 있을 수 없었다.
불은 고독해야 한다. 사람은 고독해야 한다. 불이란 불을 죽이는 법이다. 사람은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나는 마침내 일생의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내가 사람과 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불은 불을 죽이고, 사람은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모두 석탄과 불이 일러준 영감이었다.
"저기, 듣고 있어?"
열광과 열락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알리사가 건져냈다.
"뭐라고?"
"조금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그녀가 뭔가 더 말하려던 참이었다.
"빨리 출발해!"
떠났던 잭이 돌아왔다. 손에는 피 묻은 책과 종이, 나무토막이 한 아름 들려 있었다.
"버니는?"
"젠장, 놈들이 버니를... 버니를!"
나는 그가 가져온 땔감을 안으로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피 때문에 축축해진 것은 피했다. 호흡이 연소라면, 피는 불이다. 불이 불을 죽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놈들이 지천에 깔렸어. 소방대 놈들...."
"세상에, 너 다쳤잖아!"
"치료할 시간 없어,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해, 바로...!"
잭이 외쳤다.
묵중한 기차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잭은 눈을 멀뚱거리면서 날 쳐다봤다.
"네가 한 거야?"
"아니."
그저 보일러의 열이 충분해졌을 뿐이었다. 나는 그 간단한 이치를 그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에 입 다물었다.
알리사는 잭의 상처를 돌보던 중, 녹색 빛이 도는 검은 돌을 꺼내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이건?"
"아, 그게, 놈들 기차를 털었을 때 잔뜩 나왔잖아. 아무 이유 없이 싣고 다니진 않을 테니까, 뭔가 도움이 될까 해서."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모종의 희열 때문에, 그리고 나머지 둘은 아마 다른 이유로 침묵했다.
연소가 본격적으로 될수록 악취가 흘렀다. 폐 깊숙이 끈적하게 달라붙을 고무 태우는 냄새와 같았다.
의식이 흐릿해질 때마다 여러 풍경이 스쳤다. 쓰러지기 전에 다시 산소로 호흡하면 다시 풍경이 흩어졌다. 모르는 얼굴은 아는 것으로... 섬은 도시로... 절벽과 바다는 강으로....
세상은 그때마다 무언가 흉측한 것으로 바뀌었다. 차가운 세상이다. 덥히기 위해서는, 석탄이 필요했다. 열이 필요했다.
"기차가 시내 쪽으로 가고 있어."
"어, 어째서?"
잭이 말하자, 알리사가 놀라며 물었다.
"아니야, 이쪽이 맞을 거야. 백작이 그렇게 해뒀겠지. 알잖아, 반대편으로 가봐야 막혀 있다는 거."
"그건 그렇지만...."
기차가 움직일 때마다 사방의 풍경이 조금씩 밀려났다. 불타는 마일 엔드, 사람 모양을 한 잿더미, 여기저기서 들리는 총성과 아우성... 모두 기차 위에서는 먼 풍경이었다.
"조금, 느리지 않아?"
"열이 올라가는 속도가 느려."
오랫동안 방치된 문제가 여기서 나기 시작했다. 안쪽에 눌어붙은 검댕 때문에 땔감이 제대로 타질 않았다.
"힘을 써야 해."
나는 삽을 집어들며 말했다. 의미는 전달되었다. 잭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미안, 원래 내 일인데."
"괜찮아!"
알리사는 두 팔을 걷어 올렸다.
...철컹! ...철컹!
보일러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살을 태우는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몸이 붉게 물들고, 열을 견디지 못한 핏줄이 터지면서 피멍이 들었다. 땀과 검댕이 섞여서 피부 표면이 검게 침착했다. 그렇다고 해도, 고작 그슬림에 불과했다.
심장을 터트리기에는 화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착실하게 생명을 깎아내리는 열임은 분명했다. 잭은 매 순간 점점 야위어 갔다.
"젠장, 추워... 추워...."
그 변화는 바쁘게 석탄을 쏟아넣는 중에도 모두 알아차릴 정도였다.
"계속 여기 두는 거 위험하지 않아?"
그렇다고 달리 갈 곳은 없었다. 기차는 속력이 붙기 시작했고, 여기 화실 바깥은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선명한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열의 층이 나뉘었다. 온과 한, 그 사이에는 불가해한 경계만이 있을 뿐, 기차 위 어디에도 미지근함 따위는 없었다.
...철컹! ...철컹!
보일러 문을 여닫을 때마다 열층이 열렸다.
나는 눈이 멀도록, 눈물마저 마르도록 그 신비한 광경을 머리에 집어넣었다. 실제로도 시력은 순간마다 떨어져서 눈앞이 침침했다.
대신 그만큼 청각이 예민해졌다. 석탄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 연소 끝에 보일러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즉시 증발하는 소리, 온도가 오를수록 떨리는 철판의 소리, 그중 낯익은 사람의 목소리도 있었다.
'잘 들어. 너는 필레몬 허버트 남작의 환생이야. 그렇다면,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거야.'
백작은 내게 말했다.
내가? 나는 필레몬 허버트가 아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잘 알았다. 적어도 그런 이름은 아니었을 터다.
'너는 불이구나.'
실제로 나는 사람과 닿질 못했다. 불은 불을 죽인다. 사람이 불이라면, 내가 그들과 닿지 못하는 것도 불이기 때문인가?
이는 혼란스러운 가정이었다. 나는 일생을 내가 불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결코, 불이 될 수 없다는 소외 속에서 견뎌왔다.
하지만, 나 자신이 내 생각보다 나를 모른다면? 애초에 내가 불이 아니라면, 나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불에 넣어줘."
이건 불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고개 돌렸다. 이제는 청력이 좋아져 석탄이 거는 말까지 들린단 말인가. 그런 줄 알았는데, 잘 보니 석탄 더미 옆에 누운 잭이 한 말이었다.
"저기, 너. 이제 보니까, 이름도 모르네, 젠장. 나쁘게 대한 건, 미안해. 부탁이야, 나를 불에 넣어줘."
알리사는 경악했다.
"너, 미쳤어?"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아니, 너 진짜 미쳤어. 지금 아파서 제정신이 아닌 거야."
"지, 진짜로, 나나, 사실은 언제나 불이 되고 싶었어."
잭의 목소리가 진동했다. 그 모습은 백작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너도 말려봐, 머리가 이상해졌나 봐!"
"부부탁이야, 내 사상태는 내내가 알아. 나나는 어차피 더 살지 모못해... 기기왕이면 따뜻한 곳에서 주죽고 싶어. 나를 태워줘."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내가 저런 처지여도 비슷한 요구를 했을 것이다. 당장 경악하고는 있어도 알리사도 분명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도 불이니까, 결국에는 인정했다.
우리는 그의 몸을 함께 들어 올렸다.
"고고마워. 여열기가 느느껴져."
나는 한 손으로 레버를 당겨 보일러 입구를 열었다.
이 순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머리와 몸의 경계, 그곳을 잘라내는 걸 단두斷頭라고 했다. 지금까지 몰랐던 단어의 참뜻이 진정 이해되었다. 단두하기 위해서는 어느 부위를 잘라내야 하며, 그 단면은 얼마나 굴곡져야 하는지 알았다.
단두에는 각이 필요했다. 각이란 재단이며, 잣대이고, 또한 완벽한 단면이다. 단두에는 직각이 필요했다.
각이 분명해질 수록, 입은 떨려왔다. 열이란 움직임의 법칙이다. 입은 결코 멈추지 않았고, 나는 쉴 새 없이 떨었다. 그리고 하나 더.
단두에는 적절한 온도가 있다.
...철컹!
보일러 문이 닫히자, 머리 없는 시체가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핏물이 솟구쳤지만, 단면만큼 깔끔했다. 다만, 끝 부분이 살짝 탄 것처럼 보였다.
알리사는 울었고, 잭은 불이 되었다. 그러지만 누구도 멈추지는 않았다. 열이란 움직임의 법칙이기에, 우리는 이제 윤곽만 겨우 남은 잭의 머리 쪽으로 석탄을 쏟아넣었다.
기차는 한층 가속했다. 나는 속도를 열량으로 이해했다. 슬슬 보일러 내부의 온도가 한계에 다다랐다. 이는 석탄에 대한 이해이기도 했다.
이 추세라면 석탄이 다 떨어질 때쯤이면 최고 속력에 도달하리라 짐작했다. 그런 전망이 보일쯤에 묵묵히 일하던 알리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보일러 바로 앞에서 일하고 있었음에도 안면이 얼어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소각장에서도 종종 이런 일이 있었다. 어째선지 저들 스스로 질식하도록 불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일종의 소사였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이미 내부가 타 있었다. 나는 냄새로 알았다. 다시 일어나더라도 그녀는 이미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산화란 비가역적이다. 불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유치할 정도로 자명한 법칙만이 세상을 지배했다. 소실과 파괴만이 가진 미학이었다.
하지만 곤란에 봉착한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저 태우는 일만 생각했지, 그 태움에 무슨 의미가 있는 줄은 몰랐다. 소각장에서도 그랬다. 나는 소각로에서 뭘 태우며, 그게 무엇을 위한 일인지 궁금해 본 적이 없었다.
기차가 최고 속력에 달하면 어떻게 될까, 인공위성에 무엇이 적혔건 그 의미를 모르는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길 바랐다. 영원히 이 위에서 태울 수 있기를 소망했다.
아, 하지만 방금 말하지 않았던가! 산화란 비가역적이며, 불탄 것이 돌아오지는 않기에, 석탄은 착실하게 바닥을 보였다.
남은 땔감이 모두 타고난다면, 나는... 사고는 그쯤에서 꺼졌다.
선로 쪽에 무언가 쌓여 있었다. 그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직후, 번쩍하며 흰 불빛이 퍼져 끝내는 눈이 멀도록 밝아졌다.
몸이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로 부웅 떠오르고, 그리고....
... ... .
... ...나는 살아 있었다.
여기 돌무더기 아래에, 반쯤은 부서졌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아득할 정도의 통증은 도리어 무감각으로 이어졌다. 뇌가 망가지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부가 부스러지는 게 느껴졌다. 전혀 아프지 않게 느껴지는 점이 도리어 불안했다.
마지막 그건 폭발이었다.
누군가 기차가 최고 속도에 달하지 못하도록 설치해둔 것이다. 누군지는 맥락상 뻔했지만, 그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 든 의문은 기차의 안위였다. 그 정도 폭발이었다면 분명 탈선했을 테지만, 옆으로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아직 달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석탄이 없다. 사방으로 흩어졌을뿐더러, 주워 모은다고 해도 달리게 할 정도의 양은 아니었다.
나는 호흡하다가 깨달았다.
이건 연소다.
나는 불이 아니라 땔감이다. 나는 석탄이다. 숨을 참을수록, 산화를 억제할수록 내 몸 가득히 탄소가 축적하는 게 느껴졌다.
이건 탄화다. 나는 석탄이다.
드디어 모든 사실을 깨쳤다. 내가 태어난 의미, 불조차 아님에도 사람과 닿지 못하는 이유, 온기를 타고나지 못하고도 줄곧 불을 선망해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멀리서 기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알았다. 환청이다. 하지만 그건 나를 부르는 음성이기도 했다.
나는 애타게 날 뭉갠 돌과 흙을 치워냈다. 호흡이 멎을 때마다 몸이 물러졌다. 살이 아닌 석탄의 강도이다. 손가락이 부스러질 때마다 이미 탄화한 가슴 한편이 아렸다.
달그락, 달그락.
마지막 돌무덤을 치우자, 겨우 밖이었다. 나는 상반신만 끄집어낸 후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찬 공기가 혈액을 타고 흘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입 다물었다.
호흡을 멈추자, 다시금 이산화탄소가 차올랐다. 열과 한은 담금질의 법칙이다. 달아오른 것은 식혀야 하고, 고통을 참아낼수록 단단해진다. 하지만 그건 철을 위한 것이다, 석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화는 마지막까지 아껴야 했다. 나는 이미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늘은 춥다. 밤은 푸른 빛을 띈다.
"... ... ."
나는 호흡하지 않으며, 몸을 바닥에서 끌었다.
돌더미 사이로 불완전한 반신이 드러났다. 끝에는 뭉개진 왼 다리가 보였다. 뼈가 드러나는데도 통증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괴사한 것이었다.
기차를 모는 동안에도, 질식하며 잠드는 동안에도 나는 이미 꾸준히 탄화하고 있었다. 모든 석탄이 지난 3억 년간 그랬듯이, 한순간의 연소만을 위해서... 다리 일부가 석탄처럼 부스러지고 있었다.
"... ... ."
나는 기어서 선로 위에 올랐다.
선로는 열기에 뒤틀리고, 일부 녹아 있었다. 나는 탈선한 기관차에 올랐다. 기껏 예열한 보람도 없이 무쇠 차체는 차게 식어 있었다.
보일러 안에는 타다 남은 찌꺼기와 검댕이 눌어붙어 있었다.
준비한 연료를 소화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불 꺼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벌써 수십 년간 쓰지 않던 것이었다.
거기에는 내 잘못도 적잖이 있었다.
석탄이 필요했다.
심장이 뛰게 하려면, 석탄이 필요했다. 피 흐르는 사륜 바퀴에서 불티를 내려면, 차게 식은 폐에 회백색 증기를 채워 넣으려면, 모세 혈관 구석구석까지 불이 닿게 하려면, 열기를 위해서는 석탄이 필요했다.
런던이 부른다.
런던이 부른다.
런던이 부른다.
...철컹!
누구도 만지지 않은 보일러 문이 닫히고 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연소한다.
가장 먼저 눈이 메말랐다. 그건 괜찮았다. 보지 못해도 나는 온기를 통해 거기 불이 있다는 걸 아니까. 고막이 녹아내렸다. 그것도 괜찮았다. 심장이 소란스러워 어차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뺨이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 마디가 끊어졌다. 무릎 연골이 녹아내리고, 귓불이 부스러졌다. 핏줄이 터져 나갈 때마다 피가 부글부글 끓어 증발했다.
그때마다 나는 탄화했다. 본래는 수억 년이 걸렸을, 어쩌면 영영 불가능했을지 모르는 과정이 순간으로 축척하고 있었다.
낯선 풍경이 스쳐 갔다.
나는 그날의 꿈처럼 아름다운 원시의 바다에 있다. 이건 누군가의 기억이되, 나에게는 기다림의 시작이다. 이것은 3억 5천만 년 전에 피어난 최초의 꽃이 보았던 풍경이다.
언젠가 시들어, 다시 지상으로 드러나기까지 3억 5천 년간 매몰되어 고된 탄화를 계속하며, 끝내 봤던 풍경, 살아온 기억, 의의마저 검댕으로 뭉개지도록 기약 없는 한 번의 연소만을 꿈꾸었다.
나는 지금 거기에 있다.
하지만 내가 건너야 하는 시간은 고작 3억 년이 아니었다. 나는 우주의 끝에서 탄생까지 되돌아가야 한다.
나는 연소하고 있다. 엔진이 울부짖는다.
영원과 무한을 관통하여, 기차는 지금 우주를 달리고 있다! 데이곤은 실패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바다는 우주를 투영한다! 꿈에서 꿈으로, 별에서 별로 오가듯이, 기차는 바다 건너 바다로 갈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순간만을 위해, 이 순간만을 위해...!
... ... .
이 순간을 위해....
"가여운 사람."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아마도 나이는 나와 비슷하다. 아니, 나는 지금 몇 살이라 할 수 있지?
수백억 년에 걸쳐 탄화하였지만, 수천억 년을 거스르기도 했으니, 시간에 버려진 나는 몇 살이라 할 수 있을까, 수백억 살, 어쩌면 마이너스 수천억 살?
"고마워... 내가 교수님은 반드시 지구로 보내줄게."
상냥한 손길이 닿아도 화상 입지 않았다.
나는 이미 모두 타고 남은 잿더미에 불과했다. 사람의 온기에 닿아도 더는 불타지 않았다. 불탈 수가 없었다. 이미 나는 잿더미이다.
누군가 울고 있었고, 잔열이 식어갔다.
나는 심연으로 떨어진다.
고된 기다림 끝에도 연소는 순간이다. 남은 영원은 허무한 재의 세계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다.
모두 탄화했기에, 나는 생각하지 못한다. 모두 연소했기에, 나는 존재하지 않다. 하지만, 추위만을 느꼈다.
너무 늦게 깨닫고 만 것이다. 꺼져가는 불이야말로 무엇보다 차다는 것을.
그래도 좋았다.
땔감은 불타던 시절을 기억한다. 영원히, 영원히....
... ... .
... ... .
... ... .
...런던에서도 올드코트 대학 붕괴는 전례 없는 규모의 대참사였다.
대학 건물과 지반이 무너지며, 언덕을 통과하던 수도관이 파손되어 주변 지역은 간헐적인 수도, 전력 부족 현상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이조차 밝혀지는 진상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일각에선 이번 사건을 '신의 악행'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3,000명에 달하는 재학생과 교직원 전원이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으며, 전원이 압사하여 사망한 일은 도저히 신의 소행이 아니라 하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정부에서는 국지적인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재난 대책 임시부를 개국하며 전면적인 대응에 나섰다. 산술적으로만 제 1차 런던 대화재의 3배였으며, 추후 매뉴얼화 할 정도로 모범적인 초동 대응이었으나 사건의 이상성, 정치적 불안, 민심 진정 등을 이유로 총리 사퇴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번 일로 원내에서는 명예 결투가 부활하게 되었고, 서민원 의원 34명이 죽거나 다치게 되었다. 시민들은, 그리고 언제 피할 수 없는 결투에 끌려가서 죽게 될지 모르게 된 국회의사당 의원들은 하나라도 희망적인 상황을 원했다.
생존자, 무엇보다 생존자가 필요했다. 나날이 심해지는 정치계의 압박에도, 현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올드코트 대학 사건이 단순한 지반 붕괴가 아니란 것은 금방 밝혀졌다. 평면 도면으로 나타낼 수 없는 실내 구조, 유혈 흔적이 있는 용도 불명의 시설, 지상보다 광활한 지하 공간, 절단해낸 듯이 뚜렷한 낙반 흔적, 예외 없이 바위에 으깨진 시체....
사건에 투입된 전문가들은 수일 째 붕괴 원인을 내놓지 못하고, "반대로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며 잠꼬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건 그들도 곧 침묵했다.
마지막 층에 도달해서, 현장의 누구도 거기서 본 것을 대체 어떤 식으로 보고해야 할지 결론 내리지 못했다.
끈적한 웅덩이 위로는 회백질부터 선명히 썩어가는 뇌가 첨벙거리고 있었고, 그 중앙에는 한 구의 으스러진 백골이 곰팡이 덩어리를 껴안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무너진 천장 아래에는 불탄 기관차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최신형 설계에도, 최소 수백에서 수천 년은 방치된 것처럼 더럽혀지고 녹슨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일부 조사관은 며칠 전까지 기차 내부에서 누군가 생활하다가, 구조대의 굴착을 틈타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우기도 했지만, 증거가 불충분한 망상으로 치부되었다....
... ... .
"그게 주인님이었던 거죠?"
"그래."
"이번에야말로 죽은 줄 알았어요. 어떻게 된 거에요?"
"그게 말이지... 이번만큼 나도 모르겠어."
"너무 무책임하지 않아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잖나. 나는 지금 솔직하게 말했는데, 자네가 그렇게 반응하면 어쩌나?"
"저도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거에요."
"워낙 급박해서 둘러볼 여유가 없었어. 그저, 모르겠어. 조금 이상한 꿈을 꾸다 깬 기분이야."
"...못 오실 줄 알았어요."
"잠깐, 지금 우는 건가? 아야, 치기는 왜 치나?"
"사람이 못 됐어요."
"죽기는 내가 왜 죽나, 죽기는 왜...."
"... ...."
"조금 진정했니?"
"네."
"그래, 들어가서 좀 쉬렴. 지금은, 나도 조금 쉬고 싶구나."
"안녕히 주무세요."
달은 밤을 정하지 않는다. 홀로 빛나지 않는 달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럼에도 해는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