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형사 죽이기
이튿날 아침, 1898년 6월 14일, 화요일.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나의 경험과 직감이 이번 사건이 범상치 않은 것이라며 호소했다. 휴일이 끝나고, 다시 혼돈 밑으로 가라앉을 시간이었다.
사건 발생 시점은 6월 12일 심야, 하물며 비까지 내렸으니 물적인 단서를 찾으리란 기대는 진작 접고 말았다. 현장으로 향하는 대신 나는 탐문하기로 했다.
숱하게 언급했지만, 나와 신문계는 모종의 악연으로 맺혀 있었다.
그런 악연도 길게 이어지니, 나름의 인연이기도 했다. 나는 공적 형태로 알고 지낸 기자가 몇 있었고, 그들을 조심스럽게 불러냈다.
절반은 묵살했고, 기껏 호출에 응한 절반도 이번 사건에 대해 화두 꺼내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함구했다.
모든 시도가 좌절되어 가는 참에 한 사람, 기자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면 현재는 더 런던지에 근속하는 크룩 편집장만이 내게 조언했다.
"허버트 씨, 상대가 안 좋아."
그는 다짜고짜 말했다.
"사건을 캐고 다닌다고 소문이 쫙 났어. 이제는 아무도 안 나와줄 거야."
"자네가 있지."
"나도 바로 돌아갈 거야. 아무튼, 이번 건에는 손 떼."
크룩은 기세 좋게 자리를 박찼다가, 내가 미동조차 하지 않자 곧장 돌아와서 뭔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듯이 물었다.
"자네하고 나하고 얼마나 알고 지냈지?"
"종전 이래였나."
"그러면 한 십 년 그쯤 되겠군?"
"아마 그렇겠지."
"악연도 이만큼 쌓이면 정이 붙지. 댁한테 투견 기질이 있는 건 알아."
"누군 좋아서 그런 줄 아나."
"아냐, 자네는 타고난 성격이 그래. 그건 좋다 쳐. 그래도 상대를 좀 가리라는 거야. 이번에라든지."
마음 같아서는 비아냥대고 말았겠지만, 그가 하는 말이 진심 된 우려에서 나왔다는 게 절절히 느껴지니 대놓고 뭐랄 수가 없었다.
"우리 시절은 좋았지. 하지만 이젠 아니잖아. 가면서 잘 생각해 보라고, 아니, 생각하지 말고 직접 눈으로 봐.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이미 우리가 알던 런던이 아니야."
나는 그 말대로 했다.
종일 비가 내린 탓에 시간 가늠이 잘되질 않았다. 비는 거의 그쳐 하늘에선 가랑비만 내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먹구름 뒤편에서 해가 저물고 있을 시간이었다.
거리는 자동차로 즐비했다. 3년 전, 적기조례가 폐지된 이래로 꾸준히 마차가 줄어서 이제는 도시 외곽이나 시골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용맹한 가로등지기가 자욱한 물안개를 헤쳐 다녀가면 밤거리 색깔이 바뀌었다. 내가 알던 빛깔은 아니었다. 가스등 불빛은 만취한 날의 꿈에서나 찾아볼 만한 기괴한 인공색이었다.
이런 궂은 날씨에도 취객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위태로운 걸음으로 나아갔다. 내게도 분명 술잔이란 게 남과 나누는 것을 뜻하던 시절이 있었을 터였다.
시선을 돌리자 템스 강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강만은 언제나 여전했다.
근방의 아이들은 곧잘 뛰었고, 나는 우직하게 걸었다. 손의 연장처럼 익숙해진 지팡이 짚는 일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낀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나는 집 근처에 다 와서 귀갓길을 틀었다.
전에 살던 거리에는 모르는 신축 건물이 잔뜩 세워져 있었다. 지금은 골격만이지만, 완공되고 나면은 전혀 모를 장소가 되리란 상상쯤은 가능했다.
나는 계속 걸었다.
버릇처럼 다다른 장소는 아버지의 묘가 있던 터였다. 지금은 없었다. 대화재 이후 활발해진 재개발 유행이 여기까지 닿아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신청한 집안에 한해서는 푼돈의 보상금과 묘비를 생색 하듯이 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신청이 늦은 집은 어쩔 수도 없는 게, 이미 흙으로 덮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매번 에드먼드 형님께 이 일에 대해 물으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깜빡해서 아직도 아버지의 묘비를 받았는지 어떤지가 묘연했다.
마리가 언젠가 내게 비인간적이라 했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나질 않았다.
신비적인 공격이나 특이한 태생 따위의 복선이 아니라 순전히 잊고 만 것이다. 당신께서 타계하셨을 적의 슬픔이나 불안 따위도 모두 휘발하여 없었다.
예컨대 나는 아버지 묘가 분쇄되어 영영 건물 아래 묻혔다고 해도, 그 일로 분개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내 안에서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크룩이 옳았다.
도시는 바뀌었다. 그 도시에는 내가 있다. 나도 바뀐 것이다.
1898년 6월 15일, 수요일.
매번 그렇지만, 저널리즘과의 타협은 하루 만에 관뒀다.
런던에서 신문이라 하면, 이미 더 런던지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곳은 노란 외벽의 산하이다. 가뜩이나 경계 사는 중에 어설프게 행동하다가 그들 귀에 들어가서 좋을 건 없었다.
나는 순순히 물러나기로 했다. 대신 무모하지만 좀 더 직접적인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경찰과의 접선이었다.
이 시도는 더욱 빨리 좌절되었다. 등불파가 집권하고 경찰 조직이 일신하며, 무수한 인사이동이 있었고 이 시점에서 내가 줄을 댄 경찰이 모두 좌천하거나 경질된 탓이었다.
강직하다 못해 폭력적인 등불파 경관이다. 매수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이걸로 사건과 직접 연관된 두 기관, 경찰과 기자 양측 모두 막힌 셈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두는 아닐지도.
1898년 6월 23일, 목요일.
모든 일정이 예상보다 지연되었다.
내가 찾는 인물은 나름 저명하고, 눈에 띄는 인물인지라 금방 만나게 될 것이라 오산한 탓이었다. 실제로 그의 출처를 알게 된 것은 사건 발생으로부터 10일 후였다.
이렇게나 오래 걸린 이유는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상쩍은 뒷골목을 전전했다.
그리고 도착한 내리막길,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올리자 미처 있는 줄도 몰랐던 문지기가 불쑥 내 앞을 막아섰다.
"소개는?"
"여기가 뭐하는 장소인지 정도는 알아. 그렇게 자격 있는 사람만 다니는 장소가 아니란 것도."
그는 험상궂게 인상 쓰며 물었다.
"당신, 낯이 익은데 형사 아니요?"
나는 의혹을 불식하는 법을 잘 알았다. 슬쩍 바지를 걷어 의족을 보이자, 그는 멋쩍어하며 물러났다.
"사고 치지 마요."
조금 더 들어가자, 입구를 지나지도 않았는데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아편 태우는 냄새였다.
매음굴에서는 천박한 웃음과 교성이 가득했다. 걸을 때마다 바닥이 끈적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벌써 몇 달째 여기 있다고 했다.
나는 기둥과 벽으로 가려진 방을 모조리 뒤지고 다녔다.
"실례했네, 실례. 미안하네."
나중에 알았지만, 일일이 사과하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남에게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게 약에 절어 생물로서 기초적인 수준의 경계심조차 퇴화한 건지, 아니면 저들만의 천박한 세상에 갇혀서인지는 몰랐다.
개미굴처럼 이어진 아편굴을 중간보다 조금 더 지나서, 나는 어떤 부랑자가 내가 찾는 인물과 꽤 닮았다고 느꼈다. 보면 볼수록 엇비슷했는데, 다른 점도 제법 있었다.
우선, 내가 아는 남자는 항상 말쑥한 차림새였는데, 눈앞의 부랑자는 몇 달째 갈아입지 않은 게 분명한, 걸레짝처럼 헤진 명품 옷을 입고 있었고, 하관 전체에 자란 덥수룩한 수염 군데군데로 머릿니 물린 흔적이 보이기도 했고, 이빨이 좀 부족했으며, 동공에도 초점이 빠졌고, 재주의 편린조차 엿보이지 않는 점이 주로 그랬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간만이네."
남자는 눈을 깜빡이다가, 빛이 시린지 손바닥을 펼쳐 들으며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나야."
나는 힘겹게 무릎 굽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순간 남자의 동공으로 무수한 감정이 스쳤다. 나는 일부러 못 본 척했다.
"필레몬, 자넨가?"
"그래, 페터."
그의 이름은 윌리엄 페터, 나와는 용인 학교의 동창으로 전형적인 성공 일로를 걸은 인물이었다. 이는 절대 과언이 아니라, 실상 경찰청에 종속되어 있던 수사국을 대등한 위치까지 올린 수완으로 정계에서는 한때 차세대 총리로도 거론되었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만한 남자가 이렇게 몰락한 것이다.
나는 숨기려고 애썼지만, 차마 새어 나오는 동요를 다 감추지 못했다. 필시 그게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졌을 터였다.
페터는 매몰차게 물었다.
"왜 찾아온 거야?"
과거 뭇 여성을 홀렸던 프랑스 억양 대신에 그의 입에서는 중독자 특유의 혀짤배기소리만 났다.
"물을 게 있어."
"네 앞에 뭐가 있는지 알아?"
그는 뜬금없이 물었다.
"구덩이야. 텅 빈 구덩이. 여긴 아무것도 없어. 나는 끝났어. 완전히 실각했다고."
"신문은 봤나?"
"신문?"
그는 코웃음쳤다.
"여기에는 오늘 날짜를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을걸?"
"그렇군."
빛깔 침착한 눈에는 전과 같은 총기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에서... 어쩌면, 그 후로도 그의 총명함을 빌리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윌슨에 대해 말하러 왔네."
"누구?"
"피터 윌슨."
"몰라."
"그럴 리가. 내가 부탁해서 네가 거둬들인 형사가 있잖나."
"누구라고?"
"피터 윌슨, 윌슨 형사."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간신히 떠올린 듯했다.
"그가 왜?"
"나보다는 자네가 오래 보지 않았나."
"그야 그렇겠지."
"뭐든 이상한 점 없었나?"
질문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대답에 대한 기대는 접었다.
페터의 실각은 늑대 사건, 작년 1월경의 일로, 내가 마지막으로 윌슨과 만난 시점과 얼추 같았다. 그럼에도 그를 수소문한 건, 그가 실각 후에도 재기를 노리며 수사국에 적잖이 관여하고 있으리란 어림짐작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 내 눈앞에는 그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공동만 놓여 있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과 우울 증상을 일으키는 그런 어둠 말이다.
도무지 지금의 페터가 나보다 뭔가 더 알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기억나. 꼭 송장 같은 청년이었지."
페터는 떠듬거리며 말했다.
"원칙에는 고지식하고, 금욕적이고... 뜻이 맞는 동료는 있어도 사적으로 친하게 지낸 사람은 없었지. 근데 있잖나, 사실 그런 청년은 꽤 많아. 처음에는 형사면, 응, 다들 어깨에 힘주고... 알잖아, 응? 그러다가 다들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는 어설프게 계속 말했다.
"부러지거나, 구부러져. 보통은 구부러지지. 업계 말로는 이가 난다고 하는데."
"이가 나?"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 나온 표현은 꽤 낯익고, 어설프게나마 연관성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첫 번째 이빨이 나면 아이는 젖 없이도 살고, 두 번째 이빨이 나면 뭐라도 주워 먹으며 살게 되지. 그래서 우리가 영구치를 '성인치(adult tooth)'라 부르는 거야. 너도 군에 있었으니 알 거 아니야, 엄격한 규칙을 가진 조직일수록 형편을 따지는 게 요령이 되지."
페터의 문장은 전체적으로 횡설수설했지만, 나로 하여금 정말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지 의심하게 할 만큼 맥을 오가는 대답이었다.
이런 의뭉스러운 화법이야말로 그가 특기 삼던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시절의 버릇이 남아 시늉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페터는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
"피워도 될까?"
나는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최소한 나하고 대화하는 동안에는."
"그래, 그래...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그는 갑자기 낮은 소리로 비명 질렀다.
"지킬 박사, 그놈만 없었으면 전부 원래대로였을 거라고! 내가 미쳤어, 아니야, 세상이야! 아니, 난가? 빌어먹을, 밤마다 세상이 얼마나 염병하는지 보라고! 너까지 내가 돌았다고 할 셈이야!"
페터는 내 멱살을 붙들었다. 피할 수도 있었고, 지금에도 떨칠 수 있었지만, 나는 그저 노려보기만 했다.
"아, 미안해. 가끔 이래. 약빨이 떨어지면, 세상이 너무... 너무, 잔인해. 그래서, 어디까지, 아, 그래... 피터 윌슨, 그 청년은 구부러지지 않았어."
"구부러지거나, 부러지거나. 부러졌다고 말할 셈인가?"
"근데, 그러지 않았어. 웬 줄 알아?"
그는 모호하게 말을 흐렸다. 그리고는 양옆으로 입을 찢어 보였다.
"나는 봤거든. 그한테서 세 번째 이빨이 나는 모습."
검게 괴사한 잇몸 사이로 빠진 이빨이 듬성듬성 있었다.
"첫 번째 이빨이 생존의 증거, 두 번째 이빨이 생장의 증거라면, 세 번째 이빨은 대체 뭘까, 응?"
잠깐 괴로운 침묵이 흘렀다.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사람을 죽이고 수배됐어. 피해자는 경찰이었지."
페터는 거보란 듯이 음산하게 웃었다.
"심정은 이해해. 심지가 굳은 청년이었으니까, 영 서장 아래에서는 힘들겠지."
"영 서장이라면...."
"브라이언 영, 왕립구 경찰서장 말이야. 말이야 그러지만, 경찰청장이나 수사국장도 전부 그의 끄나풀이야."
그는 기침했다.
"놈은 미쳤어. 유아 수준의 논리로 움직이면서, 분에 과한 능력을 가졌지."
"등불파의 계획을 알고 있나?"
나는 다급히 물었다.
"그야 알다마다. 너는 모른단 말야? 그럴 리가. 아니, 아니군. 자네는 너무 똑똑했던 거야. 그야 알지 못하겠지, 누가 그런 농담을 상상하겠어."
그는 주절주절 혼잣말하며 당장 잠들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이봐."
"영 서장은 단순해. 자경단의 오랜 원칙을 숭배하고, 범죄를 증오하지. 등불파의 엄벌주의는 순전히 그의 뜻에서 나온 거야. 그러면, 어쩌겠나?"
"뭐?"
"모든 범죄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겠어?"
나는 처음으로 대답을 주저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페터에게서 수사국장 시절의 단면이 엿보였다. 짧게 품은 기대 때문에 나는 그가 아편을 흡입하는 걸 바로 멈추지 못했다.
고작 한 모금으로 얼핏 보인 지성이 무산되었다.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실실 웃었다. 얼굴 근육이 녹아내려야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듯했다.
"피터는 구부러지지도, 부러지지도 않았어. 그건 인간의 법칙이 아니야. 그런 걸 달리 뭐라 부르는지, 너야말로 잘 알잖아."
그는 히쭉히쭉 웃었다.
"피터는 사람을 죽이고, 괴물이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