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광공해
1898년 6월 26일, 일요일.
그날 귀가하고 난 뒤에, 밤늦게 마리가 날 찾아왔다. 나는 읽던 책자를 내려놓고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왜?"
"걱정이 되어서요."
나는 말하지 않았지만, 낮에 있던 암살 사건의 내막은 이미 도시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 윌슨과 면식 있는 마리라면, 선한 그녀라면 마음 쓰는 게 당연했다.
"내가 알아. 어떻게든 이겨낼 거야."
정작 내가 한 대답은 그다지 썩 명쾌하지 않았다. 이겨내다니, 누가, 무엇을?
"그게 아니에요."
나 자신도 맞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곤 생각했지만, 마리가 아예 정색하고 부정하니 마음이 상했다. 나는 정정했다.
"윌슨은 강직한 청년이야. 뭔가 이유가 있을 테지."
"그게 아니라."
마리는 재차 부정했다. 슬슬 고약한 성질이 나와서, 나는 대뜸 성내는 투로 되물었다.
"그러면 뭐가?"
"주인님이요."
말에는 힘이 있다. 흔한 상용구이지만, 그 말대로인 줄은 차마 몰랐다. 나는 그야말로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주인님이 걱정돼요."
마리는 마저 말했다.
"제가 말해도 바뀌진 않으실 테지만, 그래도 꼭 말하고 싶었어요."
"아니, 자네 말대로야."
내가 그리 답하자, 마리는 놀란 것처럼 얼굴을 치들었다. 나야 모르지, 그녀에겐 표정이란 게 없으니까.
"조금 쉬어야겠어, 한동안만...."
1898년 6월 30일, 목요일.
브라이언 영은 이틀 만에 회복했다.
전날까지 가망 없다던 의사들의 확진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의사들은 말을 바꿔 의식을 찾은 것만으로 충분한 기적이나, 이 이상 회복할 여지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는 런던의 모든 외과의 경력을 망가트릴 작정인지, 기어코 사흘 만에 홀로 일어섰다. 이쯤하니 어떤 의사도 기자 앞에서 그의 상태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다만, 의사를 무능하다 탓할 수는 없었다.
총알은 영의 머리에 박혔고, 여전히 뇌 깊숙이에 손쓸 수 없이 들어 있었다. 그의 생환은 운이 좋았다는 말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흘째, 영 서장은 붕대를 두른 채 대중 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야유가 아닌 환호가 쏟아졌다. 역설적이게도 이번 암살 미수는 그에게 순교자 이미지를 씌워줬고, 분노했던 대중은 그야말로 진정한 범죄 투사였다며 찬사 보내기 바빴다.
실제로 폭동 배후에 서민원이 있었나 알 순 없어도, 그들이 상황에 따라 접근 방식을 달리하기로 한 것만은 분명했다.
내분으로 무참한 국회 의사당 양당에는 이미 브라이언 영이란 신흥 거물과 맞설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의원들은 그의 인기에 편승하듯이 앞다퉈 전폭적인 지지 선언해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간만이라는 표현을 쓸까도 했지만, 새삼 이렇게 여유작작하게 지낸 일이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좀 더 과언하자면, 처음으로 보호자 노릇을 한 셈이었다.
나는 죄책감으로 찌들었는데, 아이들은 순수하게 기뻐해 줬다. 영악한 줄리엣만 빼놓고 말이다.
이 애늙은이 꼬마는 내 변화를 수상하게 여기는 티를 내더니, 한 번은 방을 뒤지다가 걸리기도 했다. 그 후로도 내 주변을 뒤적거리는 탐정 놀이를 계속하니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몰랐다.
심경 변화에 낯설어 하는 것은 비단 줄리엣만이 아니었다. 마리 역시 내가 며칠씩이나 애 돌보미를 자처하니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으로 보였다.
지은 죄가 여간 많은 게 아니라 내 잘못이려니 했다.
1898년 7월 5일, 목요일.
근래는 공사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사정을 알아보니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번 사건의 후유증이 가뜩이나 불안정하던 영 서장의 정신이 완전히 파괴했다고 한다.
거뜬히 말하거나, 걷는 것처럼 보여도 그 내용을 들어보면 문법이나 논리나 통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소문 진위야 어쨌건, 그가 깨어나자마자 의회에 300만 대의 가스등 추가 설치와, 경찰청 건물 옥상에 육상 등대 건설을 요구했다는 일화로 보아 아주 신빙성 없게 들리진 않았다.
그리고 이 망상적인 제안은 하루 만에 하원을 통과했고, 그보다 비현실적인 규모의 거액이 예산으로 배정되었다.
촘촘히 늘어선 가로등 불빛이 만들어 내는 빛의 장막은 물리적인 경계선처럼 뚜렷이 보였고, 언뜻 보자면 밤이 후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무렵 사람들 사이에선 확산하는 공사 지역을 보고는 경찰청이 있는 화이트홀 4번가에서 따와 '화이트홀 선線'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다만, 정말로 화이트홀에서 시작하진 않았는지, 내 집이 있는 킹스 로드 138번가는 화이트홀과 그닥 멀지 않은 데도 좀처럼 공사가 시작하질 않았다.
한편, 뒷골목에서는 이상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더 알아보지 않았다.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마리는 애들 공부까지 가르치고 있었다.
정작 나는 뭘 가르치는지 별로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이런 부분이 아마 그녀가 말한 비인간적인 면일 테지.
알아보니 공부라곤 해도, 간단한 글공부 수준에 그쳤다. 마리의 출신 배경까지 따지면 이만해도 충분했지만, 반평생을 학문에 바친 내게는 성이 차질 않았다.
"아예 과외를 맡길까?"
내 제안에 마리는 당황하며 고백했다. 추가 수입이 없다면, 지금 생활을 영위하기도 빠듯하다는 것이었다.
분명 안정적인 돈벌이가 끊긴 지 꽤 되었다. 어둠이니, 마법이니 하기 이전에 가정부터 챙겨야 할 처지였다.
결국, 나는 오랜만에 펜대를 들었다.
이전처럼 열의는 없었지만, 적당히 값 붙은 이름이니 뭐든 쓴다면 먹고 살 만큼은 벌릴 것이었다.
애들 공부는 내가 맡기로 되었다.
사실 그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마리는 내가 언뜻 비춘 교육열을 놓지 않았다. 이 일로 내가 좀 애들과 친해지거나 하라는 셈일 테지.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원대한 계획은 금방 좌초되었다.
일단 가르친다면 건성으로 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영문 시와 문학, 불어, 수학, 자연 철학, 웅변, 논리학의 학습 계획을 준비해 밤낮으로 아이들을 괴롭히기로 하였다. 사실을 고하면, 대학 강의 때보다 열심이었다.
결국, 아이들은 내가 부르면 곧장 숨어버리게 된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전보다 나빠 보였는데, 마리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같이 살고 2년 만에 처음 안 사실이지만, 막내 월터는 낯가림이 심한 게 아니라 말더듬이라 했다. 그날 밤 자작은 부대에 술을 붓는 것 같이 들어갔다.
1898년 8월 20일, 토요일.
공사가 시작하고 두 달쯤이 되자 도시의 변화가 속속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밝았기에, 알기 어렵지는 않았다.
여하튼, 주민에게 유쾌한 변화는 아니었다. 낮이면 공사 소음, 밤이면 커튼으로도 다 막을 수 없는 불빛으로 지역적인 불면증과 탈력 현상이 유행했으니 말이다.
뒷골목에서는 유사한 사건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부정하던 경찰청에서도 면밀한 조사 끝에 두 사건의 연관성을 인정했다.
연쇄 살인이었다.
소박한 기대와 달리, 줄리엣은 공부에 영 소질이 없었다. 토미도 그랬고, 도로시도 그랬고, 월터도 그랬다.
내가 그리 말하니, 마리는 어이없다는 투로 타박했다.
"애들이잖아요."
"내가 저 나이 때는 이것보단 잘했어."
당시에는 그렇게 대꾸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마리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물론이고, 어릴 적부터 주변에 에드먼드 형님이나 페터처럼 귀염성이라곤 없는 아이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마리에게 따로 공부 가르치진 않았지만, 그녀야 그녀대로 워낙 똘똘했기에 눈이 조금 높았는지 몰랐다.
그렇다 해도, 줄리엣은 도통 집중하질 못했다. 맏이가 모범이 되질 않으니 동생들이 착실할 리가 없었다.
"애들이 좀 멍청한 거 같아."
나는 마리에게 솔직하게 고했다가 크게 면박을 당했다.
프레디는 한 살 많은 줄리엣과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 붙었는데, 사고뭉치는 건강하다는 말도 되었다. 이제야 나는 현명하신 양친이 배즐 같은 한량을 키워낸 마음을 이해할 듯싶었다.
반대로 공부에도 가장 소질을 보인 게 프레디였다. 이유도 뜻밖이었는데, 동생들에게 매일 책을 읽어주다가 자기가 독서에 취미가 붙은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1898년 9월 1일, 목요일.
살인마 잭 사건의 네 번째 피해자가 발생했다.
이번에도 피해자는 경찰이었다. 시체 훼손은 다른 때보다 덜했지만, 여전히 현장에서 적출된 두 안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웬일로 매번 붙어 다니던 토미와 도로시가 따로 다니길래 사정을 알아보니 둘이 싸웠다지 뭔가. 토미가 먼저 이유 없이 시비를 걸었다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일을 마리에게 상담하니 반항기라는 전문가다운 단어가 나왔다. 어쩌면 여자애랑 같이 다니는 게 부끄러워질 나이가 된 걸지도 모른다 했다.
홀로 며칠간 대책을 모색했더니, 자기들끼리 멋대로 화해했는지 붙어 다니기도 하고 했다.
"요즘 안 주무시고 뭐 하시나 했더니, 그런 생각을 하신 거에요?"
마리는 깜짝 놀라며 물었고, 나는 열 받아서 그날 하루 손에서 일을 놓았다.
1898년 9월 4일, 일요일.
시내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조사 결과, 가스관 용량이 급하게 증설한 가스등을 따라가지 못한 탓이라 했다. 누출 사고는 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대형 사고로 이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 의도야 어쨌거나 결과물을 보면 누구라도 과하다 알 법했다.
10보 간격으로 늘어선 가로등은 본분이 무색할 지경이었고, 그로 인한 피해 사례가 여기저기서 속출하고 있었다.
모든 부조리에 저항하는 영국인의 반골 성향을 아는 자라면, 누구라도 공사를 멈추려 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할 것이다.
사실 그런 움직임은 전부터 있었다. 이미 시민 중에 깨친 자는 경찰청과 브라이언 영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가 나타났다.
살인자 잭.
나는 추리하지 않았다. 그래도 들려오는 소문은 있었다. 그의 정체에 관한 추측이었다....
그보다 걱정되는 것은 월터였다.
가뜩이나 굼뜬데 말까지 더듬으니 어디서 무시라도 당하며 살까 봐 여간 마음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를 데리고 소개받은 치료원 몇 곳을 돌아봤지만, 척 봐도 못 써먹을 사기꾼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가서 뛰어놀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월터는 태평하게 내 일을 구경하기나 했다. 아이에게 집필이란 꽤 시시한 작업일 텐데, 멍하니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초조함만 커졌다.
1898년 9월 28일, 수요일.
또 다른 경찰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로써 다섯 명과 한 마리째였다.
살인마 잭 사건이었다.
흔한 별명이긴 하지만, 그가 특별히 잭이라 불리는 데는 저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식적으로 그가 관여한 첫 살인 사건이 계기였다.
피해자는 야간 순찰 중이던 기마 순경으로 타고 있던 경찰마와 함께 살해당했다. 경봉으로 무장하고, 기마까지 한 경찰이었으나 현장 감식 결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경찰마의 주검은 비교적 온건한 형체가 남았는데, 기수 쪽 시신 손상은 심각했다. 특히 도려진 두 안구는 현장 어디서도 발견되질 않아, 범인이 가지고 돌아갔으리란 추측만 돌았다.
그 사건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이 3년 전의 악몽을 떠올렸다.
인간 인지를 넘어선 범행 방식, 과도한 시체 훼손, 피해자의 신원 등 여러 면에서 스프링힐드 잭 사건과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잭이란 별명이 붙었다.
여하튼, 지금에는 누구도 잭에서 3년 전의 광인을 떠올리지 못했다. 실제 피해는 미비했던 이전 사건과 달리, 올해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첫 사건으로부터 고작 석 달 만에 다섯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심지어는 일련의 법칙이 있었는데, 이 모두 사건의 괴기성을 부각하는 조미료 역할을 했다.
그 법칙이란 이랬다.
범행 대상은 반드시 경찰이었고, 시신 훼손을 못 하는 긴박한 상황에도 눈알 만은 가져갔으며, 무엇보다 모든 범죄가 화이트홀 선 경계에서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우연치고는 공교로웠다.
이런 사실이 겹치자, 대중 사이에선 살인마 잭이 가로등 불빛에 쫓겨난다는 괴담 같은 미신이 자라났다. 하층민 일부는 가로등 아래에선 어떤 살인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자 가로등 사업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줄어들게 되었다.
어쨌거나, 런던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는 잭의 정체였다.
그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가장 많은 사람이 믿는 가설로는 그가 피터 윌슨이란 것이었다. 피터 윌슨 사건과 살인마 잭 출현 시점이 겹치는 점이나, 경찰에 보이는 집요한 앙심 등이 주요한 근거였다.
심지어는 그가 총으로는 죽지 않지만, 빛을 받으면 죽는다는 현실성 없는 공상마저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다.
내막을 아는 내게는 무엇도 허황했다.
시기상의 절묘함을 봐선 경찰의 자작극인지 몰랐다. 육상 등대와 무수한 가로등은 아무래도 수상했다. 어쩌면 사라진 눈알에는 의미가 있을지도... 무언가 나만이 찾아낼 수 있는 비밀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어쩌면....
...찾아낸다고 하면, 근래 알아낸 것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줄리엣은 사회성이 다른 애들보다 떨어졌다.
분명 머리는 좋은 편인데,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멀찍이서 한참 응시하다가 저 혼자 툭 결론을 내놓는 것이다.
나야 과정을 역산해서 상황에 맞는 말을 했다고 알아듣지만, 도무지 남들과 과정을 공유하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걸 주인님이 말해요?"
마리는 정색하고는 물었다.
"걔도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어요. 누굴 보고 배웠겠어요?"
"누구, 나라고? 난 안 그래."
왠지 마리는 나에 대해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여하튼, 내용이야 어쨌건 그녀와 내가 닮았다는 건 사실이었다.
우린 같은 모양의 상처를 공유했다. 아이는 몸집이 작은 만큼, 줄리엣의 흉터가 더 크게 보였다. 신문팔이 소년 톰의 죽음은 그녀를 너무 이르게 어른처럼 만들었다.
나는 그 아이의 장래에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11월, 어느 한적한 오후.
떠도는 흰 먼지조차 의미 있게 보이는 그런 날이었다. 나는 옷을 널어둔 의자 대신에 침대에 앉아 조간신문을 읽었다.
『11월 27일 야간, 스코틀랜드 야드 등대 완공식』
반 년 가까이 논란의 중심에 있던 등대 완공이 벌써 오늘이었다. 등대가 점등하고 나면 푸른색의 밤하늘은 다시 볼 수 없으리란 게 중론이었다.
나는 기사를 애써 외면하려 하고, 다음 지면으로 넘어가려 했다.
"도로시."
슬금슬금 기어서 다가오던 도로시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러려 했다는 듯이 당당하게 걸어와 봉투를 내밀었다.
"편지 왔어요."
그러고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리고 마리가 차 마시래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빨리요!"
나는 그녀의 재촉에 신문을 반 접어 내려놓고, 부축받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편지 겉면을 읽었다.
발신인은 아서 프랑크였다. 나는 그걸 서재에 꽂았다. 옆에는 읽지 않은 편지 3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모두 같은 사람에게 받은 것이었다.
거실로 나오자, 간촐한 빵과 과자가 준비된 식탁에 다들 모여 있었다.
"빨리, 빨리!"
"토미, 똑바로 앉아. 월터도 앉아 있잖아."
"싫은데."
"마리, 나는 우유 더 타줘."
내가 왔는데도 애들은 눈치 볼 줄을 몰랐다. 줄리엣만 혼자 벌떡 일어나서는 말없이 내 의자를 당겨줬다.
"착하구나."
"네."
매번 그렇듯이 그녀는 성의 없이 답하고는 제자리에 돌아갔다.
"요즘 따라 프랑크 백작님께서 편지가 자주 오네요. 보셨나요?"
"일반 우체국 검열이 없어졌으니까, 거리낄 게 없는 거지."
나는 뜨끔해서 딴소리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무엇도 딱히 특별하지 않았다. 하릴없이 흘러가지만, 앞으로도 무수히 있을 일상의 한 점이었다.
마리는 내게 비인간적이라 했다. 나는 정말 그랬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안에 움튼 이게 인간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 대답을 알았다.
차임벨이 울렸다.
순간 식탁에 고요가 찾아왔다. 우린 가만히 현관 쪽을 바라봤다.
"손님 예정이 있었나요?"
"아니, 전혀."
마리는 습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에 들어갔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줄리엣이 복도로 뛰어나갔다. 야단스럽게 쿵쿵 뛰는 소리가 났다.
"줄리엣."
"네."
제자리에서 목소리만 높여 행실을 지적했더니, 줄리엣은 말로만 건성으로 답했다. 문에서 걸쇠 푸는 소리가 들리고, 도란도란한 말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줄리엣 혼자 말하는 줄 알았는데, 귀 기울이니 제대로 손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다만, 대화 내용이 퍽 이상했다.
"너는 누구야?"
줄리엣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여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오려는 아이들을 뒤로 물렸다. 복도에 나오자, 열린 문 너머의 햇살이 눈부셔 눈을 찡그렸다.
그 때문에 손님의 형체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윤곽만은 어렴풋이 보였다. 한 사람이 서 있었고, 키가 줄리엣보다도 작았다.
어린 아이?
그리 생각하고 있었더니, 줄리엣은 날 발견하고는 답답함을 호소했다.
"아저씨, 얘가 이름도 말하지 않고, 만나야 한다고."
영 다른 이야기지만, 줄리엣은 말이 짧았다. 그런 와중에도 필요한 정보에는 딱딱 전하는 게 머리가 좋다는 증거였다.
나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모두 이해했다.
저 아이는 우연히 어떤 집에 방문한 게 아니라, 명백히 나에게 용무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러면서도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걸 보아 내가 여깄다는 확신이 있진 않은 모양이었다.
이쯤 하면 알 테지만, 나는 어떤 만남에도 대비가 되어 있었다.
아, 그리고 이것도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사람 면전에서 놀란 티를 내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감정 표현을 절제하는 법을 배우는 런던식 영재 교육 덕이기도 하고, 실전 경험으로 웬만한 일로는 자기 통제를 잃지 않게 훈련된 덕이기도 했다.
여하튼, 나는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왕자!"
"아, 경...."
윌리엄 왕자는 젖은 눈으로 내게 다가왔다.
미처 상황 파악이 끝나지 않은 나는 그가 내 옷자락을 잡고 얼굴을 파묻도록 두었다. 줄리엣은 애답지 않은 얼굴로 우릴 꼬나보고 있었다.
우선 나는 줄리엣을 쫓아내려 손짓했다. 그녀가 좀처럼 움직이려 하질 않았기에, 엄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불만스러운 얼굴로 물러났다.
나는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입 떼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왕자는 얼굴을 파묻은 채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우선,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안으로 드시죠."
나는 그를 떼어내서, 먼저 응접실 쪽으로 보냈다.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나가 보니, 나른한 오후 햇살이 쏟아지고만 있었다. 청량한 온기는 이 계절만의 특권이다.
통행객은 드문드문하게 있었지만, 왕자 말대로 수행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미행이 붙은 기색 역시 그랬다.
별반 다를 게 없는 평화로운 날이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고, 그늘이 드리웠다. 햇살로 오른 체온 때문인지 오한으로 털이 뻣뻣하게 섰다.
지금 나는 어둠 위에 서 있다.
일상 사이에 침투해온 왕자는 명백한 이질의 것이었다. 기껏 외면해 온 음지에서 다시 한 번 보내온 초대장이었다. 저 방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번에야말로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깊이 떨어지고 마리란 확신이 들었다.
때때로 세상은 내게 죽어달라 했다. 내 대답은 항상 같았다. 그러나 오늘 나는 주저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내게도 혼란스러웠다.
언젠가는 제 발로 사지에 뛰어들었다가, 이제는 별거 아닌 일상에 매달리며 의무마저 기피하고 있지 않은가.
모두 내 안에 싹튼 무언가 때문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인간처럼 느껴지지만, 인간은 아니다. 나는 이것이, 이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나는 두려웠다.
무서워 한다고? 내가 죽을까 봐?
대답조차 가지지 못한 채,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응접실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나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멈추지 않고 걷는 것만이 특기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세상은 내게 물었고, 내 대답은 항상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