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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고 보니 크툴루-211화 (211/232)

§211. 망설임 없이 동의!

윌리엄 왕자는 의젓이 앉아 있었다.

시간으로 치면 1분 남짓했을 텐데, 자리에 앉은 그는 처음보다 한결 침착해져 있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경이 내 꿈속의 존재만이 아닐 거라 믿었지."

왕자는 아직 소금기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뚱맞은 말은 아니었다.

런던 대화재 당시에 왕자를 보호했던 날들은 이미 에드워드에 의해 꿈으로 바뀌었고, 당시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런던에 드물었다.

그중 하나가 왕자였다. 나는 그게 그의 특별한 혈통과 관련있는지 궁금했다.

"국서께 제 일을 추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은 누구에게?"

"소피입니다."

"그래, 그랬었지. 그녀 일은 실로 유감이야."

왕자는 공적인 자리에서 쓰일 법한 기품 있는 말씨로 애도했다. 나는 그가 말주변 없다고 세평이 났다는 게 잘 체감되질 않았다.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언젠가 경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올 줄 알았네."

그는 다부지게 말했다.

"하나 믿음으론 충분치 않았기에, 사전에 경이 실재하는지, 어디 거주하는지, 또 어떤 인물인지 알고자 했지. 비록 아버지와 소피를 이용한 모양이 되었지만... 믿어주게. 나는 일이 그렇게 끝날 줄은 몰랐네."

잠깐 사이에 벌써 몇 번째 놀라는지 몰랐다.

적당한 빈말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에는 확고한 의도를 품고, 몸소 수행한 자만이 가지는 확신에 찬 어조가 실려 있었다.

설마 이 어린 왕자가 그 정도 선견으로 일을 벌였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감탄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게는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시겠지만, 저는 이미 물러난 몸입니다. 어떤 직무건, 저보다 젊고 적임일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제게 몸소 찾아오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그래도 내게 할 말은 하나뿐이야. 도와주게, 경."

그 말을 듣고, 나는 문쪽으로 고갤 돌렸다.

"왜 그러나?"

"실례를 무릅쓰고, 잠시."

내가 힘겹게 서자, 문 건너에서 우당탕하며 소란이 났다. 문을 열고 둘러봐도, 이미 다들 달아났는지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왕자도 어찌 된 일인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의좋은 형제들이네."

"제가 잘못 가르친 모양입니다. 따끔히 혼내두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니 괜찮네. 그저 부러워서 그랬어."

"그렇습니까."

나는 문을 꽉 닫고, 문에 고리까지 걸어뒀다. 이러면 못된 놈들이 장난칠 수 없겠지. 그 후 제자리에 돌아와, 다리 사이에 지팡이를 끼워 축 삼으며 앉았다.

나이도 엇비슷할 텐데, 이만큼 의젓하란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하고 있자니, 왕자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어쩌면 너무 빤히 들여다보았는지도. 나는 그의 입술이 매마른 걸 깨닫고, 말 돌리며 분위기를 환기할 심산으로 말했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대접 못했습니다. 혹시 차라도?"

"아, 부탁하지!"

왕자는 반색하며 답했다. 아이다운 행동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쑥스러워했다. 그가 평소 궁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짐작되었다.

다만 절박했던 것만은 사실인 듯싶었다.

마침 티타임이 한창이었기에 준비된 차와 빵을 고스란히 가져오자, 왕자는 꼭 며칠 굶은 사람처럼 해치웠다.

비록 왕족에 요구되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기어코 눈치주지 않으려 애썼다. 간신히 배부른 왕자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오해는 하지 말게."

"어떤 말씀이신지."

"형제 얘기 말이야. 형님과 누님은 내게 아주 잘 대해줘."

나는 분명 식사 태도에 대해 변명할 줄 알았는데, 좀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느라 눈치채지도 못한 듯했다.

"하지만 그게 형제로서 올바른 형태인지는 자신이 없어서 그러네. 하물며 종손자 중에는 나보다 나이 많은 아이가 있으니."

왕자는 아이가 비밀 얘기를 하듯이 속삭였다.

그러고 보면 여왕폐하께서 윌리엄 왕자를 회임했을 당시에, 마침 나는 세네갈 강류를 거스르고 있었으니 몰랐지만, 국내에서는 출생에 대한 구설수가 제법 있었다고 했다.

영리한 왕자이다. 생전에 돈 추문 내용까진 몰라도, 주변의 분위기로 깨닫는 바가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지금 성숙함은 그 영향인지 몰랐다.

"그 부분도 차차 묻고 싶었습니다."

"응? 경도 내 가정사에 흥미가 있나?"

왕자는 숨김없이 싫은 표정을 지었다.

"제게 도와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물었다.

"그건 더 없는 바람이나, 어째서 왕자께선 제게 오셨습니까? 주변에는 의지할 여왕폐하와 그 부군, 그리고 형제분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윌리엄 왕자는 침통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지 않네, 경. 너무 늦었어."

"어떤 의미입니까?"

"버킹엄 궁전은 이미 적의 손에 있네. 왕가와 궁중 신하 모두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지. 어머니... 여왕폐하 역시도."

나는 눈을 부릅떴다.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겠지. 미리 눈치채고 있던 나만이 기회를 엿봐 빠져나왔으니까. 바깥에 알려지기도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창밖, 온화한 하늘 아래로는 뛰노는 아이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디에도 소동의 기색은 없다. 자리에 선 나는 천천히 창가 앞에 다가갔다.

"버킹엄 궁전 경비에는 육군 분견대가 동원되는 줄 압니다. 교전이 있었다면 작은 규모는 아니었을 겁니다."

"교전은 일어나지 않았어, 경. 바로 그 병사들이 문제였으니까."

나는 세차게 커튼을 닫았다.

"더 자세히."

왕자는 긴장한 얼굴로 끄덕이고 말했다.

"처음 눈치챈 건, 2달 전이었어. 궁내 경비를 담당하는 우리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행실 수상쩍은 작자들이 대체했지."

"왜 그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까?"

"오직 나만이 눈치챘으니까."

"어째섭니까?"

"궁내 식솔들은 경비 유무에만 신경을 썼지, 각각이 누구인지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어. 사람이 바뀌었는데도 아무도 알지 못한 거야."

분명, 있을 수는 있는 일이었다.

영국은 여전히 계급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였고,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여러 세계로 분리되었다. 아내와 지배인에게 모두 맡겨,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 얼굴조차 모르는 인물도 더러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이는 달랐다. 나도 아이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데, 보통 어른이 쓸데없다 여기는 일에도 홀로 진지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마침, 버킹엄 궁전에는 아주 영리하고 눈치 빠른 아이가 한 명 있었다고 하면은....

"지금 돌이키면 누구와 상담했어야 했어."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랐다. 나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이건 나의 직업적인 버릇이다.

"하지만 누구와도 상담하지 않았다."

"수상하다 해도, 그건 내 기분뿐이었으니까. 그들이 미심쩍다는 증거가 필요했네."

왕자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밤마다 몰래 방에서 빠져나와, 이들이 뭘 하는지 미행했지."

나는 기절초풍했다.

"왕자!"

"알고 있네! 위험하고, 경망스러운 일이란 것쯤은! 하지만, 나는 실제로 보았어! 은밀히 회합하는 그들 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그는 강하게 호소했다.

"눈치채지 못한 척했지만, 그 후로 쭉 그들 동향에 주의를 기울였지. 덕분에 나만이 미리 흉계를 간파하고 직전에 탈출할 수 있던 거야. 저들은 아직도 내가 성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믿을 거야, 설마 내가 밖에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겠지."

꼭 자랑스러워 하는 듯한 말 내용과는 달리 왕자의 어투는 차분하다 못해 우울할 지경이었다.

"정말 아슬아슬했어. 내 한 몸 건사하는 게 한계였지... 거기서 왕실의 책무 따위로 망설였다면 여기 있지 못했을 거야. 경, 그런 의미에서 나는 경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뜻밖의 말에 당황했다.

"비록 그날 일은 꿈이었다지만, 불바다가 된 도시에서 나는 배운 게 많네. 왕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살아남는 법 말이야."

그 말에 나는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만, 오히려 난국에 처한 왕자가 날 위로하는 듯한 말을 하였으니 말이다.

"궁내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게, 참 기묘하네."

"기묘하다뇨?"

"저들이 본색을 드러낸 것은 어젯밤이지만, 무언가 해를 가하거나 하려 하진 않았네. 대신에 외부와의 소통을 모두 차단하고, 외출도, 출입도 금지하고 있을 뿐이지. 어떤 형태로 준동하였다기에는 마치 그런 일정을 수행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전환이었어."

왕자는 고심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어쩌면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는 일인지도. 모여서 따로 논의하는 모습은 못 봤는데, 일제히 모반에 가담했으니 말이야. 지금은 나 이외에는 다들 자기 방에 갇혀 있을 거네, 어머니... 아니, 여왕폐하를 비롯해서. 경 생각은 어떤가?"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나는 버릇처럼 욕지거리를 중얼였다가, 화들짝 놀라며 묵례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경의 입버릇이 사납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왕자는 그리 말하며 손사래 쳤지만, 여간 놀랐는지 얼굴이 금방 새빨개졌다.

"우선, 저들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아니, 벌써?"

"등불파라는 경관들입니다. 의회와 민중의 지지를 업었으니, 버킹엄 궁을 잠식하긴 어렵지 않았겠죠."

내 말에 왕자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되물었다.

"경찰은 본분은 왕가에 충성하며, 시민을 보호하는 일 아닌가. 어째서 그들이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줄곧 비범하였던 왕자였기에, 그 미숙한 답변은 더 돋보였다.

왕자와 소년, 어른과 아이, 성숙과 미숙... 왕자는 양 극단의 면모를 두루 가졌고, 어쩌면 그러기에 더욱 위태롭게 보였는지 몰랐다.

"이치란, 반드시 그러기에 이치인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어떤 상황에, 어떻게든 고수해야만 하는 걸 뜻합니다. 아직 왕자께선 알기 어려우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남 위에 서는 자라면 필히 알아야 합니다. 부정한 일에는 힘이 깃들기 마련이고, 대비하지 않고는 폭풍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란 걸."

정신 차리니, 나는 주제에도 맞지 않는 충고를 입에 담고 있었다. 왕자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놀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는 고개 숙였다.

"괜한 참견을 했습니다."

"아, 아니야, 경. 좋은 이야기였네. 명심하지."

왕자는 고개 저었다.

"계속하자면... 단독적인 계획은 아닙니다. 왕자께서 예상하신 대로 계획되어 있었을 겁니다. 누구나 알아볼 만한 신호가 있었을 테죠. 날짜와 시간은 합리적인 추측입니다. 일제히 준동하기에 더 없는 지표이니까요."

나는 그리 말하면서도 미심쩍었으나 계속했다.

"그리고 독단적이지도 않을 겁니다. 우선, 목적이 흐릿합니다. 저들이 반란으로 요인들을 억류했다면, 그를 바탕으로 교섭해야 합니다. 대의를 내세우건, 요구를 제시하건... 하지만 지금은 구속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고요합니다.. 외부에 누군가 물밑 작업을 하는 협력자가 있다 여기는 게 합리적이겠죠. 이번 경우는 경찰청이 유력합니다만."

과연, 왕자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말에 담긴 은밀한 함축을 놓치지 않고,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테지. 하지만... 경은 내 말을 믿지 않나?"

"저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나는 단언했다.

"다만 판단할 따름입니다. 왕자께서는 절 속이지 않을 테고, 상황을 잘못 판단할 만큼 안목 없지 않으리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왕자는 두 차례 정도 머뭇거리다가, 끝내 의아하단 투로 물었다.

"그거와 믿는 게 뭐가 다르지?"

나는 쓴웃음 지었다.

"저는 그렇게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저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반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위협 없는 요구를 정부가 받아들일 리 없고, 왕가를 해치면 대의를 잃으니, 인질은 인질로서 기능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군권의 용인 없이는요. 버킹엄 궁전이 아무리 수성에 유리한 조건이라 한들 육군 화력에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궁전의 이상은 바깥에도 곧 알려질 테고, 사흘, 어쩌면 나흘이면 종식될 소동입니다."

겉으로는 긍정적인 전망이나, 윌리엄 왕자의 표정은 거듭 어두워졌다.

"아마 이 대답에는 만족하지 않으실 테죠."

"미안해, 경. 나는 그리 침착하게 관망할 수 없네. 그분은 내 어머니고, 아버지이며, 평생 보살펴준 유모와 교사, 그리고 가신들이야."

자란다는 것은, 상처 날 부위가 늘어나는 것과 같다.

왕자는 너무 일찍 성숙했다. 그는 통증을 견디거나, 숨길 만큼 어른이 아님에도 남들보다 상처받았다. 그는 나와 눈 마주치지 못하고, 연신 제 무릎을 손으로 문질렀다.

왕자는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안다.

"경청하겠습니다."

나는 눈 감았다.

"부디 도와주게."

지금 세상이 내게 죽어달라 했다.

"황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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