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212화 (212/232)

§212. 明日 (1)

현관에는 음울한 음영이 묻어 있었다. 명과 암이 아닌 습도와 관련 있는 것이었다. 줄리엣은 외출하려는 날 붙잡고 물었다.

"쟤, 진짜 왕자님이에요?"

"그래."

"아저씨가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잘 모시고 있어라, 마리는?"

"방에요."

본다고 보일 턱도 없는데, 나는 괜히 복도 건너를 힐끗 봤다.

"오늘은 집에만 있어라."

"왜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뭐지?"

"...왜, 요?"

"그래, 그거. 이유는 묻지 말고, 그리고 나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으면 마리가 하란 대로 하거라."

줄리엣의 시선에 의심이 차오르고, 나는 실수를 깨달았다. 이 영악한 아이에게 지나치게 많은 빌미를 보이고 만 것이다.

"이런, 늦었구나. 다녀오마."

나는 말과 몸을 급하게 돌렸다. 현관은 어두웠다. 나는 이곳이 그렇게 어두운 장소인지 처음 알았다. 어쩌면 돌아와서 조명을 걸어둬야 할지도.

"아저씨, 죽으러 가요?"

줄리엣은 등에 대고 물었다.

"무슨 소리니."

"애 취급하지 마요. 다른 애들이면 몰라도, 저하고 마리는 아니까요."

잠깐 주저했지만, 얼버무린다고 속아줄 아이가 아니었다. 그보다 나는 먼저 신경쓰이는 점을 묻기로 했다.

"잠깐, 너는 그렇다 쳐도, 마리라니?"

"아저씨가 어디 갈 때마다 마리는 기도해요. 몰랐죠?"

나는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몰랐어, 전혀."

대신 닫힌 문만 마주하며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아저씨?"

줄리엣의 부름에, 나는 가까스로 현실에 돌아왔다.

"일단 오해를 하나 정정하자꾸나. 나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단언코 어떤 경우에도 그런 목표를 가진 적은 없어. 오히려, 그보다는... 구하러 가는 거지."

"왜요?"

아이처럼 순진한 질문이면 좋으련만, 나의 소박한 기대와 달리 눈앞에는 아니나 다를까, 악착같이 날 추궁하는 숙녀가 서 있었다.

"내 의무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냉소적인 시선이었다. 빈말로도 귀엽지 않았다.

"지금 도시에서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어. 그리고 그걸 알면서 저지할 수 있는 건 나뿐이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다친단다. 그러니 네 질문에 답하자면 해야 하고, 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남이잖아요."

"그래, 남이지. 하지만, 그게 뭐가?"

그녀는 소름 끼치는 무표정으로 응시했다. 얼핏 보면 화내는 것 같지만, 나는 그게 깊이 고찰할 때의 버릇이란 걸 알았다.

"복잡하게 생각할 수록 본질에서 멀어지는 일은 드물지 않아. 좀 더 단순하게 보렴. 누가 강에 빠졌다면 누구라도 돕고 싶어하겠지. 가만 두기에는 마음이 불편하니까. 그러면 행동하게 되지. 나를 위한 것이지만, 남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 그게 도덕이란다."

나는 말을 멈췄다. 스스로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줄리엣은 입 다문 날 보며 고개만 옆으로 기울였다.

"그게, 나의 도덕이지."

겨우 말을 매듭짓자, 줄리엣은 정색했다.

"바보 같아."

그러면서 볼멘소리로 투정했다.

"왜 모르는 남에게 그만큼 신경 써야 해요? 결국 자기가 손해보는 일이잖아요. 저는 죽어도 그렇게 안 살 거에요."

"아니, 너도 때가 오면 그렇게 할 거란다."

"무슨 근거로요?"

나는 무심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줄리엣은 자기가 무시당했다고 여기는지 매섭게 노려봤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조그만 녀석이 근거처럼 어려운 단어를 써가며 따져대는 모습이 누구하고 똑 닮았다. 그게 정말이지 우스웠다. 항상 그렇듯이, 어쩌면 마리가 맞았을지도.

"너도 그럴 거야. 네가 누구한테 배웠는데."

어린 숙녀는 내 답변에 질색했다. 나는 다시 웃었다. 다시 보니, 문은 그리 어둡지도 않았다.

문고리를 쥐자, 줄리엣이 내게 말했다.

"죽지 마요."

"위로보다는 진솔한 말을 좋아하겠지? 나라면 그럴 텐데."

대답은 없었다.

"노력하마. 내가 너흴 두고 어디 가겠어."

문밖에 나오자, 한가로운 오후 햇살이 쏟아졌다.

마침 집앞에선 가로등 공사가 한창이었다. 말 많은 화이트홀 선이 이제야 당도한 것이다.

내 말은, 정말로 늦은 편이었다. 버킹엄 궁전마저 육안으로 보이는 여기는 말 그대로 '화이트홀'과도 멀지 않았다. 전체 공사가 끝나가는 막판에야 시작했단 사실은 꽤 의아했다.

보도에는 인부가 파둔 흙구덩이가 움푹했다. 다시 보면 그 간격이 너무 짧았는데, 누구도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어이!"

멀리서 어떤 아이가 날 보며 소리쳤다. 그쪽을 보자 그는 우스꽝스럽게 쩔뚝거리는 시늉을 해댔다.

"망할 놈들!"

내가 발끈해서 욕설을 내뱉자, 아이는 제 또래 무리와 왁자지껄 달아났다. 한편에서 떠들던 주부들은 힐끔 내 쪽을 보더니 다시 자기네 수다로 돌아갔다.

전에는 흔했지만, 근래에는 잘 보이지 않던 풍경이었다.

대화재의 상처는 2년 새에 느리지만 분명 아물어갔다. 하지만 다시 군화발에 밟히면 이번에야말로 영영 사라질지 모르는 풍경이기도 했다.

의지할 경찰이 누구보다 굳건해야 할 여왕폐하를 인질삼고, 자랑스러운 군인이 수도 왕궁을 공격해야 한다면 시민들은 무얼 믿을 수 있을까.

나는 오랫동안 어떤 의무를 체감해 왔다.

군인으로서, 시민으로서, 어쩌면 여왕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의 짐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이 옳았다. 꼭 내가 짊어질 필요 없는 짐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버킹엄 궁전 쪽을 바라봤다.

멀리 보이는 성의 푸른 윤곽은 싸늘하게 고요할 뿐이었다. 저기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단들 밖에서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수십, 어쩌면 백 이상의 경찰이 지키고 있는 궁전에 침투하여, 왕가를 비롯한 수십 명의 식솔을 해방하는 방법.

"현실적이지 않아."

초조함에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근본적인 해법이 있을 테지."

무작정 뛰어 나오기는 했지만, 나는 이번 일에 대해 아는 게 적었다.

그간 모른 척 외면해댄 대가를 호되게 치루는 셈이었다. 나는 가진 단서를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왕자의 설명 중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그의 설명이 잘못 되었다기보단, 상황 자체가 워낙 묘연했다.

매번 말하듯이 런던에는 우연한 일은 없다. 모든 부자연스러운 것에는 저만의 이유가 있었다.

왕자의 증언대로라면, 저들, 등불파는 궁을 점거하고 2달여간 침묵했다. 그 잠복기에 대해선 궁리할 필요 없없다. 저들은 어떤 날을 기다린 것이다. 마침 오늘이 경찰청에 아주 특별한 날이니까.

『11월 27일 야간, 스코틀랜드 야드 등대 완공식』

나는 조간에서 기사 제목을 떠올렸다.

저들이 본색을 드러낸 것은 전날, 11월 26일 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절묘했다. 언뜻 보면 빈틈 없어 보이는 추측이지만, 사실은 꽤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등대 완공일과 맞추자는 게, 계획치고는 아주 허술했다. 비록 왕자의 말을 전부 맹신할 수는 없지만, 그가 옳다면 저들에겐 사전에 회합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면 전부터 일정을 정해두었다는 건데, 아무리 맞추려 해도 공사는 변인이 많은 작업이었다. 하물며 연중 절반 정도에 비와 안개가 오는 런던에서야.

기간에 여유를 두었다면 이해는 가지만, 등대란 게 반 년만에 그리 뚝딱 지어지는 것이던가. 사전에 조금이라도 공사 진행에 대해 좀 알아두었다면 확신을 가졌을 텐데.

"필레몬아, 대체 아는 게 뭐냐!"

나는 답답한 마음에 애타게 부르짖었다.

"이제서 한탄한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진짜 미심쩍은 부분은 달리 있으니까. 그게 분명 이번 사건의 본질일 거야."

나는 가정했다.

만일 왕자가 틀렸다면, 저들이 어떻게든 사전에 날짜를 맞췄다면, 어째서 어제 일을 벌였을까.

시간으로는 고작 하루 차이였지만, 이런 중대사에는 시간, 분조차도 일을 좌우했다. 궁내 궐기 같은 사태를 벌이고도 손 놓은 채 황금시간을 흘려보내는 속셈이 도저히 이해가질 않았다.

지금까지 치밀하게 밑작업한 것에 비해 어설픈 결말 아닌가.

"어떤 신호가 있었을 거야."

처음으로 돌아가, 결국에는 기준이었다. 그게 날짜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궁내 경비 모두가 대번에 알아차릴 만큼 뚜렷하지만, 다른 누구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만한 징조 말이야. 등대와 맞추려 했던 그 신호가 예정보다 일렀던 거지."

그렇다면 첫 추측대로 등대는 아니었다.

등대의 완공식은 오늘이며, 전에는 한 번도 점등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눈에 띄기도 하고 말이다.

"아니, 점등이라면, 다른 것도 있지."

나는 하나의 착상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경험상 런던에서 우연한 일은 없었다. 육상 등대는 어째서 화이트홀 4번지에 지어졌을까, 단지 거기에 경찰청이 있어서?

가로등은 어째서 10보 간격으로 놓여서는 그토록 뚜렷한 빛의 차이를 내었으며, 어째서 버킹엄 궁전, 화이트홀 4번지와도 가까운 시내 한복판인 내 자택에는 그리 늦게 공사를 시작했을까.

누구라도 알아차릴 변화? 그건 너무 뻔하다! 대체 환한 빛보다 전통적인 신호가 어디 있다고!

집 앞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공사지만, 왕궁 앞 공사가 예정보다 일찍 어제 끝났을 것이다. 왕궁에선 전날 밤, 확연히 달라진 거리의 불빛이 보였을 테고....

"그래, 그게 신호였어! 하지만, 다음 계획은 뭐지?"

그들이 무얼 획책하든 여기서 멈출 리는 없었다. 이번에도 어떤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테고, 그게 뭐냐면....

"관계 없기는 개뿔이!"

나는 펄쩍 뛰어오를 기세로 외쳤다.

"염병할 놈의 등대잖아!"

겨울 해는 짧다. 좀 전까지 화창하던 하늘이 붉은빛을 띄기 시작했다. 저 멀리 바다에선 어둠이 몰려고 있다.

밤이 온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야드.

아직 100년이 되지 못한 런던 경찰의 역사가 경찰청 건물에 덧씌워진 일은 그리 의외랄 것 없었다. 스코틀랜드 야드가 경찰인 동시에, 경찰이 스코틀랜드 야드인 것이다.

나도 한때는 협력자 신분으로 여길 빈번하게 드나들었지만, 거리 풍경은 못본 사이에 상당히 변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빛이었다. 대로에는 거대한 어둠이 배어 있었다.

건물 옥상의 흉물 때문이었다. 우악스럽게 쌓아 올린 등대는 공학자가 아니고선 이해할 수 없는 구조로 간절하게 버텨 서고 있었다.

이러니 통행객이 숨 죽여 다니는 것도 당연했다. 건물은 워낙 아슬아슬해서 작은 날숨조차 탑을 무너트리고 말 것처럼 불안했다.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이해했다. 처음부터 무리한 게획이었다.

용도불명의 육상 등대, 건축보다는 토목 영역에 걸친 증축, 그 결과물이 스코틀랜드 야드 등대라는 괴물이었다. 지탱하기 위해 쇠사슬을 덧댄 모습은 웅크린 죄수처럼도 보였다.

불 꺼진 등대의 비참한 풍채를 올려다 보자, 얼굴에 찬 물방울이 떨어졌다. 날이 갑자기 어둑해지더니, 소나기였다.

여기저기서 우산 펴는 소리가 들렸다. 호사롭다 생각했더니 취재 나온 기자들이 어깨를 적셔 가면서까지 카메라를 지키려고 안달법석이었다.

나는 빗물을 맞으며 점등식 일정을 회고했다.

이건 시간벌이다. 원론적인 해결 방법은 아니었다. 등댓불을 막는다고 모든 게 해결될 리 없잖은가.

점등식을 망치는 계획도, 홀로 버킹엄 궁전을 해방할 방법이 없기에 왕립군이 나설 시간을 버는 것에 불과했다. 어쩌면 제때 점등되지 않으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걸 깨닫고 반란 세력이 와해될지도.

모두 불확실한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나쁜 적이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일을 방관해 왔고, 뒤늦게 관여하려 하니 대가를 치룰 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죽을 지도."

그리 말하면서도 오후내 우중충했던 기분이 한결 가벼웠다. 그야 그렇다. 나야 딱히 죽음을 겁 내는 성격도 아니지 않던가.

결국, 나는 인정했다. 나는 왕자의 부름이나, 사명 따위의 고결한 의무를 지지 않았다. 그저 누구나 간직한 바람이다. 내 안에 싹튼 두려움의 실체이기도 했다.

나는 내 삶이 바뀌지 않길 바랐다. 그게 전부였다.

정면 입구에 모여든 기자들 몰래, 나는 골목을 돌아서 건물 배후로 다가섰다. 수사국에 조력하던 때부터 알고 있던 샛길이었다.

상당히 오랜 일이다 보니 진작 막혔을 줄 알고 걱정했지만, 왠지 걱정이 무색하게도 문은 열려 있었다. 경비는 없었다.

나는 계획은 점검했다. 점등을 저지할 방법은 두 가지였다.

등대를 무너트리거나, 점등식을 거행하지 못할 만큼 큰 소동이 벌어지거나... 물론 후자 외에는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저들은 이미 강을 건넜다. 영 서장은 어떤 소동에도 강행하려 할 테고, 어쩌면 그때 내 특기가 도움이 될지 몰랐다. 여러 번 해보았기에 썩 잘하는 일이었다.

나는 브라이언 영을 죽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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