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明日 (2)
한 번 그리 마음 먹으니 주저가 사라졌다. 여긴 경찰청 본부, 사조직화한 무력 집단의 본거지이자 영 서장 권력의 중추였다.
그는 보호받고 있을 테고, 일이 순순하게 풀릴 거란 기대는 안 했다. 어쩌면 무고한 피를 보게 될지도.
"내가 이럴 나이는 아닌데."
나는 푸념하며 나아갔다. 매번 그렇지만, 전방을 살피며 나아갈 때마다 지팡이가 이렇게 거슬릴 수 없었다.
창문과 방문이 여럿 열려서 실내에도 바람이 세게 불었다. 밖에서는 비 냄새가 들었고, 그때마다 천장에 찬 연초 내음이 코끝에 알싸하게 맴돌았다.
복도는 그저 고요했다.
좀 전까지 사람이 있던 흔적은 있었지만, 정작 인기척은 어디서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따라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가 괜히 을씨년스러웠다.
운 좋게도, 나는 계단에 들어갈 때까지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았다.
건물은 4층으로, 내가 향하는 것은 그보다 한 층 높은 옥상이었다. 그래도 위로 향하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이 도시에서 죽음이란 주로 하강하는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비가 많이 온 탓일까, 다른 때라면 곧장 알았을 텐데, 나는 3층에 도착하고서야 어떤 냄새를 맡았다.
뭐라 말하기 야릇한 향이었다.
여러 냄새가 뒤섞인 탓에 향수처럼 번갈아 나타났는데, 몹시 자극적이었다. 어느 쪽이건 런던에서 산다면 익숙할 향취였다.
혈액과 수은.
위로 향할 수록 냄새는 가까워졌다. 나는 4층에 올랐다. 옥상 쪽으로 이어진 계단에는 공사 흔적인지 짐이 잔뜩 쌓여 있었다.
비록 그 틈에 가려져 있었지만, 이렇게 짙은 냄새가 난다면 숨긴 의미가 없었다.
어쩐지 일이 수월하다 했다.
막혔을 줄 알았던 통로는 열려 있었고, 여기까지 오도록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다. 살인을 각오한 내 손은 여전히 깨끗했다.
항상 그렇듯이 우연은 없다. 단순한 결론이었다.
선객이 있었다.
바닥에는 시체가 뉘여 있었다. 경찰이었다. 나는 다가가서 상태를 살폈다. 아직 체온이 남았고, 바닥의 피는 마르지 않았다.
죽고 기껏해야 십수 분이었다.
사인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창백한 얼굴, 총알이 폐를 뚫어 질식한 것이다. 상처로 봐서 소총은 아니고, 권총탄 같았다. 나도 쓸 만한 것을 하나 가지고 있지만, 주로 경찰이 쓰는 물건이었다.
일단 분명해진 것은 이랬다.
우발적 살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명확히 살의를 품었고, 단 한 발로 치명상을 입혔다. 군인보다는 노련한 살인자였다.
뻔뻔하게 모른 척 주절댔지만, 사실 나는 범인이 누군지도 알았다.
시체에는 안구가 비어 있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연쇄 살인마 잭의 수법이었다. 다만, 알려진 것처럼 눈알을 뽑아갔다기엔 미심쩍었다.
나는 텅 빈 눈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장갑이 뾰족한 무언가에 걸렸다. 그걸 조심스럽게 집어서 뽑아내자, 왠 유리 조각이었다. 아직 따뜻했고, 수은 냄새가 배어 있었다. 깨진 전구처럼 말이다.
시체 주변에는 이와 비슷한 파편이 꽤 흩뿌려져 있었다. 우연치고는 그 양과 빈도는 꼭... 두 개의 안구 정도 크기의 전구가 깨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더 조사하며, 몇 가지 사소한 발견을 했지만 특기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지체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기에, 나는 계단 난간을 붙잡고 함겹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저 올랐다. 길 끝에는 외부 옥상으로 이어진 문이 있었다.
나는 조심히 문을 밀어 나왔다.
밖에는 아까보다 거세진 빗발이 쏟아지고 있었다. 옥상에서는 시내 정경이 펼쳐졌지만, 빗줄기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다.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이 환하게 보였다.
반면, 나는 어둠 아래에 있었다. 가까이서 본 등대는 더욱 참담했다. 묶인 쇠사슬은 한계까지 팽팽해서는 바람에 따라 울부짖었고, 그때마다 탑이 조금씩 좌우로 기울었다.
"꼭 우는 듯하네."
공연히 감상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보면 그리 생각할 모습이었다. 아무대로 현실적인 풍경이 아니었다.
이러니 나는 이런 것까지 만들어 영 서장이 꾀하는 게 뭔지 자못 궁금해졌다. 등대 아래에는 위로 오르는 부실한 사다리가 하나 걸려 있었다.
나는 거길 향해 천천히 다가가다 걸음을 멈췄다. 처음에는 보지 못했으나 앙상한 등대 철골 사이에 낯선 물건이 놓여 있는 탓이었다.
작은 원형 탁자 위에는 옥색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길이와 너비가 두세 뼘 정도로 같지는 않았다. 틈이 있는 걸로 봐선 뭔가 넣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디로 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 공간에서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물체였다. 거기에 정신이 팔린 탓에, 눈치채는 게 조금 늦고 말았다.
나는 천천히 몸 돌리며, 오른손을 위로 들었다.
"쥐새끼답게 눈치 하난 빠르군."
뇌를 다쳐서 움직이질 못해? 그따위 소문을 퍼트린 작자가 누군지 궁금했다. 영 서장이 겨눈 총구는 정확하게 내 미간을 향하고 있었다.
"건강해 보여서 좋네그래."
"뭘 하려 했는지 몰라도."
나는 상황을 살폈다. 그의 경력을 따지자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권총 파지법이 자연스럽고 정확한 게 실수를 바랄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자비도.
"맹수로군."
영 서장은 말했다.
"지금도 기회를 엿보고 있어. 길들여지지 않은 눈이야. 하지만, 언제나 내 승리야. 이유가 궁금한가?"
나는 답하지 않았다.
"궁전에선 뭘 하고 있지?"
"취조는 경찰이 시민에게 하지, 그 반대가 아니라."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는 당장 쏠 것처럼 보였고, 사실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가 쏘지 않는 이유가 뭐든간에, 이대로 있어서는 악화될 뿐이란 계산이 섰다. 영 서장은 과연 노련해서, 곧바로 그걸 눈치챘다.
"헛생각 말게."
나는 그 말을 신호 삼아 몸 던졌다.
총성이 울리고, 격통이 일었다. 환부를 내려다 보니, 어깻죽지 쪽이 붉게 젖고 있었다. 팔에 힘을 주려하자 핏물이 솟구쳤다.
그래도 도박은 성공했다, 당장은.
영은 달아오른 얼굴로 노려볼 뿐, 더 쏘지 못했다.
"내려 놔."
"이게 꽤 소중한가 보지, 안 그런가?"
나는 고통을 참으며 인질 삼듯이 옥색 상자를 끌어 안았다. 여간 무게가 아니라 한 팔로 들 만한 게 아니었지만, 나도 여간 남자는 아니었다.
"너 같은 놈이 만질 게 아니다."
도박이란 표현은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이걸 노린 데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영 서장이 나와 대화하며 몇 번 힐끔거린 게 전부였다.
상황이 이만큼 나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먹혀 들었다. 나는 서둘러 뒷걸음질을 반복해, 난간 아슬아슬한 곳까지 물러섰다.
"날 죽이면, 4층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야."
뒤로는 아무 안전 장치도 없었고, 한 번만 헛디뎌도 곧장 추락할 듯했다. 찬 비가 딱 좋게 몸을 식혀주었다.
"그만!"
영 서장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먹혀든 것은 좋았지만, 이쯤 하니 아무래도 호기심이 일었다.
"이게 뭐길래 그리 소중하게 여기지?"
"희망."
그의 대답은 다소 생뚱맞았고, 나는 반사적으로 비꼬듯이 물었다.
"이게 판도라의 상자라도 된다고 할 셈인가?"
"그렇게 거창한 것까진 아니지만."
영 서장은 말했다.
"하지만 내게는 전부야."
사실 이건 내 실수였다.
상대와 상황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나는 그가 더 이성적이라 믿었는데, 그는 나만큼이나 과격한 성정이었던 것이다.
총구가 불을 뿜고, 내가 아차하기도 전에 지팡이가 맞아 튕겨나갔다. 힘껏 체중을 실고 있었기에, 몸의 균형이 무너지며 나는 왼쪽으로 빙글 돌았다.
영 서장은 문자 그대로 날았다.
가까스로 내가 충격에서 회복했을 무렵, 그는 이미 내가 놓친 옥색 상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품에서 권총을 뽑았지만, 상대가 조금 더 빨랐다. 총알이 내 손에 든 총을 맞췄다. 그 충격으로 권총은 튕겨 나가고, 오른손의 떨림이 멎질 않았다.
나는 몸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으려 했으나, 영이 달려와서 왼손을 짓밟았다.
"악!"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가슴을 걷어찼다. 의식이 산만해졌다. 눈앞이 새까맣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 개새끼가! 범죄자 새끼!"
그가 날 구타할 때마다 불꽃이 번쩍 번쩍 튀었다.
"너 같은 놈은 항상 그렇지! 하지만 이제 오늘로 끝이다! 내가 악에 종지부를 찍겠다! 모든 범죄를 없앨 거고, 그 시작이 너다!"
일단, 폭력이 멈췄다.
다시 눈을 뜨려 했지만, 따끔거리고 앞이 잘 보이질 않았다. 폭우 탓인지, 아니면 얻어맞은 눈이 부어서 그런지 몰랐다.
영은 비를 맞으며 상반신을 들썩였다. 그는 꽤 지쳤는지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다.
"그건, 불가능해."
"말할 기운이 남았나?"
나는 끓는 가래를 뱉었다. 붉은 핏물이 빗물에 섞여 흩어졌다.
"네가 경찰을 늘리고, 시민을 탄압하고 뭐가 바뀌었지?"
"범죄가 줄었지."
"그리고, 더 심각해졌고. 아직도 모르겠나? 모든 범죄를 없앨 수는 없어. 그건 망상이야."
"아니, 나는 알아. 모든 범죄에는 공통점이 있거든. 알고 있나?"
한결 여유가 돌아왔는지, 영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악행은 어두운 곳에서만 일어나지."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질 못했다.
"모르겠나? 어둠이 없다면, 범죄는 일어나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도시에서 어둠을 추방하기로 한 거다, 영원히!"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브라이언 영은 미쳤다.
"고작, 그따위 유치한 망상이었다고?"
나는 떠뜸거리며 물었다.
"의회를 장악하고, 여왕폐하를 볼모 삼아, 도시 전역을 뜯어내어 공사한 이유가... 고작, 고작 그런 유아적인 몽상 때문이라고?"
"너 같은 범죄자가 나의 고결함을 이해하리란 기대는 안 했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물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 대해 알고 있나?"
순간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또다. 본래는 있을 리 없는 단어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알프스 산맥의 군소 가문에서, 유럽의 지배자까지 등극한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전설이지. 그건 여러 장소와 시대에서 다른 이름으로 나타났다. 누군가는 소방수와 기관장의 나라라며, 또 누군가는 쌍둥이 흉성의 세계라고 불렀으며, 북극의 이누이트는 쿠투잔각악사루닉누나(Kutjangakaksarniknuna), 물구나무 선 오로라의 땅이라고 부르며 외경하였지."
영의 입에서는 도저히 그가 할 것 같지 않은 말들, 학구적이며, 또 신비적인 설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여기 런던에서는 이렇게 부르지. 무한과 영원, 혹은 영원과 무한의 도시."
"이상하다 생각했지."
마침내, 나는 모든 사태의 배후를 깨달았다.
"서장이라 한들 일개 공무원이 주도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크다 했지. 그들이 속삭인 비밀과 지식이 자넬 바꿔 놓은 거야. 그 모든 헛된 망상이...."
"헛되지 않아!"
영의 고함에 귀가 얼얼했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빗소리가 다시 돌아왔다.
"사람의 목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아나? 좋은 게 아니야.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관리 위원회는 내게 접점법을 알려줬다. 그저 조금만 오른쪽으로 머리 돌리면 되는 거야. 그러면, 찬란한 내일만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왼 광대뼈와 턱에 양손을 붙였다. 그가 뭘 하려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자기 머리를 스스로 비틀어 꺾었다.
"빛은 다시는, 이라 말하지 않는다!"
섬광이 일었다.
정면에서 맞은 광파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았다. 귀로는 빗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뭔지 모를 온기가 얼굴을 보듬었다.
차츰 눈이 빛에 익숙해지며, 시계가 선명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광원의 정체를 살폈다. 흐린 세상에서 영 서장은 환하게 보였다.
문자 그대로 그는 빛나고 있었다.
전구였다. 영의 머리가 있을 자리에는 대신 커다란 전구가 놓여 있었다. 거기서 흐른 빛이 옥상 전체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처음에는 눈이 손상되어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그렇지 않았다.
옥상에는 우리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건...."
탕, 하고 총성이 울렸다.
전구 유리가 깨져 사방으로 튀고, 빛과 열이 사라졌다. 영의 몸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졸지에 어둠에 낙오된 나를 향해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질 수록 빗소리 사이에서 까득, 까득하는 이 가는 소리가 섞여왔다.
"윌슨."
까득, 까득.
"자넨가?"
까득, 까득.
대답은 오지 않았다. 어쩌면 빗줄기에 삼켜진 걸지도. 대신에 다른 곳에서 숨 꺼져가는 혼잣말이 들렸다.
"어두운 밤...."
영은 피 흘리며 중얼였다.
"꼭 오늘처럼 어두운 날이었지... 런던에서는 그리 드물지도 않은 밤."
그리고 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비 내리는 옥상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는 결연한 동작으로 영의 시체에 다가갔다.
"이봐."
내 부름에 답하지 않고, 그는 영의 가슴을 밟고, 다른 발로는 턱 부분을 걷어찼다. 머리가 전구처럼 뽑혀 나왔다.
나는 한없이 두려웠다.
"윌슨, 자네가 잭이었지?"
그는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 붕대로 덮인 몸 아래는 쉼 없이 꿈틀거리며 까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전부 알고 있던 거야. 내 말이 틀렸나?"
까득, 까득.
나는 습관처럼 상대의 눈을 봤지만, 장소가 어두운 탓에 보이질 않았다. 그가 나를 내려다 보자, 나는 심장이 옥죄이는 듯했다.
그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선생님, 괜찮습니까?"
윌슨이 불쑥 손 내밀었다.
"엉망으로 당하셨군요."
"그래."
나는 답했다.
"누가 보고만 있던 탓에 말이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멀리서는 둘 중 누굴 쏴야할 지 몰랐거든요."
"변명이 늘었어."
내가 볼멘소리 하자, 윌슨은 우물쭈물하며 입 다물었다.
"결국, 자네가 전부 해냈군."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며 말했다.
"늙은이가 방에 처박혀 있는 동안 말이야. 솔직히, 나는 아직도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모르겠네."
"선생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연세도 아니잖습니까."
분명 그런 식으로 말했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가 그런 식으로 답하자 굉장히 심통이 났다.
"나한테 그런 말하기에는 백 년은 일러."
윌슨은 마른 기침을 했다.
"그래서, 어쩔 텐가? ...이봐?"
"선생님, 보세요."
나는 그가 향하는 쪽을 돌아봤다. 호우 속에서 도시는 힘차게 빛나고 있었다. 불빛으로 가득한 시내는 보석함처럼 반짝였다.
윌슨은 끝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 서장이 하던 말에는 하나도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뭐... 아름답긴 하군."
"런던이 이렇게 빛나는 줄 몰랐습니다."
"자네가 지킨 거야."
그는 날 돌아봤다.
"나는 별로 칭찬 안해."
"압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가, 천천히 영의 시체 주변에 놓인 옥색 상자로 다가갔다. 꽉 닫혀 있지만, 분명 안에는 뭔가 들어 있었다.
"비취입니다."
"알고 있나?"
"자세하진 않지만... 관리 위원회와 엮인 인물은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와 관련 있는 건 분명하겠죠."
"영 서장은 희망이 들었다 했지."
굳게 고정되어 있긴 했지만, 잠근 것은 아닌지 힘으로도 뜯어낼 수 있었다. 나는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가만히 살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고형물이 아닌 뭔가가 들어 있는 듯했다.
"뭡니까?"
나는 답하지 않고 손으로 퍼올렸다. 가까이서 보니 잿빛에 가까운 흰 가루였다.
"그게 뭐죠?"
"뼛가루야."
윌슨이 날 돌아봤다.
"틀림없어. 많이 봤거든."
"그러면."
그는 마저 말하지 못했다. 영은 죽었고, 이게 그의 과대망상적인 계획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우리는 묘한 무력감 속에, 그나마 빗물이 덜 새는 등대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윌슨은 내 상처를 옷가지로 처치했다. 여전히 피는 흐르고, 열도 났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런던에는 오백 만 명의 시민이 살고 있습니다."
한참 뒤에 윌슨은 말했다.
"그를 죽여야 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자연스럽게 살인조차 계산에 넣게 된 겁니다."
나는 침묵했다.
"제 모습이 어떻습 니까?"
그는 주섬주섬 붕대를 풀었다. 그 형상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인간을 흉내 낸 섬뜩한 조형물처럼 보였다.
"아직 거울을 보지 않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그렇게 많이 바뀌었습니까?"
"있잖나. 나는 무서웠네. 이 나이를 먹고 나서, 간신히 소중한 게 생기고, 변화가 두려워진 거야. 특히나 자네 일은 더욱이... 그래서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지."
나는 고백했다.
"자네는 바뀌었어."
윌슨은 입가를 씰룩거렸다. 동시에 몸을 떨기도 했다. 그 둘이 별로 다른 것 같진 않았다.
"3년 전에는 간신히 쫓아오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내가 자네 뒤를 따라가잖나. 멋진 일이야."
어떤 입은 웃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어떤 입은 울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윌슨은 조금 뒤에 말했다.
"자수하려 합니다."
"자네가 책임질 필요 없는 일이야."
그는 고개 저었다.
"자포자기한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생각하던 일입니다."
"못 나올 수도 있어."
어쩌면 그보다 나쁠지도, 나는 차마 그 가능성을 입에 담지 못했다.
"제 죄는 제가 압니다. 이유야 어떻든 저는 인륜을 저버렸습니다. 정당한 죄값을 치뤄야 합니다. 다행히 이번 일로 더럽힌 손은 저뿐입니다."
"그 수밖에 없나?"
윌슨은 단호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출소 후에는 형사로 복직하려 합니다."
옆 얼굴은 붉게 상기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워낙 도시가 밝아서 잘못 봤는지도 몰랐다.
"그래, 그래야지."
나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자네에게는 천직이야. 자네보다 더 잘 어울리는 청년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 꼭, 그래야지."
지금은 비가 멎지 않길 바랐지만, 어쨌거나 이 밤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