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영원토록 침묵
"이건 제가 알아낸 비밀입니다. 그날 제가 구한 좀도둑 말입니다."
윌슨은 마지막 말을 남겼고, 나는 깊게 잠들었다. 다시 깨어난 것은 모든 일이 끝난 이후였다.
... ... .
... ... .
... ...국장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바닥은 아직 축축하지만, 날씨는 맑았다. 젖은 풀잎이 생기로우니 장례에는 더 없는 날이었다.
내 심정이 어찌나 복잡했는지, 전전날 예의 차린 부고문과 초청이 들어왔을 때도 바로 고사하고 말았다. 다만 운구 행렬이 집 앞을 지나간다고 하자 아이들이 워낙 보채어서 끝내 구경에 나가고 말았다. 막내 월터는 마리와 집에 남기로 했다.
여하튼, 아이들이 뭘 예상했건, 지금 거리 풍경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렬이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길가에는 애도하는 주민으로 들어찼고, 여기저기서 들리는 곡소리는 분위기를 한층 침통하게 하였다.
사람이 많은 장소라 걱정했지만, 아이들도 장소의 영향을 받았는지 오늘따라 얌전했다.
"괜찮을까요?"
어느 틈엔가 내 옆을 꿰찬 줄리엣이 물었다.
뜻밖의 일만 가득했던 11월 27일 중에서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내가 부재한 사이에 왕자께선 이 악동들과 부쩍 친해지신 듯했다.
나는 그녀를 달래듯이 답했다.
"왕자께선 잘 이겨내실 거란다."
"뭐, 걔 말하는 거 아니거든요?"
줄리엣이 발끈하며 따졌다. 걔라니, 나는 상스러운 어휘에 충격받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 자리서 말투를 교정했겠지만, 오늘은 때가 때이니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줄리엣도 그와는 인연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분명 이겨낼 테지, 늘 그랬으니까."
그 밤이 가고, 윌슨은 자수했다.
죄상과 증언의 불일치가 없고, 무엇보다 경찰청 내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체로,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살인마 잭 사건의 종결이었다.
우려와 달리 큰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밤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으로 런던 사회 전반이 자숙하는 분위기가 된 탓이었다.
사연이란 이렇다.
그가 한 일은 헛되지 않았지만, 원래 그렇지 않던가. 모든 극이 그렇듯이 비극 없는 결말이란 없는 법이다.
때마침 우리 앞으로 운구 행렬이 지나갔다. 맨 앞선에는 새로 선출된 켄터베리 대주교 향을 피우며 걸었고, 이후 관을 짊어진 장병들이 지났다
이름 난 공작, 백작을 위시로, 각계 명사가 지난 끝에 여왕의 궁정 식구, 소위 로열패밀리가 나타났다. 왕자는 나이차 많은 누이 옆에 있었다. 표정은 침통했으나, 한참 울었는지 눈에는 부기가 빠지지 않았다.
아이들이야 아는 사람이 행렬에 있다는 게 철없이 신기한 모양이었는데, 줄리엣은 보일 턱도 없는데 괜히 내 뒤에 숨으려고 했다.
그날 밤, 우리 예상과 달리 피는 흐르지 않았다.
버킹엄 궁전을 점거하고 있던 등불파는 공황 상태로 자진 출두했고, 궐기는 하룻밤 소동으로 자연히 무산했다.
여왕폐하께서 승하하셨다.
노환으로 인한 심장 마비라고 했다. 반란과는 직접 연관이 없었다지만, 가담자들은 재판 내내 이 일로 받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보였다.
그에 비해 궁정 가신들이 보인 태도란 실로 담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여왕폐하가 쓰러지자 젊은 등불파 경관들에게 호통쳐 가며 일을 주도했고, 사망이 확인되자 재빨리 후사를 준비했고 런던에 닥친 무수한 난리에도 사흘 만에 국장 준비가 끝낸 것이었다.
영 서장의 사망, 살인마 잭의 자수, 버킹엄 궁전 점거, 그리고 여왕폐하의 서거까지... 하룻밤 사이 벌어진 일들에 시민들이 혼란에 빠진 것도 당연했다.
하나 영국인의 담력이란 보통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과거에 묶이는 대신에 앞을 보는 성정이었다. 분명 그들 대부분 런던 이면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으나, 거기 얽매이는 대신 여왕폐하를 추모할 준비를 다했다.
"...주인님."
덕분에 영 서장의 죽음이나, 윌슨의 자수 같은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고....
"주인님, 괜찮아요?"
나는 부르는 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머리에서 피가 싸하게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옷이 땀으로 축축했다.
"내가, 지금, 여기가...."
"애들이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고 모시고 들어왔어요."
내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끝내지 못하자, 보다 못한 마리가 끼어들었다.
"아직 다 낫질 않으셨어요. 돌아다니실 때가 아니라요."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그 밤의 상처는 내게도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정신 아닌 필멸의 육신에 말이다. 출혈이 많았고, 타박상이 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장시간 비 맞으며 체온이 떨어진 게 문제였다 했다.
오늘이 되어서야 겨우 집 앞에도 나가고 할 정도가 되었지만, 전날까지는 해종일 침대에 누워 깨어 있는 시간이 더 드물었다.
"전 같지가 않아."
나는 되뇌었다.
"이젠 젊지가 않군?"
"그걸 말이라고 하셔요."
마리는 타박하듯이 말했다. 나는 별로 바뀐 게 없는 듯한데, 언젠가부터 젊지 않다는 말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어제도 그렇게 안 주무시려고 하시는 거 보고 이럴 줄 알았어요. 오늘 밤에는 제대로 주무셔야 해요."
나는 그녀의 엄중한 당부에 고개 끄덕였다.
"그래, 약속하지."
그날 새벽, 나는 등불만 켜놓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탁한 갈색 가죽으로 제본된 책자가 들려 있었다.
책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앙주백伯 제프리 1세는 악마와 혼인했다.'
제목 없는 책은 붉은 성경이라 불렸고, 이건 그 첫 번째 권이다. 한때 영국사 이면에서 암약하던 자작원의 비서이기도 했다.
현 영국 왕실은 악마의 혈통이다.
여기 적히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역사는 이형의 것이다. 자작원에서는 악마 혈통을 지키고자 장미전쟁의 결과를 뒤바꿨다.
"네 의구심을 옳다."
밤이 내게 말 걸었다.
"천박한 교접으로 옅어졌다 해도, 역사의 귀결마저 뒤집는 저주받은 힘은 영원불멸하다."
그렇다 해도..., 나는 변명하듯이 생각했다. 그럼에도 왕가에 허락된 힘은 아니었다. 역사를 바꾼 것은 사멸한 자작원의 비법이었고, 비밀 결사였던 저들과 왕가 사이에 교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지에는 무고가 깃들지 않던가.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어떤 힘을 다룰 때는 적절한 절차와 방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의사는 그 자체로 힘을 담는 그릇이기도 하지."
미혹이 독소처럼 핏줄을 타고 흘렀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바뀌는 일은 없었다. 일은 이미 일어났고, 나는 그저 검증할 수 없는 현상을 회고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정말 여왕께서 무의식 속에 역사를 주도하는 무형의 힘을 다루고 있었다면, 한낱 바람조차도....
"어쨌거나, 여왕의 서거로 반란은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진압되었다. 그건 분명 그녀 자신이 소망한 결말이다."
이건 내가 영원토록 가져가야 할 의심이다. 나는 그저 불편한 통찰과, 아우성치는 몽상 속에서 선잠에서 깨었다.
... ...옅은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샌가 잠든 모양이었다. 마리 말대로였다.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기에는 몸이 안 좋았다. 나는 눈가를 손으로 비비며, 책 끝을 접고는 서랍장 위에 올려뒀다.
그러다 문득, 꿈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는 게 기억났다.
분명 방 안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게 창가였다는 걸 떠올렸다. 돌아보니 그곳만 부자연스럽게 어두웠다.
"끙."
나는 힘겹게 자리에서 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어떤 선을 지나자, 좀 전까지 아늑했던 정취가 사라지며 역한 냄새가 났다. 숨을 쉴 때마다 눅눅한 습기가 기도를 간지럽혔다.
커튼을 걷어내자, 그 아래로 사람 모양으로 검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어쩌면, 재회가 머지않은지도.
그날 밤, 다시 잠들기 전까지, 나는 총으로 죽일 수 없는 사람을 죽이는 법에 대해 고심하며 몸 뒤척였다....
다음 날, 나는 아침부터 외출하려 했다.
"안 돼요."
마리는 몸으로 막으면서 그리 말했다.
"가뜩이나 몸도 안 좋으신 분이 또 어딜 가려고요?"
"급한 용무야."
"어차피 그런 종류의 일이잖아요."
"그런 종류라니? 남들이 들으면 못할 일인 줄 알겠네."
"하지만 위험한 일이잖아요."
나는 잠깐 생각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아니, 안 그래. 조금이라도 빨리 알아봐야 할 것이 있어.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고."
보통 이만하면 물러나는데, 오늘따라 마리가 강경하게 나왔다.
"그런 몸으로 나가셔 봤자 뭔 일이든 하시겠어요?"
분명, 내 상태가 온전하지는 않았다.
"아직 열도 안 내리셨고, 손을 다쳐서 지팡이 잡은 한 손만 겨우 쓰잖아요."
그건... 전부 사실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내가 조금 더 건강하지 않은지도 몰랐다.
변명거릴 생각하며 말수가 줄어들자, 마리는 쐐기를 박을 요량인지 이렇게 선포했다.
"누군가 주인님하고 대동하며 도와줄 사람 없이는 절대 안 돼요."
"그래? 그러면 자네가 따라오겠나?"
내가 즉답하자, 도리어 마리가 당황했다.
"네?"
"전부터 생각하던 일이야. 자네를 집 안에만 가둬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네. 아직은 조금 이르다 생각했지만, 대중 눈에 익혀두기 나쁘지 않은 시기야."
"저, 저는, 그런 말 안 하셨잖아요."
"심중으로만 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문제는 보안이지만, 나하고 있을 때는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마리는 물러나며 말했다.
"자, 잠깐만요. 모든 게 너무 성급해서...."
"재촉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했듯이 시간이 촉박하네. 어쩔 텐가?"
내 질문에 마리는....
이스트 엔드 오브 런던.
나와는 여러 악연으로 얽힌 이 거리에는 한낮에도 짙은 그늘이 깔려 있었다. 등불파의 헌신으로도 닦아내지 못한 것이었다.
습판 사진이 그렇듯이 본래 빛이란 액체에 스며드는 법이다. 늘 습기에 찬 거리에서 그림자가 스며든 일은 별로 의외랄 것은 아니었다.
이토록 빛과 그림자는 결코 같지 않지만, 아주 닮은 것이었다. 그런 만큼, 여기서는 다른 데서 찾지 못할 것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나는 허름한 건물 앞에 섰다.
윌슨은 어떤 인물을 구해내고, 그가 내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직감하여 여기 숨겨두었다. 그의 마지막 제보가 정확하면 분명 이 건물 한구석에 숨어 있을 터였다.
나는 난간 계단을 올랐다. 녹이 낀 계단은 한 사람의 무게에도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2층, 먼지 쌓인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대답도, 인기척도 없었다.
"박사."
내가 그렇게 부르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 열어. 있는 줄 알고 왔네."
"누, 누구...."
얇은 문 너머로 앵앵거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한 푼도 없어요, 진짜로요."
"그래, 그것도 있었지... 그건 나중에 얘기하지. 하지만 지금은 돈 얘기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면."
"윌슨 형사 소개로 왔네."
망설임이 느껴지는 적막이 흘렀다. 그는 마지막으로 재차 확인하듯이 주절거렸다.
"정말, 정말로 돈 없어요."
빈약한 건물에 비해 번잡할 정도로 많은 잠금장치가 풀리고, 이내 문이 열렸다. 어찌나 오래 닫혔는지 문틈에선 이끼 같은 게 우수수 쏟아졌다.
"다, 당신은?"
상대는, 모든 면에서 너무 달라져 있었다.
미리 듣지 못했다면 동일인이란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만큼, 전과 어떤 공통점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바나나 박사, 꼴이 말이 아니네그래."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제임스, 다디단 사카린 사업에서 나를 꼬드겼다가 파멸에 떨어진 비참한 사업가였다.
제임스도 결국 날 알아보고는 놀란 눈치였다.
"혹시 몰라 확인하지만, 문을 연 게 손님으로 받겠다는 뜻은 아니지, 아닌가?"
내가 눈치를 주자, 제임스는 그제야 자리를 비켰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실내로 들어갔다.
우선, 더러운 방이었다. 밖에서부터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사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내 시선을 끈 것은 달리 있었다.
"상자, 여기도 있군."
그건 비취 상자였다. 영 서장의 것과 모습도 그렇고, 크기마저 빼닮았다. 아마 내용물도.
제임스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 불편한 듯이 몸으로 그걸 가렸다.
"이건 못 줍니다."
"거듭 말하지만, 내 용무는 그게 아니야."
"그러면은?"
"어떤 대답을 찾고 있네. 분명 자네는 해줄 수 있겠지."
나는 물었다.
"왜 아직도 여깄지?"
그는 멍청한 얼굴을 했다. 나는 질문이 성급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시 정리했다.
"여긴 자네 고향이 아니야. 하물며, 영어는 모국어조차 아니지. 사업은 실패했고, 채무에 쫓기는 신세에, 좀도둑질까지 할 만큼 전락했네."
"전부 사실이죠."
제임스는 불편해하면서도 순순히 인정했다.
"반면, 고향에는 여전히 풍부한 가산이 남았지. 거기가 아니라도, 프랑스, 스페인, 미국... 어디든 여기보단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아직까지 남아 있느냔 거네, 다름 아닌 런던에."
대답은... 예상한 것과 같았다.
영원한 침묵.
그리고, 나는 그걸 깨는 주문을 알았다.
"무한과 영원의 도시."
제임스의 몸이 경련처럼 떨렸다.
"아니면, 영원과 무한의 도시라 하던가? 호텔에서 사고가 있던 날, 분명 자네 입으로 말했지. 나는 그걸 쫓고 있네. 아는 걸 전부 말해줘야겠어."
"그럼에도...."
그는 낮게 중얼였다.
"뭐?"
"그럼에도, 런던이 낫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비해?"
"세상 그 어느 도시보다도."
병적으로 유약하게만 보이던 제임스의 눈에 광기에 찬 확신이 담겼다.
"저는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운이 좋아 그들의 계획을 알았죠. 런던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조차, 세계 최고의 부자보다 부유할 겁니다."
나는 그 이유를 물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 대화는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하지만 고요해지진 않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음 때문이었다.
런던이야 바람 잘 날 없는 도시라지만, 그것은 여러모로 기이했다. 아주 짧은 간격으로, 또 균일하게, 땡, 땡, 땡... 하며....
잠자코 귀 기울이고 있더니, 소리가 점차 커졌다. 아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빨랐다. 땡 땡 땡... 에서 땡땡땡으로, 땡땡땡! 땡땡땡땡땡땡땡!
수라장을 건너온 직감이 미친 듯이 경각을 울렸다.
이때만큼 빨리 움직여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펄쩍 뛰어서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놈의 다리가 다시 발목을 잡았다.
잠금을 다시 걸기 직전에, 문이 활짝 열렸다. 징소리가 멈췄다. 오후, 화창한 하늘 아래에는 거구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상대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악수하듯이 내 손을 붙잡고는 그대로 난간 너머로 뛰어내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그와 함께 지상으로 추락했다. 떨어지기 직전, 제임스가 한 무리의 인파에게 붙잡혀 끌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각오했던 충돌은 없었다.
눈을 뜨자, 이계異界였다.
거석이 줄지은 초원이었다. 사방이 훤하게 뚫려서 바람은 멈추지 않았고, 허리춤까지 오는 풀은 끊임없이 물결쳤다.
흑색 하늘에는 두 개의 검은 태양이 떠 있었다. 나는 그게 뜨는 중인지, 아니면 저무는 중인지 알 수 없었다.
환상열석의 가운데에는 옥색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영 서장, 그리고 제임스의 집에서 본 것과 같은 모양이었지만, 하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건 거대했다.
비록 원근감이 흐린 공간이라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분명 앞서 본 것들에 비해서는 훨씬 커다란 것이었다.
한편, 제임스는 심판대에 올라 있었다. 그는 앞으로 닥칠 결말에 대해 짐작한 바가 있는지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나는 그제야 위에도 무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득히 높은 연단에는 영광스러운 마흔 명의 신사 숙녀가 서 있었다. 그들 모두 런던에서 가장 귀한 자리의 주연에나 허락될 법한 야회복을 입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러기에 누구도 주연처럼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옷차림조차 명백한 이상을 가리진 못했다. 그들 어깨 위, 머리가 있을 자리에는 대신에 그만한 크기의 백열전구가 놓여 있었다. 불빛의 밝기는 제각각이었지만, 아예 꺼진 것은 없었다.
상술한 전구 머리 집단은 서로 마주 보며 고상한 척 시늉했지만, 실제 들려오는 소리는 욕설과 고함, 악다구니뿐이었다.
"이게 무슨."
모든 것이 이해 범주를 넘어섰다. 나는 홀로 허탈하게 중얼였다. 그때였다. 내가 잘 아는 목소리가 수풀 속에서 들려왔다.
"아저씨."
"줄리엣!"
나는 소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경악해서 외쳤다.
"대체 왜 네가 여기에...."
"미안해요, 따라왔어요."
줄리엣의 대답은 또다시 상상 초월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제임스는 올려다보며 간절히 애원했다.
"부디, 자비를...."
연단에서 소동은 점점 거세어질 뿐, 사그라질 기미가 없었다. 그때, 밀려나서 떨어지려던 자가 팔을 번쩍 들며 외쳤다.
"눈!"
모두의 이목이 그의 손에 쏠렸다.
"눈?" "눈." "눈!"
좀 전까지 악쓰며 다투던 이들은 언제 그랬느냔 듯이 연호하며 박수했다. 제임스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서 아예 푸르게 보였다.
"위원님들, 재고해 주십시오! 전 크리스토퍼 제임스입니다! 빚은 언젠가 열 배, 아니, 백 배로 갚겠습니다!"
눈, 눈, 눈, 연호가 계속되고, 제임스는 떨리는 손으로 갈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제 안면에 꽂아넣었다.
"아아악!"
붉은 피가 들판에 쏟아졌다. 눈구멍에서 다시 갈고리가 뽑혀 나왔지만, 끝에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만 맺혀 있었다.
전구 머리 집단은 차분하게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들이 정적하자, 도저히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외형 탓인지, 어쩌면 참혹한 광경을 보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비정함 때문인지도 몰랐다.
"요, 용서를...."
"코."
피 묻은 검은자위 속에 절망이 비쳐 보였다.
"부디...."
"코." "코."
그는 보지도 않고 손만 더듬거려, 주머니에서 집게 가위를 꺼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에 대어, 그대로 코뼈 위의 살점을 잘라냈다.
"으헉, 으흐, 으악...."
그는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버거워서, 숨만 계속해서 헐떡거렸다.
"혀."
제임스의 기색이 바뀌었다. 그는 더는 떨지도 않았고, 헐떡이지도 않았다. 대신 신속한 동작으로 자기 목을 찔렀다.
지금껏 이상으로 많은 피가 솟구치면서, 몸을 벌벌 떨다가, 그대로 절명했다.
"위반 행위."
연단에서 처음으로 감정 섞인 초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 뒤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들은 비명지르며 혼란스러워 했다.
"이건 파산이다!"
"공황, 공황!"
"제재하라!"
나는 치미는 욕지기를 억눌렀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무언가 외치려는 때였다.
"정숙, 외야는 정숙하라!"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저들은 막무가내로 외쳤다.
"실로 간사한 언변이로다!" "그에게는 변호권이 없다!" "회기 방해!" "이런 소음은 가히 공해다!" "누가 저자에게 말할 권리를 줬지?"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 "내가 항상 옳다!"
이윽고 나온 목소리는 모두 소음에 삼켜지고 말았다.
어쩌면 이보다 더 큰 소리를 내야 할지도, 나는 그러기 위한 도구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나는 품에서 총을 뽑았다.
그러자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저들, 전구 머리 집단은 총을 보며 경악하고, 비명 지르면서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들 모두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