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신세계
꿈의 피막에는 감은빛 자국이 묻어 있다. 의식으로 비추어 보면 그림자가 자라나 춤을 춘다. 꼭 악마가 담긴 환등 같다.
기상은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오르는 과정이고, 알다시피 런던에서 죽음이란 언제나 하강하는 것이다. 우리 의식은 잠들 때마다 생사 변두리에 침착했다가 각성과 함께 부유했다.
꿈과 현실 사이에는 오직 한 겹의 얇은 막만이 있고, 거길 투과할 때면 우리 몸은 소금물, 또는 도한이라 부르기도 하는 액체로 젖어든다.
이윽고 깨어나면, 몸에는 형상이 되지 못한 꺼림칙한 착상만이 들끓었다. 형상이 없기에 눈으로 볼 수 없고, 끝내는 어디도 남지 못하고 휘발하였다.
이것이 내가 드림랜드에서 귀환할 때마다 겪는 일이다.
그게 오늘 바뀌었다.
본래 들어서는 안 되는 저들 아우성에 귀 기울인 대가인지, 깨어나고도 어떠한 문장이 내 안에서 맴돌았다. 나는 비망록을 적듯이 두서없이 문장을 토해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신세계 질서에서, 별은 위에 있지 않다.'
그리고,
'당신은 빼앗겼다.'
...한편, 우리, 나와 줄리엣은 해질녘에 깨어났다.
체감상 아주 잠깐이었지만, 낮에서 저녁까지 반나절이 소실한 셈이었다. 명백하게 이상했지만, 조금 전 체험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애당초 소녀 앨리스가 일러주지 않았던가, 정신의 영역에서 시간이란 균일한 것조차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순간에 더없이 황량한 기분을 겪었다.
양손은 얼굴을 덮었고, 입에서는 깊은 쉼표가 연거푸 흘러나왔다. 노을빛에 붉게 물든 거리는 낮과 다른 공간처럼 보였고, 그 안에선 분명 무언가 없었다.
나는 상실했다. 빼앗기고 말았다.
"아저씨?"
이성의 절벽에서 날 끌어 올린 것은 줄리엣의 불안한 목소리였다. 나는 퍼뜩 정신 차리고, 급하게 제임스의 은신처에 뛰어올랐다.
그러나 역시 늦었는지,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던 비취 상자를 비롯해 가구, 산더미처럼 쌓였던 쓰레기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바닥에는 두꺼운 흙먼지가 지층처럼 깔려 있었는데, 족히 수년은 방치된 장소 같았다.
"아저씨."
뒤따라온 줄리엣이 다시 불렀지만, 나는 홀로 생각에 잠겨 대답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지나치게 절묘한 등장이었다. 제임스는 분명 뭔가 알고 있었다. 저들 목적이 그걸 은폐하려는 것이었다면, 제임스가 숨겨둔 단서가 아직 여기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좁은 방이었고, 뭔가 숨길 만한 공간은 마땅치 않았다. 실내는 그저 오래 방치된 폐가처럼 황폐할 뿐이었다.
천장에는 유리가 삭은 전구등만 덜렁 매달려 있었다. 나는 도착했을 때, 제임스가 실내등을 켜지 않고 어둡게 생활하던 게 떠올랐다.
켜지 않은 게 아니라, 켤 수 없던 것이라면? 나는 조심스럽게 전구등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언제 교체했는지, 수명이 다한 전구 유리가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잡을 부분이 줄어서는 돌리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나는 속으로만 욕하며 전구를 떼어냈다. 줄리엣은 내 행동이 퍽 갑작스럽게 보였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여하튼, 내 추측은 맞았다.
혹시나 싶었던 것처럼 전구 이음매 부분에는 빛바랜 쪽지 한 장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걸 빼내어 펼쳤다.
"뭐라 적혀 있어요?"
어느 틈엔가 줄리엣은 등 뒤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다. 나는 등으로 종이를 가렸다. 안에는 식물 뿌리처럼 생긴 낙서와 휘갈겨 쓴 짧은 문장만 있었다.
영어는 아니었다.
스페인어, 제임스의 모국어, 빈말로도 외국어가 특기라 할 순 없었지만, 쪽지에 적힌 문장만은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강의 끝에는 잊힌 왕국이 잠들어 있다. 산 자의 신분으로 쫓으려면, 나 역시 죽어야 할 테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쪽지에 그려진 것은 식물 뿌리 같은 게 아니었다. 이건 어떤 강의 모습을 따라 그린 약도였다. 이 시대 어디에도 있지 않을 약도...
'이집트, 그 이름을 기억하라.'
나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문명이 태동한 검은 강... 그걸 어째서 제임스가 가지고 있으며, 또 이것과 노란 외벽 회사의 목적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어떤 의문도 풀리는 대신 비대해지기만 했다.
...귀갓길은 어두웠다. 줄리엣은 노인처럼 지친 걸음으로 걸었고, 나는 지친 노인이었기에 보폭은 딱 맞았다.
"줄리엣?"
나는 시종 입 다물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신경 쓰여 소리 내어 불렀다.
"너, 괜찮은 거 맞니?"
"네."
줄리엣은 침묵에는 재능 있지만, 거짓말에는 그렇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구나."
"아니에요."
이것도 거짓말. 내가 의심을 거두지 않자, 줄리엣은 천천히 고백했다.
"그냥, 아저씨가 어떤 일을 하는지, 처음으로 봐서 놀랐을 뿐이에요. 생각보다 훨씬...."
항상 이렇지는 않아,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대신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더 딱딱했다.
"어떻게 따라왔지?"
"멀리 다니실 때는 차를 타시잖아요. 정해진 길로만 다니니까 어디로 가는지 알기 쉬워요."
줄리엣은 목에 뻣뻣하게 힘을 주며 말했다.
솔직히, 놀랐다. 스스로 말하자니 재는 듯하지만, 어중이떠중이에게 뒤를 밟힐 만큼 내가 서툴지는 않았다.
그런데 말하는 작태를 봐선, 하루 이틀 쫓아본 것 같지 않았다.
"놀랍구나."
줄리엣은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몰래 따라온 건, 칭찬해줄 수 없겠구나."
"나쁜 일이란 건 알아요."
그녀는 반성하는 기색도 없이 뻔뻔하게 답했다.
"그래서, 뭘 배웠지?"
내가 훈계하듯이 묻자, 그녀는 꿍한 얼굴로 입 다물었다.
"왜, 어서 말해봐."
"저는 도움이 될 거에요."
기대했던 대답도 아니었고, 엄밀히 따지면 대답조차 아니었다.
"네가 날 돕는데 그렇게 큰 관심이 있는지 몰랐구나. 솔직하게 말하렴."
"진짜에요."
줄리엣은 억울하단 듯이 항변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마리도 걱정을 좀 덜 테고요."
"그럴 줄 알았지."
"아저씨를 도우려는 것도 사실이고요."
"됐어. 맘에도 없는 소리 말렴."
"진짠데."
우리는 서먹하게 정면을 보며 걸었다.
"아저씨가."
"뭐라고?"
줄리엣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이유보다는 그저 마음이 앞서 첫 마디를 잘못 떼어서 그런 것 같았다
한참 낑낑대던 줄리엣이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그녀 시선은 하늘에 꽂혀 있었다.
"왜 그러니?"
"하늘이 이상해요."
나도 그녀 시선을 쫓았다. 별다를 것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암운으로 적막한 하늘에는 오로지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운 만월만 떠 있었다.
"내 눈에는 언제나와 같아 보이는구나."
줄리엣은 세차게 고개 저었다.
"오늘은 12월 1일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왜 달이 떠 있어요?"
나는 불현듯이 다시 하늘을 봤다.
"어제도 달이 뜨지 않았단 말이에요."
땡땡땡... 내 안에서 경종이 치기 시작했다. 들릴 리 없는 환청은 커지지도, 줄어들지도 않고 연달아, 연달아 울렸다.
땡땡땡, 땡땡땡땡땡, 하고는....
결론부터 말하면, 줄리엣의 불안은 옳았다.
우리가 사는 거리는 한없이 낯설었다. 분명 같은 길이었지만, 아침에 나올 때와는 그 정경이 전혀 달랐다.
하지만 무엇도 집에 일어난 변화보다 크진 않았다. 나는 눈앞의 참상에 어떤 감상을 품어야 할지도 정하지 못했다. 마당은 족히 수 년은 방치된 것처럼 무성했다. 울타리를 넘어 자란 잡초는 꼭 아서네 저택이 생각났다.
"불이 꺼져 있어."
줄리엣은 사소한 지적을 했다. 나는 문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먼지가 때처럼 굳어 있었다.
"사람 살지 않는 집 같군."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옆집의 이웃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마찬가지로 초면인 그녀는 곧장 내게 다가왔다.
"그 집에는 무슨 볼일이에요?"
호의적인 질문은 아니었다. 나는 탐탁찮아 하며 대답했다.
"내가 여기 삽니다."
그러자 여인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여기 산다고요?"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녀는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내게 다가왔을 때처럼 일직선으로 지나가는 경관에게 다가갔다. 내가 어떤 대응을 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짧게 대화했고, 둘 다 매서운 얼굴로 우릴 돌아봤다.
"동행하셔야겠습니다."
"뭐?"
"대체 내가 뭘 했다고."
경관은 숨 막힐 정도로 단호했다.
"선생님께는 간첩 혐의가 있습니다."
"간첩이라니, 대체...."
나는 또 다른 의문에 봉착했다.
"대체, 대체 어느 나라가 영국에 간첩을 보낸단 말인가?"
두 사람은 날 빤히 쳐다봤다. 내가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했다는 것처럼 말이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면에 공포가 차올랐다.
나는 빼앗겼다, 무엇을?
저들이 대체 내게서 뭘 뺏어 간 거야?
저기 무너지는 달 아래에서, 흔들리는 월광이 마치 신사 숙녀가 춤추는 것처럼 보였다. 징소리에 맞춰 언제까지고, 땡땡땡, 땡땡땡땡땡.....
혐의가 풀리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군 시절에도 알지 못한 지하 시설에서, 나는 줄리엣과도 떨어진 채 탈진할 때까지 고문에 가까운 질문을 받았다. 대부분 질문이 알 턱 없는 것이었고, 그나마 답할 수 있는 일부는 이런 상황에 털어놓을 게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문답 과정은 내가 견뎌낼 뿐이었다.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은 와중이었기에, 나는 두어 차례 실신할 뻔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견디는 과정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나는 역으로 받은 질문을 추적해서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나, 변해버린 세상에서 느끼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강압 일변도의 심문 양상이 바뀐 것은 중간쯤이었다.
쉴 새 없이 다그치던 심문관은 물러나고, 내게는 과묵한 감시인과 모포, 그리고 미지근한 차가 제공되었다. 아무래도 꿍꿍이가 있어 보였지만, 이 무렵 나는 너무 지친 탓에 묻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뒤는 그저 흘러갈 시간이었다.
내가 뭔가 묻거나, 잠들려고 할 때면 감시인은 경봉으로 책상을 치며 경고했다. 그는 아주 어린 나이처럼 보였는데, 엄격함은 전쟁을 겪은 노병 같았다.
저들이 날 고문할 셈인가 의심할 즘에야, 나는 풀려났다. 그들은 겪은 일을 발설하지 말라는, 아주 지당한 수준의 경고만을 하고 물가에 고기를 풀어놓듯이 석방했다.
다행히 줄리엣은 무사했다.
그녀는 어린 덕에 별 의심받지 않았는지, 융숭히 대접받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나 같은 고초를 겪진 않은 듯했다. 그들이 어찌 생각했건, 줄리엣은 정보원 역할까지 톡톡히 해냈다.
"아까 들었어요."
줄리엣은 날 부축하며 속삭였다.
"상부에서 제동을 걸었다고요."
그녀가 엿들은 사실이 정확하면, 그건 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어렴풋이 알아낸 지금 세상에서 날 두둔할 고관은 없을 터였다.
여하튼, 우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는데, 고작 반나절이 흘렀을 리는 없고 하루가 넘도록 붙잡혀 있던 모양이었다.
태양 아래에선 그날 밤 보이지 않았던 변화가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 고루한 탓인지, 도저히 그것에 대해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랬다.
거리에는 장애인이 부쩍 늘었고, 그들 대부분이 제대로 된 의족, 의수조차 없이 다닌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때 한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멋드러진 남성이었다. 동작에는 절도가 잡혔고, 좋은 원단으로 지은 옷은 화려하면서도 딱 자기 것이다 싶은 맛이 있었다. 어딘가 좋은 자리에서 만났다면 곧장 흠모하게 되었을 그런 청년이었다.
적어도, 지금 여기서는 아니었다. 애수 섞인 상대의 표정을 보자,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경에게 보은한다는 건, 이런 뜻이 아니었는데."
이렇듯이, 곧장 알아봤다면 거짓말이었다. 변명을 좀 하자면, 예전에는 무거운 금빛이 섞였던 머리카락이 완연한 갈색이 되어 인상이 다른 탓이었다.
여하튼, 끝내 확신하지 못한 나와 달리 줄리엣은 잠깐 망설이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윌리엄...?"
"안녕, 줄리엣."
남자는 쓴웃음 지으며 손가락을 까닥여 인사했다.
"왕자."
"마지막으로 그렇게 불린 게 언젠지 모르겠네."
왕자, 윌리엄은 나직이 정정했다.
"지금은 켄트 공이네."
때는 1918년, 우리는 20년 후의 세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