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상실의 시대
윌리엄 왕자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짧은 대화만으로, 어떤 전쟁의 여파로 왕가와 군이 결별했으며, 그는 여기 있는 모습이 들켜서는 안 되는 신분이란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건 그저 빌미로, 서둘러 떠나려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왕자, 아니, 켄트 공은 대화에 거의 집중하지 못했다.
아마 그건 그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늠하기 어려운 사연이 있겠지."
윌리엄 공은 많이 묻지도 않았다. 그는 과거에서 왔다는 우리에게 방법이나, 진위 따위를 추궁하는 대신 그저 언제서 왔는지만 물었다.
"그런가, 1898년에서."
연도를 들은 공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중에 이 일로 줄리엣과 얘기할 일이 있었는데, 수상하게 여긴 나와 달리 그녀는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게, 윌리엄에게는─줄리엣은 한사코 그를 이름으로만 불렀다─모친의 죽음으로만 기억될 숫자라는 게 이유였다.
"경은 내게 은인이고, 국가에는 영웅이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제대로 된 대우를 해주고 싶네만."
"아뇨, 황송합니다."
줄리엣이 뭔가 말하고 싶은 듯이 옷자락을 잡았지만, 우리는 둘 다 그걸 눈치채고도 모른 척했다.
"그러면, 어쩔 텐가?"
상황이 명백하고 서로 교양 있으니 질문이 길어질 필요가 없었다.
"뭐든지 찾아봐야죠. 우리는 여깄는 원인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도 그런가."
공작의 여운 섞인 말투에는 절로 후각이 예민해졌다.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아무래도 단순한 향수나 불안으로 함축하기에는 여백이 많았다.
내 심경 변화가 티 났는지, 윌리엄은 소탈하게 웃었다.
"경."
"결례를 용서하시길. 직업적인 특성이라."
나는 지레 뜨끔해서는 곧장 사과했다.
"아니, 그런 모습을 보니, 정말로 경이 돌아왔구나 해서 반가워."
그러는 공작의 말에 담긴 감정이란 도저히 자길 속여서 나올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무심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왜 그러나?"
"방금 듣고 생각난 게 있습니다.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까부터 말하지만 나는 여기 오래 있을 수 없네. 짧게 끝날 질문이라면 답하겠지만."
나는 사양 없이 물었다.
"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윌리엄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언제 눈치챘나?"
"저희가 미래로 올 때 과거에서 사라졌다면, 언제서 왔는지 물을 필요는 없으셨겠죠."
별로 어렵지 않은 질문이라 쉽사리 답했더니 윌리엄이 갑자기 고갤 휙 돌렸다.
"제가 불쾌하게 해드렸습니까?"
"안 되겠네. 경 앞에서는 의젓하고 싶었는데, 역시 당해낼 수가 없어. 경은 대단해."
대화의 흐름이란 게 없는 칭찬에 당황했지만, 곧 나는 그 말이 날 향한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목소리는 그대로 날 지나쳐 어디론가 아련하게 흘러갔다.
"이대로면 자칫 내 입으로 말해선 안 되는 것마저 털어놓게 될 거 같아. 그 대답은 내게 들어서는 안 되는 거야."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 된 도리의 문제네."
윌리엄은 아예 등 돌렸다.
"주제넘은 참견이지만, 여기 오기 전에 사람을 수배해뒀네. 그가 경을 도울 거야. 물을 게 있다면 그에게 묻게."
"삼가 살피겠습니다."
나는 곧장 이어 말했다.
"하나 여쭈겠습니다. 노인의 혼잣말로 여기고,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게는 묻지 말라 했을 텐데."
윌리엄은 불쾌한 티를 내며 돌아봤다.
"노란 외벽 회사, ...관리 위원회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들은 존재하지 않네."
즉답은 물론이고, 그 내용 또한 뜻밖이라 나는 무심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공작은 무례를 탓하는 대신 제자리에서 날 빤히 응시했다.
"다름 아닌 경의 손으로 죽였으니까."
공작의 푸른 녹안이 햇빛을 받아 전구처럼 반짝였다. 땡땡땡, 땡땡땡땡땡....
세간 인식과는 달리 탐험가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정적인 시기였다.
세인트 루이스가 자극 없는 동네였다 하기는 어려웠다. 잊을 만하면 짐승이 나타나서 사람을 물어가거나, 몸에서 숯내가 나도록 불을 때도 벌레가 물어대는 통이었다.
그렇지만 오락은 없었다. 아프리카 서해안 외딴 섬에 있어봐야 뭐가 있겠느냐만, 런던처럼 복작한 도시에서 수백 명의 작은 사회에 고립되니 시간의 움직임이 체감되질 않았다.
학자로 꾸려진 영광호 동승객은 대개 지루한 샌님이었고, 차라리 가죽상이나 인부가 말벗 하기 좋았다. 학문으로만 알던 프랑스어에 숙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항구를 떠나고도 무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배에서야 손 닿는 게 다 일이라지만, 몸의 바쁨과 정신의 바쁨은 엄연한 별개의 것이었다. 무엇에든 스스로 고문하며 살과 혼을 태우는 동료 선원들에 비해 나는 항해를 총괄하면서도 붕 떴다.
이 시절의 즐거운 기억이라곤 배에 다가오는 악어를 쫓아내던 것쯤이 다였다.
그랬던 심적 거리감 때문인지 일전 영광호 선원과 우연히 재회했을 때도, 반가워하는 상대방과 달리 나는 도저히 감정이란 게 일지 않았다.
암만 그렇단들 4년을 동고동락했던 동료 선원을 보고 이처럼 무감정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그날에는 나라도 지나치게 사람 같지 않았다며 고민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필이면 지금 그 기억이 떠올랐다.
곤란하다. 정말이지 그렇다.
내가 아는 소년과 눈앞의 장년인이 도저히 동일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직전까지 어떤 얼굴로 대면해야 할지 고민하던 내가 우스울 정도로 무덤덤했을 터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그런 나와는 반대로 프레디는, 심지어 두렵게도 보였다.
"티끌 하나 바뀌지 않고 나타난 과거를 향해."
프레디의 눈을 보려면 살짝 턱을 들어야 했다. 각으로 치면 30도 안팎, 그 사이에는 장장 20년의 세월과 서너 구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었다.
그는 의사였고, 어엿한 가장이었고, 최근 맏아들을 전쟁에서 잃었다. 그리고 의사 학위는 위조한 것이었다. 멋진 콧수염도 길렀다.
모두 처음 듣는 사연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저는 딱히 주인님을 원망 안 해요."
미리 준비한 말을 읊은 것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그도 런던 출신이고, 나도 그랬으니 말뜻을 곡해할 일은 없었다.
다른 아이 중에는 날 원망하는 아이도 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
나는 순전한 의무감으로 물었다. 그런 속내가 들켰는지, 프레디는 대답 없이 고소를 머금었다.
"너무 그러지 말게. 나도 책임감 정도는 있는 사람이니."
"제가 주인님을 원망하지 않는 건, 짧은 햇수지만 주인님 덕에 세상을 다르게 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나날이 없었다면 아직도 골목이 세상 전부인지 알았겠죠."
실내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개를 키우나?"
"살벌한 시대이니까요. 뭐든지 준비를 해둬야죠."
가시가 있는 말씨였다. 나는 목이 타서 잔을 들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인간성이 있다고 믿지 않아요."
품위 없이 커피를 털어 넣자, 순간 깜짝 놀랄 만큼 좋은 향이 났다. 대단한 고급품을 내놓은 모양인데 일언반구도 없이 점잔 빼는 모습은 그야말로 런던 사람다웠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겠나?"
"큰 전쟁이 있었고, 많은 이별이 있었죠. 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망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예전 일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특히나 괴로운 것일수록요."
프레디는 완고하게 거부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이 시대의 나는 내가 아니네. 나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분명한 건, 다시 20년 전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거지. 들음으로써 방지할 수 있는 것도 있지 않겠나?"
그는 깊게 한숨 쉬었다.
"정말 프레디야?"
그때,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던 줄리엣이 차분하게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있는 거지?"
나는 그 질문에 깜짝 놀랐다.
왜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을까, 내가 있다면 그녀도 있을 텐데. 프레디는 자기 팔꿈치를 잡으며 말했다.
"런던에는 없어."
줄리엣은 꽤 섭섭한 듯이, 한편으로는 안심되어 보였다. 나는 가만히 프레디를 노려봤다.
"살벌하게 보지 마세요. 말 그대로니까요. 하지만 자세히는 모릅니다."
프레디는 말했다.
"우린 고아 출신이죠. 그게 고생을 덜 할 이유는 아니지만요. 처음에는 어떻게든 함께 지내려 했지만... 지금은 서로 뭐 하고 지내는지도 잘 몰라요."
그는 힘겹게 덧붙였다.
"저 같으면 더 안 물을 겁니다."
"다들 어떻게 됐지?"
나는 지체 없이 물었다. 그는 내게 시선을 보냈고, 나는 그걸 이해하고는 줄리엣을 돌아봤다.
"잠깐 나가 있겠니?"
"싫어요."
"어른들 진지한 얘기야."
"하지만 프레디잖아요. 제가 프레디보다 한 살 많은 건 알죠?"
누굴 닮아서 이런지 고집도 이런 쇠고집이 없었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지."
"그러죠."
"하지만, 이건 답해줘야겠어."
나는 끓어 오르는 성미를 억누르며 한 자 한 자 씹어 물었다.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대체 뭘 했느냔 말이야."
"주인님은."
프레디는 그런 나를 냉소하듯이 고했다.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죠."
프레디는 머물러도 된다 했지만, 그도, 나도 그러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당연한 듯이 사양하고 그의 집을 떠났다.
나는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한사코 여비라는 명목으로 큰 돈을 쥐여 주었다. 런던에서도 족히 몇 주는 생활할 돈이었다. 어쩌면 그 나름 정리하는 방식인지 몰랐지만,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편, 우리는 단번에 다시 막연한 상황으로 돌아왔다.
나는 거리 한복판에서 줄리엣 손을 잡은 채 한참 가만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우직하게 걷는 것만이 장점인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어쩌면 프레디 말고 다른 도움 줄 사람을 찾을 수도, 아이들이 어딘가에 있을 지도, 어쩌구 저쩌구... 어쩌구 저쩌구....
전쟁터에서 뒹굴거나, 선상 창고 구석에서 병으로 죽어갈 때며, 심해의 악마와 싸울 때에도 이처럼 뿌리부터 동요한 적이 없었다.
아니, 한 번 있었다. 내게는 고작 수일 전으로 기억되는 날이다.
그때는 윌슨이 내게 보여줬다. 변화란, 성장이라며.
하지만, 성장이란 게, 원래 이렇게 무서워?
"아야."
나는 소리에 놀라 손을 놓았다. 무심코 붙잡은 손에 힘을 준 모양이었다.
"괜찮니?"
줄리엣은 말없이 고개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상황이 정상은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돌아가야 했다.
전부 되돌려놔야 했다.
"공작께서 하신 말이 사실이면."
나는 혼잣말했다.
"노란 외벽 회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넘나드는 악마와 같은 힘은 이제 잊혔다... 아니, 하나 있군. 마법의 시대부터 살아온 전 세기의 화석이."
줄리엣이 불안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아직 살아 있다면 걸어볼 만할 거야."
그자를 찾는 일은 예상보다 버거웠다.
과연 흔적을 숨기는 게 능하다고 칭찬하고 싶은 대목이었지만, 아무래도 개인의 수법이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정보는 은폐되어 있었다.
간신히 알아낸 사실은, 그가 1900년에 어떤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었다가 바로 석방된 적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주어가 여럿 빠져 있어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나는 그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미 그런 조작에 손댈 만한 자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이 윌리엄 공작이 떠올랐다. 그의 태도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건 추측에 불과했다. 나는 공연한 의심을 관두고, 조사를 계속했다.
그래도 그의 손 닿는 범위야 다소 뻔하여, 하나씩 들쑤시다 보니 행적이 드러났다.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킹스 크로스 역.
정시가 되자, 열차가 딱 맞춰 정거장으로 들어왔다. 내 옆에서 줄리엣은 흥분하지 않은 척하면서도 구경꾼 기분으로 역사 풍경을 만끽하고 있었다.
프레디가 악감정을 품은 것은 나 뿐이기에, 원래 줄리엣은 맡겨두고 오려 했지만, 끝까지 따라오겠다며 하도 떼쓰는 바람에 피치 못하게 동행하게 되었다.
출발하기도 전부터 짐을 달고 있는 셈이었다.
열차 좌석에 앉아 창가에 머릴 기대자, 딱 좋은 한기가 머리 열을 식혀줬다. 나는 눈 감은 채 곰곰이 내가 파악한 현상을 정리했다.
노란 외벽 회사는 증발했다.
대부분 계열사가 해체 명령을 받거나, 국유화되었고, 일부 살아남은 회사도 관리 위원회처럼 불가사의한 비밀 결사에 지배받는 상황은 아니었다.
올드코트 대학 지구는 여전히 붕괴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왕립학회는 대량 학살의 증거가 속속들이 폭로되어 이제는 터부시 되는 처지였다.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그 불가사의한 남자는 왕실에 수배되어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그를 꿈꾼 사람마저 배상금을 타 가니, 설령 살아 있다 한들 현실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면,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열차는 처음이에요."
줄리엣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기에, 이럴 때 여심을 잘 아는 신사로서 어떻게 행동해야는지 잘 알았다.
"창가에 앉겠니?"
"네!"
소녀는 드물게도 고분고분했다.
비슷하다는 감상은 괜한 우려로 그쳐, 열차는 아무 문제도 없이 주행했다. 나는 줄리엣 어깨너머로 비치는 차창 밖 풍경을 관망했다.
아주 오래전, 나의 기억보다 20년 더 전에 여길 지났던 적이 있었다.
나야 그다지 감상적이지 않다지만, 연중 회색빛 도시에서는 알게 모르게 지쳐 있었다. 그러다 창 너머 싱그러운 풀밭에 핀 금잔화와 눈 마주쳤을 때의 부드러운 충격은 내 안에서도 소박하게 인상 깊었다.
하지만 지금에는 글쎄... 벌판은 차라리 눈을 문지르게 하는 모자이크 공예품처럼 보였다. 깊이 파인 탄흔에는 짧은 잡초가 듬성듬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공습의 여파라 했다.
주로 폭격받은 시내는 복원 작업으로 그 흔적이 많이 지워졌지만, 이런 인적 드문 외곽 지역에 난 상처는 여전히 붉었다.
긴 밤, 대참사, 애국... 영국인은 직접 말하려 하지 않았고, 때로는 보기 안쓰러울 만큼 많은 미사여구를 동원했지만, 뜻하는 바는 전부 같았다.
전쟁, 그 무수한 변화에도 아주 큰 전쟁이 있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이게 어떤 사건인지 알았다. 어쩌면 다시 한 번 일어날 거라고 미리 알고 있기도 했다.
나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책임감을 느꼈다. 달리 내가 분투해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단지 미리 알았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이 싹튼 것이다.
불공평한 세상이었다.
"눈치챘어요?"
줄리엣이 대뜸 물었다.
"그 아이, 제 쪽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어요."
"누굴 말하는 거니, 프레디?"
"당연히 윌리엄이죠."
나는 몸을 들썩였다. 놀라서 기침이 수차례 나왔다.
"그래도 이상하게는 생각 안 해요. 그야, 이제 윌리엄은 어른이고, 어른이 어른들 얘기할 때 아이를 쳐다보지 않잖아요?"
역설적이게도 아이에 대해 말하는 줄리엣의 태도는 이제껏 본 것 중에 가장 어른스러웠다. 별로 주목해본 적 없는 관점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 감았다.
우리는 빼앗겼다. 빼앗긴 것은, 시간인가? 그렇다면 20년에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대전쟁이 끝난 직후라는 건 우연인가, 아니면... 꼬리를 무는 상념은 깊어지기만 했고, 나는 물에 잠기듯이 잠들어 갔다.
헤어지기 전에 프레디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어찌 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도 내게 일어난 일을 잘 알지 못하는데, 그걸 어떻게 남에게 문장으로 전달한단 말인가. 그 순간, 나는 누구보다 정직하기로 했다.
"간단한 사건이야."
차분하게 말하려 했지만, 정작 귓가에는 필라멘트 타는 듯이 앵앵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우린 아주 잠깐 다른 세상에 있었고, 눈을 뜨니 20년이 흘렀어."
프레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고작, 고작 그게 다야."
변화는 상실이다. 나는 지구 꿈을 꿨다. 구멍투성이 지구, 우리는 그 위에 살고 있다.
열차의 제동이 잠에서 깨웠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물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줄리엣은 어느새 곤히 잠들어 있었다. 티는 내지 않지만, 그녀도 적잖이 지쳐 있을 터였다. 대단한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어날 때다. 나는 그녀를 깨워 열차에서 내렸다.
바다였다.
런던에서 80마일 떨어진 외딴 해안 마을, 그레이필드는 이름처럼 무채색한 장소였다. 어업만을 하는 이 마을의 생활상은 수십 년째 바뀐 것이 없었다.
죽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지도 않은 마을이었다. 그래, 박제와도 같다.
그가 하필이면 이 마을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우연할 리는 없었다. 그는 런던에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예상과 달리 추적은 간단했다.
그는 낮에는 푼돈을 받고 쉬는 어선에서 물을 빼거나, 그물 푸는 등 잡일을 했고, 밤이 오면 주점에 틀어박혀서, 적은 술만 시켜놓고 밤새 시간을 죽인다 했다.
가뜩이나 외지인에, 신분조차 불분명한 그였기에, 물으러 다니는 사람마다 넌지시 내가 그를 처리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소문 무성한 그자와 마주친 것은 저녁이나 되어서였다. 듣던 대로 해가 지자마자 그는 지정석처럼 꼬질꼬질한 구석 자리에 앉았다. 넝마 같은 옷가지만 걸친 그는 더러운 술병만이 제 보물인 것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형편없군, 형편없어. 이게 무슨 꼬락서닌가."
내가 다가서자, 그는 슬며시 날 올려다 보았다. 총기 잃은 눈, 언제 어디선가 이와 비슷한 눈깔을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가물가물한 기색이던 그는 이내 유령과 마주한 사람처럼 경악했다.
"사는 게 지치기라도 했나, 필레몬?"
1918년의 필레몬 허버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