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217화 (217/232)

§217. 불침호의 죽음

손가락으로 탁자를 긁을 때마다 검지 모양의 구덩이가 얕게 파였다. 언젠가 이럴 날이 올 줄 알았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사람이란 본디 석암과 같으니 말이다.

어릴 때야 땅의 정기를 받아 무럭무럭 자라나다가, 나고 스무 해가 지나면 지면으로 올라와 몸도, 마음도 일생 더 자라지 않고 소모되기만 했다. 나라고 별반 다를 건 없었다. 마른 흙과 퇴비로 이뤄진 젊은 살은 모두 풍화되고, 겨우 내면의 석질이 바깥에 드러나게 되었을 뿐이었다.

나이 들수록 손이 굳고 뒤틀리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또, 바위의 경도가 나무를 웃도는 것이야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니던가.

하물며 눈앞의 노인은 지금보다 20년은 더 깎여 돌이나 진배없었다. 슬며시 드러나는 표정이 석불과 닮아 보이는 것도 재질이 같은 탓이었다.

하나 진짜 석상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무른가, 이는 또 다른 문제였다.

사람은 100년이면 다 닳아 사라졌다. 밀로의 비너스는 수천 년의 세월에도 변용하지 않고 본연의 미를 뽐내었다. 말이 나와서지만, 나도 밀로의 비너스와는 썩 닮은 구석이 있다. 그녀가 양팔을 잃었듯이 나도 왼 다리를 잃지 않았던가.

하지만 비너스는 소실조차 이미 제 미학으로 삼았다. 설령 완전히 부서지고 흩어진다 해도 여신상은 살아서 그 고귀한 자태를 유지할 것이었다. 반면, 내 다리는 수십 년 먼저 죽었을 뿐이다. 죽는다는 게 무엇인가, 영원한 소멸이다. 거기에는 미의 편린조차 깃들지 않는다. 영원한 허무라면 또 모를까.

고작 20년 세월이 조각한 나 자신의 용모는 이미 나조차 알아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헛것을 보는 거냐?"

노인은 세 번이나 같은 소리를 했다. 나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마지막이네. 당장 술에서 깨든가, 한 번에 이해하든가 해야 할 거야."

"전부 이해하고 있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지."

혀 풀린 발음으로 주절거리는 꼬락서니로는 별로 신뢰 가는 말은 아니었다. 이것도 그랬다. 나는 술을 지배할지언정 지배당한 적은 없었다.

"맞춰 보지. 도움이 필요하겠지. 안 그래?"

"그래, 내가 그렇게 몇 번이나 말했지. 잘도 알아맞혔군, 명탐정."

그는 졸면서 말하는지, 아니면 그저 탁자 얼룩과 입 맞추고자 필사적인지 몰랐지만 연신 꾸벅거렸다.

"목적지는?"

"원래 시간, 20년 전, 1898년 12월."

"그런 방법 없어."

노인은 고개를 들며 태평하게 선고했다.

"왠줄 아나? 내가 다 죽였거든. 여기는 어둠 없는 세상이야."

폭삭 늙어 주름진 낯짝은 웃는 것과 찡그리는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접힌 피부 사이에는 짙은 그림자가 서렸다.

"하나 남았잖나."

노인은 히죽 웃었다.

"나라고?"

"잘도 알아차렸군.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네 성격이 고약한 건 누구보다 잘 알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틀렸어. 없다면 없는 거야."

"있지만 모를 수도 있지."

"아니, 없어."

그에게는 모종의 확신하는 바가 있는지 거듭 강조했다. 나는 상대의 생각을 읽으려고 애썼고, 그는 내게 눈을 보이지 않았기에 잠깐 적막이 일었다.

"애초에, 너는 왜 여깄지?"

"뭐?"

"오고 싶어 온 건 아닐 거 아니야. 태평양에라도 빠졌나?"

알기 어려운 예시였다.

"관리 위원회야. 저들에게 시간을 빼앗겼어."

"녀석들은 그런 걸 못해."

노인은 시답잖은 소리 마란 듯이 말 끊었다.

"놈들은 뭐든 가질 수 있지만, 시간과 우주만은 예외야."

"왜 둘만 예외지?"

"무한하고, 영원하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이군."

그는 말없이 날 빤히 봤다.

"왜?"

"일어날 리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거지."

"하지만 벌어졌지. 일어난 일에 가, 불가를 따지는 건 성미에 안 맞아."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반은 송장에 가까운 자였는데, 탁자가 앞뒤로 들썩거렸으니 얼마나 힘줬는지 알 법했다.

"따라오게."

나는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 보니 그는 의족 없이 목발에 의존하여 걸었다. 별로 눈에 띄고 싶진 않았지만, 두 외지인의 동행은 피치 못하게 점내 사람들 이목을 끌었다.

우리가 술집에서 나오자, 바깥에 쭈그려 앉아 기다리던 줄리엣이 벌떡 일어났다. 노인은 그녀를 알아보더니 눈을 번쩍 뜨고, 날 노려봤다.

"혼자 왔다고는 안 했잖나."

내가 빈정거리는 데도 아무 반응하지 않고, 그는 마냥 줄리엣을 보며 반가워했다.

"너, 정말 줄리엣이니? 반갑구나."

"누구세요?"

"필레몬 허버트란다. 이해하겠니? 내가 바로 20년 후의 이 사람이야."

나는 이때다 싶어 궁금했던 걸 물었다.

"자주 얼굴 보는 사이는 아닌가 보군."

"애들에겐 미움을 좀 샀지. 그중 날 가장 싫어하는 게 줄리엣이야."

노인은 낄낄대며 웃었다.

"아마 마주치면 죽이려 들걸."

그게 어떤 고약한 영국식 농담 같은 건지, 아니면 말 그대로인지 살피는 사이에 그는 먼저 성큼 앞서 나갔다.

"가지."

우리는 어느 부두 창고에서 도착했다. 노인은 거기서 삽 하나만 꺼내 들쳐메고, 그게 다란 듯이 다시 걸었다.

끝내 도착한 장소는 마을 바깥의 언덕이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좁고 거친 오솔길이 나 있었는데, 이조차 사람보다는 짐승이 다니는 길 같았다.

내 눈에는 여타 풍경과 매한가지였는데, 노인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삽이 무언가에 막힌 소리가 나고, 조금 더 흙을 치워내니 닫힌 철제 상자 하나가 나타났다.

바닥에서 상자를 끌어내자, 물기 있는 흙과 이끼 냄새가 섞인 특유의 습기 찬 악취가 났다.

"이건?"

상자 안에는 얼추 봐도 수상쩍은 문서로 가득했다. 이형 생물의 해부도,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사진, 종교 상징물... 개중에는 몇 번 보아 익숙한 양식도 있었다.

"알아봤나? 보편사무국 기밀문서야. 아직도 수집가 사이에선 비싸게 팔리지. 아니, 네가 온 시간대에선 아직 존속하고 있던가? 여하튼, 나는 운이 좋아서 사무국이 해체 후에 대량으로 입수했지."

노인은 내 시선을 쫓더니 반색하며 말했다.

"전부 직접 모은 건가?"

"밤은 영원하지 않다고들 말하지."

그는 바닥에 삽을 꽂아 기대었다.

"그러면 왜 영원한 낮을 기대하지?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 하임리크와 언캐니! 모두 같은 것일진대... 언젠가 돌아올 줄 알았지. 그러니까 대비하고 있던 거야."

귀기 서린듯이 쏟아져 나온 일장 연설을 마치고, 그는 제풀에 지쳐 입김과 독백, 그리고 한 웅큼 가래침을 뱉었다.

"지난 18년 동안, 나는 줄곧 기다렸지."

"그러니까 꼭 돌아오길 바랐다는 듯하네."

내 지적에 노인은 허한 얼굴로 하늘을 봤다. 놀란 것 같기도, 어쩌면 아무 생각 없는지도....

"어쩌면."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알았다.

"어쩌면."

그는 웃었다.

나는 다시 확인할 요량으로 수첩 사이에 껴 놓은 쪽지를 꺼냈다. 노인은 힐끔 보더니, 다시 돌아보며 정색했다.

"그건?"

"제임스 크리스토퍼를 기억하나?"

"그래, 그 불쌍한 사업가. 무한과 영원의 도시에 초대받지 못했지. 당시에는 그런 희생양이 많았어."

"그의 은신처에 숨겨져 있던 것이네. 전구 사이에 껴 있었지."

"보여 보게."

빈말로도 신용 가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나 혼자 품고 있는 걸로 해결될 상황 역시 아니었다. 나는 피치 못해 쪽지를 내놨다.

그러자 그는, 아마도 원시가 와서 그렇겠지만, 쪽지에서 도망치듯이 고개를 뒤로 빼서 보더니 갑자기 흥분해서 혼잣말을 쏟아냈다.

"미처 왜 몰랐을까? 지구의 구멍, 암흑대륙, 태평양이 시작하는 강, 인류의 요람, 아프리카의 주인, 검은 파라오!"

그가 휙 고개 돌아보자, 줄리엣이 기세에 눌렸는지 흠칫 몸 떨었다.

"아까 내가 모두 죽였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관리 위원회는 머리와 꼬리가 맞닿았고, 일부가 곧 전체와 같은 집단. 혼자서 모두 죽이는 것은 실제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어."

노인은 남을 이해시키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때 내가 교수를 하기도 했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이상한 변화였다.

"특히 구심점이 되는 10명의 실업가 중에 한 사람, 세실 로즈에 이르러서는 브리튼 제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지. 그가 탄 배가 지브롤터 연안에서 난파선으로 발견되었을 때, 나는 그가 태평양으로 향하다 실패했다 여겼어. 에드워드는 동인도 회사로 희망봉을 수복하려 했고, 아프리카 개발 회사의 목적도 그러리라 지레짐작한 거야."

그가 순식간에 쏟아내는 말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담겨 있어, 도저히 짧은 시간 내에 소화할 만한 게 아니었다.

"에드워드, 뭐?"

내 외마디 질문에, 그는 전부 알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과연, 너는 아직 모르나 보지? 세실 로즈의 아프리카 개발 회사, 그리고 에드워드의 동인도 회사는 닮았지만 결코 같지 않아. 경유만을 위해서면, 굳이 아프리카를 개척하려 하지 않았겠지. 그는 심부로 향하려 했던 거야."

놀랍게도 이 시점까지 나는 이 대화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나일 강의 끝, 사자의 왕국, 순환의 기원, 청나일 강 원류!"

노인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했다.

"에티오피아 고원!"

노인에게는 짐이 없었다.

재산이라고는 일생 빨지 않은 것처럼 누추한 옷가지와 짐가방 하나에 전부 들어가는 문서가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여기 건너오고 고작 두 주밖에 살지 않은 우리 짐이 더 많은 희한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게 열정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첫 대면 당시의 초탈한 모습은 이미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이 내게는 썩 불길하게 보였는데, 시든 꽃이 다시 필 수는 없듯이 죽어가던 그가 생기를 되찾는 과정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낡은 지도를 펼쳐놓고 우리의 여로를 확인했다. 국경선이 내가 알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게, 대전쟁 이전의 물건이었다.

"포츠머스에서는 지브롤터까지 가는 배가 있어. 거기서 갈아타서 나폴리로 들어갈 거야."

나는 떠오른 의문을 기탄없이 물었다.

"차라리 런던 항을 경유하는 게 낫지 않나? 거기라면 아예 직행하는 배도 있을 텐데."

그러자 노인은 실실 웃었다.

"나는 런던 출입 금지야."

조금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되었지만, 그는 유머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주 유능하기도 했다.

거의 십 년을 어촌에 은둔해 보냈음에도, 그는 현재 항행하는 국제선의 경로를 거의 꿰고 있었고, 무일푼의 걸인 상태로 포츠머스에 도착하고도 수상쩍은 연줄을 거쳐 수집품 일부를 팔아 여비를 충당해냈다.

따라할 수 없다고 까진 않겠지만, 그의 연로함을 따지면 대단한 추진력이었다.

낮의 포츠머스 항구에서 앉아 들어오는 배를 기다리고 있자니, 조선소 쪽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사단인지 시간 때울 겸에 구경을 가보니, 마침 군함 하나가 해체되고 있었다. 전쟁에서 무훈을 꽤 세웠는지 옆면이 포탄에 맞아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는데, 그 탓인지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기에는 참 못났지만, 대전쟁에서 살아온 굳건한 배였다. 내가 보기에는 고쳐서 못 쓸 것도 없어 보였는데, 이 시대에 낡은 철갑선이 나설 자리는 없는지, 아니면 고치는 수고가 더 드는지 어떤지 내가 모를 이유로 폐선이 결정된 모양이었다.

배에서 고철로, 극적인 변화였다. 일순의 파괴로, 그 모습은 여전히 배와 한없이 닮았지만, 용도는 전혀 다른 게 되었다.

쌓아 올린 고철 파편 중 하나에는 흰 글씨로 '불침'이라 적혀 있었다. 대단한 역설이었다.

한참 구경하다 보니, 처음 의도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승선 시간이 아슬아슬해져서 뛰는 수밖에 없었다.

녹초가 되어 승선장에 도착했을 때는, 우릴 지브롤터까지 데려다 줄 작은 여객선이 벌써 정박해서 승객을 태우고 있었다.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줄리엣은 성난 얼굴로 늦었다며 따지고 들었다.

우리는 함께 배에 올랐다. 선수에는 '금요일'라 적힌 선기가 펄럭였다. 다시 바다로.

선상에서도 노인은 두 가지 일밖에 하지 않았다. 술에 취해 죽은 듯이 자거나, 술에 취해 날 괴롭히거나... 이번에는 후자였다.

그는 내 옆에 앉아 대뜸 말했다.

"시간을 빼앗겼다지."

"이제사 새삼스럽네."

"아니, 중요한 문제야. 시간이란, 뺏을 수 있는 건가?"

나는 노인을 돌아봤다.

"시간이란 게, 누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누가 누구에게서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새삼스럽지만, 그간 비현실에 너무 길든 탓에 의문 가져본 적이 없었다. 듣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우리가 빼앗긴 게 시간이 아니라고?"

"나야 모르지. 잃은 당사자도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아나."

그 또한 옳았다. 내가 모르는 상실에 대해 남에게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노을진 바다에는 해가 수평선과 닿아 있었다. 태양 아래 수면에는 반사광이 길게 비쳐 있었다. 꼭 전구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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