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화
강진은 화장실에 있었다. 사실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고, 배용수와 미리 입을 맞 춰야 할 것 같아서 김봉남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온 것이 다.
화장실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강진이 배용수를 보았다.
“숙수님이 너에 대해 말을 하 면, 네가 바로 말을 해 줘야
해.”
“거짓말하는 것 같아서 조금 그 런데……
배용수의 말에 강진이 웃었다.
“내가 네 친구 아냐?”
“응? 친구지.”
“그럼 거짓말은 아니잖아.”
강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친구기는 하니 말이다. 다만…….
“하지만 숙수님은 내가 살아 있 을 때의 친구인 줄 알 텐데
“조금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틀린 건 아니잖아. 그냥 다른 거 지.”
강진의 말에 배용수가 잠시 있 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가자.”
말과 함께 강진이 화장실을 나 왔다. 화장실을 나온 강진은 복 도를 따라 가다가 매화라 쓰인 방으로 들어갔다.
매화 방도 운암정 분위기와 맞 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 에는 벽이 아닌 통 유리가 자리 를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운암 정의 멋진 정원이 한눈에 보였 다.
“경치가 참 좋습니다.”
강진의 말에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김봉남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입니 다.”
그러고는 김봉남이 앞자리를 가
리키자 강진이 자리에 앉았다.
강진이 자리에 앉자 김봉남이 차를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용수 친구라고 하니…… 내가 말을 놓아도 될까요?”
“아들 친구에게 말을 높이는 아 버지는 안 계시죠.”
강진의 말에 김봉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아들 은 아니지만 김봉남에게 요리사 들은 다 자기 자식들이나 마찬가
지였다.
“그런데…… 용수 장례식장에서 는 못 본 것 같군.”
“죄송합니다. 그때 제가 따로 연락을 받지 못해서 가 보지를 못했습니다.”
“음…… 그렇다면 내가 미안하 지. 내가 더 잘 찾아보고 연락을 다 돌렸어야 했는데. 미안하네.”
김봉남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어 려 있었다. 그 모습에 배용수가 말했다.
“숙수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 다.”
배용수의 목소리에 강진이 말했 다.
“아닙니다. 제가 못 와서 죄송 할 뿐입니다.”
강진의 말에 그를 보던 김봉남 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수하고는 어떻게 알고 지낸 친구인가?”
“풍물시장에서 만나서 알게 됐 습니다.”
풍물시장이라는 말에 배용수가 강진을 쳐다보았다. 강진이 자신 을 풍물시장에서 만났다고 할 줄 은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렇군.”
하지만 김봉남은 강진의 말을 믿었다. 자신이 가끔 배용수를 데리고 풍물시장에도 갔었고, 후 에는 배용수가 혼자 가서 물건을 사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식당을 한다고 했는데, 요리도 하나?”
“요리 배운 지는 얼마 되지 않 았습니다.”
“논현에서 식당을 하려면 잘하 지 않으면 쉽지 않을 텐데……
강남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논 현이다. 주위에 맛집도 많고 음 식점도 많아서 특색이 없으면 살 아남기 힘든 곳이었다.
김봉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 는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 다.
“제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재료
로, 제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내려 하고 있습니다.”
김봉남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 고는 웃으며 말했다.
“용수가 해 준 말인가?”
“용수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라 고 했습니다.”
“그렇군.”
강진의 말에 김봉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재료로 음식을 하면
좋겠지만 늘 최고의 재료를 쓸 수는 없어. 최고가 아니라면 그 중 최선의 재료를 선택해서 내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만 들어야 해.
배용수가 강진에게 해 줬던 이 말은 김봉남이 늘 요리사들에게 해 주던 말이었다.
자신이 가진 최선의 재료로 최 고의 요리를 만들어서 손님들을 대접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 말을 강진의 입에서 들으니 김봉남은 기분이 묘하면서도 배
용수가 떠올랐다.
그런 그를 보며 강진이 말했다.
“제가 오늘 갑자기 온 이유가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가?”
김봉남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용수가 저와 친구기는 하지만, 숙수님께 도움을 청하러 올 정도 로 제 얼굴이 두껍지는 않습니 다.”
김봉남이 배용수를 친아들처럼 생각을 하고, 배용수의 친구라고 한 자신을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움을 청할 사이는 아니었다.
친아들처럼 생각을 해도 친아들 은 아니고, 또한 배용수가 없는 상황에서 강진을 도와줄 아무런 의리도 정리도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배용수가 살아 있을 때 강진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도 듣 지 못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김봉남에게 도움을 청할 강진이 아니었다. 게다가 도움을 청할 일도 생각도 없었고 말이 다.
강진이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에 김봉남이 말했다.
“음식점에 내 사진 하나 있어도 제법 홍보가 될 거네.”
“확실히…… 그렇기는 하겠네 요.”
“어떻게, 사진 한 장 같이 찍을 까?”
김봉남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숙수님 얼굴 걸어 놓으면 장사 는 잘 되겠지만…… 용수한테 미 안할 것 같아서 못하겠습니다.”
“좋은 친구로군.”
“고맙습니다.”
“그럼 오늘 온 건 식사하러 온 것뿐인가?”
김봉남의 물음에 강진이 답했 다.
“꿈에서 용수를 봤습니다.”
“용수를?”
“용수가 그러더군요. 아버지가 걱정이 된다, 좀 가서 살펴 드려 라.”
“나를 아버지라 그러던가?”
“예전에 숙수님을 아버지처럼 여긴다고 했었습니다.”
강진의 말에 배용수가 눈을 찡 그렸다.
“야…… 쑥스럽다.”
배용수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강진이 말했다.
“그래서 오늘 오게 됐습니다.”
“꿈에서 용수가 나를 살펴 달라 고 해서?”
“네.”
“그렇군.”
황당한 이야기기는 하지만 김봉 남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김봉남 정도의 나이가 되면 죽 은 지인들의 꿈을 꿀 때가 있다.
그리고 꿈에서 죽은 지인들이 말을 한다면 신경이 쓰이기 마련 이었다.
“제가 한의사는 아니지만, 혼자 오래 살다 보니 제 몸은 제가 스 스로 살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몸이 안 좋다고 말 을 한 건가?”
김봉남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일 때 허연욱이 말했다.
“손 한 번 잡아 보십시오.”
‘손?’
강진이 의문 어린 눈으로 허연 욱을 보자 그가 말했다.
“확인하려면 진맥이 가장 빠릅 니다. 진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 지 말고 그냥 손 한 번 잡아 봐 도 되냐는 식으로 해서 잡아 보 십시오.”
허연욱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봉남을 보았다.
“저…… 손을 한 번 잡아 봐도 될까요?”
“내 손을?”
“꿈에 용수가 다시 나오면, 내 가 손이라도 잡고 왔다고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강진의 말에 김봉남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에 강진이 김 봉남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차갑네.’
김봉남의 손이 조금 차갑게 느 껴졌다. 그리고 반대로 김봉남은 웃으며 말했다.
“손이 무척 따뜻하군.”
“제 손이요?”
“기분 좋군. 후! 남자 손을 잡 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이상 한가?”
가볍게 농을 한 김봉남을 보던 강진이 손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허연욱은 그의 손 위로 김봉남의 맥을 짚고 있었다.
“혈액 순환이 무척 안 좋습니 다. 아마 손이 무척 차가울 겁니 다.”
강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허연욱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생각대로 간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허연욱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볼 때, 김봉남이 웃으며 말했다.
“남자끼리 너무 손을 오래 잡고 있는 것 아닌가?”
김봉남의 말에 강진이 시선을 그에게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 손이 한국 전통 요리를 잇 고 있다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계속 잡게 됐습니다. 숙수님의
기를 좀 받아가려고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웃으며 김봉남이 손을 떼어내자 허연욱이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그러고는 허연욱이 진맥을 한 것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간도 안 좋지만 신장이 특히 안 좋습니다.”
강진이 허연욱을 보자 그가 말 을 이었다.
“하긴 신장이 안 좋으니 간이 좋을 수는 없겠죠. 한방에서 말 하기를 물인 신장이 나무인 간을 키운다고 하니까요.”
말과 함께 허연욱이 김봉남을 보았다.
“내 기억에 숙수님께서는 섭식 을 잘하셔서 몸이 좋았는데 왜 이렇게 나빠졌는지 모르겠군요.”
병이 생기는 원인은 수십 가지, 아니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먹는 것에서 시작이 된 다.
나쁜 음식을 먹으면 몸에 해롭 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 에 이로운 것이다.
그리고 한식은 기본적으로 건강 에 좋은 음식이다. 게다가 운암 정은 최고의 식재료로 음식을 하 는 곳이니 먹는 것만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 음식점에서 삼시 세끼를 다 먹을 김봉남의 몸이 안 좋은 것이다.
하지만 강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옛날 임금들은 불로장생해야지.’
나라에서 가장 좋은 것을 먹었 을 임금들도 일찍 죽을 사람은 일찍 죽는 것이다.
그에 강진이 김봉남을 보았다.
“건강 검진 언제 받으셨어요?”
“내 몸이 아프다는 이야기인 가?”
“간과 신장이 안 좋으십니다.”
“아까는 간이 안 좋다고 하더니
지금은 신장도 안 좋다고 하는 군.”
김봉남이 웃으며 하는 말에 강 진이 말했다.
“저는 한의사도 의사도 아닙니 다. 그래서 확실하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 말을 믿으시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 아 보는 것 정도는……
잠시 말을 멈췄던 강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 꿈에 나타난 용수를 보셔서
라도 병원에 가서 진료 받으세 요.”
처음에는 부탁하는 어조였다면 마지막은 부탁이 아니었다. 거의 강제적이 었다.
김봉남은 가난하지 않다. 이렇 게 큰 음식점을 가진 한국 최고 의 한식 요리사가 가난할 이유가 없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몸이 나빠 질 때까지 검진 한 번 안 받았다 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아마도 바쁘다거나 자신의 건강 에 자신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 리고 그런 사람에게 병원에 가 보라고 하면 다음에, 라는 말을 할 것이다.
그래서 배용수의 이름을 판 것 이다.
‘죽은 제자 생각해서 가보라고 하는데 안 가보지는 않겠지.’
강진이 그런 생각을 할 때, 김 봉남이 강진을 보다가 한숨을 쉬 었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안 가볼 수가 없겠군.”
자신의 생각대로 김봉남이 병원 에 가보겠다는 말을 하자 강진이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언제 가실지?”
“바로 가라는 건가?”
김봉남의 말에 허연욱이 말했 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건 이자뿐 이 아닙니다.”
허연욱의 말을 강진이 따라하자 김봉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일리가 있군. 병도 놔두면 커 지는 법이니.”
그러고는 김봉남이 말했다.
“자네 말이 맞군. 이왕 하기로 했으니 검진 받는 걸로 하지.”
“그럼 지금이라도 가시지요.”
“그건 이따 가기로 하고……
김봉남이 몸을 일으켰다.
“자네 부탁을 들어줬으니, 이번 에는 내 부탁 하나 들어주겠나?”
“돈 문제만 아니라면 뭐든 들어 드려야죠.”
강진의 말에 김봉남이 웃었다.
“따라오게.”
김봉남이 앞장서서 걸어가자 강 진이 그 뒤를 따라갔다.
김봉남을 따라 어딘가로 걸어가 던 강진은 한쪽에 요리사들이 편 하게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김봉남이 나타나자 요리사들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히들 쉬어.”
“네.”
요리사들이 다시 자리에 앉자 김봉남이 말했다.
“정리는 다 된 건가?”
“네.”
“안은 비웠나?”
“막내들이 참으로 먹을 음식 만
들고 있습니다.”
요리사들의 말에 김봉남이 고개 를 끄덕이고는 강진을 보았다.
“이 친구는……
말을 하던 김봉남이 문득 강진 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 는군.”
“이강진입니다.”
강진의 말에 김봉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용수 친구다.”
김봉남의 말에 요리사들이 의아 한 눈으로 강진을 보았다.
“용수 친구?”
“배 요리사님 친구가 왜?”
배용수가 살아 있을 때 왔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배용수도 죽 고 없는 지금 여기를 왜 왔나 싶 은 것이다.
그런 요리사들을 보며 김봉남이 말했다.
“쉬고 있어.”
그러고는 김봉남이 한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진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 모습에 요리사들이 의아한 듯 서로를 보았다.
“용수 친구면 친구지, 왜 주방 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그러게.”
운암정에서 주방은 ‘외부인 절 대 출입 금지’인 곳이었다. 칼과 불을 다루는 곳이기도 했고 청결 을 생각해서도 외부인은 아무도
들이지 않는 곳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