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화
타타탓! 타탓!
강진의 손에서 당근이 빠르게 채 썰어지는 것을 보며 이순례가 웃었다.
“칼질 되게 잘하네.”
“그런가요?”
“주방에서 아르바이트했어?”
“아르바이트는 안 했고, 요즘 요리 좀 배웠어요.”
강진의 말에 이순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라도 배우면 다 나중 에 도움이 되는 법이지.”
이순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강 진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고시원에서 살아?”
“ 아뇨.”
“그럼 어디 월세라도 얻었어?”
“그건 아니고…… 먼 친척이 유 산을 좀 남기셨어요.”
강진의 말에 이순례가 의아함 듯 그를 보았다.
“강진이 너, 친척들하고 연 끊 고 살았잖아.”
“그렇죠.”
“근데 친척이 유산을 남겨? 그 인간들이 그래도 양심은 있었나 보네.”
이순례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분들 말고…… 고조부님 누 님의 이대손이시래요.”
“고조부? 고조부면…… 할아버 지의 할아버지 아냐?”
“맞습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누님의 이대손?”
“네.”
강진의 말에 이순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그럼 남 아냐?”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는 데…… 그래도 유산을 주셨으니
감사하죠.”
“감사하신 분이네.”
“그렇죠.”
“고조부 누님의 이대손인 분도 이렇게 너를 생각하는데…… 네 친척들은 대체 뭐니?”
“다 큰 조카 키우는 것이 어디 쉽나요.”
“그래도 그렇지 어디 조카를 보 육원에 버…… 흠! 맡겨, 맡기기 르 ”
버렸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 고 이순례가 말을 돌렸다. 그런 이순례를 보며 강진이 고개를 저 었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 있는 거 죠.”
사정이라는 말에 이순례가 한숨 을 쉬었다.
“그건 그렇지. 그래도 유산을 좀 받았다니 다행이네. 그래서 전세라도 얻었어?”
“오 년 동안은 월세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행이네.”
강진은 가게에 대해서는 자세하 게 이야기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선에서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어쨌든 오 년 동안은 월세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서울 강남 논현에 작지만 이층 짜리 건물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좋게 잘 지낸 이순례와의
사이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 다.
친척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는 말은 그 어떠한 관계에서도 통하는 진리 중에 하나였다.
물론 자신이 아는 이순례라면 기분 좋게 축하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도 있 고, 강진은 지금 이순례와의 관 계를 변화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장가오라고 하면 그 것도 난감하고.’
만약 이순례가 다른 마음이 생 겨 딸을 자신에게 붙인다면, 그 걸 거절하는 것도 민망하니 말이 다.
“커피 마시고 있어. 겉절이 만 들어 줄게.”
“고맙습니다.”
이순례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강진이 가게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변한 것이 없네. 하긴 맛집은 변하면 안 되지.’
맛집에서는 낙서도 역사다. 그
리고 칼국숫집은 그런 역사가 어 울리는 곳이었다.
강진이 가게를 둘러보고 있을 때, 이순례가 겉절이에 칼국수, 거기에 만두까지 들고 나왔다.
“온 김에 먹고 가.”
“감사히 먹겠습니다.”
밥이야 먹고 왔고 아직 점심때 도 아니지만 강진은 사양하지 않 았다.
이게 이순례의 마음이니 말이 다.
칼국수를 한 젓가락 크게 집어 겉절이와 함께 먹는 강진을 보며 이순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네.”
“음식은 늘 감사한 마음으로 먹 습니다.”
강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 순례가 그를 보다가 몸을 일으켰 다.
“그럼 먹어.”
“네.”
이순례가 자리를 뜨자 강진은 만두와 칼국수를 마저 먹기 시작 했다.
그가 칼국수를 먹고 있을 때 앞 에 배용수가 앉았다.
“최호철 찾았어.”
“찾았어?”
"응."
“그런데 왜 같이 안 왔어?”
“잠복 중이래.”
“잠복?”
“나쁜 놈 뒤를 쫓고 있대.”
배용수의 말에 강진이 눈을 찡 그렸다.
“나쁜 놈?”
“그런데 웃기지 않아? 귀신이 쫓아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뒤를 쫓아?”
배용수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어떻게 할 거야?”
“나 왔다고 했어?”
“응.”
배용수의 답에 강진이 잠시 있 다가 칼국수를 입에 넣었다. 애 써 만들어 준 건데 남기고 갈 수 는 없었다.
후루룩! 후루룩!
칼국수와 만두를 먹은 강진이 입을 닦고는 몸을 일으켰다.
“실장님 잘 먹었어요!”
“벌써 가게?”
“다음에 또 올게요.”
“이거 가져가.”
이순례가 쇼핑백을 내밀자 강진 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가끔 강진이 이야기하시니까, 한 번 인사드리 러 오고.”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가.”
이순례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다시 한 번 숙이고는 가게를 나 왔다.
“뭐야?”
배용수가 쇼핑백을 보며 하는 말에 강진이 웃으며 쇼핑백을 벌 려 보여주었다.
“반찬이네.”
일회용 비닐에 담겨 있는 반찬 들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이걸로 밥 먹자.”
“그러든가.”
“그래서 어디야?”
강진의 물음에 배용수가 걸음을 옮겼다.
“ 가자.”
배용수가 앞장서 걸어가자 강진 이 그 뒤를 따라갔다.
강진은 골목에서 최호철을 마주 하고 있었다.
“저기에 나쁜 놈이 있는 거예 요?”
최호철이 보는 곳은 모텔이었 다.
"응."
골목의 간판에 몸을 숨긴 채 모 텔을 주시하는 최호철의 모습에 강진이 한숨을 쉬었다.
“나쁜 놈이든 착한 놈이든, 쟤 는 형을 못 보는데 뭘 몸을 숨겨 요.”
강진의 말에 최호철이 멈칫하다 가 입을 열었다.
“본능이야.”
그러고는 최호철이 모텔을 보았 다.
“잡아야 하는데……
최호철의 말에 강진이 모텔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형, 형이 귀신인 건 자각하고 계시죠?”
“ 알아.”
“그럼 형이 잡을 수 없다는 것 도 아시죠?”
강진의 말에 최호철이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 아는데…… 저놈
은…… 정말 나쁜 자식이야.”
최호철의 말에 강진이 한숨을 쉬고는 모텔을 보았다.
“무슨 짓을 했는데요?”
“수원 여대생 살인 사건 알아?”
“글쎄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수원에서 여대생 둘이 강간 후 살해당했어.”
“둘이나요?”
“그래. 그런데 그때 증거가 없 어서 범인을 못 잡았어.”
최호철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그 사건 범인이 저 안에 있다는 것 아니었어요?”
“ 맞아.”
“증거가 없었다면서요?”
증거가 없었다면 범인이 누군지 도 모를 터, 그런데 지금은 그
범인을 어떻게 알고 모텔을 지키 고 있나 싶었다.
강진의 물음에 최호철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내가 담당 형사였던 건 아니지 만…… 범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피해자는 누군지 알지.”
“피해자?”
강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최호 철이 입을 열었다.
“피해자가 그 자식 옆에 붙어 있어.”
“피해자? 죽은...... 여대생 귀 신?”
강진의 말에 최호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놈 옆에 붙어 있는 여자들을 보니까, 너 무 미안해서 갈 수가 없었어. 강 간을 당한 것도 억울하고, 살해 당한 것도 억울한데…… 귀신까 지 된 거잖아. 너무…… 미안해 서…… 갈 수가 없었어.”
“형이 왜 미안해요?”
“못 잡았으니까. 살려낼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렇게 만든 놈 을 잡았어야 했어.”
최호철이 입술을 깨물며 모텔을 노려보는 것을 보던 강진이 입맛 을 다시며 말했다.
“경찰에 신고할까요?”
“ 신고?”
“여기 강간 살인마 있다고 신고 하면 되지 않아요?”
말을 하던 강진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귀신들 일에 내가 나서는 건데…… 문제없으려나?’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진이 고 개를 끄덕였다.
‘마음 가는 대로 하자. 그리고 나쁜 놈 잡는 건데 착한 일이면 착한 일이지.’
속으로 중얼거린 강진이 핸드폰 을 꺼냈다.
“신고합니다.”
강진의 말에 최호철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하지 마요?”
“증거가 없어서 범인 특정도 못 했던 사건이야. 지금 경찰에 신 고해도 증거가 없어서 나오게 될 거야.”
스윽!
말을 한 최호철이 강진을 보았 다.
“그리고 오히려 네가 고생할 수 도 있다.”
“제가요?”
“너보고 저놈이 범인인 줄 어떻 게 알았냐고 하면 뭐라고 말할 래?”
“아......"
강진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최호철을 볼 때, 최호철이 눈 을 찡그렸다.
“개자식.”
최호철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모텔 에서 나오는 자신 또래의 남자가
보였다.
“쟤에…… 어?”
쟤에요? 라는 물음을 하려던 강 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자의 뒤로…… 여자 귀신 여섯이 흐느 적거리며 걷고 있었다.
“여섯?”
강진의 중얼거림에 최호철이 입 술을 깨물었다.
“귀신이 된 사람만…… 여섯이 다.”
“귀신이 된 사람만 여섯? 그럼? 설마?”
놀람에 찬 강진의 말에 최호철 이 놈을 노려보았다.
“맞아. 귀신이 된 사람만 여 섯…… 이야.”
“그럼 대체 몇이나 죽였다는 거 예요?”
강진의 물음에 최호철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개자식이지.”
최호철의 말에 배용수가 입맛을 다셨다.
“개자식이 호철 씨 이야기 들으 면 입에 거품을 물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군.”
싸늘한 눈으로 걸어가는 남자를 보던 최호철이 간판에서 몸을 빼 그 뒤를 따라가자 강진이 말했 다.
“이렇게 무작정 따라가서 어떻 게 하시려고요?”
강진의 물음에 최호철이 입술을
깨물었다. 뒤를 따라가고는 있지 만 최호철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은 없었다.
“안 되면…… 빙의라도 해서 자 살을 해 버릴 거야.”
최호철의 말에 배용수가 놀라 급히 말했다.
“워워! 그러지 마요. 그거 정말 사형감이에요.”
“저 자식 죽이고 내가 지옥 간 다.”
“지옥이 아니라 소멸감입니다.”
소멸이라는 말에 강진도 말했 다.
“형, 그래도 소멸은 아니에요.”
“그럼 어쩌자고?”
“경찰에다 신고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증거가 없다니까.”
최호철의 말에 강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런 강진을 힐끗 본 최 호철이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 살인 사건 검거
율이 몇 퍼센트인 줄 알아?”
“글쎄요. 50?”
강진의 답에 최호철이 말했다.
“97퍼센트.”
“97퍼센트? 높네요.”
“높아?”
강진의 말에 최호철이 굳은 얼 굴로 그를 보았다.
“97 퍼센트면……
“남은 3퍼센트의 희생자한테도 그게 높을까?”
“그건…… 아니죠.”
강진의 답에 최호철이 나쁜 놈 을 보며 말했다.
“후우! 말이 돌기는 했지만 네 말이 맞아. 우리나라에서 살인 사건은 97퍼센트 확률로 범인을 검거해. 그리고 화제가 된 사건 같은 경우는 99퍼센트로 잡아들 여.”
“화제가 된 사건요?”
“사건이 많고 인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우리나라 경찰이 잡으려
고 마음먹으면 못 잡는 범인은 없다.”
“못 잡는 범인들 많던데?”
강진이 뉴스를 떠올리며 하는 말에 최호철이 눈을 찡그렸다.
“못 잡는 범인들보다 잡는 범인 들이 더 많아.”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요?”
“화제가 된 사건은 범인이 외국 으로 튀지 않은 이상 어떻게든 잡아들여. 그게 우리나라 경찰이 야.”
“어떻게든?”
“도망치는 놈들이 도망갈 곳은 다 정해져 있어. 거기부터 족치 고, 그 비슷한 부류 놈들 족치면 어떻게든 정보가 나오게 되어 있 어.”
“그런데 왜 다 못 잡아요?”
“인력이 부족하고 사건도 많 고…… 에이! 어쨌든 그래.”
그러고는 최호철이 말을 이었 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저
자식 사건은 화제가 된 사건이 야. 그런데도 증거를 못 찾아서 범인 추정도 못 했어.”
“잡으려 했는데도 못 잡은 사건 이라는 거네요.”
“맞아. 지금 경찰에 신고를 해 도 증거가 없어서 못 잡아넣어.”
최호철의 말에 강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어떻게 해요?”
강진의 말에 최호철의 얼굴이 굳어졌다. 놈을 쫓고는 있지만
그로서도 어떻게 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살아 있고 경찰이고, 놈이 범인 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어떻게든 엮은 후 수사를 해서 증거를 찾 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최호철을 보던 강진이 나 쁜 놈을 쳐다보았다. 평범한 인 상에 평범한 체격을 가진…… 길 을 가다가 흔히 볼 수 있는 사람 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피를 철철 흘리 는 여자 귀신 여섯을 달고 다닌 다는 것뿐이었다.
‘지옥이라……
딱 봐도 저놈은 지옥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