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배용수는 노인들이 진료받는 곳 으로 향하며 강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행복한 시절을 떠올 리라고 한 거야?”
“예전에 해장국 할머니 기억 해?”
“오순영 할머니?”
배용수가 기억해내자 강진이 말 을 이었다.
“할머니가 우리 가게에서 갑자 기 젊어지셨잖아.”
“젊은 시절 생각하다가 그러셨 지.”
배용수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에서 현신한 귀신은 생전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나잖아.”
“그렇지.”
“그럼…… 지은 씨가 우리 가게 에서 현신하면……
잠시 말을 멈췄던 강진이 말을 이었다.
“아팠을 때의 모습일까? 아니면 아프지 않았을 때의 모습일까?”
강진의 말에 걷고 있던 배용수 가 멈춰 섰다.
“그래서 사랑받던 시절의 모습 을 생각하라고 한 거구나.”
함께 멈춰 선 강진이 배용수를 보며 말했다.
“오랜 시간 아프다 죽었으 니…… 지은 씨는 그때를 더 기
억하고 있을 것 같아.”
“하긴…… 지금도 그 모습이니 까.”
배용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강진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 이미지를 바꿨 으면 해서 사랑할 때 시절을 떠 올리라고 한 거야. 그 이미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때의 모습으 로 현신할 수 있을 테니까.”
강진이 하는 말을 듣던 배용수 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잘 했다. 근데…… 저승식당에 어떻게 오게 하려고?”
수호령인 그녀는 유훈이 가게에 와야만 올 수 있다. 게다가 현신 까지 생각을 한다면 저승식당 영 업 시간에 와야 하는데…….
황민성이야 워낙 특별한 케이스 라 저승식당 시간에 들어오는 것 이지, 일반인은 들어올 수 없었 다.
게다가 올 수 있다고 해도 11시 까지 가게에 잡아 둬야 하기도 하고 말이다.
배용수의 물음에 강진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지금부터 생각을 해 봐야지.”
“대책은 없고만?”
“나도 오늘 처음 뵈었는데 그렇 게 생각이 바로 나겠어?”
강진의 말에 배용수가 그를 보 다가 말했다.
“잘 생각해 봐. 죽어서도 저렇 게 고통스럽게 계시니…… 식사 라도 제대로 한 끼 하게 해 드리 고 싶다.”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인 강진은 배용수와 함께 노인 전용 진료실에 들어섰 다.
임지은과 이야기를 하는 사이 모든 진료가 끝이 난 듯, 차달자 와 최순심은 강진을 기다리고 있 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니에요. 우리도 지금 끝났어 요.”
“그럼 가시죠.”
그러고는 최순심의 휠체어를 잡 은 강진이 물었다.
“저희 가게 들렀다 가실 거죠?”
“괜찮으면 그럴까 하는데.”
“당연히 괜찮죠. 오늘 오징어 물 좋은 것 들어왔으니 그거 넣 고 김치전 맛있게 해서 먹죠.”
그렇게 강진은 일행을 이끌고 가게로 향했다.
가게 홀에서는 차달자와 최순심 이 다과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일요일에 고향 가기로 했어?”
“네.”
“떨리겠네.”
“죄송한 분들이 많아서 긴장도 되는데……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동네 언니들도 그런 마음일 거 야. 나도…… 옛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가 많거든.”
최순심은 웃으며 차달자의 손을 토닥였다.
한편, 주방에서는 강진이 할머 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김치전 을 만들고 있었다.
‘달자 이모하고 순심 할머니하 고 친하게 지내니 좋네.’
차달자와 친한 이는 모두 귀신 뿐인 게 조금 걸렸는데 좋은 ‘사
람’이 생겼으니 말이다.
미소 지으며 조리를 마친 강진 이 김치전을 접시에 담아서는 홀 로 가지고 나왔다.
“김치전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최순심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몸을 돌리자, 그녀가 말했다.
“같이 드시지 않고?”
“저는 주방에서 할 일이 좀 있 어서요. 편하게 드세요.”
그리고는 강진이 주방으로 들어 가자 최순심이 차달자를 보았다.
“동생이 인복이 있어. 일하는 사람 이렇게 아끼고 잘 대해주는 사장님이 없는데 말이야.”
“저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요.”
“근데 일은 힘들지 않아?”
“ 괜찮아요.”
“사정이 좀 어려운가?”
차달자는 작게 웃으며 젓가락으
로 김치전을 찢었다.
“언니, 김치전 드세요. 사장님 솜씨가 좋아요.”
그에 최순심이 김치전을 하나 집어 입에 넣고는 고개를 끄덕였 다.
김치는 잘게 썰고 오징어는 조 금 크기 있게 썰어 씹는 식감과 맛이 좋았다.
최순심이 맛있게 김치전을 먹자 차달자가 주방을 한 번 보고는 같이 먹기 시작했다.
홀에 김치전을 가져다준 강진은 프라이팬을 닦았다. 그리고는 김 치전을 한 장 더 구울 준비를 하 며 옆을 보았다.
옆에서는 허연욱과 장병두가 싱 크대에 JS 소주를 두고 김치를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소시지라도 구워 드릴까요?”
“괜찮아요. 김치가 맛있어서 소 주가 술술 넘어갑니다. 하하하!’’
장병두가 크게 웃으며 하는 말 에 고개를 끄덕인 강진이 김치전
을 더 부치며 허연욱을 보았다.
“유훈 선생님은 결혼 안 하셨어 요?”
강진의 물음에 허연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총각입니다.”
“지은 씨 못 잊어서요?”
“그렇지요.”
허연욱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는 강진을 보았다.
“유훈 선생 전공은 이쪽이 아니
었습니다.”
강진이 보자 허연욱이 말을 이 었다.
“지은 씨 죽고 난 뒤에,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돕겠다면서 기 존에 있던 학교에서 자퇴하고 다 시 공부한 겁니다.”
“아……
“원래는 의대를 가려 했었는데, 의대라는 게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보니 이쪽으로 바꿨더군요. 이렇게라도 사람들
에게 도움을 주려고요.”
허연욱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의대 문턱이 높기는 하 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런 강진을 보며 허연욱이 한 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둘의 이야기 들었는데 참…… 안타깝더군요.”
“안타깝지 않은 사연은 없죠.”
강진의 말에 허연욱이 업소용
냉장고를 보았다. 업소용 냉장고 에 비친 강진의 모습을 본 허연 욱이 입맛을 다셨다.
스윽!
그러고는 업소용 냉장고에 비친 강진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왜 그러세요?”
강진이 의아한 듯 보자, 허연욱 이 냉장고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 다.
“지은 씨는 불치병 판정을 받자 마자 유훈 선생과 헤어졌습니
다.”
“그…… 유훈 씨 모르게 하고 헤어졌을 것 같은데.”
“맞습니다.”
허연욱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저었다.
‘미령 씨하고 인호 씨 같네.’
변호사인 유인호에게 붙어 있는 귀신 임미령도 자신이 아픈 것을 감추고 헤어진 채 죽었다.
그래서 유인호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해 다른 여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랑을 할 때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듯, 헤어질 때엔 서로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임미령의 말에 따르면 유인호는 슬퍼할 시간, 헤어질 시간을 갖 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도 그녀 를 잊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길 되짚어 보던 강 진은 이아름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잘 되면 임미령 씨
와 이문흠 씨 둘 다 승천을 할 텐데.’
이아름에게 붙은 할아버지 이문 흠 또한 남은 사람이 걱정되어서 수호령이 된 케이스였다. 그러니 두 귀신 모두 남아있는 사람들이 잘 살게 되면 승천할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할 때 허연욱이 말 했다.
“지은 씨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데 유훈 씨가 소식 알고 왔답니 다.”
강진이 보자 허연욱이 냉장고를 보았다. 그는 냉장고에 비친 강 진의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은 씨도 포기하는 성격이 아 니라서 열심히 재활할 때였는 데……
임지은은 보행 보조기를 잡은 채 부들부들 떠는 손과 발을 움 직이며 걷고 있었다. 노인이 주
로 쓰곤 하는 기구에 의존해 걷 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보조기를 밀며 걸음을 옮기는 임지은의 옆에서는 어머니가 걱 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살폈다.
-지은아, 좀 쉬자.
진땀을 흘리는 딸을 보며 어머 니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임지은 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일 거야.
-지은아…….
-내가 질 줄 알고? 매일매일 움직일 수 있는데…… 내 몸이 왜 굳어. 안 질 거야.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애써 한 걸음을 더 옮길 때, 그녀의 핸드 폰이 울렸다.
벨 소리에 어머니가 주머니에서 임지은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 곤 발신인을 확인한 어머니가 임 지은을 보았다.
- 지 은 아 • • • • • •
—하아! 하아! 누군데?
-훈인데.
어머니의 말에 임지은이 급히 핸드폰을 보았다.
〈내 새끼〉
익숙한 애칭이 액정에 떠 있자 임지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 후우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손 을 내밀었다.
- 줘.
어머니는 핸드폰을 주고는 슬며 시 자리를 옮겼다.
편하게 통화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자리를 피하는 어머니를 보던 임지은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어디야?]
살짝 떨리는 유훈의 목소리에 임지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긴 어디야. 그리고 우리
헤어졌는데 정말 왜 이래. 전화 끊어.
[너…… 정말…….]
떨리는 유훈의 목소리에 임지은 은 순간 겁이 났다.
‘설마 나 아픈 거 아는 건가?’
임지은은 그에게 사실을 말할 만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일단 자신의 부모님은 아닐 것이었다. 유훈이 알면 죽어버리겠다고 소 리까지 쳤으니…….
‘그럼 영희?’
가장 친한 친구인 영희를 떠올 리던 임지은이 말했다.
-할 말 없으면…….
끊으라고 하려던 임지은의 얼굴 이 굳어졌다. 그가 말을 멈춘 사 이, 미세하게 들린 소리 때문이 었다.
[내과 장명섭 선생님, 내과 장 명섭 선생님…….]
익숙한 톤의 안내방송은 전화 밖에서도 들려오고 있었다.
-내과 장명섭 선생님, 내과 장
명섭 선생님…….
—너…… 지금…….
어디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전화로 들리는 안내 방송이 지금 자신의 귀에도 들린다는 것 은…… 그가 지금 이 병원에 있 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 그에게 위치에 대해 섣불 리 이야길 했다간 그와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녀는 한 발 한 발 걷는 것도 힘겨워하는 자신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_난 집이야.
[너…… 진짜…… 나한테 이러 지 마.]
-뭘 ‘이러지 마.’야. 집이라니 까?
들려오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에 임지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 렁 고였다.
그에 눈가를 닦은 임지은이 목
소리를 가다듬었다.
[집이라고……?]
-그, 그래. 나 집이야. 그리고 나 자려던 중이니까 그만 끊어.
[자…… 잠깐만! 너 밥은 잘 먹 고 있어?]
-갑자기 웬 밥이야.
[밥이…… 얼마나 중요한데. 밥 은 잘 챙겨 먹고 있어? 아니, 꼭 밥 잘 챙겨 먹어.]
-하아…… 그러는 너는.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나 너 보고 싶어.]
대뜸 보고 싶다는 말에 임지은 은 움찔했다.
‘바보…… 내가 그렇게 모질게 헤어지자고 했는데……
-왜 자꾸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어. 우리 헤어졌....
말을 하며 고개를 들던 임지은 의 얼굴이 굳어졌다. 병원 대리 석 벽에…… 유훈의 모습이 비치 고 있었다.
그리고 유훈이 비친 대리석 벽 에는 자신의 모습도 비치고 있었 다.
-아…….
이때까지 유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 임지은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와 동시에 대리석에 비친 임 지은이 입을 틀어막자, 그 옆에 있는 유훈 역시 입을 틀어막았 다.
크윽! 흐으윽……!]
핸드폰에서 고통을 억누르는 듯 한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임지은 의 입에서도 작은 울음소리가 새 어 나왔다.
‘나…… 아파.’
대리석에 비친 임지은이 울고 있었지만, 유훈은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단 두 걸음…… 두 걸음만 다가 가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리석에 비친, 수척하 고 야윈 그녀를 보니 유훈은 차 마 다가갈 수 없었다.
그저 대리석에서 자신을 보는 임지은을 보며 별일 아닌 것처 럼…… 마치 헤어진 여자 친구에 게 저녁에 ‘자?’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자신이 사랑하는 여 자, 임지은이 바라는 것일 테니.
“그렇게 두 사람은 매일 그 시 간에 대리석 벽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허연욱의 말에 강진이 입맛을 다시며 냉장고에 비친 자신의 모 습을 보았다.
“나 같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 힘들 때 옆에 같이 있어 줄 텐데……
“사랑하는 방식에는 답이 없으
니까요. 그 당시의 두 사람에게 는 그것이 답이었던 거겠지요.”
허연욱의 말에 강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사랑엔 답이 없다,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