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십 년이 지나도 유 선생님은 지은 씨의 맛을 기억하시네요.’
속으로 중얼거린 강진은 가게 입구로 가서 아크릴판에 글을 적 었다.
〈금일 저녁 영업을 종료합니 다.〉
강진은 아크릴 판을 입구에 다 시 세워두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 왔다.
그러고는 황민성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가게 문 닫았습니다. 저도 술 한 잔 주세요.”
강진의 말에 유훈이 소주를 따 라주며 말했다.
“벌써 문을 닫아도 되시는 겁니 까?”
“저도 좀 놀아야죠. 그리고 저
희 가게는 저녁에는 손님이 없어 요.”
“이렇게 맛있는데 왜 손님이 없 어요?”
유훈이 의아한 둣 쳐다보자 강 진이 웃었다.
“여기가 아무래도 강남이다 보 니 저녁에는 젊은 사람들이 술 마시러 많이들 옵니다. 우리 가 게가 맛은 있지만 밤새 술 마실 만한 가게는 아니죠.”
강진의 말에 유훈이 가게를 보
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이 오징어채는 어떻게 만드는 것입니까? 제가 만들면 이런 맛이 안 나던데.”
“요리 좀 하세요?”
“제가 지금도 혼자 자취하고 있 어서 음식은 좀 합니다.”
“그래요? 이거 만드는 건 간단 해요. 답은 마요네즈예요.”
“마요네즈?”
“오징어채에 마요네즈 조금 넣
고 비비세요. 그럼 이런 맛이 납 니다.”
“아……
‘그런 간단한 방법이?’라는 표정 으로 오징어채를 보던 유훈이 웃 으며 한 젓가락 집어서는 입에 넣고 씹었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었다.
“답을 듣고 먹으니 정말 마요네 즈 맛이 나는군요. 아마 지은이 도 마요네즈를 넣어서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여자친구분께서 음식을 잘 하 시는 모양이네요.”
강진의 말에 유훈이 웃었다.
“음식 만드는 걸 좋아했습니 다.”
말투에 웃음이 섞인 것에 강진 이 의아한 듯 물었다.
“맛은 없으셨어요?”
“후! 음식에 평균이 없다고 할 까요?”
강진이 보자 유훈이 고개를 저
었다.
“이런저런 음식을 섞어서 새롭 게 만드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음식은 정말 맛이 있고, 어떤 음식은 정말 맛이 없 었습니다.”
“음식을 섞어요?”
“자신만의 레시피를 만드는 것 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특이한 음식들을 많이 만들었죠.”
그러다가 유훈이 웃으며 말했 다.
“그중에 몇 개는 성공적으로 만 든 것도 있습니다.”
“뭔데요?”
“꽁치 통조림하고 고등어 통조 림을 밀가루 묻혀서 튀긴 걸 맛 소금하고 후추 툭툭 뿌려서 먹으 면 아주 맛있습니다.”
“통조림을 튀겨서도 먹는군요.”
꽁치와 고등어 통조림은 보통 찌개에 넣어서 먹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주 간편합니다. 통조 림 자체가 그냥 먹어도 되는 거
라 살짝 튀기기만 해도 잘 익거 든요. 게다가 생선 손질할 필요 도 없고 가시도 익어서 바를 필 요 없고.”
“맛있겠네요.”
강진이 입맛을 다시자, 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선살 크게 발라서 튀기면 쫄 깃한 것이 참 맛있더군요.”
“혹시 다른 것은 없으세요?”
“옛날 소시지 토치 이용해서 직 화로 구워도 맛있습니다. 살짝
타기는 해도 불 맛도 나고. 아, 이것도 맛소금 살짝 뿌려야 합니 다.”
유훈의 말에 강진이 웃었다.
“여자친구분이 맛소금을 참 잘 쓰시네요.”
“지은이는 맛있는 소금이라서 맛소금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싱긋 웃는 유훈의 모습에 강진 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시도를 참 많이 하셨네 요.”
“제가 자취를 해서 제 집에서 여럿 했는데…… 후! 제가 실험 대상이었죠.”
“그래도 남자 친구 음식도 해 주고 좋은 분이네요.”
강진의 말에 유훈이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좋은 여자였고 강한 여자였 죠.”
유훈의 목소리에 어린 씁쓸함을 눈치챈 황민성이 소주를 들어 그 의 잔에 따라주었다.
“그런데 왜 결혼 안 하셨습니 까?”
강진이 음식을 하는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아직 혼자라 는 것을 들은 것이다.
유훈은 쓰게 웃으며 소주를 마 셨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요.”
그리고는 작게 고개를 젓는 유 훈의 모습에 황민성은 더는 묻지 않았다.
유훈의 사정을 대충은 알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사랑하는 여자 수호령이 붙어 있는 것 또 한 알고 있으니 말이다.
“자! 한 잔 더 드시죠.”
황민성이 소주를 따라주자, 유 훈이 웃었다.
“하하하! 안주 먹을 시간도 안 주시는군요.”
유훈은 유부초밥을 하나 집어 먹고는 잔을 부딪친 뒤 입에 소 주를 털어 넣었다.
6시에 시작된 술자리는 10시가 가까워질 때까지 이어졌다.
유훈은 오늘 처음 본 사람들과 술자리를 함께하게 되었지만, 더 할 나위 없이 즐거웠고 편했다.
황민성이 술자리를 즐겁게 만들 었고, 원승환과 강진이 자신이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분위기 를 잡아준 덕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훈으로서는 그저 즐겁고 재밌을 뿐이었다.
게다가 술이라는 것은 처음 본
사람들도 친구로 만들어 주는 마 법의 음료기도 했고 말이다.
술을 마시던 유훈이 웃으며 말 했다.
“라면 하나 끓여 먹을까요?”
“라면 좋아하세요?”
“술에는 역시 얼큰한 라면이 좋 지요.”
“그럼 제가 끓여 오겠습니다.”
강진이 일어나려 하자 유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가 끓이겠습니다. 혹시 버너 있습니까?”
“식당이니 당연히 있지요.”
“그럼 버너로 끓여 먹지요. 버 너로 끓이는 라면이 참 맛있습니 다. 저기 햄하고 파, 그리고 식용 유하고 청양 고추도 좀 챙겨 주 십시오.”
유훈의 말에 강진이 주방에 들 어가 재료를 챙겼다.
“라면 끓여 먹으려나 봐요?”
“네. 홀에서 끓여서 바로 드시
고 싶은가 봐요.”
임지은은 재료를 챙기는 강진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라면 끓이는 것 구경해야겠 다.”
“라면 하나 끓여 드릴까요?”
배용수의 말에 임지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때까지 기다렸는데 더 기다 릴래요.”
“라면 끓이는 것 보면 먹고 싶
을 텐데.”
먹고 싶지 않다가도 남이 먹는 것을 보면 입맛이 생기는 것이 본능이니 말이다.
“이따 저승식당 영업하면 그때 먹을래요.”
배용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녀와 함께 홀로 나갔다.
한편 강진은 버너와 라면, 그리 고 냄비와 재료들을 옆 테이블 위에 놓았다.
강진이 재료를 가져다주자 유훈
이 파와 햄을 썰어서는 기름을 두른 냄비에 넣고는 불을 켰다.
달칵!
불이 켜지고 냄비가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유훈이 젓가락으로 휘 저었다.
“파하고 햄 기름 내시는 건가 요?”
“네.”
“짬뽕라면처럼 만드시나 보네 요.”
“짬뽕라면요?”
“요즘 유행하는 짬뽕라면도 이 렇게 파 볶아서 만들잖아요. 여 기에 오징어하고 햄도 넣고. 아! 오징어 있는데 드릴까요?”
“오징어는 안 넣습니다.”
그러고는 유훈이 웃으며 말했 다.
“이것도 여자친구가 해 주던 음 식입니다.”
“추억의 음식이네요.”
강진은 말을 하며 임지은을 보 았다. 자신이 해 주던 라면이라 는 말에 임지은이 고개를 갸웃거 리다가 눈을 찡그렸다.
“그 라면 싫다고 했으면서.”
임지은이 작게 투덜거리는 사 이, 라면을 보던 황민성이 웃었 다.
강진과 친해진 이유 중 하나가 라면이기 때문이었다.
분식집을 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 라면을 많이 먹었다. 그래
서 질리고 싫었지만, 어머니의 손맛을 가장 잘 느끼게 해주는 것이 라면이기도 했다.
그래서 술 마시고 어머니가 생 각이 나면 라면을 주문해서 먹었 던 것이다.
옛 기억을 떠올리던 황민성이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저에게도 라면은 추억의 음식 입니다.”
황민성의 말에 유훈이 그를 한 번 보고는 젓가락으로 햄과 파를
기름에 볶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볶고 난 뒤 뜨거운 물을 붓고는 라면과 스프를 넣었 다.
국물이 끓으며 면발이 맛있게 익어가자 유훈이 웃으며 사람들 을 보았다.
“이렇게 먹어도 맛있지만, 여기 에 충격적인 재료가 하나 더 들 어갑니다. 그럼 조금 이상하지만 맛있는 라면이 됩니다.”
“충격적인 재료?”
황민성이 의아한 듯 보자, 유훈 이 강진을 보았다.
“마요네즈 좀 주시겠습니까?”
“마요네즈요? 설마 라면에 마요 네즈를 넣으시게요?”
“네.”
강진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다가 힐끗 배용수를 보았다.
‘라면에 마요네즈를 넣는데?’
시선을 마주하던 배용수는 라면 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라면에 마요네즈 넣어서 먹는다고 하더라.”
‘진짜?’
강진이 의아한 듯 보자 배용수 가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 사람들은 그렇게 먹는 대. 그리고 어서 가져다줘라. 면 불겠다.”
배용수의 말에 강진이 입맛을 다시고는 마요네즈를 챙길 때, 유훈이 소리쳤다.
“라면 덜 국그릇도 부탁드려
요!”
그에 강진이 국그릇과 국자를 챙겨 나왔다. 국그릇을 건네받은 유훈이 라면을 그릇에 덜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진이 옆에 놓 인 마요네즈를 보았다.
‘라면에 마요네즈라니……
마요네즈를 음식에 넣어서 먹은 적은 있다. 김치전을 찍어 먹기 도 했고, 계란말이를 할 때 마요 네즈를 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다 고체 음식에 쓴
것이지, 이런 국물 요리에 쓴 적 은 없다.
‘감이 안 오네.’
강진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라 면을 덜어 네 그릇을 만든 유훈 이 웃으며 한 그릇에 마요네즈를 짰다.
쭈우욱! 쭈우욱!
‘이렇게 많이 넣는다고?’
라면 위로 마요네즈로 이뤄진 원이 다섯 줄 정도 만들어졌다.
그냥 조금 섞어서 먹는 정도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마요네즈 비빔면 수준이었다.
강진이 놀란 눈을 할 때 유훈이 사람들을 보았다. 원승환과 황민 성도 라면에 들어간 마요네즈 양 에 놀란 얼굴이었다.
“이건 마요네즈를 많이 넣어야 맛있습니다. 드셔 보실 분?”
사람들은 마요네즈가 들어간 라 면을 보며 입맛을 다실 뿐, 선뜻 나서지 못했다.
강진이 여전히 놀란 눈으로 라 면을 볼 때, 임지은이 웃으며 말 했다.
“사장님, 이거 맛있어요.”
임지은의 말에도 강진이 머뭇거 리자, 배용수가 웃으며 말했다.
“요리사는 음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 좋은 공부한다 생각하 고 먹어 봐.”
강진은 한숨을 쉬고는 마요네즈 가 얹어진 라면 그릇을 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맛……있어 보이네요.”
강진이 젓가락을 들자 황민성이 대단하다는 듯 그를 보다가 웃었 다.
“그래. 맛있어 보인다. 저도 먹 겠습니다.”
유훈은 웃으며 마요네즈를 라면 에 짜서는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드는 황민성을 보며 원승환이 한숨을 쉬고는 유훈을 보았다. 그에 유훈이 웃으며 마 요네즈 라면을 원승환에게 건네
고는 자신의 그릇에도 마요네즈 를 짠 뒤 자리에 앉았다.
“마요네즈를 막 풀어서 드시지 말고 살짝 풀어서, 거기에 면을 찍어 먹는 느낌으로 드세요. 맛 이 좋습니다.”
유훈의 설명에 강진이 입맛을 다시고는 젓가락으로 슬쩍 마요 네즈를 풀었다.
적당히 마요네즈를 풀은 강진은 붉은 국물 군데군데 퍼진 마요네 즈를 보았다.
‘딱…… 먹기 싫은 모습이네.’
붉은 국물에 퍼진 하얀 점액질 을 보며 입맛을 다신 강진이 힐 끗 앞을 보았다.
황민성과 원승환이 자신을 뚫어 지게 보고 있었다.
‘내가 실험 대상인가?’
자신이 먹는 것을 보고 먹으려 는 것이다. 그에 강진이 면발을 들어 마요네즈를 묻혔다.
주루룩!
마요네즈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 던 강진은 눈을 질끈 감고 면을 입에 넣었다.
후루룩!
입안에 들어오는 면발을 씹던 강진은 눈을 번쩍 떴다.
‘맛있다!’
강진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훈이 라면을 한 젓가락 먹고는 말했다.
“안 느끼하죠?”
“네. 안 느끼하고 고소하고 맛 있네요.”
강진의 말에 뒤따라 라면을 맛 본 황민성이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다.”
왜 맛있는 건지 의아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원승환도 같은 반 응을 보이자 임지은이 웃었다.
자신이 개발한 라면을 다들 맛 있게 먹자 기분이 좋은 것이다.
“맛있다니까요.”
그 순간, 임지은의 웃는 얼굴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그에 강진이 웃으며 더 맛있게 라면을 먹자 그녀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 진해졌다.
“이따가 내가 만든 레시피 음식 몇 개 해 드릴게요.”
임지은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