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화
장은옥을 보던 강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강상식에게 말 했다.
“심심하면 말해요.”
“뭐?”
“놀아 줄게요.”
“놀아줘?”
“소주 마시러 와도 좋고, 축구 시합 같이 보는 것도 좋고. 심심
하면 오세요.”
강진의 말에 강상식이 그를 보 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꼭 놀아 줘야 한다?”
“그럼요. 자주 놀아요.”
강진의 답에 강상식은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났 다.
“에이! 모르겠다.”
강진이 보자, 강상식이 웃으며 말했다.
“소주 마시러 가자.”
“형 마셔도 돼요?”
“상주라고 술 안 먹나? 그리고 내 손님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마셔 버리자.”
강상식이 장례식장으로 걸음을 옮기자 강진이 그 뒤를 따랐다.
식장 안으로 들어간 강진과 강 상식은 황민성에게 다가갔다. 황 민성은 강건희와 이야기를 나누 다가 강진이 오는 것을 보고는
옆자리를 두들겼다.
“상식이, 여기 앉아라.”
친근한 호칭에 강상식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조금 거리를 두던 황민성이 자신을 막 대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강상식이 자리에 앉자 황민성이 그를 보다가 말했다.
“앞으로 많이 외로울 거다.”
“그동안도…… 외로웠는걸요.”
강상식이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장은옥이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고는 굳은 눈으로 옆에 있 는 강건희를 쏘아보았다. 그 시 선에 강건희의 얼굴에 두려움이 어렸다.
귀신은 죽은 햇수만큼 귀력이 늘어난다. 그래서 오래전에 죽은 장은옥이 노려보자 두려움을 느 끼는 것이다.
“자…… 자네, 왜 이러나.”
“왜…… 도련님을 외롭게 두셨
어요.”
“나도 해 준다고…… 했어.”
“제가 옆에서 다 지켜봤어요.”
싸늘한 장은옥의 목소리에 강건 희가 침을 삼키고는 급히 말했 다.
“내가 잘 해 주면…… 애들이 더 상식이를 힘들게 할 거라 생 각을 했어.”
강건희의 말에 장은옥이 더 그 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강건 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사실이야. 내가 옆에 두 고 챙기면 아이들이 상식이를 더 힘들게 할 것 같아서 관심을 주 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왕 비서 시켜서 상식이 챙기려고 했어.”
“왕 비서 나쁜 사람이에요.”
장은옥의 말에 강건희가 그녀를 보았다.
“나도 왕 비서가…… 큰애 사주 를 받고 있는 줄은 몰랐어.”
죽어서 알게 된 거지만, 자신의
가장 최측근인 왕 비서는 큰아들 의 사주를 받고 있었다.
왕 비서를 통해 들어온 강상식 의 이야기가 대부분 나빴던 이유 가 그 때문이었다.
잘못된 보고를 받아온 강건희는 강상식에 대한 기대감을 줄이고 더 신경을 안 썼었다.
그러다 죽고 나서 알게 됐다. 자신이 병원에 오고 가는 사이, 차기 후계자인 큰아들 라인으로 왕 비서가 갈아탄 것을 말이다.
물론 그 중간에 큰아들이 왕 비 서에게 돈을 준 것도 있기는 했 지만 말이다.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나를 배 신하다니…… 내가 그동안 얼마 나 잘 해 줬는데.’
그뿐인가? 자신의 유언장에는 자신이 죽은 후 왕 비서를 계열 사 사장으로 임명하는 내용도 있 었다.
그런데 배신이라니…….
강건희가 한숨을 쉬며 변명하는
것을 보던 장은옥이 굳은 눈으로 그를 보다가 강상식을 보았다.
강상식은 황민성과 이야기를 나 누고 있었다.
“전에는 네가 가진 것이 없어서 있어도 없는 것처럼 대했지 만…… 이제는 너에게 오성화학 이 있어. 그러니 있어도 없는 놈 에서, 있으면 보기 싫은 놈으로 대할 거다.”
황민성의 말에 강상식이 웃었 다.
“후! 그전에도 있으면 보기 싫 은 놈 취급이었어요.”
강상식이 웃는 것에, 장은옥이 다시 강건희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강건희가 한숨을 쉬며 강 상식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아들이 이런 대접을 받았다는데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 강건희를 황민성과 강진이 볼 때, 강상식이 말했다.
“그래도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 어요.”
황민성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 슨 의미인지 강상식도 감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명심해라.”
“뭘 명심하라는 거죠?”
“짖는 개는 안 문다는 말이 있 다.”
물론 짖는 개도 물기는 문다. 일종의 예일 뿐이다.
“대놓고 너를 싫어하는 애들은 조심하고 경계하면 돼. 대신 너 한테 웃으며 다가오는 놈들은 경
계해라. 측근이 하는 배신이 상 처가 가장 큰 법이다.”
“알겠습니다.”
강상식에게 조언을 해 준 황민 성이 소주잔을 들었다. 그에 강 진과 강상식도 잔을 들어 소주를 마셨다.
“크윽! 좋네.”
소주를 단번에 들이켜는 황민성 과 강진을 보며 강상식이 미소 지었다.
소주는 썼지만 자신을 봐주러
온 사람이 있고 조언을 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조언이라는 것은 때로는 간섭이 나 잔소리로 들릴 수 있다. 하지 만…… 황민성의 조언은 진심이 느껴졌기에 강상식은 기분이 좋 았다.
이때까지 자신에게 조언을 해 주던 사람들은…… 조언이라는 탈을 쓴 비난을 내뱉던 사람들뿐 이니 말이다.
기분 좋은 얼굴로 강상식이 황 민성과 강진에게 소주를 따르고
는 피식 웃으며 힐끗 빈소 쪽을 보았다.
빈소 앞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조문을 기다리고 있었 고, 오성그룹 사람들이 손님을 맞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누구도 강상식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호적과 피 로 자신은 그들과 가족으로 묶여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스윽!
강상식은 다시 강진과 황민성을
보았다. 저 자리에 있을 때는 가 슴이 무겁고 답답했는데, 지금 이 자리는 편했다.
‘이 둘이 내 형제 같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강상식은 천장 을 보았다.
‘아버지…… 가시는 길에 저에 게 큰 선물을 주시고 가시는군 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자신이 친 구가 되고 싶었던 두 사람이 왔 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 말이
다.
게다가 지금은 형 동생 하는 사 이가 되기까지 했다.
강상식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웃고 있는 강상식의 모습에 장 은옥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 다.
“도련님 앞으로도 이렇게 웃으 세요. 웃으니…… 너무 좋네요.”
장은옥의 말에 강진이 그녀를 보았다.
‘곧 승천하시겠네.’
느낌이 왔다. 장은옥이 승천할 것이란 느낌 말이다.
장은옥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 편안함이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도련님이신 가요?’
아들에게 아들이라 말을 하지 못하는 장은옥을 보던 강진이 강 상식을 보았다.
“어머니 보고 싶지 않으세요?”
강진의 말에 장은옥이 그를 보 았다. 그리고 강상식이 쓰게 웃 었다.
“늘 보고 싶지.”
강상식은 앞에 놓인 육개장을 보았다.
“전에 내가 너에게 해 달라고 한 육개장 국수를 해 준.... 누
나가 사실 내 어머니야.”
“도련님……
장은옥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 다.
반면, 강상식은 육개장을 보다 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옆에 두고 도 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 지 못했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 르지 못했어.”
입맛을 다신 강상식이 다시 한 숨을 토했다.
“홍길동은 최소한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라 했을 텐데……
강상식의 말에 강진이 잔에 소 주를 따라서는 그의 육개장 앞에
놓았다.
“지금이라도 하세요.”
“지금?”
“장례식장이잖아요. 하늘하고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여기 아 니겠어요?”
강진의 말에 황민성이 슬쩍 장 은옥을 보고는 육개장 앞에 놓인 소주잔을 집어 자신의 자리에 놓 았다.
그걸 강상식이 물끄러미 보자, 황민성이 일어나 강진의 옆으로
가서는 앉았다.
“이왕이면 어머니 옆에 있다 생 각하고 어머니라고 불러 드려.”
그러고는 황민성이 장은옥을 보 았다.
“생전에 못 들은 어머니라는 말, 지금이라도 들으시면 아주 좋아하실 거야.”
황민성의 말에 장은옥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 합니다.”
장은옥의 말에 황민성이 작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어머니, 아들이라 말해 주세요. 아들 친구는 아들이죠.’
황민성의 입 모양을 읽은 장은 옥의 얼굴에 슬픔이 어렸다. 한 번도 아들을 아들이라 불러 보지 못했는데…… 지금 아들 친구가 자신에게 어머니라고 불러 준 것 이다.
한편, 자신의 옆자리에 놓인 소 주잔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강상 식이 그것을 들었다.
그러고는 꿀꺽 하고 단숨에 마 시는 강상식의 모습에 장은옥의 얼굴에 아쉬움이 어렸다.
자신이 미워서 소주를 주지 않 는 건가 싶어 서운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이 밝아 졌다. 자신의 앞에 빈 소주잔을 내려놓은 강상식이 무릎을 꿇고 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소주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쪼르륵!
소주를 따른 강상식이 잠시 소
주잔과 빈 옆자리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누나......"
작게 중얼거린 강상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엄마.”
“도련......"
엄마라는 말에 장은옥이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고 중얼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내.. 아들. 내 사랑하는 아
들…… 엄마가 너무 미안해. 내 가 엄마라고…… 너한테 미안해 도 말을 했어야 했는데. 엄마 가…… 네가 화를 낼까 봐 말을 못 했어. 엄마가…… 너한테 너 무 미안해.”
자신이 엄마라는 걸 말하지 못 하고 키웠던 것에 너무 미안해 장은옥이 눈물을 홀리며 울자, 강진이 한숨을 쉬다가 힐끗 강건 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황민성도 마찬가 지였다.
‘나쁜 영감.’
‘다 늙어가지고..
두 사람이 어떻게 엮였는지 몰 라도 일단 강건희가 나쁜 놈이었 다.
하지만 강건희는 그 둘의 시선 을 의식하지 못했다. 장은옥이 펑펑 우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던 탓이었다.
그는 슬며시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다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려놓았다.
장은옥이 통곡하듯 우는 사이, 강상식은 소주잔을 보다가 자신 이 먹던 육개장과 밥을 그녀의 앞에 놓고는 새로 수저와 젓가락 을 놓았다.
“생각을 못 했어요. 어머니한테 내가 밥을 한 번도 차려 준 적이 없다는 걸요. 어머니한테 처음 차려 드리는 밥이 이래서 죄송해 요.”
“저는 이것도 좋아요. 아주 좋 아요.”
잠시 장은옥의 소주잔을 보던
강상식이 숨을 크게 마셨다가 길 게 내뱉었다.
“후우!”
깊게 한숨을 토한 강상식이 허 공을 보았다. 그 순간…… 강상 식은 정확하게 장은옥의 얼굴 쪽 을 보고 있었다.
“내, 흐으윽……. 내 아들.”
비록 우연의 일치일 뿐이었지 만,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을 보 며 장은옥은 흐느껴 울었다.
“누나…… 아니, 엄마가 나 행
복해지라고 했잖아. 예전에는 성 공하고 아버지한테 인정받는 것 이 내가 행복해지는 거라 생각을 했어요. 근데……
강상식이 강진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더라고요.”
강상식의 말에 장은옥이 강진에 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장은옥의 인사에 황민성이 피식 웃으며 강진의 어깨를 손으로 쥐
었다. 그에 강진이 작게 웃으며 소주를 마셨다.
강상식은 다시 허공을 보며 말 했다.
“앞으로는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일 하고, 가끔은 남을 돕는 일도 하면서 살게요. 남을 돕는 것을 조금 해 보니까…… 기분이 좋더라고요.”
강상식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 걱정하지 말고 위에서 지켜
봐 주세요.”
웃으며 강상식이 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장은옥의 앞에 놓인 소 주잔에 가볍게 가져다 대고는 강 진과 황민성을 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사람이 잔을 들었다. 그들은 서로를 한 번 보고는 소주를 마셨다.
꿀꺽!
꿀꺽!
꿀꺽!
단숨에 소주를 마시고 잔을 내 려놓는 세 사람의 모습에 장은옥 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 다.
스윽!
일어선 장은옥은 강진과 황민성 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제 아들하고 친하게 지내 주셔 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화아악!
인사를 한 장은옥의 몸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보던 강진이 작게 한 숨을 쉬었다.
마지막까지도 장은옥은 아들만 을 생각하다 간 것이다.
‘그래도 아들이라 부르고 가셨 으니 편하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