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 화
강진이 홀에 버너와 불판을 놓 고 간단하게 고기 구울 준비를 할 때, 가게 문이 열리며 강상식 이 들어왔다.
한 손에 정장 재킷을 들고 터덜 터덜 걸어 들어오는 강상식은 무 척 피곤한 모습이었다.
“오셨어요?”
강진의 말에 강상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 놓아도 되겠죠?”
조금은 가볍고 친근하게 말을 했지만 강상식의 목소리에는 조 금 불안함이 있었다.
혹시라도 강진이 아니라고 하면 어쩌나 싶어서 말이다.
“그럼요. 편하게 하세요.”
강진의 말에 강상식이 웃으며 불판이 놓인 자리에 앉았다. 그 런 강상식을 보며 황민성이 냉동 삼겹살을 손으로 툭 쳤다.
“먹고 싶다고 준비했다.”
“고맙습니다.”
“많이 피곤하지?”
“잠을 잘 못 잤더니 조금 피곤 하네요.”
강상식이 피곤해하자, 강진이 주방에서 수건을 하나 꺼내 물을 묻혀서는 가져다주었다.
“얼굴 좀 닦으세요.”
“ 고맙다.”
강상식은 웃으며 수건을 받아서 는 얼굴을 닦았다. 차가운 수건
으로 얼굴을 닦자 조금은 개운해 진 강상식이 미소를 지으며 옆에 수건을 놓았다.
“피곤하실 테니 바로 고기 구울 게요.”
“내가 할게.”
황민성이 집게를 들어 삼겹살을 올리자 강진이 강상식을 보았다.
“수고하셨어요.”
말을 하며 강진이 소주병을 들 자, 강상식이 잔을 들었다.
“장례식이 참 피곤하기는 하 네.”
“소주 드시고 푹 주무세요.”
강진의 말에 황민성이 강상식을 보았다.
“먹고 집에 갈 거야?”
“집이라……
잠시 입맛을 다신 강상식이 고 개를 저었다.
“아버지 집에 큰아버님 가족이 살아서요. 아버지도 없는데 저는
나와야죠.”
“집에서 나오려고?”
“전에야 아버님이 살아 계시니 있었는데…… 아버지 없으면 구 박밖에 더 받겠어요? 게다가 큰 아버지도 큰형한테 오성화학 넘 기라고 계속 그러는데…… 그 소 리 안 들으려면 나와야죠.”
“짐은?”
“거기 일하는 사람들한테 보내 라고 하면 됩니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오늘은 호텔에서 잘 생각입니 다.”
강상식의 말에 황민성이 말없이 고기를 뒤집었다. 그 사이 강진 이 주방에서 육개장 국수를 만들 어 가지고 나왔다.
장은옥이 알려 준, 프라이팬을 써서 빠르게 만들어내는 육개장 국수였다.
강진이 육개장 국수를 앞에 놓 자, 강상식이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저승에서는 두 분 만나면 누나 가……
무의식적으로 누나라는 말을 내 뱉은 강상식이 웃으며 말을 고쳤 다.
“엄마가 아버지를 좀 구박도 하 고 혼 좀 냈으면 좋겠다.”
“그러실 거예요. 따지고 보면 저승에서는 어머니가 고참이잖아 요.”
강진의 말에 강상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 실장을 보았다. 오
실장은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오 실장님도 같이 드시죠.”
“아닙니다. 저는 점심 먹었습니 다.”
강상식은 오 실장이 거절을 하 자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런 강 상식을 본 황민성이 웃었다.
“확실히 상식이가 많이 변하기 는 했네.”
“제가요?”
“옛날이었으면 실장님에게 식사 같이 하자고 했겠어?”
“그건…… 그러네요.”
강상식이 피식 웃는 것을 보며 강진이 말했다.
“상식이 형 시간 날 때마다 보 육원에 봉사하러 가신대요.”
“자주 가나 보지?”
황민성의 말에 강상식이 고개를 저었다.
“바빠서 자주는 못 가고 시간이
될 때 한 번씩 가서 쉬었다가 옵 니다. 아이들 보면서 멍하니 앉 아 있다 와도 힐링 되는 기분입 니다.”
“원장님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나 학용품 같은 후원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요. 아! 보육원에 컴퓨터실 만들 어 주셨다면서요?”
강진의 말에 황민성이 강상식을 보았다.
컴퓨터실을 만들어 줬어?”
“별거 아니었습니다. 저희 회사 컴퓨터 바꾼다고 결제가 올라왔 기에, 교체하면서 남은 컴퓨터들 을 설치해 준 것뿐입니다. 그래 도 보내기 전에 직원들이 깨끗하 게 손을 봐서 잘 돌아갑니다.”
“잘 했네.”
강상식은 웃으며 말을 덧붙였 다.
“저희 직원들하고 같이 가서 설 치했는데, 직원들이 좋아하더군 요. 보람 있었다고.”
“네 앞이라 좋아하는 척한 것 아냐?”
“아닙니다. 직원 중에 평소 봉 사 활동에 관심 있는 친구들만 데려간 겁니다.”
“그럼 좋아했겠네.”
황민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익은 고기를 김치 위에 올렸다.
“고생했다. 먹어라.”
황민성의 말에 강상식이 소주잔 을 들었다. 그에 강진과 황민성 이 잔을 들었다.
세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 고는 소주를 마셨다. 물론 강진 은 저녁 장사가 있어서 잔에 물 을 담아서 마셨지만 말이다.
기분 좋게 잔을 내려놓은 강상 식이 삼겹살을 입에 넣고는 미소 를 지었다.
“어렸을 때 누나…… 아니, 엄 마가 방에서 가끔 이렇게 냉동 삼겹살을 구워 드셨어요.”
“방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어?”
“직원들 밥 먹는 식당이 따로
있기는 했는데…… 삼겹살을 구 워 먹기는 그렇잖아요. 냄새도 풍기고. 그리고 냉동 삼겹살은 소주하고 먹어야 또 맛도 있고.”
“어머니가 소주를 가끔 하셨나 보네?”
“정말 가끔 이렇게 드시는 것 좋아하셨어요.”
강상식은 육개장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맛있다.”
“많이 있으니 많이 드세요.”
강진의 말에 강상식이 웃으며 황민성에게 소주를 따르고는 자 신도 소주를 받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마신 강상식이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장례 끝나고 온 녀석이 할 말 은 아니지 않나?”
“그건 그런데…… 마음 편히 올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과 소주 한 잔 같이 하자고 부를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아요.”
강상식의 말에 황민성이 소주잔 을 들었다. 그에 강상식이 잔을 들어 황민성의 잔에 맞부딪쳤다.
“네가 변해서 편해진 거다.”
“제가요?”
“예전의 너였으면 나한테 뭐 얻 을 것 없나 할 테고, 강진이는 눈 아래로 보았겠지. 그런데 지 금은 아니잖아. 그래서 여기가 편한 거야.”
“그건…… 그러네요.”
두 사람이 편한 사람이라고 해
도, 두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있 으면 이 자리가 불편했을 것이 다.
황민성의 말대로 바라는 것이 없으니 편한 것이다.
강상식은 입맛을 다시다가 자리 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강진에 게 고개를 숙였다.
“전에 내가 너한테 돈 봉투 줬 던 거 정말 부끄럽고…… 미안하 다.”
강진은 웃으며 그를 툭 쳤다.
“그 사과, 받겠습니다. 저 그때 충격이었어요.”
강상식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 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에 황민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강진이한테 돈 봉투 줬어?”
“형하고 친해지게 다리 좀 놓아 달라고 봉투를 줬었습니다.”
강상식은 변명하지 않고 사실대 로 이야기를 했다. 숨기려고 했 다면 이 자리에서 사과를 하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쯔! 그걸 왜 강진이한테 줘.
나한테 줘야지.”
황민성의 말에 강상식이 웃었 다.
“형한테 주면 받기는 하시고 요?”
“받지. 안 받을 이유가 있나.”
“봉투만 받고 신경도 안 쓰셨겠 죠?”
“정답.”
강진이 장난스럽게 묻자 웃으며
답한 황민성이 강상식에게 소주 를 따라주었다.
“너도 참 힘들게 살았겠지만, 형도 힘들게 살았다.”
“알고 있습니다.”
강상식이 답하자, 황민성은 고 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야기는 세간에 좀 퍼져 있었다. 그래서 있는 집 자식 중 에는 황민성을 은근히 무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주먹이나 쓰던 무식한 조폭 놈
이 처가 잘 만나서 성공했다고 말이다.
“근데 형이 살아 보니까, 세상 이 바뀌려면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하더라. 내가 안 바뀌면 세상은 백날 바뀌지 않아.”
그러고는 황민성이 강상식을 보 았다.
“네가 변해서 너를 보는 사람들 도 변한 거다.”
황민성의 말에 강상식이 강진을 보았다.
“강진이가…… 남을 돕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려줘서 제가 변한 것 같습니다.”
옛날의 자신이었다면 보육원 기 부를 세금 감면과 기업 이미지를 위한 것 정도로 치부했을 것이 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보육원 에 가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이 필요한 학용품과 물건 을 가져다줄 때 즐겁다. 자신이 준비한 것을 받고 기뻐하는 아이 들을 보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
이다.
강상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황민성이 말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
“재밌으니 앞으로도 더 하겠 죠.”
재미가 없으면 남이 시켜야 하 지만, 재미가 있으면 남이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것이 사람이니 말이다.
강상식의 말에 황민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주를 마시기 시작
했다.
“강진아, 육개장 국수 좀 더 줄 래?”
“잠시만요.”
말을 한 강진은 주방에 들어간 뒤 육개장을 프라이팬에 덜어서 는 불에 올렸다.
그러고는 국수를 물에 살짝 씻 어냈다. 전분을 씻어내 깔끔하게 끓이려는 것이다.
육개장이 끓기를 기다리던 강진 이 힐끗 홀을 보았다. 그러다 그
의 머릿속에 장은옥이 떠나면서 준 쪽지가 떠올랐다.
그에 강진이 지갑에서 그 쪽지 를 꺼냈다.
〈사장님…… 아니, 강진아.
아들의 친한 동생이니 내가 너 를 강진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아.
아들의 친구는 나에게도 아들이 니까. 그래서 강진이라고 부를게. 괜찮지?〉
강진은 글을 보며 웃었다. 처음 볼 때도 느낀 거지만…… 글에 망설임이 느껴졌다.
망설임이 없었다면 한 번에 주 우욱! 썼을 텐데, 이 글은 중간 중간에 멈췄다가 다시 쓴 흔적이 있었다.
아마도 자신에게 강진이라고 불 러도 되나 하는 생각을 했던 모 양이었다.
‘여기 계실 때 편하게 부르라고
할 것을
그럼 이 편지를 쓸 때 마음 편 하게 글을 썼을 테니 말이다. 속 으로 중얼거린 강진은 편지를 마 저 읽었다.
〈나는 강진이가 우리 아들 옆에 있어서 너무 좋고 안심이 돼. 앞 으로도 우리 아들하고 친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어.
이건 민성이하고 맛있는 거 사 먹어.
그리고 우리 상식이하고 친하게 지내줘서 너무 고맙고 감사해.〉
장은옥이 남긴 편지에는 어머니 로서 아들 친구에게 하는 말이 담겨 있었다.
‘가실 때도 친하게 지내 고맙다 고 하시더니……
장은옥을 떠올리니 마음이 짠한 강진이었다. 승천하기 직전에야 겨우 아들에게 아들이라고 말을 할 수 있었던 그녀를 떠올리니
짠한 것이다.
입맛을 다신 강진은 지갑에서 종이를 하나 더 꺼냈다.
지급자: JS 금융
2,000,000원 (금이백만원정)
이 수표 금액을 이강진, 황민성 에게 지급해 주기 바랍니다.
발행인: 장은옥〉
수표를 보며 강진이 한숨을 쉬 었다. 맛있는 거 人} 먹기에는 너 무 큰돈을 장은옥이 보내 준 것 이다.
‘그냥 오만 원만 보내 주시지. 애들 용돈을 너무 크게 주셨어 요.’
수표를 보던 강진이 고개를 흔 들고는 지갑에 그것을 다시 집어 넣었다.
이 수표는 아무래도 좀 나중에 입금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친구 엄마가 준 돈을 바로 입금하기에
는.. 엄마가 친구들에게 용돈
을 주던 모습이 떠올라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장은옥을 떠올리던 강진은 육개 장 국수가 다 되자 그릇을 들고 홀로 나왔다.
“육개장 국수 나왔습니다.”
“고마워.”
강상식이 웃으며 육개장 국수를 떠먹으려 할 때, 강진이 말했다.
“미안해요.’’
그에 강상식이 의아한 듯 그를 보았다.
“무슨 소리야?”
“형 아버님이 살아 계시다 면…… 형한테 이 말을 꼭 하셨 을 거예요.”
강상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피식 웃었다.
“그랬으면…… 어머니가 좋아하 셨겠다.”
그러고는 강상식이 황민성을 보 았다.
“갑자기 피곤해서 집에 좀 가야 겠습니다.”
“사우나 안 가고?”
“집에 가서…… 좀 쉬려고요.”
“가족들 있지 않겠어?”
“있어도 그 집이 제 집이 아닌 건 아니니까요.”
강상식은 다시 강진을 보았다.
“육개장 시키고 먹지도 않고 가 서 미안하다.”
“제가 먹으면 되죠.”
강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강 상식이 몸을 일으켰다.
“형 간다.”
“가세요.”
“그리고…… 그 사과, 받을게 요.”
허공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한 강상식은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