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허연욱이 군인 귀신과 이야기를 나 눌 때, 의사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화상으로라도 보호자에 게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개복 수술을 할 경우 최선을 다하겠 습니다. 그건…… 최선을 다하겠다 는 것 외엔 말을 못 드리겠습니다.”
통화하는 걸 듣던 허연욱은 황당하 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는 지금 최 선을 다하겠다고 하지만, 미묘한 어
감 차이로 분명히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개복 수술을 하면 살 수 도 있지만, 병원으로 이송을 시키면 최선을 다해도 어렵다고 말이다.
이건 명백하게…… 협박이었다. 보 호자로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뭐가 됐든 의료진의 말을 따를 수밖 에 없으니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허연욱의 중얼거림에 군인 귀신이 쓰게 웃었다.
“보호자한테 생각할 시간을 잘 안 주는 편이죠.”
“이건 협박인데요?”
군인 귀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와 달리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보호자 동의 받 고 개복하겠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것으로 통화를 끝낸 의사가 핸드 폰을 만지작거리고는 말했다.
“통화 녹음한 거 제가 가져갑니 다.”
의사의 말에 구조대원이 그를 보았 다.
“녹음을 하셨습니까?”
“사람 살리는 건 좋아하지만....
소송은 싫어서요.”
구조대원이 고개를 끄덕일 때, 끼 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뜯겨 나왔다.
“됐습니다.”
“바로 꺼내요.”
말을 한 의사가 서둘러 구급차로
가서는 의료용 침대를 끌고 왔다.
사고 현장을 보던 강진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다른 환자들을 태 운 구급차는 모두 가고, 두 번째 차 량에서 내린 환자를 태운 구급차만 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구급차는 가지 않고 여 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환자 급한데 왜 안 가지?’
그런 생각을 하던 강진은 걱정스러 운 눈으로 구조대 쪽을 보다가 가게 에서 오미자차가 담긴 물통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한쪽 손을 들며 사고 현 장으로 다가갔다.
사고가 난 탓에 주행 중인 차들이 속도를 줄인 상태라 위험하지는 않 았다.
강진은 구조대원들에게 종이컵을 내밀었다.
“오미자차입니다. 시원하니 한 잔 들 하세요.”
“괜찮습니다.”
“들고 왔으니 한 잔들 하세요. 이 거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강진이 웃으며 종이컵에 오미자차 를 따르자, 더는 거절하기 힘든 구 조대원이 그것을 받아 마셨다.
“후우! 시원하고 달달하니 좋네 요.”
말은 안 했지만, 날씨가 더워지는 오월의 낮이고 도로 한복판이라 아
스팔트가 열을 받아 무척 더웠다.
이런 상황에서 시원하고 달달한 오 미자차를 마시니 힘이 나는 듯했다.
구조대원의 말에 강진이 한 잔 더 따라주고는 다른 대원들에게도 차를 건네주었다.
장비를 정리하던 구조대원들이 오 미자차를 마시는 것을 보던 강진이 구급차를 보았다.
그 구급차 옆에는 허연욱과 처음 보는 군인 귀신이 있었다.
강진이 보자 허연욱이 다가왔다.
“환자, 살 것 같습니다.”
허연욱의 말에 강진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까는 어렵다고 하셨는데, 괜찮 아진 건가요?”
허연욱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제 생각에는 그랬는데…… 마침 여기에 온 의사 선생님이 이런 응급 처치에 능하더군요.”
“그런데 왜 차는 안 가는 거죠?”
“여기에서 개복해서 출혈 잡고 출 발할 겁니다.”
“여기에서요?”
“네.”
그러고는 허연욱이 대단하다는 듯 구급차를 보았다.
“실력이 아주 좋더군요. 출혈도 순 식간에 잡고.”
“그럼 저분 사시는 건가요?”
강진의 말에 군인 귀신이 웃으며 다가왔다.
“내장이 몸 밖에 나온 환자도 살리 는 친구입니다. 위험하기는 해 도…… 여기는 시설도 좋으니 도착 전까지 숨 잡아 놓으면 겁니다.”
병원 살릴
강진이 그를 보자, 허연욱이 다.
말했
“의사 선생 수호령입니다. 말 들으 니 아프간에서 같이 있었다고 합니 다.”
“그런데 군복이 우리나라 것이 아 닌 것 같은데요?”
“미군 소속입니다.”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데…… 한국 말도 잘 하시고.’
그런 생각을 하던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교포가 미군에 들어 가는 경우가 꽤 많다고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아프간요?”
“아프간에 파병 나가 있을 때 저 친구하고 친해졌죠. 나는 미군, 저 친구는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이었 고.”
군인 귀신은 구급차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의료법 없는 곳에서 더 실력이 좋 은 놈이지만, 여기는 설비가 더 좋 으니 어떻게든 살려 낼 겁니다.”
군인 귀신의 말에 허연욱이 그를 보았다.
“의료법?”
“저 녀석이 환자 보면 과 상관없이 손부터 대거든요. 후! 그래서 한국 에 왔을 때 소송도 많이 걸렸어요.”
“확실히 소송 걸릴 일이군요.”
“아프간에서야 과 안 따지고 살릴 수 있으면 살렸지만, 체계가 잡힌 나라에서는 안 될 일이죠. 그래서 아까 보호자 허락도 먼저 받아서 녹 음한 거고요.”
“그만큼 소송을 많이 당했나 보군 요.”
군인 귀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고생했죠. 다행히 저 녀석 좋게 보는 선배들과 신세 졌던 이들 이 도와줘서 아직 가운 입고 있는 겁니다.”
군인 귀신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았다.
“그럼 살 수 있는 겁니까?”
“살릴 겁니다. 저 녀석은…… 죽을 환자한테는 손을 안 대거든요.”
묘한 씁쓸함이 묻어나는 군인 귀신 의 목소리에 의아해하던 강진은 구 급차를 보았다.
‘그래도 아빠가 살아서 다행이다.’
장난감을 떠올리며 강진이 속으로 중얼거릴 때, 오토바이 한 대가 급 하게 다가왔다.
그 오토바이 뒤에서 의사 한 명이 아이스박스를 들고는 급히 내렸다.
그리고는 급히 구급차 문을 향해 소리쳤다.
“선생님, 혈액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안에서 들리는 고함에 의사가 문을 열었다.
주르륵!
그와 동시에 구급차 열린 문을 통 해 혈액이 바닥으로 홀러내렸다.
“허억!”
강진이 놀란 눈으로 그것을 볼 때. 의사도 당황스러운 듯 몸이 굳어졌 다.
“안 들어와?!”
수술을 집도 중이던 남자가 버럭 외치자 혈액 팩을 챙긴 의사가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함께 구급차가 급하게 출발을 하기 시작했다.
애애행! 애애행!
사이렌을 크게 울리며 차선을 넘어 가는 구급차를 경찰차 한 대가 급히 뒤쫓았다.
그 경찰차는 구급차 앞으로 빠르게 끼어들어서는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 다.
강진이 그것을 볼 때, 구조대원들 이 자리를 정리하고는 강진에게 물 통을 돌려주었다.
“잘 마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야 늘 하는 일인
걸요. 그리고 신고해 주시고 사고 현장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조대원이 경례하자 강진은 자기 도 모르게 그를 따라 경례했다.
그 모습에 구조대원이 웃으며 한끼 식당 앞에 있는 택시 택시 기사에게 도 경례를 했다.
그에 택시 기사도 웃으며 경례를 하고는 도로를 살피며 다가왔다.
“다 된 겁니까?”
“사고 차량 뒤에 비상등 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사고 차량을 보지
못하고 뒤에서 들이박는 2차 사고도 생기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한 겁니다. 그럼 수고들 하셨습니다.”
택시 기사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다가 말했다.
“사장님.”
“ 예.”
“저희 식당 언제든지 한 번 찾아와 주세요.”
“맛있다고는 하던데……
“아세요?”
“택시 기사들은 싸고 맛있는 집 찾 아서 다니니까요. 근데 점심시간에 는 자리 없어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 던데요?”
“점심시간에는 좀 그런 편입니다. 근데 한 시 넘으면 손님 적어서 바 로 드실 수 있습니다.”
강진의 말에 택시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서 손님 내릴 일 있으면 가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강진의 말에 택시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다가 다시 뒤돌 아섰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사장님도 오늘 수고했어요.”
택시 기사가 손을 내밀자 강진이 맞잡으려다가 멈칫했다. 새끼손가락 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기 흉하지?”
“아닙니다.
고개를 저은 강진은 그 손을 잡았 다.
“꼭 와 주세요.”
강진의 말에 택시 기사가 피식 웃 고는 몸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또 봅시다.”
택시 기사가 트렁크에 올려놓은 비 상등을 챙기고는 곧 차를 돌려 가 자, 강진이 구조대원들을 보았다.
“저 혹시 식사는 하셨습니까?”
“저희도 식사는 하고 다닙니다.”
“그럼 언제 시간 나실 때 한 번 찾 아와 주세요. 저희 가게는 여기 앞 에 있는 한끼식당입니다.”
“알겠습니다.”
“아! 정말 꼭 와 주세요.”
강진의 말에 구조대원이 웃으며 슬 쩍 정리되고 있는 현장을 보았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수고하셨습니다.”
강진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자, 구 조대원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구조대원이 각자 짐을 챙기는 사 이, 경찰과 견인차가 와서는 사고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고가 났던 날로부터 며칠 후, 점 심 장사를 준비하던 강진은 가게 문 이 들썩이는 것에 고개를 돌렸다.
띠링! 띠링!
영업시간 전에는 가게 문을 잠가
놓기에, 강진은 직원들에게 눈짓을 주며 가게 문을 열었다.
덜컥!
문을 연 강진은 삼십 대 정도 되 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강진이 몸을 돌렸다.
“들어오세요.”
여자는 강진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
였다.
“감사합니다.”
여자의 행동에 조금 의아해하던 강 진이 그녀를 보다가 안을 가리켰다.
“식사 손님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들어오세요.”
강진의 말에 여자가 안으로 들어오 며 손에 들린 음료수 상자를 내밀었 다.
“저기, 뭘 사 와야 할지 몰라서요.”
여자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음료수
상자를 받고는 슬며시 물었다.
“혹시 며칠 전에 여기서 사고 난 차……?”
여자는 아차 싶은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그때 선생님 아니셨으 면 우리 남편 죽었을 거라고 들었어 요. 정말 감사합니다.”
“남편분 사셨어요?”
“아직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그래 도 방금 눈 떠서 몇 마디도 나눴습 니다.”
“아, 다행이네요.”
“남편이 사고 났을 때…… 어떤 분 이 의식 놓지 말고 정신 꼭 붙잡으 라는 말에 버틸 수 있었대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나요. 그때 구급대원 분들과 의사 선생님이 고 생 많이 하셨죠.”
강진의 말에 여자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의사 선생님이 사고 나 고 바로 119가 도착해서 정말 천만
다행이라고, 이번에 남편을 살려 준 건 바로 신고를 해 준 분이라고 하 셨어요.”
“정말 살아나셔서 다행입니다.”
강진이 웃으며 말하자 여자가 눈가 를 닦았다.
“사고가 난 날이 제 아들 생일이었 어요. 만약 그날 남편이 죽었다 면…… 우리 아들은……
그날의 감정이 떠오르는 듯 계속 눈물을 홀리는 여자를 보던 강진이 입을 열었다.
“잠시 의식이 드셨을 때 그런 이야 기를 하셨습니다.”
여자가 보자, 강진이 말을 이었다.
“오늘 자식 생일이라... 죽을 수
없다고요. 죽어도 내일 죽게 도와달 라고요.”
“아......"
“아들 생일에 아버지 제사상을 차 리지 않게 하려고 남편분이 죽을힘 을 다해 버티신 것 같습니다. 참 대 단히 강한 분이십니다.”
“흑! 우리 그이가…… 그런 생각
강진은 오열하는 여자를 자리에 앉 혔다. 이런 감정으로 가게를 나가면 어디 길바닥에 쓰러져 계속 울기만 할 것 같으니 좀 감정을 추스르게 도우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