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화
옛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미소 를 짓던 한선동이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죽어서 태우 면 한 줌 가루가 되는 주제에 욕 심이 과했지. 내 몸이 얼마나 크 다고 이 큰 산을 독차지하려고 했는지…… 잘 팔았어.”
한선동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강진이 물었다.
“근데 안 팔려고 하신 산을 왜
파신 거예요?”
강진의 물음에 한선동이 웃으며 학교를 돌아보았다.
“부동산에서 팔라고 연락이 왔 기에 안 판다고 거절을 했는 데…… 황 사장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어. 여기 산이 참 마음에 든다고. 그래서 ‘왜, 여기에다 리 조트라도 짓게?’ 했지.”
-왜, 리조트라도 짓게?
-리조트 지으면 파시겠습니까?
-리조트 짓는다고 하면 팔 수 도 있지. 산에 그거 들어오면 주 변 땅값도 오를 테고…… 그래서 리조트를 짓는다고?
-아닙니다.
-그럼 이 볼 것도 없는 산을 사서 뭐 하려고?
-학교를 지을 겁니다.
-그게 말이 되나? 학교를 지으 려면 애들이 있어야 하는데?
-전국에서 모을 겁니다.
“그러면서 불량한 애들 데려다 가 기술 가르치고 공부 가르쳐서 사회에서 제대로 월급 받고 살 수 있게 만들겠다고 하잖아.”
“그래서 파신 건가요?”
“그 말 들으니……
입맛을 다신 한선동이 한숨을 쉬었다.
“죽은 내 손주가 생각이 나더라 고.”
“손주요?”
“아들 내외가 일찍 죽었어. 그 래서 나와 할망구가 손주를 키웠 는데……
한선동은 멍하니 있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애가 일곱 살이 될 때…… 자 다가 죽었어.”
“자다가요?”
“아침에 일어나서 애 깨우려고 하는데…… 죽어 있더라고.”
한숨을 크게 토한 한선동이 입 맛을 다셨다.
“나 같은 노인네나 데려갈 것이 지. 그 어린 것을 데려다가 어디 에 쓰겠다고.”
한선동은 하늘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어떻게 됐다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후 우!”
고개를 떨군 한선동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들 내외 죽고 남은 손주까지 보내니……
뒷말을 하지 않아도 강진은 그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자식과 손주를 먼저 보내는 심정은 몰라 도…… 사랑하는 부모님을 먼저 보낸 심정은 잘 알고 있으니 말 이다.
고개를 저은 한선동이 잠시 삼 겹살을 보다가 말했다.
“그러다가 겨울이 됐지. 우리 손주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해서 11월부터 크리스마스, 크리스마
스 노래 부르면서 그날만 기다리 거든.”
“아이들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 죠.”
크리스마스에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도, 그날이 되면 사람들이 모두 홍겨워하고 즐거워하니 말 이다.
그리고 산타 할아버지도 있고 말이다.
“손주가 없는데 12월이 되니 우 리 할망구하고 나하고 참 쓸쓸하
더라고. 손주 살아 있으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뭘 사줘야 하나 걱정하면서도 즐거웠을 텐데 말 이야.”
재차 입맛을 다신 한선동이 말 을 이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할망 구하고 점심을 먹고 있는데 이장 이 찾아왔더라고. 그래서 밥 먹 었냐고 하니 머뭇거리다가 일단 식사부터 하라고 하더군.”
머뭇거리는 이장을 보며 의아한 한선동이 말했다.
-식사 안 했으면 밥이나 같이 해.
-아닙니다. 일단 식사부터 마저 하세요.
평소 활달한 이장이 조금 목소 리가 가라앉은 것 같다 생각을 하며 한선동이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저기 어르신…….
말을 마저 하지 못하고 입을 다 무는 이장을 보며 한선동이 고개 를 저었다. 뭔가 부탁할 것이 있 어서 이러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 다.
-이 사람…… 뭐 돈 필요해?
-돈이라니요. 저 여기 정착할 때 어르신께서 도와주신 것도 아 직 다 못 갚았는걸요.
-그런데 왜 그래? 혹시 태동이 녀석이 사고 쳤어?
-아닙니다. 태동이는 요즘 술도
안 마시고 회사 잘 다닙니다.
-그럼 뭔데 그래?
한선동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장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말없이 내민 종이를 받아든 한 선동이 그것을 보았다. 작은 글 씨라 잘 보이지 않자 이장을 보 며 물었다.
-이게 뭔데?
-어르신, 안경을 끼시죠.
-이거 참…… 그냥 말을 해 주 면 될 것을.
사람 답답하게 한다 생각을 하 며 한선동이 안경을 찾아 쓰고는 종이를 보았다.
〈취학 통지서〉
-취학 통지서?
이게 뭔지 의아해하는 한선동을
보며 이장이 한숨을 쉬었다.
-일선이…… 학교 갈 나이 됐 다고 나온 겁니다.
자신의 손자 일선의 이름에 한 선동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취학 통지 서를 보던 한선동이 내용을 읽었 다.
통지서에는 며칠에 예비 소집을 한다는 것과 장소가 적혀 있었 다.
멍하니 통지서를 보고 있는 한
선동을 보던 이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손에 쥐었 다.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119라도 빨리 불러야 하니 말이다.
-이게…… 우리 일선이 학교 나오라는…….
-일선이 살았으면 내년에 학교 갈 나이잖습니까.
취학 통지서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 한선동에게 이장이 슬며시 말을 이었다.
-일선이 사망…….
잠시 말을 멈춘 이장이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망 신고 아직 안 하셔서 나 온 것 같습니다.
원래라면 사망하고 한 달 이내 에 해야 하는 신고지만 한선동은 아직 안 한 것이다.
“아…… 취학 통지서가 나왔군 요.”
강진이 안타까운 듯 보자, 한선 동이 한숨을 쉬었다.
“손주 죽고 나도 정신없고, 할 망구도 정신없고…… 사망 신고 를 할 수가 있어야지. 그러다 보 니 그게 나왔더라고.”
잠시 있던 한선동이 말을 이었 다.
“취학 통지서 들고 있다가 이장 하고 같이 면사무소로 가서 사망 신고서 작성하려고 하는데, 글자 하나하나마다 손주 얼굴이 떠오 르는 거야. 그래서 울고만 있으
니 이장이 대신 써서…… 사망 신고를 했지.
한선동의 말에 강진이 입맛을 다셨다.
‘손주가 죽은 것도 슬픈데…… 사망 신고를 할 때는 얼마나 슬 프셨을까?’
강진이 한숨을 쉬며 한선동을 보았다. 그런 강진의 시선을 받 으며 한선동이 말을 했다.
“황 사장 이야기 듣고 있는데 벽에 걸려 있는 일선이 취학 통
지서하고 등본이 보이더라고.”
‘일선이? 그럼 학교 이름을 어 르신 손주 이름에서 따온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강진이 물었 다.
“그런데 등본요?”
강진이 묻자 한선동이 쓰게 웃 으며 말했다.
“면사무소 직원이 사망신고서를 받고는 먼저 등본을 하나 뽑아 드릴까요? 하고 묻더라고. 그래 서 그건 뭐 하게? 했더니 직원이
잠시 있다가 울더라고
갑자기 우는 직원의 모습에 이 장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면사무소에 있던 직원들 도 놀란 눈으로 우는 직원을 보 았다.
그 시선에 급히 눈가를 닦은 직 원이 잠시 있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얼마 전에 저희 어머니가 돌 아가셨습니다.
_이런…….
한선동이 남 일 같지 않아 애잔 한 시선으로 보자 직원이 재차 한숨을 쉬며 말을 했다.
-얼마 전에 등본을 뗄 일이 있 어서 보니…… 등본에 어머니 이 름이 없더군요.
-아…….
한선동이 탄식을 토하자, 직원 이 말을 이었다.
-그때…… 우리 어머니 이름 들어간 등본이라도 먼저 한 통
떼어 놓을 것을…….
다시 직원이 울기 시작하자, 한 선동이 그를 보다가 말했다.
-등본…… 떼어줘. 아니, 열 장 떼어줘.
한선동의 말에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본을 떼어주었다. 그리고 한선동은 자신과 아내 밑 에 적힌 손주 이름을 보고…… 또 한참을 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등본엔 더 이상 손주의 이름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한선동의 말에 강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직원분이…… 무척 고맙네요.”
강진의 말에 한선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지. 아주 고맙고말고. 그이 아니었으면…… 손주 이름 적힌 등본 못 챙겼을 테니까.”
그 직원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 던 한선동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취학 통지서하고 손주 이름 적힌 등본 보니…… 알겠더 라고. 우리 손주가 못 간 학교 짓는다는데 내가 못 할 것이 뭐 가 있겠나. 그리고 이 한 몸이야 태우면 한 줌 재가 되고 흙으로 돌아갈 텐데 이 커다란 산이 무 슨 소용이겠어.”
한선동은 학교를 둘러싼 산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날 이 산을 팔았어. 대신 학교 이름은 우리 손주 이 름을 따서 일선 학교로 하게 해
달라고 했지.”
“그렇군요.”
“그리고 산 팔고 받은 돈 학교 에 기부했지.”
“학교에요?”
“여기 학교 지은 벽돌 중에 우 리 일선이 이름으로 기부된 것들 이 반 이상은 될 것이야.”
기분 좋게 웃는 한선동을 보며 강진이 물었다.
“그럼…… 할머니는?”
강진의 물음에 한선동이 입맛을 다셨다.
“아……
그 모습에 강진이 탄식을 토하 자, 한선동이 고개를 저었다.
“마을에서 잘 살고 있어.”
“잘 살고 계세요?”
“왜? 잘 못 살기를 바랐던 거 야?”
“당연히 그건 아니죠. 다만 방 금 어르신 표정이……
방금 한선동은 할머니가 돌아가 셨을 때나 지을 표정을 짓고 있 었으니 말이다.
강진의 말에 한선동이 입맛을 다셨다.
“할망구가 먼저 죽었어야 했는 데…… 내가 할망구보다 한 일 년 더 살다 죽었어야 했는데.”
“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보자 한 선동이 고개를 저었다.
“자식 죽고, 손주 죽고, 이제는
나까지 없으니…… 우리 할망구 얼마나 외롭겠어. 나라도 있었으 면 그래도 서로 등이라도 긁어주 고 외롭거나 화가 날 때 같이 이 야기를 하든 싸우든 할 것인데 말이야.”
“그건…… 그렇겠네요.”
“차라리 할망구가 먼저 죽었으 면…… 내가 외롭고 말았을 것 아니겠나.”
잠시 있던 한선동이 입맛을 다 셨다.
“나이 먹으면 먼저 죽는 것이 호강이야. 남는 사람은 외롭고 힘들어.”
한선동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다가 말했다.
“주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내려 가는 길에 반찬 좀 챙겨 드릴게 요.”
강진의 말에 한선동이 반색을 하며 그를 보았다.
“그래 줄 건가?”
“혹시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럼 마당에 있는 잡초 좀 뽑 아 주고 전구…… 아, 전구는 얼 마 전에 이장이 와서 갈아 줬지. 그럼 뭐가 있나……
한선동이 집에 필요한 일들을 생각하며 말을 해 주자 강진이 웃으며 그것을 기억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때 어느새 식사를 하고 나온 아이들이 하나 둘씩 푸드 트럭으로 다가왔다.
푸드 트럭에서 맛있는 튀김 냄
새가 나기 시작하니 아이들이 뭔 가 하고 다가오는 것이다.
아이들이 다가오자 강진이 웃으 며 말했다.
“핫도그하고 야채 튀김 합니 다.”
강진의 말에 덩치가 큰 학생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무료요?”
학생의 건들거리는 목소리도 강 진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답했 다.
“당연히 무료로 드리는 겁니
다.”
강진의 말에 학생은 튀겨진 핫 도그와 야채 튀김을 보고는 슬며 시 물었다.
“핫도그 하나…… 먹어도 됩니 까?”
“그럼요.”
여전히 건들거리는 목소리에도 강진은 친절하게 핫도그를 하나 집어 내밀었다.
“앞에 케첩하고 설탕 있으니 취
향대로 뿌려 드세요.”
강진의 말에 학생이 핫도그를 받고는 설탕과 케첩을 뿌렸다. 그러고는 강진에게 고개를 숙였 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학생의 인사에 강진이 살짝 놀 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이미 학생은 핫도그를 입에 넣으 며 걸어가고 있었다.
‘감사하다고 인사할 줄은 몰랐 네.’
건들거리고 아주 못되게 생겨서 그냥 툭 집어갈 줄 알았던 것이 다.
그 학생 이후에도, 딱 봐도 불 량스러워 보이는 학생들이 음식 을 받아 갈 때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가자 강진이 웃었 다.
‘다른 건 몰라도 인사하는 건 잘 배웠네. 하긴…… 인사만 잘 해도 사회에서 욕은 안 먹지.’
그런 생각을 하며 강진이 핫도 그와 튀김을 더 튀기기 시작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