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5 화
“음식 나왔습니다.”
강진의 말에 정복립이 웃으며 노인을 보았다.
“먹어 봐. 내가 괜히 여기 오자 고 한 것이 아니니까.”
정복립의 말에 노인이 웃으며 수저로 국물을 한 번 떠먹어 보 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물이 진하고 맛이 좋네.”
“그렇다니까.”
웃으며 정복립이 강진을 보았 다.
“우리 소주도 한 병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강진이 소주와 잔을 두 개 가져 다 놓고는 말했다.
“그리고 말 편하게 하세요. 처 음에는 그렇다 쳐도 이제 두 번 이나 봤는걸요.”
“하하하! 그럼 그럴까?”
웃으며 정복립이 소주를 따려 하자 강진이 먼저 병을 집어 뚜 껑을 딴 뒤 내밀었다. 그에 정복 립이 잔을 들어 소주를 받았다.
강진은 앞에 있는 노인에게도 술을 따라주고는 병을 내려놓았 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강진의 말에 정복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인을 보았다.
“올해도 무사히 넘어갔네. 내년 에도 좋은 얼굴로 보자고.”
“내년만인가? 내후년에도 좋게 봐야지.”
노인의 말에 정복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노인의 모습에 강진이 입맛을 다셨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은 오늘 내 일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내 년에 다시 보자고 이렇게 또 약 속을 하는 것이다.
두 노인을 보던 강진은 다른 손 님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빠져나간 한끼식당 안에는 정복립과 할아 버지 한 분만이 남아 술을 주거 니 받거니 하며 음식을 먹고 있 었다.
그것을 주방에서 보던 강진이 정복남을 보았다.
“오늘 두 분 무슨 날인가요?”
“오늘이 육이오라서 이렇게 모 인 겁니다.”
“육이오라서요?”
“진섭이도 육이오 때 가족을 잃 었고 제 동생도 육이오로 저를 잃어서 그냥 오늘을 제삿날로 생 각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을요?”
“피난을 하다가 내려와서 진섭 이는 부모 형제가 언제 죽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하고, 복남이도 제가 언제 죽었는지 잘 모르니까 요.”
“그 어르신 돌아가실 때 옆에 계시던 것 아닌가요?”
“옆에 있기는 했는데 날짜는 잘 모릅니다.”
“아…… 그래서 그냥 육이오를 제삿날로 하는 거군요.”
“맞습니다.”
말을 하던 정복남이 웃었다.
“사실 저도 제가 죽은 날이 언 제인지 잘 모릅니다. 그냥 무척 더운 여름이었던 것만 기억을 하 지요.”
“난리 통이라 날짜 세는 것도 쉽지 않았겠어요.”
“맞습니다. 신문이라도 봐야 오 늘이 며칠이구나, 할 텐데 전쟁 터에 신문이 배달되지는 않으니 까요.”
정복남은 소주를 한 모금 마시 고는 불투명한 잔을 내려놓았다. 그에 강진이 소주를 옆에 빈 통 에 따라내고는 새로 따라주었다.
쪼르륵!
강진이 따라주는 소주를 받은 정복남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정복남이 감사해하자 강진이 웃 으며 말했다.
“그럼 저 두 분은 제사를 지내 고 오는 건가요?”
“제사라……
정복남이 잠시 웃다가 말했다.
“제 동생은 저와 살던 곳을 돌 아보고 왔습니다. 물론 그때 저 희가 살던 집은 허물어지고 빌딩 이 올라오기는 했지만요.”
“아……
“6월 25일이 되면 이렇게 저희 살던 동네에 앉아 있다가 오고는 합니다.”
“그럼 친구분은요?”
“진섭이도 제 동생과 함께 앉아 있다 옵니다.”
“친구분도 제사를 지내야 하지 않나요?”
“진섭이는 북이 고향이라 못 가 니까요.”
“아……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복남 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냥 저희가 살던 동네 를 고향처럼 여기고 같이 머물다 갑니다.”
“그렇군요.”
말을 하던 정복남이 강진을 보 았다. 강진은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정복남이 미 소를 지었다.
“제 동생이 밀가루 좋아하는 것 도 기억을 하시는군요.”
“한 번 온 손님이라도 그 취향 은 기억을 해야죠.”
“대단하십니다.”
“대단하기는요. 이래야 먹고사 니 그런 거죠.”
웃으며 답한 강진은 비닐 씌운 밀가루 반죽을 테이블 한쪽에 잘 두었다. 이렇게 얼마라도 숙성을 시켜야 수제비를 띄워도 맛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내기는 괜찮으세요?”
강진의 물음에 정복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심심한 것은 있지만, 동 생 보고 있으면 지낼 만합니다.”
“그래도 외롭지 않으세요?”
“하하하! 외롭지 않은 귀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을 하며 웃는 정복남의 모습 에 강진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외롭지 않 은 귀신은 없는 것이다.
강진은 그와 이야기를 더 나누 다가 손님들이 먹고 난 자리를
치우러 홀로 나갔다.
얼추 자리를 정리한 강진은 주 방에서 밀가루 반죽과 휴대용 버 너를 챙겨 다시 홀로 나왔다.
“어떻게, 식사는 마음에 드세 요?”
강진의 말에 마주 앉아있던 노 인, 오진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아주 맛집이구만. 소주 가 아주 꿀꺽꿀꺽 넘어가.”
오진섭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음식이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 니다.”
“그런데 그건 뭔가?”
자신이 든 버너와 밀가루 반죽 을 보며 의아해하는 오진섭에게 강진이 말했다.
“앞으로 단골이 되시라고 작은 서비스입니다.”
강진은 테이블 가운데에 있는 김치찌개를 옆으로 치우고는 버 너를 놓았다.
그 위에 김치찌개를 올린 강진
이 버너에 불을 올렸다.
달칵! 화르륵!
버너에 불이 올라오자 강진이 냄비를 보며 말했다.
“국물이 부족해서 리필을 좀 해 야겠네요.”
“리필도 해 주나?”
“단골 되시라고요.”
“하하하! 이거 친구들 데리고 한 번 더 와야겠네.”
강진은 주방에서 육수와 미리
썰어 놓은 햄들을 챙겨서는 홀로 나왔다. 강진이 가지고 온 햄을 본 정복립이 미소를 지었다.
“한 번 왔는데 취향을 기억해 주시는군.”
“그때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어떻게, 넣을까요?”
정복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진 이 육수를 더 붓고는 그 안에 햄 을 넣었다.
그것을 보던 정복립이 남은 반 찬들을 모아서는 다 넣기 시작했
다.
“아……
강진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정 복립을 보았다. 남은 파김치 정 도는 넣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 지만…… 정복립이 넣은 것에는 젓갈과 계란말이, 멸치볶음도 포 함되어 있었다.
정복립은 강진의 놀란 얼굴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음식 남기는 걸 안 좋아 해.”
“아......" 네.”
“집에서는 며느리도 있고 해서 못 하는데…… 오늘은 친구와 먹 는 거라 나도 모르게 다 넣어 버 렸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음식 안 남으면 저야 좋죠.”
강진의 말에 정복립이 웃으며 냄비를 보았다.
“우리 아내도 남은 음식 다 넣 고 끓이면 싫어했지.”
“아내와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
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어 하니까요.”
말을 하던 강진은 아차 싶어서 급히 덧붙였다.
“아! 이 음식이 나쁜 음식이라 는 말은 아닙니다.”
강진의 말에 정복립이 웃었다.
“알아. 개밥 같아 보이지?”
“그것도…… 제 의도는 아닙니 다.”
“무슨 말인지 아네.”
정복립은 미소 지은 채 냄비에 끓고 있는 잡탕을 보았다.
“우리 아내는 음식을 예쁘게 먹 지, 왜 이렇게 다 섞어서 개밥처 럼 먹느냐고 자주 화를 냈으니 까.”
정복립의 말에 강진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현이 좀 잘못됐지만 의도는 전달이 된 것 같으니 말이다.
아내와 어머니는 자식과 남편에 게 좋은 음식을 주면서도 최대한 깔끔하게 주려고 한다. 이렇게
남은 음식을 넣고 끓이는 건 싫 어하는 것이다.
냄비가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강 진이 밀가루 반죽을 뜯어서는 수 제비를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정복립이 남은 밀가 루 반죽을 들어서는 반으로 잘라 오진섭에게 내밀었다.
그에 두 사람이 반죽을 주물럭 거리고는 조금씩 뜯어 넣기 시작 했다.
반죽을 뜯으며 오진섭이 웃었
다.
“이러고 있으니 꼭 부산 다리 밑에 있는 것 같다.”
“그때에 비하면 아주 호강이 지.”
정복립이 끓고 있는 잡탕을 보 며 말했다.
“최소한 상한 음식은 안 들어갔 잖아.”
“크크크! 그때 음식 잘못 먹고 며칠 고생했던 것 생각난다.”
“거지 주제에 위가 그리 약해서 어쩌나 했지.”
육이오 때 거지로 지냈던 시절 을 떠올리던 정복립이 강진을 보 았다.
“이 친구하고는 육이오 때 부산 에서 알게 됐어.”
“그러셨군요.”
“그때부터 지금까지니…… 아주 징글징글하지.”
웃으며 냄비를 휘젓는 정복립을 보던 강진이 말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부대찌개 네요?”
“그렇지. 부대찌개라는 것이 그 냥 이것저것 다 넣고 끓인 거니 까.”
웃으며 말을 한 정복립이 문득 강진을 보았다.
“전에 본 아이들은 잘 지내나?”
“전에 본 아이들이면…… 아!
태수하고 미소요?”
“그래. 그 아이들.”
정복립이 처음 왔을 때, 밥을 먹으러 온 아이들을 보고는 집에 데려다주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참 착하더군.”
“맞습니다.”
“지금도 잘 지내나?”
정복립의 물음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와 같이 사시던 할머님 이 돌아가셔서 지금은 아빠하고 지방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런......"
정복립이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아빠와 같이 산다니 그 나마 다행이군.”
“네.”
“그런데 아빠가 있는데 할머니 와 살았다면 키울 형편이 되지 않았던 것 아닌가?”
“아버님이 지방 공장에서 일을 하셨는데 사장님이 도와주셔서 작은 집을 구할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같이 살고 있습니 다.”
“사장님이 좋은 분이군.”
“그런 분들이 계셔서 아직 세상 이 살기 좋은 듯합니다.”
강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정 복립이 미소를 지었다.
“미소 그 아이 아주 귀여웠는 데……
“미소는 귀엽고, 태수는 의젓하 죠.”
말을 하던 강진이 입맛을 다셨 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내려가 서 연락을 드럽게 안 하네요.”
강진의 말에 정복립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먼저 해 봐.”
“제가요?”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면 연락 이 오나? 보고 싶은 사람이 연락 을 해야지. 그리고 태수와 차에 서 이야기를 해 보니 자네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끼더군. 그 럼 미안해서 더 전화를 못 할 수 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정복립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 다.
“우리가 마지막 손님인가?”
“저희 가게가 주말에는 손님이 적어서요.”
“그럼 같이 좀 먹겠나?”
“그럼 그럴까요?”
강진은 웃으며 그릇을 가져왔 다. 사실 강진도 이 잡탕이 어떤 맛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맛이 없지는 않을 거야.’
계란말이를 넣은 것이 좀 충격 이기는 하지만, 명절에 남은 음 식을 처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계란말이에 있는 기름도 햄의 기름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 니 말이다.
거기에 오징어 젓갈도 마찬가지
고, 된장 나물 무침과 멸치볶음 도…… 딱히 나쁘지 않을 것 같 았다.
다만…… 이렇게 몽땅 넣어서 끓이는 것이 좀 충격일 뿐이었 다.
“이제 먹으면 되겠구만.”
정복립이 수저로 국물을 떠서 먹고는 미소를 지었다.
“국물이 기름진 것이 아주 좋구 만.”
“어디…… 나도 이렇게 먹는 건
정말 오랜만이구만.”
오진섭이 웃으며 국물에 소시지 를 올려 먹고는 고개를 끄덕였 다.
“기름지고 아주 좋네.”
두 사람의 말에 강진이 입맛을 다시고는 국물에 계란말이를 올 려서는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강진이 피식 웃었다.
“왜? 맛이 없나?”
“아뇨. 생각보다 더 맛있어서요.
미묘하게 맛있네요.”
그러고는 강진이 부대찌개를 보 았다.
‘된장 나물 무침이 들어가서 그 런가…… 해물탕 맛도 나네.’
메뉴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이 렇게 잡탕으로 끓여도 맛이 있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 다.
피식 작게 웃은 강진이 국물과 소시지를 떠서 입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