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1 화
김장을 하면 추위가 온다고 하 더니, 그 말대로 김장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겨울날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눈이 내리는 거리에서 강진과 귀 신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당신하고 처음 맞는 첫눈이네 요.”
최호철의 말에 미소 지은 이혜
미가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하 늘을 보았다.
“눈이 참 이쁘게 내리네요. 소 복소복…… 소리가 들리는 것 같 아요.”
“그러게요. 너무 좋네요.”
뒤에서 최호철과 이혜미의 애정 어린 목소리를 듣고 있던 강진은 옆에서 걷고 있는 배용수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우리는 두 번째 첫눈이네요.”
요 자까지 붙이며 이혜미 말투
를 흉내 내는 강진의 행동에 배 용수가 급히 손을 떼어냈다.
“미친놈이.”
그러고는 걷는 속도를 높여 앞 질러가는 배용수의 뒤를 강진이 쫓으며 말했다.
“용수 씨, 같이 가요.”
“좀!”
배용수가 성질을 내자 강진은 웃으며 놀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여기서 더 놀리면 배용수가 정말 화를 내니…… 장난도 적당히가
필요했다.
“형수 배 좀 나오기 라.” 시작했더
강진이 화제를 돌리자 배 용수가
다시 나란히 걸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내년에는 조카들 볼 다.” 수 있겠
“그러게 말이다.”
김이슬을 떠올리던 강진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쌍둥이라니……
“형 엄청 좋아했지.”
“그러게 말이야. 바보처럼 웃더 라.”
그동안 못 가진 애를 하늘이 한 번에 점지해 준 듯 김이슬은 쌍 둥이를 가진 것이다.
그것을 말해 주러 왔던 황민성 이 바보처럼 계속 실실거리던 것 을 떠올리며 작게 웃을 때, 배용 수가 말을 했다.
“형수 요즘 식욕이 많이 좋아졌
나 봐.”
“형이 요즘 새벽에 자주 오지?”
“운 좋아서 12시 전에 오면 좋 은데, 운 나쁘게 새벽 서너 시쯤 올 때는 형도 피곤해 보이더라.”
요즘 김이슬은 임산부만의 특권 이라 할 수 있는, 새벽에 먹고 싶은 것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황민성이 새벽에 일어나 배용수에게 문자로 메뉴 보내고 찾으러 오는 일이 잦았다.
가끔은 김밥이 먹고 싶다고 해
서 김밥을 준비했었고 다른 날은 떡볶이, 닭발, 주꾸미 등등 다양 하게 만들어야 했었다.
가게에 그 식재가 있으면 다행 이지만, 식재가 없을 때는 강진 이 일어나서는 근처 야식집이나 술집에 가서 식재만 따로 사다가 가게에서 음식을 하는 경우도 있 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한끼식당 냉 장고에는 다양한 식재가 조금씩 냉동 보관되어 있었다.
그날그날 신선한 식재로 음식을
만드는 게 가장 좋지만, 아무래 도 김이슬이 먹고 싶어 하는 음 식이 다양하다 보니 어쩔 수 없 이 식재를 냉동 보관한 것이었 다.
“아! 어제 순대 써서 없다. 가 는 길에 순대 좀 사서 가자.”
배용수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길을 걷던 강진은 정자에 도착했다. 짐을
푼 강진이 사료통을 꺼내 흔들자 어디선가 개와 고양이들이 달려 와서는 정자 밑에 들어갔다.
그것을 보며 웃은 강진은 통들 을 꺼내 사료와 물을 나눠 담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이들이 통에 머리를 박고 사 료를 먹는 것을 보던 강진은 소 복소복 내리는 눈을 보았다.
“그나저나 너희들에게 힘든 계 절이 와 버렸네.”
밖에서 떠도는 아이들에게 춥고
눈 내리는 겨울은 쉬운 계절이 아니었다.
특히 눈이 털에 묻은 채 녹으면 체온을 뺏어가 위험할 수도 있었 다. 사람이라면 집에서 옷이라도 갈아입을 테지만 이 녀석들은 그 럴 수도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보기 좋은 겨울의 눈이 길 위의 아이들에게는 고통 이 되는 것이다.
내리는 눈을 보고 있던 강진은 이강혜가 휠체어를 밀며 다가오 는 것을 발견했다.
“누나.”
강진이 손을 들자 이강혜 또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강진아, 첫눈이야.”
이강혜가 웃으며 눈을 보는 사 이, 강진은 오혁을 보았다. 오혁 은 몸에 우의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아마도 눈이 녹으면서 몸을 춥 게 할까 봐 우의를 덮은 모양이 었다.
“눈도 오는데 왜 나오셨어요.”
“눈이 내리니까 더 나왔지. 오 빠하고 첫눈 밟았던 게 생각나기 도 하고.”
“그래도 형 몸에 안 좋지 않겠 어요? 감기라도 걸리면요?”
강진이 오혁을 보며 걱정 어린 말을 하자, 이강혜가 웃으며 말 했다.
“그래서 이렇게 철통같이 해 놨 잖아.”
이강혜는 강진의 손목을 잡아서 우의 안으로 넣었다. 강진은 따
스한 온기가 우의 안에서 느껴지 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뜻하네요?”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만든 발
열 우의야.”
“발열
우의요?”
“요즘 산악인들은 발열 조끼 같 은 거 입잖아.”
“광고 본 적이 있어요.”
겨울에 등산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온, 열선이 들어간 조끼 광고
를 본 적이 있었다.
“그거 보니까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들에게 쓸 수 있는 발열 모 포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험적으로 만들
어 보라고 했어.”
이강혜는 오혁이 덮고 있는 우 의를 가리켰다.
“이건 시험 제품.”
“하긴, 저체온증 환자들한테 쓰
면 좋겠네요.”
“겉은 비가 와도 물이 흘러내리
도록 방수 재질로 해서 우의처럼 보이는데 안에는……
이강혜는 우의를 살짝 들어 올 려 안을 보여주었다. 안은 겉과 는 달리 부드러운 면으로 되어있 었다.
“맨몸으로 입어도 피부에 자극 이 되지 않게 처리했지. 그리고 이거 세탁기에 넣고 돌려도 되는 거야.”
“발열이면 전기 들어가는 걸 텐 데 물세탁이 돼요?”
“그게 기술이지.”
웃으며 이강혜가 말을 이었다.
“아직 개발 단계기는 한데 소방 서에 좀 보냈어.”
“소방서에요?”
“거기는 저체온 응급 환자들을 상대할 일이 많을 것 아니겠어? 그리고 겨울이기도 하고 그래서 미리 보내서 그쪽에서 사용해보 고 불편한 점이나 개선할 점 있 으면 그거 반영해서 만들어야 지.”
확실히 소방서 쪽에 들어가면 좋을 물건이었다. 일단 사람이 다치면 몸에 모포를 덮어 체온을 유지하니 말이다. 게다가 겨울에 는 저체온증 환자도 많이 발생할 테고 말이다.
이강혜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오혁을 보았다.
“그리고 이 발열 우의는 우리 혁이 씨처럼 몸을 움직이기 쉽지 않은 사람들 체온 유지에 도움이 될 거야.”
“혁이 형 생각해서 만든 거군
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움직이 면 체온이 올라가지만, 이렇게 앉아만 있는 사람들은 체온이 빨 리 떨어질 테니까.”
이강혜의 말에 강진이 발열 우 의를 보았다. 확실히 일반인들에 게는 있으면 좋지만, 반드시 필 요한 정도의 물건은 아닌 듯했 다.
일반인이 저체온증에 걸릴 일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춥다 싶으 면 더 입거나, 따뜻한 곳을 찾아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응급 환자나 물에 빠졌 다가 구조된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었다.
즉, 이건 돈보다는 응급 상황 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든 제품이었다. 눈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던 점자폰 처럼 말이다.
“누나네 회사는 늘 좋은 물건을 만드네요.”
이강혜는 발열 우의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적 다고 해도 필요한 건 필요한 거 니까.”
이강혜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혁을 보았다.
‘차도가 있으신 건가?’
예전에 만났을 때는 영혼 상태 인 얼굴이라도 살짝 빼서 말도 하고 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자신을 봐도 말을 하거나 눈짓으 로도 인사를 하지 않는 오혁이었
다.
인사는커녕 반응조차 하지 않는 그였지만, 강진은 그것을 좋은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영혼이 밖으로 나오지 못할 만 큼 몸에 붙었다는 것을 의미하니 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 나 강진의 생각일 뿐이었다.
오혁을 보던 강진은 다시 이강 혜를 보았다.
“형은 여전하시죠?”
강진의 말에 이강혜가 오혁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빠야 여전하지.”
“깨어나실 거예요.”
“그래…… 그래야지.”
웃으며 오혁을 보던 이강혜가 문득 강진을 보았다.
“그런데…… 요즘 좀 기분이 이 상해.”
“왜요?”
“오빠가 나를 보는 것 같은 느 낌이 들어.”
“매형이 누나를요?”
"응."
이강혜는 오혁을 지그시 보다가 그가 쓰고 있던 챙이 넓은 모자 를 벗겨 눈을 털어내고는 다시 씌워주었다.
“혁이 씨가 나를 계속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강진이 보자 이강혜가 웃으며 오혁을 보았다.
“그런데 막상 쳐다보면 이렇게 다른 곳만 보고 있고.”
이강혜의 말에 강진이 그녀를 보다가 오혁을 보았다.
“형이 누나가 많이 보고 싶은가 봐요.”
강진은 이강혜의 어깨를 잡아서 는 오혁의 앞에 서게 했다.
“형이 누나가 많이 보고 싶은 모양이니…… 이렇게 앞에 서 계 세요. 형은 고개를 못 돌리니 누 나가 형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 어야죠.”
“아……
강진의 말에 이강혜가 웃었다.
“그래. 네 말이 맞네. 혁이 씨는 나를 보고 싶어 하는데…… 나는 그 앞에 없었네.”
이강혜는 자세를 낮춰 오혁을 보았다.
“나 보고 싶어서 그렇게 신호를 줬던 거예요? 내 앞에 좀 있으라 고?”
웃으며 오혁과 시선을 마주한 이강혜가 입을 열었다.
“나…… 회사 그만두고 오빠하
고 계속 있을까?”
이강혜의 말에 강진이 그녀를 보았다.
“오빠가 나한테 회사 맡긴 이유 잘 알아. 오빠 옆에서 병간호만 하지 말고 내 일 하면서 인생 즐 기면서 행복하게 살라는 거였잖 아.”
잠시 말을 멈춘 이강혜가 미소 를 지으며 오혁의 얼굴을 쓰다듬 었다.
“근데…… 요즘 그런 생각이 들
어. 내가 행복한 것이 어떤 건 가, 하는.”
오혁의 얼굴을 쓰다듬던 이강혜 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에 회사에 노부부가 찾 아온 적이 있었어.”
얼마 전 회사에 한 노부부가 이 강혜와 만나고 싶다며 찾아왔었 다. 물론 아무런 약속도, 아무런 연고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노부 부였다.
그 노부부는 당연하게도 이강혜
를 만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 야 했다.
L전자가 비록 L그룹 계열사기 는 하지만, 한국 하면 떠오르는 2대 전자 기업 중 하나인데 그런 회사의 사장을 아무나 만날 순 없으니 말이다.
노부부는 회사를 떠나기 전, 로 비에 사장님에게 전해 달라면서 케이크와 빵 봉투를 맡기고 갔 다.
일단 사장인 이강혜 앞으로 온 물건이기에 비서실에 전달이 되
었고, 비서실에서 빵 봉투 안에 들어 있는 편지를 발견하고는 그 녀에게 전해 주었다.
“노부부의 아들이 바다에 빠져 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는 데…… 우리 VR 핸드폰을 통해 서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면 서 감사하단 말을 하려고…… 오 셨더라고요.”
이강혜의 말에 강진은 전에 바 닷가에서 만난 노부부를 떠올랐 다. 물론 그 노부부가 자신이 만 난 그분들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진은 그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기뻤으니…… 서울까지 와서 인사를 드리고 싶었겠지.’
정말 기쁘고 행복해서 인사를 하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그분들처럼 직접 오시는 분들 은 드물지만…… 회사 메일로 감 사하다는 인사들이 자주 와. 그 걸 보면 오빠와 내가 하고 싶었 던 일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아. 오빠도 나 중에 나하고 그 메일들 보면 너
무 좋겠다.”
그 기억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 은 듯 미소를 짓던 이강혜가 오 혁을 보았다.
“근데…… 요즘 오빠하고 아침 에 산책하니까 너무 좋아. 그래 서 생각을 해 봤는데…… 나는 오빠하고 같이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 그래서…… 나 회사 쉬고 오빠하고 좀 더 있을 래.”
이강혜의 말에 오혁의 손가락이 살짝 꿈틀거렸다. 하지만 오혁의
얼굴을 보고 있던 이강혜는 그런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대신…….
“어? 오혁 씨 손가락 움직였어 요!”
옆에서 이강혜와 오혁을 보고 있던 이혜미가 오혁의 손가락을 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또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