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2화
정인섭을 기특하다는 듯 보던 정학봉이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 고 잠시 망설이다가 문자를 보냈 다.
〈사장님…… 혹시 지금 가게 문 열었습니까?〉
영업시간이 아닌 것을 알지만,
혹시라도 영업을 하거나 강진이 문을 열어 준다면 자신이 좋아하 는 가게에 아들을 데리고 가고 싶었다.
오늘 아들이 정말 사랑스럽기 이를 데가 없으니 말이다.
전동 킥보드를 끌며 걸음을 옮 기는 정학봉에게 정인섭이 말을 했다.
“아빠, 줘 봐. 나 좀 타게.”
정인섭이 킥보드를 잡으려는 것 에 정학봉이 급히 손을 저었다.
“안 돼.”
“안 돼?”
“술 먹고 킥보드 타는 건 위험 해.”
“그냥 킥보드인데?”
“킥보드가 아니라 자전거라도 술 마시고 타는 건 위험한 거 야.”
그러고는 정학봉이 정인섭을 보 았다.
“너도 술을 먹을 나이가 됐으니
말을 하는 건데…… 술을 먹으면 너 자신을 믿지 마.”
“나를 믿지 마?”
“소주 한 잔이 됐든, 맥주 한 잔이 됐든 술이 입에 들어가면 절대 자신을 믿으면 안 돼. ‘괜찮 아.’ ‘이 정도쯤이야.’ ‘가까운 데……이런 생각을 하지 마. 그냥 술을 마셨으면 내 몸은 이 제 내 몸이 아니고 팔 다리가 없 다고 생각해야 해.”
“에이, 무슨 그 정도까지 생각 을 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살아도 위 험한 것이 술이야. 아빠가 왜 괜 히 대리운전을 하겠어.”
진지한 아빠의 말에 정인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리고 오늘 그 친구 대리 처 음이라고……
말을 하던 정학봉은 문자가 오 는 것에 그것을 보았다.
〈새벽 한 시에서 두 시까지라 면…… 괜찮습니다. 무슨 일 있 으세요?〉
강진의 문자에 정학봉이 시간을 보았다. 지금 시간이 12시 40분 이니 택시 타고 가면 얼추 1시에 도착할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요. 아 들하고 제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소주 한잔하고 싶습니다.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무슨 기분 좋은 일 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들하고 같이 오신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 요.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강진이 보낸 답장을 확인한 정 학봉이 웃으며 정인섭을 보았다.
“아빠가 좋아하는 식당이 있거 든? 거기 가서 간단하게 소주 한 잔하자.”
“나야 좋지.”
“아! 그리고 아까 그 친구 대리 잘 불렀어. 나중에 혹시라도 누 가 술 마시고 운전하려고 하면 꼭 말리고.”
“당연하지.”
정인섭의 말에 정학봉이 웃으며 손을 들었다.
“택시!”
택시가 다가오자 정학봉이 킥보 드를 접어 택시에 실었다.
“다들 잘 가세요.”
강진은 귀신 손님들을 배웅하고 는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서둘 러 그릇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여자 직원들도 나와서는 같이 치 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 그 아저씨 오신다 는 거예요?”
이혜미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이 있어서 아들하고 한 잔하고 싶다고 하시길래…… 아 빠 생각도 나고 해서 오시라고 했어요.”
말을 하며 강진이 빠르게 그릇 들을 치우자 여직원들도 그릇을 치우는 속도를 높였다.
띠링! 띠링!
닫힌 문이 덜컹거리며 풍경이 울리자 강진이 홀을 보다가 말을 했다.
일단 치우던 것만 들고 들어가
세요.”
“네.”
여자 귀신들이 서둘러 그릇들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자, 강진이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세요.”
강진의 인사에 정학봉이 미안한 듯 웃으며 말을 했다.
“영업 끝났는데 저 때문에
닫힌 문을 보고 영업이 끝났다
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가게 안에 펼쳐져 있는 술판과 음식들 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벽에도 영업을 하십니까?”
“오늘 단체 예약이 하나 잡혀서 요. 그런 건 좀 잡아야죠.”
정학봉은 테이블마다 놓인 술병 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정도 단체 예약이면 장사를 해야겠네요.”
정학봉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뒤에 있는 정인섭
을 보았다.
“그 아드님?”
“맞습니다. 인사드려라. 아빠 자 주 가는 단골 식당 사장님이셔. 너하고 같은 서신대 출신이시 래.”
정학봉의 말에 정인섭이 강진을 보았다.
“저희 선배님이시네요.”
“무슨 과예요? 나는 심리학과인 데.”
“저는 토목과예요.”
“좋은 과네요. 거기 취업 잘 되 죠?”
“네. 저도 토목과가 취업이 잘 된다고 해서 그쪽으로 했습니 다.”
정인섭의 말에 강진이 자리를 보다가 그나마 좀 정리가 된 곳 을 가리켰다.
“일단 앉으세요.”
둘을 자리로 안내한 강진은 테 이블 위를 마저 치우기 시작했
다. 그 사이, 정학봉이 자리에 앉 으며 정인섭을 보았다.
“여기가 음식이 맛이 있어.”
“그런 것 같네요. 냄새가 좋은 데요.”
정인섭의 말에 정학봉이 기분 좋은 얼굴로 강진을 보았다. 강 진은 탁자를 행주로 닦고는 그릇 들을 옆으로 치우고 있었다.
“막걸리하고 두부김치 좀 주시 겠습니까?”
“막걸리하고 두부김치. 알겠습
니다.”
주문을 받은 강진은 그릇들을 주방으로 옮기고는 배용수를 보 았다.
그는 이미 홀에서 나온 이야기 를 듣고는 두부김치를 만들 준비 를 하고 있었다.
“저 아들 술 좀 먹고 온 모양이 야. 국물도 좀 해야겠다.”
“어묵국 좀 칼칼하게 해서 낼 까?”
배용수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저었다.
“술 먹으면 면이 당길 거야. 라 면이나 하나 끓여.”
“라면? 칼칼하게 국수 끓일까?”
“신입생 때 애들하고 술 먹고 라면 끓여 먹으면 맛있더라고.”
“그래?”
“친구 자취방에서 라면에다 참 치랑 이것저것 다 넣어서 먹었는 데 맛있었어.”
강진의 말에 배용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잡탕으로 끓인다?”
“그래.”
배용수는 넓은 그릇 가운데에 볶음김치를 올리고는 그 주위로 두부를 동그랗게 올렸다. 마치 해바라기처럼 말이다.
강진은 그가 만든 두부김치와 밑반찬을 쟁반에 담아서는 홀로 가지고 나왔다.
음식 나왔습니다.”
강진의 말에 정학봉이 웃으며 말을 했다.
“냉장고에서 막걸리 먼저 빼왔 습니다.”
“셀프로 해 주시면 저야 좋죠.”
말을 하며 강진은 막걸리를 흔 든 뒤 가지고 나온 양은 주전자 에 부었다.
콸콸콸!
원을 그리듯 병을 흔들며 막걸 리를 부운 강진은 양은그릇을 두 사람 앞에 놓았다.
“자, 좋은 시간 되세요.”
“고맙습니다. 아! 그러지 마시고 같이 앉으시죠.”
“저도요?”
“제가 오늘 기분이 좋아서요. 그리고 저희가 마지막 손님 아닌 가요? 저희도 많이 먹을 건 아니 니 같이 좀 드시고 푹 주무세 요.”
정학봉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막걸리를 보았다.
“제가 마시는 것도 선생님이 계
산을 하신다면야 저도 앉죠.”
“하하하! 그럼요. 앉으세요.”
정학봉이 웃으며 하는 말에 강 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며시 자신의 잔을 놓았다.
“저도 한잔하라고 하실 것 같아 서 제 잔도 미리 가져왔습니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정학봉은 강진의 잔에 막걸리를 따르고는 정인섭에게도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받는 정인섭 을 보며 정학봉이 미소를 지었 다.
“술 대학 가서 배웠을 텐데 잘 배웠네.”
“TV만 봐도 배우는걸요. 주세 요. 제가 따라 드릴게요.”
“하하하! 아들이 따라주는 술이 라. 좋구나.”
웃으며 정학봉이 잔을 들자, 정 인섭이 두 손으로 막걸리를 따랐 다.
술을 받은 정학봉이 잔을 높이 들자 정인섭과 강진도 잔을 들어 가볍게 맞부딪쳤다.
꿀꺽! 꿀꺽!
시원하게 막걸리를 마신 정학봉 이 입을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 맛있네요.”
“5대째 잣 막걸리를 만드는 곳 에서 가져온 겁니다. 아주 명품 이죠.”
“정말 맛이 좋습니다. 고소하면 서 뒷맛도 깔끔하고…… 아주 맛
있네요.”
“맛있다고 많이 드시면 내일 장 난 아닙니다.”
웃으며 강진이 막걸리를 따라주 자, 정학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부김치를 집어 먹었다.
“그런데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으셨어요?”
강진이 묻자 정학봉이 정인섭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참 별거 아닌 일이고 당연한 일인데…… 직접 겪으니 너무 기
분이 좋습니다.”
정학봉이 꿀 떨어질 것 같은 눈 으로 자신을 보는 것에 정인섭이 민망한 듯 웃었다.
“제가 홍길동도 아니고 아버지 를 아버지라 불렀는데 그게 뭐 그리 좋아요.”
정인섭이 민망한 듯 말하자 정 학봉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빠 정말 기분이 너 무 좋았어.”
정학봉은 막걸리를 마시고는 강
진을 보았다.
“아까 콜을 받아서 갔는데 인섭 이 친구 차였습니다.”
“인섭이 친구 차? 그럼……
강진이 정인섭을 보자, 정학봉 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거기서 우리 아들을 딱 하고 마주쳤습니다.”
“아……
강진은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되었다.
‘상당히 민망하셨겠네.’
대리기사가 불법적인 직업도, 이상한 직업도 아니지만…… 콜 을 받아서 간 곳에 아들도 같이 있었다면 민망할 것이었다.
강진이 보자, 정학봉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들을 보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겁니다.”
“이해되네요.”
“이해되십니까?”
정학봉이 웃으며 하는 말에 강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는 분 중에 무당이 계 십니다.”
“ 무당?”
“정말 용하신 분인데…… 그분 아들은 엄마가 무당이란 걸 무척 싫어했습니다. 비 오는 날 우산 을 가지고 학교로 마중을 온 어 머니를 모른 척할 정도로요.”
강진의 말에 정학봉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어렸다.
“그 엄마 가슴이......" 너무 아팠 겠군요.”
정학봉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철이 없었던 겁니다.”
“철이 너무 없었군요.”
“초등학생 때니까요.”
강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얼마 전에 화해를 해서 지금은 화목하게 살고 있습니 다.”
“그래요?”
“그 철이 없던 아들도 나이를 먹고 자식을 낳은 아버지가 된 거죠.”
“아버지라……
정학봉이 중얼거리자, 강진이 말을 했다.
“아버지가 돼 보니 알게 된 거 죠. 어머니가 어떠한 마음으로 일을 했는지요.”
강진의 말에 정학봉이 잠시 있 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커서 아버지가 되면,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리는 법이 죠.”
“맞습니다.”
그러고는 강진이 웃으며 말을 했다.
“그건 그렇고, 머릿속이 하얗게 된 다음은요?”
강진의 말에 정학봉이 정인섭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이 ‘아빠.’ 하고 저를 부르더군요. 그 말을 듣고 얼마
나 마음이 편해지던지.”
“거 참…… 아까도 말을 했잖 아. 나는 홍길동이 아니라고.”
“그래도.”
정학봉은 정인섭을 보며 말했 다.
“아빠가 대리운전 하는 거 친구 들이 알았는데,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친구들이 놀리지 않을까?”
정학봉의 말에 정인섭이 피식
웃었다.
“에이, 우리가 무슨 애인가? 그 리고 대리운전이 뭐 어때서. 도 둑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한테 사기를 치는 것도 아니 고. 나는 오히려 아빠 직업이 정 치인보다 좋아.”
“정말?”
“그럼. 아빠는 정당하게 땀 흘 리고 다른 사람 잘 때 잠 못 자 고 일해서 나 학교 보냈잖아. 그 런데 내가 왜 아빠 직업을 부끄 러워해? 나는 오히려 좋아.”
당당한 정인섭의 말에 정학봉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럼. 그리고 아빠가 걱정하는 것이 뭔지 알아.”
“ 알아‘?”
“애들한테 따돌림 당할 것 같아 서 그런 거잖아.”
정인섭은 고개를 저었다.
“요즘 그렇게 부모님 직업 가지 고 급 나누는 애들 없어.”
“그러니?”
“그래. 그리고 아빠 대리기사 한다고 뭐라고 하는 애들 있으면 그놈들은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없어. 열심히 살아온 우리 아빠 무시하는 놈들 나도 싫거든.”
정인섭의 말에 정학봉은 멍하니 아들을 보았다. 감동을 먹은 듯 눈시울이 붉어진 그는 웃으며 눈 가를 손으로 닦았다.
“우리 아들... 언제 이렇게 다
컸어.”
정학봉의 말에 정인섭이 웃으며 주전자를 들고 일어났다.
“열심히 사는 우리 아빠. 나는 아빠 가장 존경해.”
정인섭의 말에 정학봉이 작게 한숨을 토했다.
“ 하아아.”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에게 존 경한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 이 터질 것 같았다.
정학봉이 잔을 내밀자, 정인섭 이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쪼르륵! 쪼르륵!
잔에 채워지는 막걸리만큼이나 정학봉의 가슴도 차오르고 있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