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0화
스르륵! 스르륵!
저승식당 안에선 책장 넘기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있었다.
스르륵! 스르륵! 탓!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들리던 저승식당 안에 다른 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에 책을 보던 김소희 가 소리가 난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맥
주잔을 내려놓다가 깜짝 놀란 둣 잔을 보고 있었다. 분명 가볍게 놓는다고 생각을 했는데 소리가 크게 난 것이다.
그에 당황한 눈으로 잔을 보던 할아버지가 급히 김소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무표정한 얼굴로 보는 김소희를 본 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 였다.
“아가씨…… 그게, 잔이……
“괜찮네.”
김소희의 말에 할아버지는 안심 이 되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주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할 아버지가 조심히 자리에 앉으며 이마에 난 땀을 슬쩍 닦았다.
“후……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한숨 을 토하려던 할아버지가 급히 입 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슬쩍 김 소희의 눈치를 보았다.
김소희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여전히 책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할아버지는 뱉으려던 한숨을 조금씩 나눠 토하고는 맥 주를 따라 소리 안 나게 마셨다.
그런 할아버지와 귀신들의 모습 에 강진이 피식 웃었다. 할아버 지에게 어린 소녀 모습인 김소희 가 눈치를 주는 것이 버릇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김소희는 생긴 것과 달리 오백 살이 넘었 으니 말이다.
다만 김소희가 책을 보는 탓에 시끌벅적해야 할 술집이 조용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렇다고 김소희가 조용히 하라 고 눈치를 준 것은 아니었다. 그 저 책을 보다가 시끄러우면 그쪽 을 한 번 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시선이 조선 제일의 귀신인 김소희의 것이다 보니 시 선을 받은 귀신들이 알아서 조용 히 했고, 다른 귀신들도 눈치를 보기 시작해서 가게 안이 조용해 진 것이다.
‘카페에서 공부하시는 분들은 소희 아가씨에 비하면 양반이네.
그분들은 최소한 술집에서 책을 보지는 않으시니.’
그에 강진이 고개를 젓고는 주 위를 보았다. 귀신들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히 음식 을 먹고 있었다.
평소 술을 마시며 잡담을 하던 이들이 지금은 아주 조용히 하다 못해 대화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소리 안 나게 음식을 조심 히 씹으며 간간이 술을 마실 뿐 이었다.
그런 귀신들을 보며 작게 고개
를 저은 강진이 옆을 보았다. 옆 테이블에서는 직원들이 책을 읽 고 있었다.
책을 재밌게 보는 여직원들을 강진이 볼 때, 김소희가 말을 했 다.
“집중해서 보게나.”
김소희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강진도 손에 책을 한 권 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강진은 자신이 보던 부분을 마
저 읽기 시작했다. 적에게 붙잡 힌 김소희를 검둥이가 홀로 적진 에 들어가 구출해 나오는 장면이 었다.
C아가씨 먼저 가셔요!”
검둥이의 외침에 김소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뒤를 따르던 검둥이는 몽둥이를 움켜쥔 채 산을 올라오 는 왜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둥아! 어서 가자!”
김소희의 외침에 검둥이가 그녀 를 돌아보고는 웃었다. 피에 절 은 머리카락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어두운 밤에 눈에 들어오지 않 을 그런 모습인데 김소희의 눈에 는 그것이 참으로 선명하게 보였 다.
자신을 보는 김소희를 보며 검 둥이가 웃었다. 검은 피부와 어 울리지 않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 며 환히 웃었다.
“아가씨…… 그동안 복실이한테
잘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검둥아! 그런 소리 말고 가자 니까.”
말을 하며 급히 김소희가 그에 게 다가가려 하자, 검둥이가 웃 으며 손을 들었다.
“어서 가셔요. 아가씨 꼭 모시 고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아 무래도 그 약속은 못 지킬 것 같 으니 아가씨만이라도 보내야 제 가 복실이한테 덜 혼나죠.”
“같이 가면 된다. 같이 가면
돼.”
김소희의 말에 검둥이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발을 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검둥이의 발을 본 김소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검둥이의 다리에 화살 두 개가 박혀 있었다. 그걸 본 순간, 화살 들이 날아올 때 자신을 막아서던 검둥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까?”
김소희의 말에 검둥이가 화살을 보며 웃었다.
“주인마님께서 늘 제 아래가 비 어 있다고 혼을 내셨는데…… 좀 더 잘 배울 것을 그랬습니다.”
그러고는 검둥이가 몽둥이를 가 볍게 휘둘렀다.
“그래도 저는 대가리 깨는 것이 좋더라고요. 남자가 위를 봐야지, 아래를 봐서야 되겠습니까.”
웃으며 검둥이가 김소희를 보았 다.
“화살 맞은 데가 아파서 더는 못 뛰겠어요. 아가씨 먼저 가셔
요. 저는 여기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왜구들 대가리나 좀 쪼개 고 뒤를 따를게요.”
검둥이의 말에 김소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리가 아파서 못 뛰겠다는 녀 석이 어딜 뛴다는 말이냐?”
“하하하! 그러면 기어서라도 쪼 개고 따르면 되겄지요. 어서 가 셔요.”
검둥이의 말에 김소희가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스윽!
그에 검둥이가 뒤로 두 걸음을 옮겼다.
“그만 오셔요. 다리 아프다니까 요.”
검둥이의 말에 김소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다가가는 만큼 검둥이는 왜구들을 향해 더 다가 갈 것이다.
“검둥아…… 같이 가자.”
“다리 아파요. 못 걷겠어요.”
웃는 검둥이의 모습에 김소희가 재차 입술을 깨물었다.
“꼭…… 살아서 와야 한다.”
“복실이가 기다리는데…… 당연 히 가야죠.”
“돌아오면 복실이와 혼례를 치 르게 해 주마.’’
“에이! 복실이가 어디 저를 좋 아하나요?”
검둥이의 말에 김소희가 고개를 저었다.
“복실이가 왜란이 끝나면 너와 혼례를 시켜 달라고 했었다.”
“정말요?”
환하게 웃는 검둥이의 모습에 김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 꼭 돌아와야 한 다.”
“알겠어요. 그러니 어서 가셔 요.”
검둥이가 재촉하자 김소희는 마 지못해 몸을 돌렸다. 뒤돈 채 우 두커니 서 있던 김소희가 말했
다.
“꼭 돌아와야 한다!”
그러고는 김소희가 뛰기 시작했 다.
‘살아서 와야 한다. 꼭 살아 와 야 해.’
김소희가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 을 보던 검둥이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려 산을 올라오 는 왜구들을 보았다.
“아따…… 복실아. 이제 내 마 음을 알아준 거야? 조금만……
더 빨리 알아주지. 주둥이라도 한 번 대 보게 말이여. 그게 많 이 아쉽네.”
몰려오는 왜구들보다 복실이와 뽀뽀 한 번 못 해 본 것이 더 신 경이 쓰이는 검둥이는 입맛을 다 시고는 다리에 박힌 화살을 잡았 다.
“겁나 아프겠네.”
작게 중얼거린 검둥이가 손에 힘을 주었다.
우직!
“끄응!”
작은 신음을 토한 검둥이는 남 은 화살 깃대도 부러뜨렸다. 살 에 박힌 화살촉을 보던 검둥이는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달빛 하나 없이 아주 어 주웠다.
“아가씨 잘 가시라고 달빛 하나 없구먼…… 다행이네.”
어두운 밤하늘을 보던 검둥이는 웃으며 왜구들을 보았다.
“내가 부모님 선택을 못 해서
노비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내 죽 을 곳은…… 내가 선택하는구 먼.”
검둥이는 웃으며 왜구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덤벼! 이 왜놈들아!”
검둥이의 고함에 산을 오르던 왜구들이 그쪽으로 몰려들기 시 작했다.
덤벼! 이 왜놈들아!”
뒤에서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외 침에 김소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 외침은 왜구들을 끌어모으는 외침이었다.
동시에 그 외침은 김소희에게 자신이 왜구들을 끌어모을 테니 어서 멀리 가라는 검둥이의 전언 이었다.
“미안해. 검둥 오라버니.”
…….>
거기까지 읽은 강진은 책 모서
리에 그려진 꽃을 보았다. 작은 봉오리였던 꽃은 꽤 많이 피어 있었다.
‘꽃이 피는 만큼...... 소희 아가 씨의 슬픔은 더 커지는구나.’
여기까지 읽는 동안 김소희는 슬픈 일을 많이 겪었다. 아버지 가 돌아가시고 오빠와 이별을 했 다. 그리고 그녀와 싸우던 동지 들도 죽고....
게다가 이 책에서 느껴지는 슬 픔과 아쉬움도 김소희가 직접 겪 은 일에 비하면…….
강진은 작게 고개를 젓고는 책 을 마저 읽었다.
* * *
“조심히 가세요. 그리고 오늘 좀 불편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가게 밖으로 나가는 귀신들에게 강진이 대신 사과를 하자, 그들 이 슬며시 김소희를 보고는 고개 를 저었다.
“아가씨를 주인공으로 한 책인 걸요. 조용히 집중해서 보고 싶 은 마음 이해합니다.”
“맞아. 다른 분도 아니고 임진 왜란의 영웅이신데... 책 보시
는 것 정도야 우리가 이해를 해 야지. 소희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우리 조상들도 없었을 수도 있 어.”
귀신들이 웃으며 이해를 해 주 는 것에 강진이 고개를 숙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요. 잘 먹고 가요.”
귀신들이 하나둘씩 갈 길을 가 는 것을 보던 강진은 가게 안으 로 들어왔다. 가게 안에서는 여 전히 김소희가 책을 보고 있었 다.
“정리는 나중에 할까요?”
이혜미가 김소희를 보며 하는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정리한답시고 그릇 소리 내면 책 읽는데 불편할 수 있으니 말
이다.
“괜찮으니 정리하게.”
책에서 눈을 뗀 김소희는 소주 잔 쪽으로 손을 뻗다가 돌연 거 뒀다.
현신이 풀렸으니 술을 마셔도 맛이 안 사는 것이다. 탁자에 있 는 음식들을 보던 김소희가 말했 다.
“입이 심심하네.”
뭔가 먹고 싶다는 김소희의 말 에 강진이 주방에서 JS 과자를
들고 나왔다.
봉투를 뜯어 강진이 놓자, 김소 희가 과자를 보다가 말했다.
“초콜릿은 없나?”
“떨어졌는데 제가 지금 가서 사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그냥…… 다 음부터는 떨어뜨리지 말게나.”
김소희의 말에 강진이 작게 웃 고는 식탁을 보았다.
“그럼 이건 정리하겠습니다.”
강진의 말에 김소희가 책을 들 었다. 비닐장갑을 끼지 않은 채 로도 책을 드는 김소희의 모습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가씨.’
강진이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하 자, 직원들도 서둘러 홀을 정리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홀을 모 두 정리하자 황민성이 시간을 한 번 보고는 김소희를 보았다.
“아가씨, 저는 이만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황민성의 말에 김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를 보았다.
“자네는 책을 보았나?”
“나오자마자 일독했습니다.”
“잘 했군.”
그러고는 김소희가 강진을 보았 다.
“전에 벼루와 붓을 사 놓은 것 이 있었을 텐데.”
“있습니다.”
“가져오게.”
김소희의 말에 강진이 2층으로 올라가 전에 산 벼루와 화선지들 을 가지고 왔다.
강진이 벼루가 담겨 있는 상자 를 가지고 오자, 김소희가 그것 을 열어서는 안에 물건들을 꺼냈 다.
그리고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며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글을 쓴 작가의 이름이 뭔 가?”
“신용인 작가입니다.”
황민성의 말에 김소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붓을 들었다. 그러고 는 강진을 보았다.
“책을 주게.”
강진이 자신이 보던 책을 내밀 자, 김소희가 고개를 저었다.
“새 책.”
강진이 쇼핑백에서 새 책을 꺼 내 주자, 김소희가 책을 받아 펼 쳤다. 그러고는 책 가장 앞 쪽 하얀 페이지에 붓을 가져다 댔
다.
스윽! 스윽!
김소희가 붓을 움직이자 하얀 페이지에 글이 쓰였다. 그에 강 진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와. 저 붓으로 저렇게 얇은 글 씨를 쓰시네.’
서예를 하는 두꺼운 붓으로 글 을 쓰는데 얇은 붓 펜으로 글을 쓰는 것처럼 얇게 쓰이는 것이 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김소희.〉
번짐 없이 글을 써 내려간 김소 희는 잠시 종이를 보다가 그 옆 에 대나무를 그렸다.
스르륵! 스륵!
붓이 몇 번 움직이자 대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그림 잘 그리셔. 조 선시대 규수들은 다 이렇게 그림 을 잘 그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