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1 화
강진이 대나무를 볼 때, 김소희 의 손이 가볍게 글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스르륵!
그러자 촉촉하게 젖어 있던 종 이가 말랐다. 책을 앞으로 밀어 낸 김소희가 손을 내밀자 강진이 새 책을 하나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김소희가 잠시 있 다가 책을 펼쳤다.
〈희야,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 렴. 김소희〉
글을 보던 김소희가 잠시 망설 이다가 뒤에 한 단어를 더 적었 다.
〈고모가.〉
그것을 본 황민성의 얼굴에 기
쁨이 떠올랐다. 고모라 적은 걸 보니 자신을 정말 가깝게 여기는 구나 싶은 것이었다.
글을 적은 김소희은 고모라 적 힌 부분을 보며 미소 지었다.
‘너희가 언제까지 나를 볼지 모 르겠지만…… 고모가 많이 예뻐 해 줄게.’
스르륵!
다시 젖은 글씨를 말린 김소희 가 손을 내밀자 강진이 새 책을 내밀었다.
〈고모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사 람으로 자라거라. 김소희 고모 가.〉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두 번은 쉬운 듯 고모라고 글을 적은 김 소희가 책을 보다가 붓에 먹물을 묻히고는 빈 여백에 꽃을 그렸 다.
스슥! 스윽!
먹으로만 그렸을 뿐인데도 화선
지에 꽃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자신이 그린 꽃을 보며 김소희 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김소희 를 보던 강진이 글을 보며 속으 로 웃었다.
‘아가씨는 아름다운 것보다는 귀여운 쪽이신데. 꽃도 그런 화 사한 것보다는 개나리가 어울리 시고.’
김소희가 붓을 놓으려 하자, 강 진은 슬며시 자신의 책을 앞에 놓았다.
“저도 한 글자 부탁드립니다.”
강진의 말에 김소희가 그를 보 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붓을 다 시 세웠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 을 하다가 글을 적어 내려갔다.
〈늘 고맙게 생각하네. 김소희.〉
김소희가 적은 글에 강진의 얼 굴이 굳어졌다. 그 모습에 김소 희가 살짝 눈을 찡그리며 말했 다.
“글이 마음에 안 드나?”
“아닙니다. 너무 마음에 듭니다. 그저…… 아가씨께서 저에게 고 맙다 적으셔서…… 감동이라.”
강진의 말에 김소희가 작게 고 개를 저으며 책을 내밀었다. 그 에 강진이 웃으며 책을 받았다.
“앞으로도 아가씨께서 고맙다고 생각하도록 열심히 보필하겠습니 다.”
강진의 말에 김소희가 그를 보 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겸손이라는 것을 모르 는군.”
“요즘은 자기 피알 시대 아니겠 습니까.”
강진의 말에 김소희가 그를 보 다가 붓을 다시 집었다.
〈앞으로도 하고 싶은 대로 살
게.〉
한 줄 글을 더 적어 넣은 김소
희에게 강진이 웃으며 말했다.
“변하지 않겠습니다.”
“그리하게.”
웃으며 강진이 책을 집어 들자, 황민성이 슬며시 책을 하나 그 앞에 놓았다.
“저도 한 글자 부탁드리겠습니 다.”
황민성의 말에 김소희가 그를 보다가 주위에 있는 이들을 보았 다. 귀신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들도 자신의 책에 글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작가는 내가 아닐세. 사인은 작가에게 받아야지.”
“하지만 이 글의 주인공은 아가 씨죠.”
이혜미의 말에 김소희가 그녀들 을 보다가 황민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에 황민성이 책을 내밀자, 김소희가 그를 보았다.
“음식을 먹은 것인가?”
“네?”
“지금 나를 보고 내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은가.”
“아…… 아가씨를 못 뵙는 것이 아쉬워서……
황민성은 주머니에서 작은 사탕 봉지를 꺼냈다.
“조금 깨서 입에 넣고 있었습니 다.”
황민성이 살짝 혀를 내밀자, 그 위에 작은 사탕 알맹이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황민성의 모 습에 김소희가 입을 열었다.
“저승 음식을 조금 먹는 것 정 도는 문제되지 않으나…… 이슬 비에 옷 젖는 법일세.”
“주의하겠습니다.”
“안 먹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 군.”
“보고 싶은 사람은 보고 싶어서 요.”
“몸에 안 좋을 수도 있네.”
“술을 마시면 숙취가 생기는 법 입니다.”
황민성의 말에 김소희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다. 하지 만 그 다음날에는 숙취를 겪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술을 마신 다. 숙취로 고생하며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다, 개야.’라고 하 면서도 마시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 훙이 오르며 괴로 운 일이 조금은 잊어지니 말이 다.
황민성은 저승 음식을 먹어서 생기는 일보다 저승 음식을 먹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보는 것을 더 중요하다 본 것이다.
황민성의 말에 김소희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붓에 먹 을 묻힐 뿐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는 천천 히 글을 적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아 들이 되시게. 가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네. 김소희.〉
글을 적어 책을 내밀자, 황민성 이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받았 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황민성의 말에 김소희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이들 의 책을 받아 글을 적어 내려갔 다.
그렇게 모든 이의 책에 글귀와 이름을 적어 준 김소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화선지 하나를 탁 자 위에 깔았다. 그러고는 붓에 먹을 다시 묻히고는 글을 적었 다.
〈꽃 피어나다.〉
글을 적은 김소희가 붓을 내려 놓고는 황민성을 보았다.
“드라마 제목은 이걸로 하시게 나.”
“드라마에 나오는 제목 말씀하 시는 거지요?”
책과 드라마 제목은 ‘꽃 피어나 다’로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러니 이건 TV에 나오는 영상 속 제목 으로 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네.”
고개를 끄덕인 김소희는 화선지 에 적힌 꽃 피어나다를 보며 말 했다.
“내 무신의 기운을 담았으 니…… 이 글을 보고 도움을 얻
는 이들도 있을 것이네.”
“도움이라면?”
“건강이라도 찾을 수 있겠지. 아니면 호연지기라도 얻을 수 있 고.”
“아…… 알겠습니다.”
황민성은 화선지를 조심히 말았 다.
‘글귀는 영상에 넣고 이건 액자 에 담아서 우리 집 가보로 해야 겠다.’
속으로 중얼거리던 황민성이 김 소희를 보았다.
“아가씨.”
붓을 내려놓고 책을 손에 쥐던 김소희가 황민성을 보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학교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네.”
“아시는군요. 저…… 저희 학생 들이 사회 나가서 나쁜 짓 하지 않게 좋은 글 한 줄 적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건 그자의 심성이 하는 일이 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그래도 좀 착하게 살도록 하는 글은 없을지요.”
황민성이 글을 보며 말에 김소 희가 작게 고개를 젓고는 새 화 선지를 집어 펼쳤다. 그러고는 글을 적었다.
〈勸善懲惡〉
한문으로 멋들어지게 글을 적은 김소희가 황민성을 보았다.
“선한 행동을 장려하기는 어려 워도 악한 행동을 할 때는 겁이 날 것이네.”
“겁이요?”
“내 살기를 담았네.”
살기라는 말에 황민성이 놀란 눈으로 글을 보다가 침을 삼켰 다.
“살기요?’’
“나쁜 짓 하면 혼난다는 그런 의미라고 해 두지.”
김소희의 말에 황민성이 글을 보았다. 그러고는 작게 침을 삼 켰다. 살기를 담았다는 말을 들 어서인지 글이 좀 무섭게 느껴지 는 것이다.
황민성이 글을 보는 사이, 김소 희가 말을 했다.
“학생들이 이 글의 뜻을 알겠는 가?”
“모르면 알려 주면 됩니다.”
“그럼 알려주게나.”
“글 감사합니다.”
황민성은 종이를 잘 말아 쇼핑 백에 조심히 넣었다.
“자네는 이만 가 보게.”
“아가씨께서는?”
“나는 책을 더 보겠네.”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이만 들 어가겠습니다.”
황민성이 고개를 숙이자 김소희 가 책을 쥐고 탁자에 앉으려다가
그를 보았다.
“애들한테 가지 말게.”
“네?”
“괜히 보고 싶다고 들어가서 애 들 깨우지 말라는 거네.”
“아…… 잠시 얼굴만……
“애들이 깨면?”
눈을 찡그리는 김소희의 모습에 황민성이 슬며시 말했다.
“제가 다시 잘 재우겠습니다.”
“자네가 애 둘을 감당할 수 있
겠나?”
“그게......"
주저하는 황민성을 보며 김소희 가 고개를 저었다.
“이슬이가 집에 있다 해서 노는 것이 아닐세. 애 둘을 보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그러니 보겠 답시고 애들 깨우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황민성이 답을 하자 김소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 다. 그에 황민성이 고개를 숙이
고는 가게를 나서자 강진이 그 뒤를 따라 나왔다.
가게를 나서며 대리운전을 부른 황민성에게 강진이 웃으며 말했 다.
“애들 깨우면 아가씨한테 많이 혼나겠어요.”
“그러게 말이다.”
“애들 깨우지 마세요. 정말 혼 납니다.”
“쩝! 애들 얼굴 보고 싶은 데…… 얼굴도 못 보겠네.”
아쉬워하는 황민성의 모습에 강 진이 웃었다.
“술 마시고 애들 깨우는 것이 아빠의 즐거움 중 하나인데 말이 죠.”
“즐거움?”
“예전에 저희 아버지도 야근하 거나 하면 가끔 제 방에 들어와 서 저 보고 가더라고요.”
“그러셨어?”
“그때는 쉬시지 하는 생각을 했 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후!”
강진이 뒷말을 하지 않고 작게 웃자, 황민성이 무슨 말인지 알 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웃 었다.
“일이 힘들어도 내 새끼 얼굴 보면 하루 피로가 사라지니까. 아버님도 너 보고 힘 얻으려고 했나 보다.”
“그러신 모양이에요.”
강진이 입맛을 다셨다.
“그때 ‘수고하셨어요.’ 할 걸 그
랬어요.”
“넌 뭐했는데?”
“그때 애들 하는 거 하고 있었 겠죠. 자거나 게임했거나.”
강진은 아쉽다는 듯 하늘을 보 았다.
“오늘 하루 수고하셨어요. 들어 오셨어요? 이렇게 말을 할 것 을 ”
강진의 말에 황민성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잠시간 두 사람은 하늘을 보았다.
그러다가 강진이 웃으며 말했 다.
“어머니는 요즘 어떠세요?”
“며칠 전에 보고는 물어보냐.”
“그것도 그러네요.”
강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황 민성이 손에 들린 쇼핑백 안의 화선지를 보았다.
“아무래도 학교에 걸 종이는 집 에 안 들이는 것이 좋겠지?”
“아가씨께서 아이들 몸에 해가
될 것을 담지는 않으셨겠지만, 살기를 담았다고 하니…… 좀 그 렇죠.”
“게다가 무신의 살기잖아.”
“그러게요.”
두 사람은 쇼핑백 안의 화선지 를 보았다. 그러다가 황민성이 트렁크를 열어서는 쇼핑백을 그 안에 넣었다.
그러고 있을 때 대리기사가 도 착했다.
“사장님.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기사에 게 키를 준 황민성이 강진을 보 았다.
“형 간다.”
“잘 가세요.”
강진의 인사에 손을 흔들어 준 황민성이 차에 올라타 문을 닫자 차가 출발했다.
멀어져 가는 황민성의 차를 보 던 강진은 가게 안으로 들어왔 다.
가게 안에서는 직원들이 홀을
마저 정리하고 있고, 김소희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 김소희 옆에 선 강진이 물었다.
“책은 마음에 드세요?”
강진의 물음에 김소희가 책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말했다.
“당시의 풍습과 맞지 않는 장면 들이 있기는 하지만…… 몇 백 년 전의 일을 작가 선생께서 모 두 다 알기는 어렵겠지.”
“이거 집필할 때 아가씨께서 조 언을 해 주신 걸로 아는데도 틀
린 부분이 있으세요?”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내 용은 조금씩 틀어지기 마련이네. 그리고 난 이야기 흐름을 말했 지, 사소한 것까지 말을 하지는 않았지 않나.”
김소희는 책에서 시선을 떼서는 강진을 보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마음에 들게 잘 나온 듯하네.”
김소희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 이네요.”
강진의 말에 김소희가 책을 보 다가 말했다.
“음료 하나 주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강진이 음료를 하 나 꺼내 가져다주고는 말했다.
“저는 이만 올라가겠습니다.”
“오늘도 수고하였네.”
재차 고개를 숙인 강진이 직원
들을 보았다.
“수고들 하셨어요.”
“강진 씨도 수고했어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강진은 책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2 증에 도착하자마자 음식 냄새가 밴 옷을 벗고 샤워를 한 강진은 이불 위에 누웠다.
“끄응!”
이불 위에 누운 강진은 잠시 멍 하니 있다가 책을 들었다. 김소 희의 이야기라서 보고 싶은 것도
있지만…….
“이 책이 재밌으면 안 되는 건 데……
사람들 재밌게 보라고 유명한 작가 섭외해서 만든 것인 만큼 재미가 있었다. 슬픔도 있고 통 쾌함도 있는 것이었다.
다만…… 그 내용을 보면서 재 밌어하는 것이 맞나 싶었다. 김 소희의 슬프고 힘들었던 삶이 담 긴 내용이니 말이다.
입맛을 다시던 강진은 엎드려서
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