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1 화
“조심히들 가세요.”
“귀신이 조심할 것이 뭐가 있겠 어요.”
가게를 나가는 귀신들을 배웅한 강진은 가게 문을 닫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가게 안에는 직원들이 귀신들이 먹고 간 그릇들을 치우 고 있었다.
뒤이어 주방에서는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는 참 설거지를 잘해.”
“그럼. 내가 혼자 자취한 시간 이 얼마인데. 나 음식도 잘해.”
“ 진짜?”
“내일 저승식당 시간에는 내가 음식 해 줄게.”
“뭐 해 줄 건데?”
“그야 당신 먹고 싶은 거 해 줘 야지.”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이혜미와 최호철의 목소리에 강진이 피식
웃었다.
‘조금 늦게 만났지만 열심히 사 랑하고 보기 좋네.’
주방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두 귀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강진 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꽃 피 어나다를 읽고 있는 문지혁이 보 였다.
“그거 이미 다 보지 않으셨어 요?”
“보기는 다 봤죠. 지금 두 번째 보는 겁니다.”
“본 걸 또 보세요?”
책이 재밌으면 두 번도 보기야 하지만, 보통은 어제 본 책을 오 늘 바로 다시 보지는 않으니 말 이다.
강진의 말에 문지혁이 웃으며 책을 보았다.
“각색이 되겠지만, 대본이 여기 에서 나오니 미리 공부하는 겁니 다.”
“이를테면 교과서 중심으로 공 부하시는 거네요.”
대본이 시험지라면 책은 교과서 이니 말이다.
“그런 셈이죠.”
책을 보던 문지혁이 문득 강진 을 보았다.
“소희 아가씨는 요즘 어떠십니 까?”
“아가씨는 민성 형 집에서 애들 보면서 지내고 계세요.”
“그…… 아가씨는 괜찮으신 겁
니까?”
“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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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은 한숨을 쉬며 책을 보 았다.
“제가 소희 아가씨라면 너무 힘 들어서…… 미치지 않고는 못 살 것 같습니다.’’
문지혁의 말에 강진이 책을 보 았다. 책은 중간쯤 펼쳐져 있었 는데, 모서리에 그려진 꽃의 봉 오리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삶이 너무 험난하고…… 마지
막에는 혼자 쓸쓸하게 돌아가시 잖아요. 그것도 어린 나이에.”
김소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책 의 내용이 홍미고 재미겠지만, 김소희를 아는 사람과 귀신은 안 스럽고 가여운 것이다.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 이 홍수처럼 들이닥쳐 어린 소녀 였던 김소희를 휩쓸었으니 말이 다.
그래서 김소희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강진과 배용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문지혁의 물음에 강진이 책을 보다가 말을 했다.
“힘든 만큼 아가씨한테는 시대 마다 그분의 곁을 지키던 분들이 있으셨을 거예요. 그때는 복실 씨가 있었던 것처럼요.”
“그럼 지금은 사장님이 계신 거 군요.”
“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저도 있는 거죠. 저 말고도 아가씨 아 끼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분들 이 있으니까요.”
말을 한 강진이 문지혁을 보았 다.
“처녀귀신 보신 적 있으세요?”
“처녀귀신? 저는 못 봤습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날 이 있을 거예요. 그날이 소희 아 가씨를 따르는 처녀귀신들이 우 르르 오는 날이에요. 그때는 각 오하고 오셔야 할 거예요.”
“처녀귀신이 많은가요?”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처녀귀 신이나 총각귀신이 되는 것이 쉽
지 않거든요.”
“그렇군요. 그래서 제가 처녀귀 신을 한 번도 못 봤군요.”
문지혁의 말에 강진이 웃었다.
“한 번도 못 본 건 아니죠. 아 가씨를 보기는 했으니까.”
“아! 아가씨를 처녀귀신이라 생 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몰랐습 니다.”
문지혁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책을 볼 때, 가게 문이 흔들렸 다.
띠링! 띠링!
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강진이 힐끗 문을 보고는 직원들을 보았 다.
직원들은 후다닥 그릇들을 챙겨 서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문지혁 도 책을 덮고는 손에 끼고 있던 비닐장갑을 벗었다.
그제야 강진이 가게 문을 열었 다. 가게 앞에는 정학봉이 서 있 었다.
정학봉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
다.
“지나가는 길에 불이 켜져 있어 서…… 쉬는데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단체 예약 손님들 가셔서 요. 치우던 중이지 쉬던 건 아니 었어요. 들어오세요.”
강진이 웃으며 하는 말에 정학 봉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킥보드 를 세우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일은 좀 어떠셨어요?”
말을 하며 강진은 행주로 탁자
들을 닦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그릇들은 주방으로 옮겼지만, 아 직 뒷정리는 하지 못한 것이다.
강진의 말에 정학봉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운수가 좋은 날인지, 손 님 태워다 주고 내리면 근처 콜 이 뜨고, 내려 주면 콜이 뜨고 그래서 일 좀 많이 했습니다.”
“운수 좋은 날이네요. 하긴, 그 런 칙칙폭폭이 되는 날도 있어야 죠.”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기분이 좋은 둣 웃는 정학 봉을 보며 강진이 말했다.
“아! 식사하시겠어요?”
“아닙니다. 아까 손님 내려 주 고 오는 길에 포장마차 보여서 거기서 국수 한 그릇 먹었습니 다.”
“국수로 요기가 되겠어요?”
“세 시까지만 돌고 집에 갈 거 라서 괜찮습니다.”
정학봉은 가게를 둘러보다가 입 맛을 다시며 말했다.
“문이 열려서 잠시 들어와 봤던 거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음료라도 좀 드시고 가시죠.”
“음료?”
“따뜻한 매실차 한 잔 드릴게 요. 잠시만요.”
강진은 주방에 들어가 따뜻한 물에 매실청을 타서는 가지고 나 왔다.
“고맙습니다.”
정학봉이 서서 차를 받는 것에 강진이 웃으며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서 드세요.”
“아, 쉬셔야 하는데……
“저도 이렇게 좀 쉬는 거죠.”
먼저 앉으려던 강진은 “아차.” 하고는 주방에 가서 매실차를 한 잔 더 타서 가지고 나왔다.
“앉으세요.”
강진의 말에 정학봉이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뒤 가게를 보며 말했다.
“제가 여기에서 대리 뛴 지 한 칠 년 됐습니다.”
“그러시구나.”
“그전에는 이 근처에 밥을 먹을 만한 곳이 별로 없었는데…… 여 기 한끼식당 알게 된 후에 밥을 먹기가 너무 행복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장 사하기를 잘 했네요.”
웃으며 정학봉을 보던 강진이
물었다.
“그런데 저녁은 저희 가게에서 늘 드시는 것 같던데 집에서 식 사를 안 하고 나오세요?”
“아침에는 저도 따로 일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퇴근하고 바로 여기 일하러 옵니다.”
“그럼 낮에는 따로 일도 하시고 대리도 하시는 거예요?”
“대리만 해서 먹고살 수 있나 요. 대리하시는 분 중에 대부분 낮에 일하시면서 대리는 부업으
로 하시는 분들 많으세요.”
“정말 열심히 하시는군요. 그럼 잠은 언제 주무세요?”
“세 시에 일 끝내고 한 네 시간 자고 출근합니다.”
“아니, 네 시간만 주무세요?”
강진이 놀라 보자, 정학봉이 고 개를 끄덕였다.
“일할 수 있을 때 일해야죠.”
정학봉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았다.
‘정말 대단하시구나.’
강진도 예전에는 하루에 네 시 간 정도만을 자고 일을 했었다. 새벽에는 우유와 신문 배달, 그 다음엔 아침 알바, 그리고 저녁 에는 저녁 알바까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 스스로 번 돈으로 학교 다니고 먹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정학봉은 하루에 네 시 간만 자면서 일하는 돈을 가족을 위해 쓰는 것이다. 자신은 오천
원, 육천 원짜리 식사를 하고 배 고파도 국수로 때우면서 말이다.
아버지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아닌 사람들은 자신이 번 돈을 자신을 위해 쓸 테지만, 아버지들은 자신이 번 돈을 가족 을 위해 쓰니 말이다.
강진이 대단하다는 듯 보는 것 에 정학봉이 머리를 긁었다.
“제가 많이 못 배워서 몸이 고 생을 하는 겁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대
단하세요.”
강진의 말에 정학봉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리하시는 분들 대부분 이런 생활을 하십니다.”
“훌륭한 가장들이 참 많네요.”
그러고는 강진이 웃으며 차를 가리켰다.
“차 드세요.”
웃으며 강진이 매실차를 한 모 금 마시자, 정학봉도 차를 마셨
다.
“좋네요.”
“요즘 매실이 좋더라고요. 시원 하게 마셔도 좋고, 따뜻하게 마 셔도 좋고. 아! 그리고 매실이 몸에 좋은 거 아세요?”
“압니다. 소화에도 좋고 열 낮 추는 데도 좋다고 하더군요.”
정학봉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시 고는 잠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밥 먹을 때 말입니다.”
정학봉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정학봉 이 말했다.
“인섭이가 생일을 별로 안 좋아 합니다.”
“그런 것 같더라고요.”
“이야기 들은 것처럼 인섭이 큰 이모가 생일 이틀 후에 죽었습니 다. 인섭 엄마나 저에게 아주 소 중한 사람이라... 오월은 저희
에게 힘든 달입니다.”
그러고는 정학봉이 한숨을 쉬었
다.
“오월에 저희가 그러니 아들도 그걸 아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생일을 안 좋아하는 듯합니다.”
“큰이모하고 사이가 아주 좋으 셨나 보네요.”
강진의 말에 정학봉이 미소를 짓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큰이모가 인섭이 엄 마입니다.”
“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강 진은 처음 듣는다는 듯 놀란 반 응을 보였다. 그에 정학봉이 입 맛을 다시며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얼추 이야기를 한 정학봉이 짧 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 다.
“사람들이 들으면 많이들 이상 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잘 이야기를 하지 않 습니다.”
“그러시군요. 말씀해 주시기 쉬 운 이야기는 아니었을 텐데…… 저에게 이야기를 해 주시는 건……
강진이 보자, 정학봉이 찻잔을 만지다가 말을 했다.
“인섭이 이번 생일날 인섭 엄마 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려고 했 습니다.”
정학봉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다가 말했다.
“이모로 알던 분이 자기 엄마란
걸 알면 인섭이 충격이 크겠네 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 만, 그래도 계속 감출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인섭이 도 이제 스물이고 자기 친엄마가 누군지 알아야 하니까요.”
정학봉이 잠시 있다가 입을 열 었다.
“그리고 인섭이 엄마가 잘못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몸 이 안 좋아서 그렇게 하늘에 먼 저 간 것인데……. 자기가 낳은
아들이 자신을 이모라고 알고 있 는 건 그녀한테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정학봉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인섭 어머니도 승천을 하실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강진이 정학 봉을 보았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단골 식당의 사장인 만큼 꽤 자 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아들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친분이 깊 은 건 아니었다.
이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정 도의 친분이 아닌 것이다.
강진이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자, 정학봉이 잠시 있다가 말 했다.
“생일에 저희 아들 좀 봐 주셨 으면서 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정학봉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 었다.
“저도 인섭이 나이일 때가 있었
습니다. 그 나이 때는 부모님 말 보다 친구나 친한 형의 말이 더 귀에 잘 들어오더군요.”
정학봉은 작게 고개를 젓고는 강진을 보았다.
“그래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학봉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이대 남자들에게는 아빠와 엄마의 말보다 친구와 형들의 말 이 더 귀에 잘 들어왔다.
그래서 정학봉이 강진에게 정인
섭을 부탁한 것이다. 혹시라도 그날 마음 많이 아파하면…… 위 로를 해 주라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강진의 말에 정학봉이 작게 한 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좀 더 앉았다가 가시죠?”
“아닙니다. 대리는 지금 시간이 제일 바쁘거든요.”
웃으며 정학봉이 가게를 나서자
강진이 그를 배웅했다. 밖으로 나온 정학봉은 고개를 한 번 숙 이고는 킥보드를 끌고 천천히 걸 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