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화
“인섭아.”
멍하니 미역국을 보는 정인섭을 보며 강진이 상을 가리켰다.
“와서 밥 먹자.”
“그냥 여기에서 먹으라고 해요. 상을 뭐 하러 또 차려요.”
최동해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 지저분한 곳에 생일상 차릴
수 있냐.”
강진의 말에 최동해가 식탁을 보았다. 식탁에는 먹다가 흘린 안주와 술 때문에 깨끗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거야 치우면……
“어허! 말이 많다.”
그러고는 강진이 정인섭을 보았 다.
“인섭아 이리 와. 술자리에서 미역국 먹기 좀 그런 거 아는 데…… 그래도 형이 식당 하는데
너 미역국은 먹게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했다.”
“저…… 괜찮은데.”
“왜. 한 숟가락 해.”
강진의 말에 옆에 있던 홍진주 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인섭아. 이거 다 엄마가 한 거야. 이리 와서 먹어. 엄마가 맛있게 했어.”
홍진주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말했다.
“이리 와. 형도 저녁에 예약 손 님들 상대하려면 밥 좀 먹어야 해.”
강진은 주방에 가서는 미역국과 밥을 한 그릇 더 푼 뒤 다시 홀 로 나와 그것을 탁자에 놓았다.
“뭐 해. 이리 와.”
강진의 말에 정인섭이 그릇을 보다가 일어나서는 거기에 앉았 다.
“형, 저희 거는 없어요? 미역국 맛있어 보이네요.”
최창수의 말에 강진이 피식 웃 으며 의자를 잡아 뺐다. 그러고 는 슬쩍 홍진주를 보았다.
‘식사하세요.’
강진의 눈빛을 읽은 홍진주가 놀란 눈으로 정인섭 앞에 있는 밥과 미역국을 보았다.
“사장님 드시려고 한 것이 아니 라…… 저 먹으라고 가져오신 거 예요?”
홍진주의 말에 강진이 의자를 가볍게 손으로 툭 치고는 주방으
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홍 진주가 정인섭 앞에 앉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정인섭을 보았다.
“엄마가 그동안 인섭이하고 오 래 같이 있었지만…… 이렇게 식 탁에 마주 앉은 건 처음이네.”
밥을 먹을 때 부모님이 맞은편 에 앉으니 홍진주는 늘 그의 옆 에 서 있었다. 빈 의자를 빼 놓 고 밥을 먹는 집은 없으니 말이 다.
그래서 홍진주는 늘 정인섭의 옆이나 뒤, 혹은 앞에 서서 그가 밥을 먹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마주 앉아서 밥을 먹는 건 처음 인 것이다.
미역국을 보고 있는 정인섭의 모습을 보며 홍진주가 손을 내밀 었다.
“인섭아, 밥 먹어.”
정인섭 앞에 놓인 수저를 들려 던 홍진주가 멈췄다. 자신은 수 저를 들 수 없었다. 그에 잠시 있던 홍진주가 정인섭을 지그시
보았다.
“인섭아…… 아빠하고 엄마는 너 속이려 한 게 아니야.”
잠시 말을 멈춘 홍진주는 천천 히 입을 열었다.
“아빠하고 엄마는…… 말을 해 야 할 순간을 잡지 못했을 뿐이 야. 네가 처음 한 말은 엄마였 고, 그 엄마라는 말을 들은 건 진해였으니까. 그래서 말을 못 했던 거야.”
한숨을 쉬며 홍진주가 말을 이
었다.
“네가 어렸을 때는…… 너무 어 려서,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아 이라서 말을 할 수 없었어. 그리 고 나이를 먹을 때는 예민한 시 기라 말을 할 수 없었고……. 그 래서 지금 이야기를 한 거야. 아 빠하고 엄마는 네가 이해해 줄 나이가 되기를 기다린 거지, 일 부러 속인 것이 아니란다.”
홍진주가 안쓰러운 눈으로 정인 섭을 보았다.
“그리고 진해가 네 엄마야. 네
가 아플 때 너 업고 병원으로 뛰 어간 건……
홍진주가 미소를 지으며 정인섭 의 손을 잡았다.
스르륵!
살며시 정인섭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린 홍진주가 잔잔하게 말 했다.
“내가 아니라 진해야. 그러니 네 엄마는 진해야.”
홍진주의 중얼거림을 강진이 들 으며 한숨을 쉬었다.
‘저런 말 하기 힘드실 텐데.’
자신이 아니라 홍진해가 엄마라 고 하는 것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최동해가 말했다.
“형.”
최동해의 말에 강진이 정신을 차리고는 그들의 앞에 미역국을 한 그릇씩 놨다.
“닭고기로 해서 고소해.”
“맛있어 보이네요.”
최동해가 침을 삼키는 것에 강 진이 그를 보고는 말했다.
“추가해 놔.”
“ 뭘요?”
“다이어트 완료하면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에.”
강진의 말에 최동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해야겠네요.”
최동해는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 을 열고는 미역국을 적었다. 그
에 강진이 슬쩍 리스트를 보았 다.
〈라면, 탕수육, 자장면, 짬 뽕…….>
리스트에는 여러 음식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던 강진이 슬쩍 정인 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인 섭은 여전히 미역국을 먹지 않고 보고 있었다.
“인섭아, 어서 먹어 봐. 미역국 식으면 맛없어.”
홍진주의 말에 강진이 잠시 있 다가 입맛을 다시고는 그녀의 옆 에 앉았다.
“인섭아, 먹자.”
강진의 말에 정인섭이 잠시 있 다가 수저를 들었다. 그러고는 미역국을 떠서 입에 넣었다.
“맛있어요.”
“그래?”
강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정인섭이 문득 그를 보았다.
“근데…… 혹시 오늘 저희 어머 니 오셨어요?”
“어머니?”
어머니라는 말에 강진이 홍진주 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안 오셨는데?”
“그럼 아버지는요?”
“안 오셨어. 왜?”
강진의 물음에 정인섭이 잠시
있다가 미역국을 보았다.
“미역국 맛이…… 저희 집에서 먹던 것 같아서요.”
“너희 집?”
“네. 아침에 이거랑 같은 거 먹 고 나왔어요.”
미역국을 보던 정인섭은 국물을 한 모금 더 떠 마셨다. 그 순간, 눈물이 주르륵 홀러내렸다.
그 모습에 강진이 티슈를 뽑아 슬며시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돌연 눈물을 흘리는 정인섭의 모습에 강진이 뭐라고 말을 하려 할 때, 최동해가 자리에서 일어 났다.
“덥다. 형, 저희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말을 하며 최동해가 최강찬과 친구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강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해도 다 컸네.’
정인섭이 우는 것 같자, 최동해 가 그걸 보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자기만 알고 남을 생각하지 않았던 녀석인 데…… 이제는 남을 배려하는 것 을 아는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나가는 것에 정인섭이 그들을 보다가 강진을 보았다.
“저 때문에 나가시는 건가요?”
“남자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 으니까. 그리고……
강진이 웃으며 말했다.
“남자의 눈물처럼 보기 힘든 것 도 없으니까.”
강진의 말에 정인섭이 숨을 작 게 토하고는 눈가를 티슈로 닦았 다.
“후우!”
작게 숨을 토한 정인섭이 미역 국을 보다가 말했다.
“엄마가 끓인 미역국하고 맛이 같아서…… 엄마하고 아빠가 왔 다 간 줄 알았어요.”
정인섭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다가 말했다.
“부모님하고 싸웠어?”
강진의 물음에 정인섭이 잠시 있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 다.
“제가……
잠시 머뭇거리던 정인섭이 눈물 을 흘렸다.
“엄마 아들이 아니래요.”
정인섭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다가 말했다.
“아버님께서…… 사실 얼마 전 에 나한테 네 이야기를 해 주셨 어.”
강진의 말에 정인섭이 멈칫해서 는 그를 보았다. 눈물이 맺힌 그 의 눈엔 놀람이 어려 있었다.
“형, 알고 있었어요?”
“너 여기에서 저 애들하고 술 마시고 난 다음 날 아버님이 일 찍 오셨어.”
“아버지는 늘 여기서 저녁을 드
시니까요.”
“생일날 네가 여기에서 형들하 고 술 마신다는 이야기 듣고 일 찍 오셨더라고. 근데 아버님이 왜 일찍 오셨는지 알아?”
말없이 자신을 보는 정인섭을 보며 강진이 말했다.
“인섭이 생일날…… 이야기를 해 준다고 하셨어. 그래서 너 힘 들어하면 다독여 주라고 하시더 라.”
“아버지가요?”
정인섭의 물음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야기를 듣고 힘들어할 것을 아시니…… 아버님이 걱정 이 많이 되셨나 봐.”
그러고는 강진이 정인섭을 보았 다.
“힘들지?”
“……네.”
“힘들 거야. 나라도 너 같은 상 황에서는 머리가 복잡해서 터져 버렸을 거야.”
강진은 홍진주를 한 번 보고는 정인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이 너한테 형 비밀을 하나 이야기해 줄게.”
“비밀요?”
“네 비밀을 아니까, 내 비밀도 이야기를 해 줄게.”
자신을 보는 정인섭을 보며 강 진이 말했다.
“형은…… 고등학교 때 부모님 이 돌아가셨어.”
“아……
정인섭이 놀란 눈으로 보자, 강 진이 말했다.
“그리고 보육원에서 자랐어.”
“보육원……
“다 큰 아이 키우기 힘들어서 그런지 친척들이 나를 거기로 보 냈거든.”
“형.”
정인섭이 당황과 놀람이 찬 눈 으로 보자, 강진이 웃었다.
“형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내가 너보다 더 불쌍하니 너에게 생긴 일은 별거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야. 그저 네 비밀을 알고 있으니 내 비밀 도 이야기를 해 준 거야.”
강진의 말에 정인섭이 그를 보 았다.
“아빠하고 엄마가 너에 대한 것 을 속였다고 생각하지 마.”
“일찍…… 말을 해 주셨어야 했 어요.”
“아빠하고 엄마는 말을 해야 할 순간을 잡지 못했을 뿐이야. 네 가 어렸을 때는 너무 어렸고
홍진주가 했던 말을 강진은 그 대로 해 주었다.
“그래서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네가 이해를 할 나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이제 네가 어른이 됐다 생각해서 말을 한 거야.”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
안……
정인섭이 뒷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홀리자, 강진이 그를 보 며 말했다.
“어머니가 친엄마가 아니라서 속은 것 같아?”
잠시 있던 정인섭이 티슈로 눈 을 닦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아니에요. 말을 하지 않 았던 것도 이해도 되고. 그런 데.. 복잡해요.”
“복잡할 거야. 이때까지 네가 알던 삶이 전부 바뀌는 것 같을
테니까. 그런데……
강진이 정인섭을 보며 홍진주가 했던 말을 마저 했다.
“너 아팠을 때 누가 업고 병원 에 갔어?”
“그건…… 엄마요.”
“그럼 지금 어머니가 어머니인 게 맞는 거지.”
강진의 말에 정인섭이 잠시 있 다가 한숨을 쉬었다.
“복잡해요. 그리고……
정인섭은 미역국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큰이모가 너무 안쓰러워요.”
“큰이모가?”
“내 생일 이틀 후가 큰이모 제 사예요. 그렇다는 건 나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했을 텐데……
정인섭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았다. 강진의 시선을 받으며 정 인섭이 눈물을 흘렸다.
“큰이모, 아니......
정인섭이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가 너무 불쌍하고…… 너 무 미안해요. 나 엄마한테 한 번 도 엄마라고 불러 주지도 못했는 데. 엄마가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제사상에서도 큰이모라고 했는 데.”
정인섭의 말에 홍진주가 그를 보았다.
“엄마는 괜찮아. 엄마는. 큰
이모가 아니라 아주머니라고 불 려도 괜찮아. 네가 왜 미안해. 엄 마가 너 두고 먼저 가서 그게 미
안하지. 엄마는 정말 괜찮아.”
홍진주는 정인섭의 손을 쓰다듬 었다. 물론 그것을 정인섭은 알 지 못하지만 말이다.
“엄마한테…… 너무 미안해요.”
정인섭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았다.
‘마음이 복잡한 이유가 친엄마 가 안쓰러워서였구나.’
부모님에게 속았다거나 그런 생 각을 할 거라 생각을 했는데, 그 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복잡했고…… 자신 에게 엄마 소리도 듣지 못하고 죽은 홍진주가 너무 가엽고 안쓰 러워서 더 마음 아파 한 것이다.
일찍 말을 해 주지 않아서 속상 한 것도…… 홍진주가 너무 안쓰 러워서였다.
말을 하며 티슈를 꺼내 눈물을 닦는 정인섭의 모습에 강진이 홍 진주를 보았다.
‘참 바르고 착하게 잘 컸네요.’
강진이 입 모양으로 말을 했지
만, 홍진주는 그것을 보지 못했 다. 그저 울고 있는 정인섭을 보 며 울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