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5 화
아가씨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 산을 하고 가자, 박혜원이 슬며 시 그녀들이 가는 것을 지켜보았 다. 그 시선에 아가씨 중 한 명 이 웃으며 말했다.
“밥 잘 먹고 가.”
“네. 안녕히 가세요.”
박혜원이 일어나 인사를 하자, 아가씨가 웃으며 가게를 나섰다.
다시 자리에 앉은 박혜원은 반 찬통 뚜껑들을 열고는 자신의 젓 가락으로 반찬을 넣으려 했다.
“스톱!”
강진이 만류하자 박혜원이 그를 보았다.
“안 돼요?”
또 눈망울을 초롱거리는 박혜원 의 모습에 강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젓가락으로 하는 건 안 돼.”
강진은 젓가락 통에서 새 젓가 락을 꺼내 내밀었다.
“네 침이 더럽다는 건 아닌데 침 닿으면 음식이 빨리 상해. 그 리고 위생적으로도 안 좋아. 이 걸로 해.”
“아! 고맙습니다.”
새 젓가락을 받아든 박혜원이 반찬통에 음식들을 담으려 하자, 강진이 또 손을 내밀었다.
“스톱!”
박혜원이 왜 또 말리냐는 듯 쳐
다보자 강진은 반찬통을 들더니 하나씩 냄새를 맡았다.
킁! 킁!
그 모습에 박혜원이 눈을 찡그 리며 말했다.
“제가 집에서 깨끗이 씻어 온 거예요.”
“누가 뭐라고 하든?”
강진은 반찬통을 몇 개로 나누 고는 말을 이었다.
“반찬통은 음식 냄새 배는 경우
가 많아. 특히 김치나 생선 같은 건 쉽게 냄새가 배기지. 김치 냄 새 배긴 통에 계란말이 담으면 어떻겠어?”
“그건…… 그러네요.”
“앉아 있어. 오빠가 반찬 담아 줄 테니까. 명색이 내가 음식점 사장인데 좀 더 잘 담지 않겠 어?”
강진은 젓가락으로 반찬들을 하 나씩 통에 담았다. 김치 냄새가 나는 통에는 김치를 담고, 냄새 가 안 나는 통에는 계란말이와
멸치볶음을 담았다.
“근데 너 자주 하는 ‘안 돼요?’ 이거 일부러 하는 거지? 상대방 거절 못 하게 하려고.”
강진의 말에 박혜원이 웃었다.
“헤헤헤! 걸렸네요.”
“그건 어디서 배운 거야?”
“예전에 슈렉이라는 영화를 봤 는데 거기 고양이 기사 하는 거 따라한 거예요. 그거 하면 엄마 가……
박혜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부탁 다 들어 줬어요.”
박혜원의 말에 강진이 피식 웃 으며 반찬을 마저 담았다. 그런 강진을 보던 박혜원은 식탁 수저 통 옆에 세워져 있는 책으로 시 선을 옮겼다.
“이 책은 뭐예요?”
말을 하며 박혜원은 주위를 둘 러보았다. 벽에 닿아 있는 식탁 들에는 모두 이 책들이 세워져
있었다. 카운터에도 몇 권이 진 열이 되어 있었고 말이다.
박혜원의 물음에 강진이 책을 보고는 말했다.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에 대한 일대기야.”
“일대기요? 위인전이에요?”
박혜원이 책으로 손을 내밀며 강진을 보았다. 봐도 되냐는 의 미였다.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혜원이 책을 잡아 펼쳤다.
“조선시대 양반가 규수의 몸으
로 왜병들과 싸운 여인이 있었 다. 이 책은 잊힌 한 송이 꽃과 같은 김소희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는……
“그런 내용이 있어?”
강진이 보자 박헤원이 책을 펼 쳐 앞장을 보여 주었다.
〈작가 서문〉
“앞에 작가 서문에 있잖아요.”
“작가 서문도 읽어?”
“사장님…… 아니, 오빠는 안 읽어요?”
“나야 바로 본문부터 보지.”
“에이! 작가 서운하게. 작가 서 문도 봐야죠. 그리고 책 내용의 핵심은 작가 서문에 있는 거예 요. 작가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 은 이야기를 압축해서 적어 놓으 니까요.”
“그래?”
“그럼요.”
“혜원이는 책 많이 보는 모양이 네?”
“책 재밌잖아요.”
웃으며 박혜원이 책을 보았다.
“여성 의병장 이야기인가 보네 요.”
박혜원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지.”
“마치 아시는 분처럼 말씀하시 네요?”
“알지.”
“ 알아요?”
박헤원이 의아한 듯 보자, 강진 이 웃으며 책을 보았다.
“책을 봤으니까.”
“아…… 근데 책이 왜 이리 많 아요? 다 사신 거예요?”
“그건 아니고 나하고 친한 형이 이 책을 만들었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위인상이라면서 말이야.”
그러고는 강진이 박혜원을 보았
다.
“이거 곧 드라마로도 나올 거 야.”
“드라마요? 이 책 되게 많이 팔 렸나 보네요?”
박혜원의 말에 강진이 입맛을 다셨다. 아직 홍보가 덜 되어서 그런지 책이 많이 팔리지는 않은 상태였다.
‘돈 벌려고 한 건 아니지만, 책 이 너무 안 팔려도 안 좋은데.’
특히 김소희가 실망이 클 것이
다. 자신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 왔는데 안 팔린다니 말이다.
‘많이 팔려야 할 텐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아니, 돈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김소희 가 실망할까 봐 걱정이었다.
“대단한 분이셔. 작가 서문 내 용대로 양반집 규수인 데다 열여 섯의 나이에 의병으로 왜병과 싸 우신 분이니까.”
“열여섯…… 그렇게 어린 나이 에요?”
“어린 나이시지.”
“대단하네요.”
박혜원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반찬이 담긴 통들을 보았다. 반 찬통에는 반찬이 담겼지만 빈 곳 이 많았다.
아무래도 식당에서 내어 주는 반찬들은 많이 나가지 않으니 말 이다.
“반찬들 좀 더 채워 줄까?”
마음 같아서야 더 채워 주고 싶 지만, 아까 이야기를 한 것을 보
아 박혜원은 자존심이 강한 아이 였다. 물론 자존심과 다르게 애 교를 피울 줄도 아는 여우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신이 지키는 선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으니 물어본 것 이다.
강진의 말에 박혜원이 고개를 저었다.
“한끼 식사로 이 정도면 충분해 요.”
내가 모든 반찬 채워 준다는
건 아니야. 점심 장사하고 남은 나물류 같은 반찬 주겠다는 말이 야.”
“나물류요?”
“김치하고 그런 건 시간 지나도 손님들 드리면 되지만 나물 같은 반찬은 만들고 바로 먹어야 더 맛있잖아. 손님들 얼마나 들어올 지 생각해서 만들다 보니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져가 면 몇 끼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야. 아니면 나물 넣고 비벼 먹 어도 맛있고.”
그러고는 강진이 웃으며 말했 다.
“어떻게, 줘?”
강진의 말에 박혜원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그에 강진이 피 식 웃으며 말했다.
“기다려.”
강진은 주방에 가서는 반찬통을 세 개 들고 나왔다. 강진의 말대 로 반찬통에는 점심에 나온 밑반 찬이 담겨 있었는데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강진은 반찬들을 같은 반찬이 담긴 곳에 덜고는 통을 주방에 가져다둔 뒤 쇼핑백을 들고 나왔 다.
강진이 반찬통을 쇼핑백에 넣으 려 하자 박혜원이 말했다.
“가방에 넣으면 돼요.”
“가방에 넣고 다니면 반찬 모양 다 흩어져. 이대로 가져가서 이 대로 꺼내.”
쇼핑백에 반찬통을 넣은 강진이 박혜원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집까지 태워다 줄 게.”
“집요?”
“마음 같아서는 학교로 태워다 주고 싶은데...
강진이 시간을 보았다.
“지금 가면 하교 시간일 것 같 아서. 집까지 태워다 줄게.”
강진이 다시 박혜원을 보며 말 을 덧붙였다.
“이건 거절하지 마. 너 혼자 보
내면 집에 잘 갔나 신경 쓰일 것 같아서 그런 거니까.”
강진의 말에 그를 보던 박혜원 이 슬며시 말했다.
“근데 저 집 인천인데……
박혜원이 보자, 강진이 웃으며 말했다.
“잘 됐네. 오랜만에 소래포구에 서 장이나 봐야겠다. 나 손만 씻 고 나올게. 기다려.”
강진이 식탁에 있는 접시들을 쟁반에 담아 주방에 가져다 놓
자, 배용수가 말했다.
“나는 설거지하고 여기 정리할 테니까 너는 먼저 가.”
“그럼 저희가 할게요.”
“아니에요. 저야 강진이랑 여기 저기 잘 다니니까 괜찮아요. 다 들 오랜만에 바람 좀 쐬세요.”
배용수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씻은 뒤 자동차 키를 챙겼다.
“모두 차에 가 계세요.”
강진의 말에 여자 직원들이 서 로를 보다가 배용수에게 웃으며 수고하라 하고는 뒷문으로 나갔 다.
여자 직원들이 모두 나가자, 강 진이 배용수를 보았다.
“한 이십 분이면 되지?”
“흠……
배용수가 주방을 보다가 말했 다.
인천에 도착하면 불러.”
“왜?”
“하는 김에 홀도 청소도 좀 하 고 이 층도 좀 청소하려고.”
“이 층?”
“보니까 위에서 자고만 내려오 지, 청소하는 꼴을 못 본 것 같 아.”
“나도 가끔 해.”
배용수 말대로 자고 내려오기만 해서 2층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치울 것도 없고 해서 청소를 자주 못 하기는 했
다.
“내가 갔다 와서 할게.”
“됐어. 애 기다린다. 어서 가 라.”
배용수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홀로 나 왔다. 박혜원은 책을 보고 있었 다.
“혜원아, 가자.”
“네.”
박혜원이 책을 다시 수저통 옆
에 세워 놓자, 강진이 웃으며 책 을 쇼핑백에 담았다.
“어‘?”
“빌려줄게.”
“그래도 돼요?”
박혜원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이라는 건 누가 읽으라는 거 잖아. 그럼 읽어 줄 사람의 손에 들어가야지. 그래야 이 책 속 주 인공인 소희 아가씨께서 좋아하 지 않겠어?”
“그건 맞아요. 책은 누가 읽어 줘야 그 역할을 다 하는 거니까 요. 그럼 깨끗하게 읽고 다시 가 져다드릴게요.”
“그래도 되고 너 가져도 되고.”
웃으며 강진이 뒷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자.”
“이리로 안 가요?”
박혜원이 앞문을 보자 강진이 웃으며 뒤쪽을 가리켰다.
“차가 뒤에 있어.”
“그럼 가게는요?”
“걱정하지 마.”
강진이 웃으며 뒷문으로 향하자 박혜원이 그를 보다가 뒤늦게 따 라갔다.
뒷문으로 나온 강진은 피식 웃 었다. 여자 귀신들과 아주머니 귀신이 차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에 강진이 차 문을 열고는 박 혜원을 보았다.
“ 타.”
박혜원이 먼저 조수석에 타자, 강진은 지붕에 타고 있는 귀신들 을 보았다.
“왜 다 거기에 계세요?”
“답답한 안보다는 그냥 여기에 타고 갈래요. 이게 더 좋아요.”
이혜미의 말에 강진이 아주머니 를 보았다.
“저도 여기 타고 갈게요.”
“안에 넉넉하니 뒤에 타고 가시
지 그러세요?”
“아니에요. 여기 분들하고 이야 기 좀 하고 싶어서요.”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을 이었 다.
“오랜만에 말 상대가 있어서 너 무 좋네요.”
아주머니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은 강진이 쇼핑백을 건 네자 박혜원이 그것을 다리 사이 에 잘 놓았다.
“집이 어디야?”
“희망천이요.”
“희망천?”
“동네 이름이에요. 내비에 치면 나올 거예요.”
박혜원의 말에 강진이 희망천을 치고는 웃었다.
“희망천이라. 동네 이름 멋지네. 희망천 어디야?”
“그냥 동네까지만 태워 주세 요.”
박혜원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망천을 목적지로 설정한 뒤 핸들을 잡았다.
부웅!
강진의 차가 인천으로 출발을 했다.
* * *
집에 도착한 박혜원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쇼핑백에 있는 반찬
들을 냉장고에 다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냉장고에서 미역을 꺼 내 물에 담갔다.
손을 씻은 박혜원은 서둘러 집 을 나섰다. 곧장 동네 정육점으 로 가서 소고기를 조금 산 박혜 원은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그 사이 잘 불어난 미역을 가위 로 적당히 자른 박혜원이 미역국 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런 박혜 원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주머니 귀신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버지 오늘 기분 좋겠
네.”
손녀가 끓여 주는 미역국을 먹 는 할아버지들은 세상에 몇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