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4화
“열심히 살아가는 초등학생이 너, 그리고 이 연구실의 도움이 필요하다.”
“초등학생요?”
임경호가 의아한 듯 보자, 강진 은 박혜원에 대해 말을 했다. 자 세한 개인 사정은 빼고 공부하러 인천에서 여기 서신대로 온다는 내용만 말이다.
“여기로요?”
“학생회관 앞에서 지나가는 학 생들한테 모르는 문제 알려달라 고 하는 모양이야. 얼마나 기특 하냐. 공부하겠다고 인천에서 여 기까지 지하철 타고 와서 모르는 사람들한테 알려 달라고 하고 말 이다.”
강진의 말에 학생들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강진이 하는 말을 들으면 정말 기특한 아이였 다.
그러다 문득 최광현이 손뼉을
쳤다.
“아! 그 애!”
“ 알아요?”
“전에 학생회관인가 어디인가에 서 여자애가 수학 모르는 것이 있다고 해서 알려 준 기억이 있 어. 어린 여자애가 수학 책 들고 물어봐서 기억이 나.”
서신대에서 공부 알려 달라고 다가온 어린 여자애는 정말 흔하 지 않다 보니 기억을 하고 있었 던 모양이었다.
최광현의 말에 강진이 의아한 듯 그를 보았다.
“형한테 물어봤다고요?”
“응. 왜?”
“그…… 혜원이는 여자하고 같 이 있는 남자들한테 문제를 풀어 달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되묻는 최광현을 보며 강진이 작게 웃었 다.
“그게 문제인데…… 형이 여자 하고 같이 있었다는 것이.”
강진의 말에 최광현이 눈을 찡 그렸다.
“이게 오냐오냐하니 까불어.”
“농담이에요.”
“진담이잖아.”
“ 반은......"
강진이 웃으며 중얼거리자, 임 경호가 웃으며 말했다.
“광현 형이 학기 초에 여자 후
배들 밥 사 주고 다니잖아요. 그 때 만났나 보네요.”
“아!”
임경호의 말에 강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광현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 는 신입생 중 겉도는 애들을 따 로 챙겨 밥을 사 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그리고 밥을 사 주는 건 남자 후배든 여자 후배든 마찬가지였 다. 다만 여자 후배들은 학생회
관 데려가서 학식을 사 주고, 남 자 후배들은 연구실에 데려와 라 면을 끓여 주었다.
여자 후배들과 다니는 최광현이 니 박혜원에게는 좋은 타깃이었 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애가 왜?”
최광현의 물음에 강진이 임경호 를 보았다. 연구실에서 입김은 있지만 그래도 은퇴한 최광현보 다는 임경호가 허락을 해 줘야 하니 말이다.
“그 애가 공부를 하러 인천에서 여기까지 오잖아.”
“저희 보고 공부 좀 봐 달라고 요?”
심리학과답게 바로 묻는 임경호 를 보며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 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데 밖에서 사람들한테 공부 물어 보는 게 안쓰럽잖아.”
강진의 말에 임경호가 옆에 있 는 후배들을 보았다. 그 시선에
강진 역시 후배들을 보았다.
“너희가 좀 도와주면 밖에서 비 맞을 일도 없고.”
“비요‘?”
“여름에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 리면 맞아야지 어떻게 하겠어.”
“학생회관에 들어가면 되잖아 요.”
“당연히 그러면 되지. 다만 갑 자기 소나기가 내리는데 그걸 어 떻게 안 맞고 들어가겠어.”
강진의 말에 후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박혜원의 성격이면 우산도 잘 챙겨 다닐 것이고, 비도 건물 안에 들어가 잘 피할 것이다.
하지만 애들이 측은지심을 가지 도록 비를 맞는다고 말을 한 것 이다.
“공부 오래 가르쳐야 해요?”
임경호의 물음에 강진이 고개를 저었다.
“애가 머리가 좋아서 지금 4학
년인데 중2 진도 나가. 그래서 혼자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 으면 미리 적어 오거든. 그 적어 온 것만 봐 주면 돼. 그리고 머 리가 좋아서 매주 찾아오지는 않 을 거야. 한 이 주에 한 번?”
“그럼…… 괜찮아요. 저희야 일 요일에도 연구실에는 사람 늘 있 으니까요. 저희 공부하면서 좀 알려 주면 되겠죠.”
“오케이. 그럼 몇 시쯤에 오는 게 너희가 편해?”
“술 마시고 할 때도 있으니 점
심 이후가 좋죠.”
임경호의 말에 최광현이 그를 툭 쳤다.
“사람이 정 없게.”
“네?”
임경호가 보자 최광현이 말했 다.
“이왕이면 점심 전에 와서 한 시간 빨리 봐 주고, 애 점심 좀 사 주고 하면 얼마나 좋냐? 강진 이가 너희들 준다고 반찬을 그렇 게 가져다줬는데 정 없게 그럴
거야?”
최광현의 말에 임경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점심은 저희도 사 줄 수 있어 요. 근데 애가 너무 일찍 인천에 서 여기 오면 힘들까 싶어서 넉 넉하게 점심때 오라고 한 거죠.”
“그래‘?”
“그럼요. 저희도 정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어린애가 공 부하겠다고 지하철 타고 여기까 지 온다는데 밥 한 끼 못 人} 주
겠어요? 아니면 여기에서 우리 먹을 때 같이 먹어도 되고요.”
임경호가 웃으며 강진을 보았 다.
“그 애한테 제 전화번호 알려 주세요. 전날에 온다고 문자하면 학교 앞으로 데리러 간다고.”
임경호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학교가 커서 여기 찾아오기 힘 들 텐데요?”
“혼자 길 못 찾을 정도로 어리 숙한 애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 와도 되지?”
“지금요? 오늘 같이 온 거예 요?”
"응."
흐.
“그럼 오라고 하세요. 아니다.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 학생회관 앞에 서성이는 애 찾으면 되겠 죠?”
“아니야. 혼자서도 잘 찾아올 거야.”
한 번은 데리러 가도 되겠지만, 강진은 박혜원이 혼자서 잘 찾아 올 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데리러 가면 박혜원이 부담스러 워할 수도 있고 말이다.
사람들이 잘 해주는 것을 바라 지만, 너무 잘 해 주면 박혜원은 불편해하는 편이니 말이다. 적당 한 호의는 감사히 받지만 너무 큰 호의는 불편해하는 스타일이 었다.
강진은 핸드폰을 꺼내 박혜원에 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박혜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에 강진이 고개를 젓 고는 의자에 앉았다.
“지금 공부 물어보는 중인가 보 네요.”
“확실히 열심히 하나 보네.”
최광현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 공부해서 성공하는 거래 요.”
“성공?”
강진의 말에 최광현이 그를 보 다가 피식 웃었다.
“공부로 성공하는 거야 우리 아 버지 세대 이야기지. 우리 시대 에는 그게 어디 쉽나.”
옛날 다들 못 배우던 시절, 초 등학교만 나와도 학교 나왔네 하 는 시절에나 공부로 성공을 할 가능성이 있지, 요즘 같은 시대 에는 공부로는 성공하기 쉽지 않 았다.
“그건 그렇지만…… 혜원이한테 는 공부가 성공으로 가는 가장
정직한 길인가 봐요.”
강진의 말에 최광현이 그를 보 다가 말했다.
“커피나 한잔하자.”
최광현의 말에 후배 한 명이 일 어났다.
“커피 타 드려요?”
“아니야. 밑에서 오랜만에 자판 기의 여유를 느끼고 싶다. 너희 도 마실래?”
“네!”
후배들이 일제히 답하자, 최광 현이 한숨을 쉬었다.
“너희는 거절이라는 단어를 모 르냐? 그 단어가 얼마나 좋은 뜻 이 담겨 있는지 몰라?”
“거절? 먹는 건가요? 새로 나온 음식 이름이냐?”
임경호가 웃으며 후배들을 보 자, 그중 한 명이 웃으며 쟁반을 챙겼다.
“일단 우리 연구실에서는 선배 가 시키는 건 죽어도 해야 하고,
선배가 주는 건 일단 받으라고 배웠습니다.”
그러고는 후배가 문을 열었다.
“가시죠.”
후배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최 광현을 보았다.
“가시죠.”
“너까지 왜 이러냐?”
“그야 돈 내는 사람이 선 아니 겠습니까?”
강진의 말에 후배가 고개를 끄
덕였다.
“역시 선배님! 나이를 드신 만 큼 현명하십니다. 돈 내는 분이 선이시지요. 어서 가시죠.”
두 사람의 말에 최광현이 고개 를 젓고는 뒷짐을 진 뒤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세나.”
최광현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그 뒤를 따라 연구실을 나섰다. 자판기가 있는 1층으로 향하며 강진이 입맛을 다셨다.
‘여기는 또 어떻게 변하려나?’
임상옥의 연구실은 좀 유쾌하고 잔정이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임상옥은 조금 성격이 무뚝뚝한 면이 있지만, 반대로 최광현은 좀 유쾌하고 잔정이 많은 스타일 이었다.
임상옥의 연구실이지만, 실제 연구실에 오래 있으면서 후배들 을 이끄는 것은 최광현이다 보니 연구실 분위기도 그 성격처럼 흘 러간 것이다.
게다가 최광현이 자신이 마음에 드는 학생들을 위주로 연구실에 데리고 와서 분위기가 그렇게 홀 러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최광현이 왕고를 놓게 되면 이곳 분위기도 조금씩 바뀌게 될 것이다.
아무리 최광현이 자신이 마음에 드는 애들로 연구실을 채웠다고 해도, 작은 차이가 큰 변화를 이 끌어 낼 것이다.
어떻게 변할지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보아온 임경호도 성격이
모질지 않고 최광현과 비슷하니 나쁘게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강진 입장에서는…… 집처 럼 여기던 곳이 변하는 것이니 조금 마음이 이상했다. 강진에게 연구실은 가끔 들러서 쉬어가도 좋은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강진이 문득 최광현을 보았다. 최광현은 자판 기에 천 원짜리를 넣으며 투덜거 리고 있었다.
“요즘은 자판기에도 카드 되던 데……
“학생회관 자판기는 카드 되던 데요?”
“그런데 왜 우리 과 자판기는 안 되는 거야?”
“글쎄요.”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현금 들고 다닌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최광현의 지갑 에는 천 원짜리가 꽤 들어 있었 다.
그의 말대로 요즘은 현금 들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들고
다녀도 만 원이나 오만 원짜리 한두 장 들고 다니지, 천 원짜리 를 이렇게 다섯 장 이상 들고 다 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광현은 천 원짜리를 여러 장 가지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후배들이 음료 사달라고 하면 뽑아 주려고 천 원짜리를 일부러 들고 다니는 것이다.
투덜거리며 지폐를 넣은 최광현 은 후배가 버튼을 누르는 것을 보다가 강진을 보았다.
“너 뭐 마실래?”
강진이 답을 하지 않고 지그시 쳐다보고만 있자 최광현이 물었 다.
“왜 그렇게 봐?”
“형은 참 세심하고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요.”
“후! 내가 좀 그런 사람이기는 하지. 그런데…… 여자들은 그런 걸 몰라. 나처럼 진국인 남자를 말이야.”
작게 고개를 젓는 최광현을 보
며 강진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형이나 나나 참 좋은 남자인데 왜 그럴까요.”
“그러게 말이다.”
두 남자가 고개를 저을 때, 찰 칵 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후배가 웃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여기 두 분의 의문에 대한 답 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의아한 듯 핸드폰 사 진을 보았다. 심각한 얼굴로 이
야기를 하는 두 사람이 찍혀 있 었다.
“이게 답…… 이게? 죽을래?”
말을 하다가 무슨 의미인지 안 최광현이 눈을 찡그리자, 강진 역시 그 후배를 보며 한숨을 쉬 었다.
“매우 죽여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 후배가 웃으며 쟁반에 커피를 올리고는 내밀었 다.
“사과의 음료 서비스입니다.”
후배의 말에 강진이 한숨을 쉬 고는 핸드폰을 쟁반에 놓은 뒤 커피 두 잔을 챙겼다. 연구실 후 배들과는 이 정도 장난은 주고받 올 사이니 말이다.
“그럼 저는 먼저 올라갈게요.”
최광현이 강진과 할 이야기가 더 있다는 것을 눈치챈 후배가 자리를 피해 주자, 강진이 피식 웃었다.
“형 나간다고 애들이 장난치네 요.”
“매일 학교에서 라면에 소주 먹 던 늙다리가 이제 잘 안 온다니 섭섭하겠지.”
최광현은 계단 위를 보다가 피 식 웃었다. 자신도 서운한 만큼 애들도 서운할 것이다. 그러니 애들이 평소보다 농을 더 하는 것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