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2화
밤이 되어 저승식당이 된 바다 식당 안에는 많은 귀신들이 앉아 서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서울과 부산이라는 지역의 차이 는 있지만, 저승식당의 시스템은 다르지 않았다.
귀신 손님들이 오면 음식과 술 을 제공하고, 손님들은 맛있게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저승식당 사장들은 귀신들과 어
울려서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시 는 것이다.
홀에서는 한끼식당 식구들이 부 산 귀신들과 섞여서 이야기를 나 누고 술을 먹고 있었다.
“하하하!”
“아가씨가 무척 재밌네.”
“한 잔 받아.”
부산에 여행 온 기분에다 새로 만난 귀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니 한끼식당 식구들도 흥이 돋는 듯 큰 목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홀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는 귀 신들을 보던 강진이 윤복환에게 소주를 따랐다.
쪼르륵!
“여기도 무척 화기애애하네요.”
강진의 말에 윤복환이 웃으며 식당 손님들을 보다가 말했다.
“화기애애를 넘어서 많이 소란 스럽지.”
윤복환이 강진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부산 사람들이 목소리가 크고 거친 면이 있지만 잔정이 많지. 부산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다 ‘화를 내는 건가?’ 싶을 때 너무 기분 상하지 말게나. 그냥 목소 리가 큰 거지, 화를 낸 것이 아 니라 그냥 말을 한 것일 수 있으 니.”
윤복환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앞에는 소 윤이 혼자 앉아 안주도 없이 소 주를 마시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소 주를 마시며 창밖을 보고 있는 소윤…….
그런 그에게서 귀신들은 조금 떨어져 앉은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소윤이 북한군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귀신이라고 해도 한국 귀신들은 그가 조금 불편한 것이 다.
남한 사람에게 북한 사람은 아 주 가깝고도 먼 존재이니 말이 다. 그리고 그건 귀신들도 마찬
가지였다.
귀신이라고 해도 그들의 사고방 식은 산 사람의 것과 같았다.
그리고 소윤도 딱히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혼자 있고 싶은 듯 바다를 보며 편지를 보고 있었 다.
그런 소윤을 보던 강진이 마른 멸치를 접시에 담고는 그에게 다 가갔다.
빈 잔에 소주를 따라준 강진은 소윤처럼 창가에 엉덩이를 대고
는 앉았다. 그러고는 소윤처럼 말없이 바다를 보았다.
그렇게 잠시 있자, 소윤이 소주 를 마시고는 마른 멸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한참 말없이 소주를 마시며 바 다를 보던 소윤이 옆에 있는 식 탁에서 편지 하나를 집었다.
“이게 휴전 후에 아내가 처음으 로 쓴 편지입니다.”
강진이 보자 소윤이 쓰게 웃으 며 말했다.
“여기에는 제 걱정이 쓰여 있더 군요.”
소윤이 편지를 보며 말을 이었 다.
“혹시 이 편지를 보면 마을에 들어오지 말고 있는 곳을 적어서 남기라는군요. 그럼 자기가 찾아 가겠다고요. 이걸 남길 때 아내 는 제가 탈영을 하든 뭘 하든 해 서라도 가족이 있는 부산으로 돌 아올 거라 생각을 했나 봅니다.”
소윤은 들고 있던 편지를 내려 놓고는 다른 봉투를 들었다.
“이건 마을을 떠날 때 남긴 편 지입니다. 마을에서 살기 힘들 것 같고, 대현이 앞날을 생각해 서 대전으로 이사를 간다는 내용 이었습니다. 대전에 자신의 친척 이 살고 있으니 그쪽으로 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봉투 안 에 돈이 들어 있더군요. 그때 이 돈이면 쌀을 한 가마니는 살 수 있었을 텐데. 타지 가서 살려면 돈도 필요할 텐데 너무 큰돈을 넣어 뒀어요.”
소윤은 들고 있던 봉투에서 편
지를 꺼내 마지막 장의 마지므I 문구를 보여주었다.
〈당신 혼자서도 잘 할 걸 알지 만 밥은 굶고 다니지 말아요.
굶으면 배고파요.〉
“굶으면 배고프다. 당연한 이야 기인데…… 아내는 그게 가장 걱 정이었나 봅니다.”
“사람한텐 먹는 게 가장 중요하
니까요.”
강진의 말에 소윤이 고개를 끄 덕이며 다른 봉투를 꺼냈다.
“이건 제……
소윤이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다 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제 아내가 남긴 마지므]' 편지입 니다.”
강진이 보자 소윤이 잠시 편지 를 만지작거리다가 나지막한 목 소리로 내용을 읽었다.
“당신에게 그동안 많은 편지를 썼어요.”
〈대현 아빠에게.
당신에게 그동안 많은 편지를 썼어요. 참 많은 편지를 썼는 데…… 편지는 여전히 당산나무 밑에서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제 손을 타고 있네요.
그리고…… 아마 이 편지도 당 신의 손에 전달이 되지 못하겠 죠. 저도 이제 나이를 많이 먹어
서 아마 이게 제가 당신에게 보 내는 마지므I 편지일 것 같아요.
당신을 참 오래 기다린 것 같은 데…… 지금 이 편지를 쓰면서 생각을 하니…….>
아내가 쓴 편지 내용을 말을 하 던 소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가 본 편지에는 군데군데 잉크가 번진 자국이 있었다.
그걸 보니, 눈물을 흘리며 볼펜 을 꾹꾹 눌러서 글을 썼을 아내
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시 말을 하지 않던 소윤이 입 을 열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면서 생각을 하니, 내가 당신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오래 기 다리게 만든 것 같아요. 대현 아 빠…… 나만 당신을 기다렸을 거 라 생각을 했는데, 당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미안해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 을 기다리게 했지만, 나 대현이 정말 열심히 잘 키웠어요. 그러
니 내가 너무 늦게 왔다고 나한 테 타박하고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
나는 당신 살아 있을 때, 늘 기 다리는 역할만 했잖아요. 독립운 동을 한다고 집에 안 들어오는 당신을 늘 기다린 것이 저잖아 요.
그러니 나 만나면 꼬옥 안아줘 요. 어서 와요. 잘 왔어요. 그렇 게 반겨 줘야 해요.
당신에게 붙이지 못한 이 편지 들 제가 당신 보러 갈 때 꼭 가 지고 갈게요. 그때는 이 편지 보 면서 우리 대현이가 어떻게 컸는 지 제가 잘 이야기해 줄게요.
그때는 우리 그동안 못 한 이야 기 많이 하고, 같이 있지 못한 시간만큼 많이 보내기로 해요.〉
“당신의 처, 정……은……자.”
아내의 이름을 한 글자씩 천천 히 말하는 소윤의 모습에 강진이
그를 보다가 말했다.
“사모님께서 소윤 씨를 기다리 시네요.”
강진의 말에 소윤이 멍하니 편 지를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를…… 처음 본 건 혼례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소 윤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 고…….
화아악!
소윤의 모습이 변했다.
북한군 군복을 입은 중년인에서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잘생긴 청 년…… 이제 열여덟, 열아홉이나 될까 한 어린 학생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많이 부끄러워했습니다. 그 모 습이 어여쁘더군요.”
자신의 모습이 변한지도 모르고 미소를 짓는 소윤의 모습에 강진 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신부는 혼례 때 가장 아
름답죠.”
강진의 말에 잠시 미소를 짓던 소윤은 이내 씁쓸한 얼굴로 고개 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아내를 많이 기다리게 했 습니다. 독립운동을 한다고 신혼 때부터 기다리게 하고, 그 후에 는 제가 만주로 가면서 기다리게 하고, 이제는…… 이렇게 또 기 다리게 했습니다.”
소윤이 한숨을 쉬며 편지를 가 만히 보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한테 미안 해하네요. 자신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고……
소윤은 한숨을 쉬며 편지를 보 다가 쓰게 웃었다.
“저처럼 죄 많은 인간에게는 정 말 어울리지 않는 감사한 사람입 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한 사람입니다.”
편지를 쓰다듬던 소윤이 바다를 보았다.
“그러니 더는 기다리게 하고 싶
지 않습니다. 아니, 않으렵니다.”
웃으며 소윤이 자리에서 일어났 다.
“살아서도 나를 기다리고, 지금 은 저기 위에서도 저를 기다리는 그녀에게 너무 미안해서 더는 여 기 못 있겠습니다.”
소윤이 재차 입을 열려고 할 때, 강진이 웃으며 손을 혼들었 다.
“잘 가세요.”
인사도 하지 말고 어서 가라고
강진이 손을 먼저 흔들자 소윤이 그를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복립이에게 초콜릿은 정말 구 하기 힘들었다고 전해 주십시 오.”
말을 하며 소윤은 해맑게 웃었 다. 어린 학생이 정말 보기 좋은 미소를 짓는다 생각을 할 때, 윤 복환에게 고개를 숙이는 소윤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 다.
화아악!
그리고…….
툭! 툭!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편지가 바 닥으로 떨어졌다.
“ 가셨군.”
“가셨네요.”
“힘든 시기를 겪으신 분이니 좋 은 곳으로 가시겠지.”
윤복환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떨어진 편지 를 들어 식탁에 놓았다.
* * *
JS 금융에서 서류를 모두 작성 을 한 소윤은 JS 편의점에서 저 승에서 필요하다는 물건들을 구 입하고 있었다. 그런 소윤의 옆 에는 오에서 붙여 준 쇼핑 도우 미가 있었다.
소윤이 VIP라 JS 금융에서 쇼핑 도우미도 붙여 준 것이다.
“우리 고객님께서는…… 일단
한빙지옥이 좀 걸리시네요. 그러 니 내복을 좀 사시면 될 것 같습 니다.”
“한빙지옥이면 효도를 못 한 사 람들이 가는 곳 아닙니까?”
“지옥에 대해 좀 아시는군요.”
“저희 집이 불교를 믿습니다.”
소윤의 말에 쇼핑 도우미가 웃 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객님 걱정을 부모님께서 많 이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집에 자주 없던 것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그러니 불효 중에 이런 불효가 없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 오. 고객님 등급이면 JS 최고의 변호사가 저승에서 대기하고 있 을 겁니다.”
도우미의 말에 소윤이 쓰게 웃 었다.
“죄를 지었으니 죗값을 받으면
됩니다.”
“그거야 저승 가서 변호사님하 고 상담하시면 되시고…… 일단 다른 지옥들은 걸리지 않으실 것 같으니 내복만 사시면 될 것 같 습니다.”
도우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소윤이 문득 선반에 있는 초콜릿 을 보고는 미소를 짓다가 말했 다.
“이것 좀 사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도우미의 말에 소윤이 초콜릿을 몇 개 집다가 웃으며 아예 상자 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많이 사시게요?”
“줄 사람이 있습니다.”
소윤이 내복과 초콜릿 계산을 하자, 도우미가 말했다.
“그럼 바로 비행장으로 가시 죠.”
“비행장요?”
“비행기가 안전하고 빨리 도착
합니다.”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비행장에 도착한 소윤은 곧 전세기 같은 작은 비행기 앞에 도착할 수 있 었다.
“사진이나 TV에서는 비행기가 무척 크던데?”
소윤이 작은 비행기를 보며 묻 자, 도우미가 웃었다.
“그렇게 큰 비행기에 VIP를 모 두 태우려면 오래 걸려서요. 요 즘은 전세기를 사용하고 있습니
다. 이게 기름값은 싸게 들어서 요.”
도우미는 두 손을 공손하게 모 으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승에서 수고하셨습니다.”
도우미의 말에 소윤이 그를 보 다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소윤이 비행기에 오르고 얼마 뒤, 비행기가 하늘을 향해 날아 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탄 비행기에 서 내린 소윤은 자신에게 다가오 는 고급 승용차를 볼 수 있었다.
덜컥!
운전석에서 하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소윤 고객님 맞으십니까?”
“네? 네.”
소윤의 답에 남자가 주머니에서 은으로 된 케이스를 꺼내고는 그
안에 들어있던 명함을 내밀었다.
“이번에 고객님의 변호를 맡게 된 신수호 변호사입니다.”
“아......" 네.”
소윤이 명함을 보는 人}이, 신수 호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여기 사인을 해 주시겠습니 까?”
“이건 뭔가요?”
“재판을 저에게 맡긴다는 변호 계약서, 그리고 이건 저승 입국
에 필요한 서류들, 그리고 이건 재판 기간 동안 이용하실 지옥 여행 패키지 계약서입니다.”
“지옥 여행 패키지?”
지옥을 다니는 것을 여행이라 표현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