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7화
임정숙이 서둘러 들어오는 것에 강진이 음식들을 쟁반에 담다가 그녀를 보았다.
“첫사랑이었어요?”
홀에서 나눈 대화를 들은 것이 다. 강진의 말에 임정숙이 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런 말 하지 말 아요.”
임정숙의 말에 배용수가 웃으며 말했다.
“정숙 씨가 학교 다닐 때 인기 가 많았나 보네요.”
“그러게. 중학생일 때 고백도 받고. 너는 그런 적 있었냐?”
“뭐? 받은 거? 주는 거?”
“받은 거야 당연히 없을 테고 주는 거지.”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배용수를 보며 강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받으면 좋겠지만 주는 것도 좋잖아. 그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거니까.”
강진의 말에 배용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러네. 중학생이면 한 창 사춘기라 부끄러울 나이인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사탕 주려고 찾아가다니 말이야.”
“그 나이 대에는 정말 대단한 용기를 낸 거지.”
강진의 말에 배용수가 웃었다.
“아마 며칠 동안은 잠도 못 잤 을 거다.”
“잠만 못 잤겠어? 디데이 맞춰 서 내가 가진 옷 중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제일 좋은 신발을 신 고…… 머리도 몇 번 왁스를 바 르다가 감기를 반복하면서 다시 세팅했을 거야.”
“그리고……
강진의 말을 받아 배용수가 또 뭐라고 하려고 하자, 강선영이 웃으며 나섰다.
“그만 좀 하세요. 정숙이 울 것 같잖아요.”
강선영의 말에 강진이 임정숙을 보았다. 임정숙은 정말 울 것 같 은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 다. 그에 강진이 웃으며 말했다.
“부러워서 그래요. 부러워서.”
“그렇지. 우리는 고백을 하는 쪽이었지, 고백을 받는 쪽이 아 니었으니까요.”
웃으며 말을 하는 둘을 보며 고 개를 저은 강선영이 말했다.
“인기 많은 여자들은 어디 가서 도 남자들이 귀찮게 하는 법이 지. 이 언니도 그런 경우 많았 어. 그런 건 자부심을 가져야지,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래도 부끄러워요.”
임정숙의 말에 배용수가 웃으며 쟁반에 국그릇을 올렸다.
“자! 정숙 씨가 열심히 끓인 회 심의 가자미 미역국입니다.”
쟁반 위에 올라간 가자미 미역 국은 사골 육수처럼 뽀얗고 진한
국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가자미 한 토막이 올라 가 있었다.
“정말 맛있게 잘 끓이셨어요.”
배용수의 말에 임정숙이 언제 침울했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말요?”
“그럼요. 이따가 저승식당 오픈 하면 저도 먹어 봐야겠어요.”
지금은 귀신 상태라 맛을 봐도 잘 모르니 말이다.
“가지고 가.”
배용수의 말에 쟁반을 들고 홀 로 나간 강진이 웃으며 음식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오늘 음식입니다.”
강진의 말에 강상식이 쟁반에 있는 음식들을 받아 놓다가 가자 미 미역국을 보고는 웃었다.
“가자미 미역국이네.”
“아세요?’’
서울에서는 보통 물고기를 넣어
서 미역국을 끓이지 않아 가자미 미역국은 생소할 터였다.
강진이 보자, 강상식이 웃으며 말했다.
“부산에 출장 가서 해장으로 먹 어 봤어.”
그러고는 강상식이 임형근 부부 를 보았다.
“육수가 진해서 해장에 좋더라 고요.”
강상식의 말에 임형근이 웃으며 말했다.
“가자미 미역국이 몸에 아주 좋 아요. 해장에도 좋고 여자 애 낳 고 젖 안 돌 때 먹어도 좋고.”
임형근이 미역국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애도 이걸 참 좋아했어. 서울에서는 먹기 힘들다고 했었 는데 이걸 여기서 보네.”
임형근의 말에 진세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숟가락을 들어 국물 을 먹었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 했다.
“맛있어.”
진세영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말했다.
“정숙이가 어머니 표 조리법을 알려 줘서 그대로 끓였는데 입에 맞으셔서 다행이네요.”
“정숙이가 알려줬어?”
“정숙이가 한 번 끓여줬는데 맛 있어서 용수가 배웠어요.”
강진의 말에 진세영이 웃으며 국물을 한 번 떠 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숙이가 잘 가르쳐 줬나 보 네. 확실히 우리 집에서 먹던 미 역국 맛이야.”
진세영의 말에 임형근도 미역국 을 떠 먹고는 웃으며 말했다.
“정숙이가 우리 생일에 해 주던 맛이야.”
“그러게. 정말 정숙이가 용수 씨한테 잘 가르쳤나 봐.”
두 사람의 말에 배용수가 주방 에서 나오며 말했다.
“당연하죠. 정숙 씨가 직접 끓
인 거니 그 맛이 그대로 나는 거 죠.”
가자미 미역국을 숟가락으로 스 윽스윽 젓던 진세영이 미소를 지 었다. 딸이 끓인 것 같은 가자미 미역국을 먹으니 딸 생각이 났 다.
아니…… 늘 딸 생각은 계속 났 다. 다만 오늘 조금 더 딸이 가 까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후루룩! 후루룩!
진세영이 국물을 마시자 임형근
도 미역국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강진도 의자를 하나 끌어 다가 옆에 앉았다.
‘가자미 미역국이라……
사실 가자미 미역국 같이 생선 이 들어간 미역국은 강진에게 생 소했다.
경상도 여자와 전라도 남자가 결혼을 한 드라마에서 본 적도 있고, 다큐에서도 본 적이 있었 다.
다만 직접 먹어 볼 기회가 드물
다 보니 익숙한 음식이 아니었 다.
강진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먹었다.
‘맛있네. 비리지도 않고.’
생선이 들어가서 비릴 것 같았 는데 전혀 그런 맛이 아니었다.
‘하긴. 비리면 사람들이 먹지 않 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미역국을 후 루룩 먹을 때 진세영이 입을 열 었다.
“우리 집이 제사를 지내.”
진세영의 말에 사람들이 그녀를 보았다.
“제사상 차리는 건 참 힘들어.”
“그렇죠. 명절을 또 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명절과 음식 종류는 조금 다르 지만 음식을 많이 한다는 건 비 슷했다.
친척들이라도 많은 집은 그들 먹을 음식까지 해야 하니 명절하 고 비슷한 품이 들어가야 했다.
“힘들기는 해도 전통이고 집에 서 하는 행사니까 그냥 했어. 그 리고 제사 지내는 거 모르고 시 집 간 것도 아니니까.”
미역국을 수저로 저으며 진세영 이 말을 이었다.
“우리 딸 실종되고…… 조상님 들한테 기도하려고 제사상을 차 렸어.”
“제사상을요?”
“뭐라도 해야 했어. 그렇지 않 으면 미칠 것 같았거든. 그동안
받아먹은 것이 있으면 제발 조상 님들이라도 우리 정숙이 꼭 좀 찾아주라고, 무사하게 보호해 달 라고…… 그런 마음으로 제사상 을 차렸어. 그때 정말 정성껏 음 식을 했어.”
진세영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 이다. 딸이 실종이 됐는데 제사 상을 차리다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절박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기도 한다.
병을 낫게 하겠다고 부적 태운 물을 먹는 사람도 있는데…… 평 소라면 그들도 ‘무슨 그런 짓을 해?’라고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절박하니 그런 거라도 해 보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 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니 말이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진세영은 제사상을 차린 것이다. 조상님들 이라도 제발 딸을 보호해 주기를 바 라면서..
“그런데…… 우리 딸…… 내 딸 이…… 돌아왔어.”
진세영이 한숨을 쉬며 눈가를 손으로 닦자, 황민성이 급히 티 슈를 뽑아 내밀었다. 그에 티슈 로 눈가를 마저 닦은 진세영이 미역국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 딸이 그렇게 돌아와 서…… 화가 났어.”
“그럴 테죠.”
“우리 딸…… 예쁜 내 딸을 도 와주지도 않는 조상들이 무슨 소 용인가 싶었어. 고모들하고 친척 어른들한테도 우리는 앞으로 제 자 안 지내니 제삿날에 우리 집
에 오지 말라고 했어.”
진세영의 말에 임형근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런 남편의 손을 맞잡은 진세영이 한숨을 쉬며 말 했다.
“고모들이 알았다고, 앞으로 제 사 걱정하지 말라면서 자기들이 하겠다고 제기를 가져갔어.”
“잘 하셨어요.”
강진의 말에 진세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있다가 말을 했 다.
“그렇게 있다가 어느 날…… 제 삿날이더라고.”
진세영이 미역국을 한 모금 떠 마셨다.
멍하니 달력을 보는 진세영에게 임형근이 다가왔다.
- 뭐해?
임형근이 걱정스럽게 보는 것에 진세영이 달력을 보다가 말했다.
-내일이 제사네.
진세영의 말에 임형근이 달력을 보았다. 달력에는 내일 날짜에 동그랗게 원이 그려져 있고 제사 라고 적혀 있었다.
-신경 쓰지 마. 동생들이 한다 고 했잖아.
임형근의 말에 진세영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 히 달력에 고정이 돼 있었다.
-준비는 잘 하고 있대?
-준비?
-고모들 제사 싫다고 제사 안
지내는 곳으로 시집갔잖아.
-그 애들이 직접 제사 차린 적 은 없어도 엄마 하는 거 보고 음 식 준비도 많이 해서 알아서 잘 할 거야. 당신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신경 끊으라고 말을 하고는 임 형근이 달력에 손을 가져다 댔 다. 아직 날짜가 남아 있기는 하 지만 달력을 뜯어 버리려는 것이 다.
그런 임형근을 보던 진세영이 말했다.
-아직 날짜 남았어. 그냥 둬.
-그럼 그럴까?
최대한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남편을 보던 진세영이 달력을 보았다.
제삿날에 그려진 동그라미를 보 던 진세영이 입을 열었다.
-시장 가자.
- 시장?
—응.
-그래.
딸 죽고 늘 집에서 멍하니 있던 아내가 먼저 나가자고 하자 임형 근이 급히 옷을 챙겨 나오며 말 했다.
-시장 갔다 오는 길에 모처럼 외식 할까?
-아니야. 오늘 바빠.
—바빠? 뭐 하게?
진세영이 답 없이 작게 고개를 젓고는 집을 나서자, 임형근이 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시장에서 물건을 가득 사서 들
어온 진세영은 그것을 정리하고 씻고 자르고 음식을 만들었다.
갑자기 음식을 만들어 대는 진 세영이 걱정이 됐지만 임형근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저 그 녀가 하라는 대로 재료를 다듬었 다.
왜인지 몰라도 음식을 하는 아 내의 얼굴이 밝아 보였기 때문이 었다.
가끔…… 아니, 자주 티슈로 눈 을 닦기는 했지만 그래도 뭐라도 하려고 움직이는 것이 고맙고 감
사했다.
딸 떠났는데…… 아내까지 따라 가겠다고 할까 봐 그동안 너무 무서웠으니 말이다. 그래서 뭐라 도 집중해서 만드는 아내가 고맙 고 감사했다.
그렇게 점심에 시작을 한 음식 들은 저녁이 될 때까지 이어졌 다.
시간이 흐르면서 임형근은 의아 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재료들만 있어서 잘 몰랐는데 하다 보 니…… 모두 제사 음식들이었다.
그에 임형근이 한숨을 쉬며 진 세영을 보았다.
-제사 음식을 한 거야?
- 응.
-뭐 하러 했어. 애들이 알아서 한다고 했는데. 신경 쓰지 마.
임형근의 말에 진세영이 버무리 던 잡채를 보다가 말했다.
-제삿날에…… 온다잖아.
-누가? 친척들?
임형근이 의아한 듯 그녀를 보
았다. 지금 집 사정 모르는 사람 이 없는데 누가 감히 제사를 하 겠다고 이곳에 온다는 말인가?
말 그대로 ‘감히’였다. 어른이고 뭐고 도리 따지면서 제사는 아들 이 지내야 한다고 오면 들이박을 것이다.
말없이 잡채를 보던 진세영이 고개를 돌렸다. 진세영이 바라보 는 곳은 임정숙의 방이었다.
임정숙의 방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늘 방문을 열어두고 있었
던 것이다.
화창한 날은 창문을 활짝 열어 햇살이 들어오게 했고, 바람 부 는 날에는 문고리에 줄을 달아서 의자에 달아 놨다. 바람에 문이 닫히지 않게 말이다.
그렇게 늘 방문은 열려 있었다. 그래서 방 안이 보였다. 주인 없 는 방은 주인이 웃으며 집을 나 갈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딸이 밥 먹으러 올 수 있잖아.
진세영의 말에 임형근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숙이…… 먹일 밥……이었 어?
- 응.
진세영이 어깨를 움직여 눈가를 닦고는 잡채를 비비며 말했다.
-우리 딸…… 배고플 거야. 그 동안 제사상 한 번도 못 받았잖 아. 그러니까 정말 맛있게 해 줘 야 해.
진세영의 말에 임형근이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 앞 에서 눈물을 줄줄 흘릴 것 같았 다.
-하아!
심장이 입을 통해 나올 것처럼 임형근은 길고 길게 숨을 토했 다.
자신의 아내는 평생 차리지 말 아야 할…… 딸의 제사상을 차리 고 있었다.
긴 한숨을 연거푸 토해낸 임형 근이 손으로 눈가를 닦았다. 동
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딸이 배고플 거라는 생각을 차 마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것 과……
‘우리 정숙이 죽은 날도 모르는 구나.’
제사는 기일에 한다. 고인이 된 날에 제사상을 차리는 것이다.
하지만…… 딸이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는 임형근도 진세영도 몰랐다. 그러니…… 제사를 제대 로 할 수도 없었다.
잠시 있던 임형근이 볼펜을 꺼 내 달력에 다가갔다. 그러고는 오늘 날짜에 하트를 그려 넣었 다.
하트가 그려진 달력을 보며 임 형근이 잠시 머뭇거렸다.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몰랐다. 딸 제삿날 이라고 적기도 이상하고…….
스윽!
고민하는 임형근의 옆에 다가온 진세영이 그가 쥐고 있던 볼펜을 빼내더니 달력에 글을 적었다.
〈우리 딸 집 오는 날〉
달력에 글을 적은 진세영이 잠 시 글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오늘이 우리 정숙이 집에 오는 날이야.
-그래. 앞으로 매년 오늘엔 정 숙이 기다리자. 그리고 맛있는 거 많이 해서 우리 정숙이 배고 프지 않게 해 주자.
임형근의 말에 진세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달력에 그려진 하트 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엄마가…… 제삿날만 되면 며 칠 동안 머리도 아프고 스트레스 가 있었는데, 우리 딸 오는 날은 며칠 동안 오늘만 기다리고 즐거 울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딸 오늘 되면 꼭 잊지 말고 집에 왔다 가야 해. 엄마가 우리 딸 좋아하는 거 정말 많이 해 놓고 기다릴게.
진세영이 달력을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정말 너 많이 보고 싶 고 사랑한다. 정말…… 많이 사 랑해. 그러니까 꼭 와서 밥 많이 먹고 가야 해. 알았지?
진세영이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바탕화면에 환하게 웃고 있는 임정숙의 얼굴을 보며 진세 영이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우리 딸 좋아하는 걸 로 많이 해 놓을게. 꼭 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