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화
노트에 적힌 글을 읽은 오태산 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 다.
‘송화…… 글씨인데?’
묘하게 채송화를 떠올리게 하는 글씨체였다. 게다가 말투 역시 채송화가 자주 쓰던 말투였다.
노트를 보던 오태산이 슬며시 말했다.
“저 이 노트 좀 봐도 될까요?”
“그 노트……
강진이 눈을 찡그리고는 채송화 를 보았다.
혹시라도 노트에 채송화 이름이 나 귀신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으면 난감했다.
강진의 시선에 배용수가 그 의 미를 눈치채고는 빠르게 말했다.
“노트에 혹시 송화 씨 이름이나 귀신에 관한 내용 있어요? 아니 면 저승식당이나.”
배용수가 자신의 마음을 바로 읽은 것에 강진이 흐뭇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짜식! 역시 내 마누라!’
눈빛만 보고도 마음이 통하다 니…….
강진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채 송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나 필요한 거나 잡담만 있고 내 이름이나 귀신 이야기는 안 적었어.”
채송화의 말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음료를 들고 오태산 에게 다가갔다.
“보세요.”
강진의 말에 오태산이 슬며시 노트를 들어서는 글을 보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밥은? 밥도 안 먹었어?
내가 사 오라고 한 건? 알았어. 저녁에 TV 소리 줄일게.
심심한 걸 어떻게 해!〉
노트에 적혀 있는 글을 보던 오 태산이 강진을 보았다.
“여기 형님이 여자친구하고 같 이 사시나 보네요.”
“아니야. 아니야. 여자친구는 무 슨. 그냥 같은 공간을 같이 쓰는 것뿐이야. 광현이하고 나하고 그 런 사이 아니야.”
채송화가 급히 부인을 했다. 하 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오태산은 들을 수 없었다.
둘을 번갈아본 강진이 웃으며 오태산을 보았다.
“여자친구가 가끔 오기는 하세 요.”
“여자친구 아니라니까! 너 왜 그래!“
채송화의 말에 배용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너라고 이야기하리?”
“그건…… 아니지.”
“그냥 보고 있어. 우리 강진이
가 거짓말을 참 잘해.”
“그런 것 같아.”
두 귀신의 말에 강진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하는 거짓말은 하얀 거짓 말이다, 이것들아.’
속으로 중얼거린 강진이 오태산 에게 음료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오태산은 음료를 서랍장 위에 놓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노트를
넘겼다.
“그냥 별 내용 없는데……
“여기 사시는 분 여자친구분께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여기 적혀 있는 글들이 제 여자친구 말투하고 참 비슷해요.”
“그래요?”
“네. 그리고 필체도 정말 우리 송화가 쓴 것 같아요.”
오태산이 웃으며 노트에 적힌 글자를 가리켰다.
“우리 송화 글씨가 좀 둥글둥글 했거든요.”
오태산의 말에 강진이 글씨를 보았다. 채송화의 글씨는 확실히 동글동글했다.
“송화 씨는 어떤 분이셨어요?”
“우리 송화요?”
“네.”
강진의 물음에 오태산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송화는 장미 같았어요.”
“장미요?”
“내가 좀 장미처럼 예뻤지.”
채송화의 말에 강진이 오태산을 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오태 산이 입을 열었다.
“송화는 가시가 박힌 장미 같았 어요.”
“아…… 가시.”
가시라는 말에 강진과 배용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채송화를 보았 다.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장미라면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드는데, 가 시 박힌 장미라고 하면 이해가 되었다.
채송화의 말투나 행동 등등을 생각하면 확실히 가시 돋친 장미 와 어울리기는 했다.
생전의 모습을 보지 못해서 얼 마나 예뻤을지는 모르겠지만 말 투는 확실히 뾰족했으니 말이다.
강진과 배용수가 고개를 끄덕이 는 것에 채송화가 눈을 찡그렸 다.
“내가 가시라는 거야?”
채송화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말했다.
“가시처럼 뾰족한 분이셨나 보 네요.”
“속은 정도 많고 한데 사람을 대할 때 조금 그런 면이 있었어 요.”
오태산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 었다.
“친해지고 하면 따스한 모습을 보이는데 처음인 사람들에게는
일부러 거리감을 두려는지 그렇 게 대하더라고요.”
“왜요?”
“그게......"
“말하지 마!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채송화의 다급한 목소리에 강진 과 배용수가 그녀를 힐끗 보았 다.
둘이 채송화를 볼 때, 오태산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송화가 저만 알라고 해서 말을 하면 안 되겠네요.”
“약속을 하셨군요.”
“우리 송화 지금은 저승에 있지 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까요.”
오태산의 말에 채송화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내가 죽었어도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잘 했어, 우리 태산이.”
채송화가 오태산의 머리를 쓰다
듬어 주었다. 그 순간, 오태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그러세요?”
“좀 시원한 것 같아서요. 어디 바람이 부나?”
오태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에 강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연애를 하게 되 신 거예요?”
강진의 물음에 오태산이 웃으며 잠시 허공을 보다가 말했다.
“제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송화가 신입으로 들어왔 어요.”
“아, 그럼 태산 씨가 선배였네 요.”
“그렇죠. ……음, 사실 처음에는 송화가 되게 싫었어요.”
“그래요?”
“그랬어?”
강진과 채송화가 놀란 눈으로 오태산을 보았다.
“그런데 왜 고백을 했어? 네가 먼저 고백했잖아.”
채송화가 황당해하는 人}이, 강 진이 말했다.
“그래서요?”
강진의 말에 오태산이 노트에 적힌 글을 읽으며 말했다.
“제가 어리기는 해도 선배라 송 화 일 가르쳤거든요. 송화가 일 은 잘 했는데…… 옆을 안 주더 라고요. 일적인 대화는 받아 주 는데 사적으로 ‘누나, 일 끝나고
뭐해요? 사장님이 저녁밥 사 준 다는데 뭐 먹을래요.’ 이런 말을 하면 차갑게 밀어내더라고요. 그 래서 성격 참 이상하다 생각을 했어요.”
“그럼 왜 나한테 고백을 했어?”
채송화가 눈을 찡그리며 하는 말에 강진도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귀시게 된 거 예요?”
채송화는 오태산을 지그시 쳐다 보았다. 오태산에게 생전에도 이
런 걸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냥 네가 너무 예뻐서.
이런 답이 돌아오곤 했었다. 그 런데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는 뭐라고 할지 궁금한 것이다.
채송화의 시선을 받으며 오태산 이 웃으며 말했다.
“하루는 사장님이 누나한테 뭐
라고 했어요. 손님한테 좀 친절 하고 부드럽게 대하라고요.”
“커피숍이면 그럴 수 있죠.”
“그리고 사장님 나갔는데, 누나 가 혼자 울더라고요.”
“울어요?”
“말없이 그냥 설거지하면서 눈 물만 흘리는데 그게 마음에 걸리 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더 친절 하게 대하고 하다 보니…… 마음 이 갔어요.”
말을 하던 오태산이 고개를 저
었다.
“그리고 가까이 갈 때마다 가시 를 세우는 것이 귀엽더라고요. 속은 약한 사람이 겉으로는 강한 척하는 것 같고.”
“무, 무슨 소리야! 나 그런 사 람 아니거든?”
“그래서 더 마음이 갔어요. 이 마음 약한 여자 지켜주고 싶고, 아껴 주고 싶고. 그래서 고백했 어요.
“안 받아 줬을 것 같은데?”
채송화의 성격상 안 받아줬을 확률이 컸다.
“맞아요. 안 받아줬어요.”
오태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 번인가 연속으로 차이고 네 번째에 다시 말을 했어요. 너무 좋아한다고. 그리고 그때 송화가 받아 줬어요. 송화가 고백을 받 아 주고 사귀기로 했을 때 정말 기뻤어요.”
미소를 지으며 노트를 보던 오 태산이 손으로 글을 가리켰다.
“우리 송화도 이런 말투를 많이 썼는데.”
오태산의 말에 강진이 글을 보 았다.
〈뭐래는 거야. 진짜 웃긴다.〉
“제가 정말 잘못하고 있다는 것 을 알아요.”
“네?”
강진이 의아한 듯 오태산을 보
았다.
그가 뭐가 잘못하고 있다는 건 지 의아해하던 강진은 채송화를 보았다.
‘혹시 송화 씨 살던 곳에 자주 오는 것을 말하나? 하긴……
죽은 여자친구를 잊지 못하고 계속 여기를 찾아오는 건 오태산 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문제가 될 것이다.
새로운 사랑을 할 때에도 걸릴 것이고…….
“이거 여기 사시는 형님 여자친 구가 형님에게 쓴 이야기인데, 제가 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아……
오태산의 말에 강진이 그를 보 았다. 자신의 생각이 틀린 모양 이었다.
‘하긴. 그 말도 맞네.’
실제는 채송화가 쓴 거지만, 최 광현의 여자친구가 적은 걸로 말 을 바꿨으니 말이다.
남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행
동이었다.
“보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정말 여기 사는 형님과 여자친구분께 죄송한데…… 계속 보고 싶네 요.”
“여자친구분이 글 쓰는 걸 좋아 해서 가끔은 이렇게 노트에 글을 적어서 보여줘요. 대부분 별다른 의미 없는 내용들이니 그냥 보 셔도 됩니다.”
“그래요?”
“가끔 형도 저한테 보라고 하거
든요. 그 대학 때 동아리방에서 돌려서 보는 롤링 페이퍼 있잖아 요.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최광 현이 채송화가 자기 괴롭힌다고 노트를 보여 준 적도 있으니 말 이다.
강진의 말에 오태산이 그를 보 다가 슬며시 말했다.
“그럼 좀 읽겠습니다.”
보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송화 글씨체에 송화 말투를 보니 내용
을 더 읽고 싶었다.
글을 보던 오태산이 미소를 지 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뭐 했어?”
작게 중얼거린 오태산이 글을 보았다.
〈뭐 하기는. 그냥 있었지. 왜 이렇게 늦게 와?〉
글을 읽는 순간,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바빠서 그랬어.”
〈나는 한가하다 이거야?〉
“그런 건 아닌데. 왜, 나 기다렸 어?”
〈기다리기는. 그냥 늦게 와서 좀 그랬지.〉
“다음에는 일찍 올게.”
오태산은 마치 연극 대본을 읽 는 사람처럼 말을 했다. 자신의 대사를 치고 상대의 대사를 눈으 로 읽는 것처럼 말이다.
작게 중얼거리며 노트를 보는 오태산의 모습에 강진이 입맛을
다셨다.
‘하긴, 대화가 되기는 하겠구 나.’
강진이 노트를 볼 때, 오태산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송화와 이야기를 하 는 것 같아요.”
“그래요?”
“네.”
노트를 천천히 넘기던 오태산의 손이 돌연 멈췄다.
한 페이지에 적힌 글들을 보던 오태산이 손으로 그것을 쓰다듬 었다.
“두 분이 무척 좋아하시나 보네 요.”
오태산의 말에 그게 무슨 소리 냐는 듯 채송화가 급히 노트를 보았다.
노트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그 녀가 급히 말했다.
“이거 영화 보려고 하는데 광현 이가 유료 결제 번호를 안 알려
줘서 어쩔 수가 없었어. 좋아하 기는 무슨. 내가 그 사람을 왜 좋아해!”
채송화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노트를 보았다.
〈정말 보고 싶었단 말이야.
뭐하기는, 그냥 있었지.
그러니까 일찍 오라고 했잖아.
보고 싶었다니까!〉
노트에 적힌 글에 강진이 오태 산을 보았다. 오태산은 미소를 지으며 글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