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대련
깊은 후회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뭐였지?”
마치 영화 보는 것처럼 내가 했던 행동들이 지나갔다.
“내가 왜 저랬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내가 맞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나 조울증도 생긴 건가?”
윤예진한테 뭐 저렇게 활기차게 대했지?
뭔가 미친놈처럼 뛰어다닌 건 알겠다.
베개를 안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도 알겠다.
그녀에게 장난친 것도 알겠다.
“미쳤네.”
자고 일어나자마자 느낀 감상이었다.
한 달 동안은 푹 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나가야지.”
나가자마자 마주친 것은 운이 안 좋게도 윤예진이었다.
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쳤다.
어제 그런 일을 해놓고는 무슨 염치로 얼굴을 본다는 말인가.
교실에는 가장 늦게 들어갔다.
원래라면 빠르게 들어가 잠을 청했을 텐데, 오늘은 늦게 들어가는 것이 좋아 보였다.
나랑 같이 교관이 들어왔다.
“오늘 수업은 대련이다. 시연회가 멀지 않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네?”
“대련이요?”
실습을 끝낸 지 며칠 안지나고 바로 대련을 한다고 하니 원성이자자했다.
“다들 조용! 2학년 때 길드로 실습 나가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그렇기 위해서 지금이 어필할 시간이다. 그러면 대련장으로 오도록.”
교관의 말과 동시에 반의 대다수가이동하기 시작했다.
**
대련이라고 하면 떨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누군가와 싸운다는 이유였기에 마음이 다를수밖에 없었다.
“원거리 무기도 예외는 없다. 교관이 지정해준 상대와 싸우도록.”
보통 활과 검이 싸우면 검이 유리하다.
거리를 벌린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가까이 붙은 상태에서 싸워야 하는 입장에서는 최악의 경기장이었다.
“한설화! 유은설!”
더군다나 이렇게 실력의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더더욱 불리했다.
“잘 부탁해.”
앞에 서 있는 유은설의 눈빛에는 승부욕이 깃들어 있었다.
“응…”
적어도 나는 궁수니 민첩은 더 빠르지 않을까?
“시작!”
그런 환상은 시작과 동시에 사라졌다.
뒤로 빼고 있음에도 처음과 거리가 벌려지지 않았다.
아마 나와비슷할 정도의 속도를 내는 것이 분명했다.
경기장은 그렇게 작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넓혀놓은 느낌이었다.
원을 빙글빙글 돌며 거리를 벌리려 해도 벌어지지 않았다.
자세를 잡고 조준할 수가 없었기에 그냥 대충 화살을걸고 쏘기만 했다.
내 공격을 피할수록 약간씩 거리가 벌려지기 시작했다.
화살 통에 있는 마지막 화살이 하나쯤 남을 때쯤 거리가 충분히 벌어졌다.
마지막 남은 화살을 시위에 걸고 조준했다.
몇 초밖에 안 되는 시간일지라도 전과는 다른 정확도를 보여줄 거라고 믿었다.
목을 조준해서 날린 화살은 갑작스럽게 거리가 벌려져 그녀의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나는 힘차게 외쳤다.
“항복!”
싸우고 싶어도 더 이상 화살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맞은 손목을 치료했다.
“괜찮아?”
“왜 끝까지 안 싸운 거야?”
나는 대답 대신 뒤에 화살통을 보여줬다.
그녀의 입장으로는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내려와야 했다.
“이거 깊게 베였으면 큰일 났겠다.”
스치고 지나갔다고 신경을 안 쓰면 큰일 날 뻔했다.
치유가 있기에 그 정도는 아닐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더 깊게 베였으면 피가 분수처럼 튀어 나왔을 것이다.
“됐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기에 금방 치료됐다.
앞에는 김세연과 이름 모르는 애가 싸우고 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둘 다 활이기에 보는 맛이 있었다.
쏘고 피하며 둘 다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까 내가 항복하며 재미없던 경기와는 다르게 한 명이 먼저 지쳐 화살이 정확하게 몸통에 맞으려고 했다.
교관이 그것을 잡고 중재했다.
아마도 김세연과 나를 먼저 끝낸 것은 치료해달라는 뜻이겠지.
나도 김세연의 상대에게로 다가가 치료를 도와줬다.
한 명씩 지나가며 마지막 상대는 윤예진과 교관이었다.
총에 대응할 수 있는 생도는 몇 없다고 처음은 교관이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멀찍이 물러나며 둘의 대련을 지켜봤다.
윤예진도 자신이 모든 힘을 다해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가까이서 총을 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승리는 교관의 승리였지만, 총의 위험성을 볼 수 있었다.
“오늘 대련 수업은 이걸로 끝이다. 돌아가서 나머지 수업을 마저 듣도록.”
교관의 말에 다시 원망의 소리가퍼져 나왔지만, 금세 포기하고 교실로 돌아갔다.
**
오늘도 치료실에 앉아 넋 놓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찾아올 사람은 없었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아… 생각나 버렸다.’
윤예진과 있었던 일은 흑역사 그 자체였다.
남자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를 들고 다니며 시내를 활보한 것은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윤예진에게 막말을 한 것도 사과를 해야 할 텐데.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얘기했다.
“들어오세요.”
들어온 얼굴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이하늘?!”
“맞아. 맞으니까. 앉아있어.”
그렇게 나오면 편하게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어디 다쳤어…?”
“아니 됐고. 얘기나 좀 하자.”
“나랑…?”
“어 너랑.”
그가 나랑 얘기할 것이 뭐가 있을까.
“그냥 듣기만 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내 한탄일 뿐이니까.”
“근데 그걸 왜 나한테?”
“그렇다고 이걸 유은설한테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다른 애도…”
“그냥 조용히 하고 듣기나 해.”
‘감정 쓰레기통?’
지금, 이 상황에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내가 너무 바보 같네. 유은설한테 자격지심이 있는 걸까? 걔가 잘나가는 거 보니까 가슴이 아프네.”
이런 부분은소설에 없었다.
‘아마 이하늘 혼자서 자책하고 끝났겠지.’
“어느 순간부터 유은설이 나보다 앞서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나 봐.”
“……”
“학교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감정의 쓰레기 통이라기 보다는 그는 벽을 보고얘기하는 느낌을 원한 것 같다.
아마 내가 그 상대로 어울리는 것일 테고.
“저번 실습 때도 느꼈고, 이번 대련 때도 느꼈어. 사실은 처음 실습 때도 알았겠지.”
“그래서?”
“인정해야지. 유은설이 나보다 앞서있다는 걸. 걔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니까.”
옆에서 지켜봤던 이하늘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은설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그렇기에 주인공이었다.
“걔랑 나랑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어. 차라리 소꿉친구가 아니었다면 괜찮았을까?”
중반부터 사귄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기가 힘들었다.
중반부의 이하늘이 유은설과 사귄 것도 힘들 때 위로하다 보니 싹이 튼 것뿐이다.
그런 위험 요소를 내가 다 없앨 거기 때문에 진도가 나가기 힘들 것이다.
“이미 유은설과 나는 가족 같은 사이야.”
“……”
“그냥 그렇다고. 그럼 나 이만 간다.”
이하늘과 같은 소꿉친구가 있었다면 내 인생이 나아질 수 있었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네.”
소꿉친구가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물론, 내가 멀리 떠나고 연락을 하지 않았다.
오는 연락마저 차단하고 만나지 않았다.
“내 손으로 없애놓고, 이러고 있네.”
떠난 이유는 간단했다.
병이 도졌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었다.
아니. 어쩌면 그때가 불신증은 더 심했다.
지금은 망상이 주를 이룬다면 그때는 사람을 아예 믿지 못했다.
내첫 정신병이 발병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주변인의 죽음.
누구나 겪는 일이다.
하지만 멀리 있던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죽음이 아닌, 동생의 죽음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괴롭힘으로 인한 자살.
나는 그당시에 지금과 다르게 말을 잘하고, 밝은 성격으로 교우 관계가 좋았다.
‘일진’이라는 애들과도 친했기에낮은 학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나이가 깡패였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따라 해보려고 해도 입이 움직이지 않았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동생에게는 무관심했다.
그녀도 나와 똑같은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을 거라 믿었다.
초등학교 때의 흔한 착각이었다.
자신도 하고 있다면, 남들도 모두 하고 있다는 착각.
그 착각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는 사람을 믿지 못했다.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애들도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후배마저도 역겨웠다.
모르는 사람을 혐오한 다음에는 주변인을 혐오했다.
최종적으로 찾아온 것은 나에 대한 혐오였다.
내가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잘할걸’
챙겨 줄 수있었을 텐데.
그래서 도망갔다.
나를 아무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나의 추악한 면모를 모르는 사람에게 향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하려고 하면 도망갔다.
도망갔기에 생겨난 것이 지금의 나였다.
“그만 생각하자.”
소꿉친구라는 말이 여기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만.”
─삐빅
치료실을 닫을 시간이 다가오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 소품들을 정리했다.
**
오늘도교관과 같이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무언가 없으면 섭섭한일과였다.
“한 다음 번이면 끝나겠네.”
“실습은 하게 됐는데 왜 계속하는 걸까요.”
“원래 ‘끝’하고 끝나면 정 없잖아.”
“그런 걸까요?”
“그런 거지.”
“그것보다 잘 되셨어요?”
“뭐가?”
“그때 선물이요.”
“아직 안 줬어. 볼래?”
이미경 교관은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그런 거 보여주면 남자가 안 좋아하지 않나요?”
“왜?”
“자기 줄 선물인데 다른 남자가 먼저 본 거잖아요.”
예전에 본 적이 있었기에 그대로 대답했다.
이런 거 싫어하는 여자가 많다길래 이 세계에서 남자도 똑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가?”
“남자 많이 사귀어보시지 않으셨어요?”
“내가? 나 이번 남자가 처음일 거야.”
“그래요?”
그녀는 객관적으로 봐도 이 세계에서 외모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궁금증을 참는 것은 당연했다.
“별로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그냥 전의 말을 물음으로 끝내지 말 걸 그랬다.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근데 이젠 괜찮아.”
“맞아요. 100번의 인연보다 1번의 인연이 더 의미 있으면 되죠.”
“네 말이 맞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다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겠지?”
“맞아요.”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이렇게 수다를 떨 정도까지 친해졌다.
교관과 생도라는 상하가 존재하는 신분이어서 그럴까.
그녀한테는 별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