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헤어짐
─탁 탁
윤예진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면을 쓴 남자는 한설화가 맞았다.
이미 가면을 쓴 남자는 길드 간부들 사이에서 유명한 존재였다.
저번의 이상 현상으로 대부분이 알았었고, 그전에도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었다.
투명화를 능력을 가진 유물 소유자.
이 설명 하나로 모든 길드들이 그를 찾는 데 혈안이었다.
윤예진은 이미 그 남자를 한설화라고 확정 짓고 있었다.
“근데 물증이 없단 말이지.”
한설화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보여준 이상한 행보 때문이었다.
호텔에서 소피아를 호위하는 보안을 뚫고 방으로 침투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물론, 원래 한설화가 소피아와 친분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렇지만 그와 그녀는 처음 보는 사이가 분명했다.
“투명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딱 맞는데.”
윤예진은 어째서 유은설이 눈치를 못 채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여러 번 만난 눈치임에도 유은설은 정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유은설에게 정체를 물어본 것도 그런 의미에서였다.
이미 정체를 어림짐작하고 있었지만, 유은설도 알고 있나 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눈치가 없는 건가.”
그렇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면과 옷 그리고 활까지 전부 유물처럼 보였다.
“그런 건 언제 가져온 거지.”
윤예진이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였다.
그녀는 책상 옆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웬일이야? 먼저 전화도 하고?]
전화기에서는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들렸다.
윤예진이 먼저 전화를 건 것에 놀람을 표하고 있었다.
“부탁 좀 하나 하게.”
[응. 뭔데? 다 들어줄게.]
“전에 말했던 한설화 알지? 한 번 길드에 오게 해보려고.”
[한설화?]
“응.”
윤예진과 통화하는 사람은 김종현이었다.
윤예진과 친한 남자라면, 김종현밖에 없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길드 영입을 위해 친하게 지낸 것뿐이었다.
윤예진이 생각하기에 남자는 남자가 잘 안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여자보다 예민했다. 어떤 말을 한 번 잘못하면 화를 풀 때까지 오래 걸린다.
그렇기에 그녀는 김종현한테 부탁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고, 길드 영입에 관해서는 그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겠어.]
“고마워.”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는 남자가 말하는 것이 한설화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윤예진은 다시 가면을 쓴 한설화를 만날 때를 대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성공할지는 미지수였지만, 계획을 세워놓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
김종현은 윤예진의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김종현은 윤예진의 곁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사심이 약간 섞인 것도 있지만, 서로가 어릴 때부터 친한 사이였다.
“한설화… 한설화…”
김종현이 최근 윤예진한테 가장 많이 들은 이름이 한설화였다.
김종현은 한설화가 싫었다.
윤예진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남자는 김종현뿐이었다.
최근에 한설화가 그녀의 관심을 모두 가져갔다.
별로 특별할것도 없는 놈이 자신의 자리를 뺏어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자신보고 영입을 시도해보라는 윤예진의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었다.
윤예진의 말을 거부할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전에 재미는 볼 수 있었다.
김종현은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애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설화에게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가지 당부를 덧붙였다.
[윤예진한테는 들키지 않게 조절해.]
김종현은 그제야 편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설화야내 말 듣고 있어?”
앞에서 유은설이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마음을 돌리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보였다.
벽에다 몰아붙이고 그녀의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좋은 구도는 아니었다.
여자가 남자를 몰아붙이는 자세는 남이 보기에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일단 조금 떨어져 줘.”
유은설은 아침에 반에 들어올 때까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 말도 없는 그녀가 의심스러웠지만,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유은설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치료실로 가는 중 유은설에게 붙잡혀 이런 상황이 되었다.
그녀가 나에게서 떨어지고, 우리는 자리에 찾아 앉아서 얘기했다.
“이제는 더 이상 못 보겠어. 신고하자. 응?”
“……”
그녀의 말에대답할 수 없었다.
어제의 일이 없었다면, 당연하게도 안 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렇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작은 희망은 무시할 수 있어도, 작은 불안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희망은 관심을 주지 않으면 금세 사그라든다.
불안감은 그 반대였다. 관심을 주지 않고 방치하게 된다면 어느새 크게 자란다.
마음 한편에 숨죽이고 있는 불안감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사실 어제 던전에서 많이 생각했어.”
나에게 얘기했던 것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눈알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의 주장에는 타당성이 있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것. 너를 빨리 그 년한테서 구해줘야 한다는 것.”
“생각해볼게.”
“생각만으로는 안 돼. 지금 당장 대답해줘.”
그녀의 앞에 있는 탁자를 치고 일어났다.
위에서 아래로 나를 내려다보며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
“너… 오늘도 교관한테 불려가지?”
“……”
“맞나보네.”
그녀는 화를 참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맞다고 생각해?”
“그건 아닌데..”
“그러면 어떡할 건데.”
“생각…”
“생각만 하지 말고!”
그녀가 소리치자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볼 자신이 들지 않았다.
내가 화를 내게 했다는 미안함이 겹쳐왔고, 지금 눈을 보게 되면 힘들어질 것만 같았다.
“음…”
“대답해줘. 정말 걱정돼서 그래.”
고개를 살짝 들고, 눈알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대답을 안 하면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전처럼 부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강제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알겠어.”
그래서 대답했다.
“다행이다.”
유은설은 좋다는 말보다 다행이라는 말을 먼저 했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다가와 안았다.
인생 살면서 여자의 품에 안겨본 것이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거부하지는 않았다. 가만히 그녀의 품을 느꼈다.
그 따뜻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내 어깨에 팔을 풀고는 어색한지 옆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핸드폰을 켜서 영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내용은 나와 교관의 성관계 영상이 찍혀있었다.
유은설은 천천히 증거를 수집했고, 그것을 토대로 신고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지금 갈까?”
유은설은 바로 신고하러 가자고 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이유를 물어보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오늘까지만 교관을 볼 수 있을까?”
유은설은내 말에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왜?”
“마지막이잖아.”
다시는 못 볼 사이라고 생각하니 마지막 얼굴은 보고 싶었다.
“밉지 않아?”
“밉지.”
어떨 때는 죽도록 싫었고, 어떨 때는 좋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일도 결국 사람과의 관계였다.
그 사람이 나에게 나쁜 일을 했던, 좋은 일을 했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싶었다.
싫어하는 사람도 결국은 나와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이었다.
내가 죽도록 싫어한다면 더욱 관계의 끈은 길고, 굵을 것이다.
유은설은 나를 노려보다가 말을 꺼냈다.
“알겠어.”
안 된다고 할 줄 알았지만, 유은설은 허락해줬다.
“내가 왜 허락해줬는지 궁금해?”
내 속마음을 읽은 듯 그녀가 나한테 물어왔다.
“내가 너도 아니고, 이것 정도는…”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나를 봐줘서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해.”
그녀는 나에게 신경 써준 것이 많았다.
그것을 전부 담아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유은설은 웃으며 나를 보내줬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것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
이미경 교관을 만나 숲으로 가고 있었다.
빽빽하게 늘어져 있는 빌딩의 숲을 지나 나무가 무성히 자라 있는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평소였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말을 해보고 싶었다.
“교관님. 혹시 저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아마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설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등장이 그녀를 괴물로 만든 것일 수도 있었다.
교관은 뒤를 돌아 나를 쳐다봤다.
아마 호칭이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별 말하지 않았다.
교관도 느끼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 인생은 원래 예상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그런가요.”
“너는 왜 나를 따라온 거야?”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평소처럼 강압적이 아니라, 예전의 교관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훈련할 때의 숲을 걸으면서 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말했잖아요. 교관님이라서 따라왔어요.”
“그렇지?”
내가 한 말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전처럼 화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를 강간한 것에 대해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런 행동은 그녀와 어울려 보였다.
“신고할 거야?”
교관은 나에게 물어왔다.
“네.”
“그렇지?”
그녀는 신고한다는 말에 놀라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다는 듯 받아들였다.
“별로 놀라시지는 않네요?”
아마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결국, 늘 도착하는 숲에 다다르고, 그녀는 늘 그렇듯 내 앞에 섰다.
평소처럼 지퍼를 내리고 애무부터 시작했다.
“흣…”
그녀는 전처럼 손을 쓰지 않았고, 내가 하는 것을 느끼기만 했다.
내가 그녀를 괴물로 만든 걸까.
이게 그녀의 평소 모습이 아닐까.
성욕에 눈이 먼 교관은 보이지않았다.
어쩌면 마지막이라고 내 눈에 미화되어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오늘은 제가 위에서 해드릴까요?”
지금까지는 늘 그렇듯 교관이 내 위를 올라가 허리를 흔들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니 늘 똑같은 자세로 성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풉… 그래.”
교관의 위에 올라타 천천히 넣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성관계였다.
허리를 그녀에게로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하자, 교관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흐읏…”
“좋으세요?”
“응.. 좋아.”
나의 등장으로 바뀐 첫 번째 등장인물이었다.
원래의 역사라면 성심성의껏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나에게는 악영향을 끼쳤지만, 그녀에게는 내가 좋은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무르다고 할 것이다.
강간한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여기서의 강간은 다른 의미였다.
나에게 남자는 성관계를 즐기는 입장이었다. 나 역시도 같은 성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폭력은 약간 싫어했을 뿐이다.
“교관님 저 갈 것 같아요.”
“하아… 같이 가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발가락을 빳빳이 세우고, 신음을 내질렀다.
“흐으으으읏!”
나도 그녀의 안에 정액을 쌌고, 그녀의 애액이 내 몸에도 묻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그렇게 한 번의 성관계 후에 나는 지쳐서 쓰러졌다.
교관은 평소처럼힘이 넘쳐 보였다.
몇 번의 관계 후에 겨우 만족하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달려들지 않았다.
주섬주섬 일어서며 주위를 정리하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정리하는 그녀에게 말을 했다.
“제가 좋은 영향을끼쳤을까요?”
정말 궁금증에 물어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숲 밖으로 걸어갔다.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유은설은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건지 교관이 떠나고 내 곁으로 달려왔다.
아마 교관도 알아차리고 있던 것 같다.
그녀의 인지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유은설이 그 범위를 벗어나 구경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괜찮아?”
“응.”
주변에 남아있는 정사의 흔적을 보며, 교관이 나간 길을 노려보고 있었다.
“괜찮아.”
그녀에게 어쭙잖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내일이면 끝날 거야.”
그녀는 내일 신고할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나의 직감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 오늘이면 끝날 거야.’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나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이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늘 미화되기 마련이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든, 그 끝은 늘 아름답게보였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그 끝에 추모를 받는 사람도 많았다.
“갈까?”
내가 유은설에게 말했고, 그녀는 곧 나를 따라 숲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조회부터 교관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