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헤어짐
“뭐라고?”
“그만… 만나자고.”
그녀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얘기했다.
“이번에는 또 누구야.”
“누구도 아니었어. 그냥 내 의견이야.”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또 누구한테 협박받는 중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얼굴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쳐다보면 당장이라도 진심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저번과는 달랐다.
숲에서는 얼굴을 보면서 거짓말을 얘기할 수 있었다.
그때는 그녀와 깊은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가능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충분히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사이였다.
‘아니면 이것도 나만의 착각이겠지.’
어쩌면 그녀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나한테 그녀는 친구였다.
“꼴 보기 싫어.”
“뭐?”
“뭐라고 선심 쓰는 게 보기 싫다고.”
말해버렸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전에는 그녀가 이해해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녀가 상처받을 만한 말을 했다.
자신이 도와준 사람한테 저런 말을 듣고 싫어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이야? 눈 똑바로 보고 말해.”
“진심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 보지 말자고.”
눈은 여전히 피하고 말했다.
그녀가 다가와 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눈을 마주쳐도 내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정말로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래야 그녀가 나를 버리고, 나아갈 것이다.
“정말이야?”
“맞아. 이제 일도 끝났으니까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나만 친구라고 생각한 거였어?”
“친구?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였어? 너 혼자서 망상한 걸 나한테 말하지 마.”
내 입에서 이렇게 험한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다시 번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나가줘.”
“진짜로?”
“우리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자. 그냥 쿨하게 헤어지면 안 될까?”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그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말에 결국은 어깨를 축 내린 채로 밖으로 향했다.
내 말에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어쩌면 몇 걸음 되지 않는 작은 거리일지라도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구경하고, 문이 닫히자 긴장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관계를 끊어냈다.
그것도 확실하게 끊었다.
끊은 실을 다시 이어 묶을 수는 있어도, 전과 같은 모양은 유지되지 않는다.
묶은 중간에 이상한 매듭이 생긴다.
매듭은 매끄러운 선 모양을 이루지 않게만든다.
중간에 걸림돌이 있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끊어진다.
“잘했어.”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오늘은 잠자리에 들지못할 것 같았다.
아직도 유은설에게 한 말이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다.
어쩌면 착하게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랑에 남은 마지막 하나의 실이 남아있었다.
방금 끊어 낸 실 말고 남은 하나의 실마저 정리해야 했다.
“누가 보면 자퇴하는 줄 알겠네.”
혼자서 킥킥 되면서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었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을 꾹 감고 웃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오는 건 전부 다 웃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오는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절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녔다.
웃겨서 우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잘했어.”
내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머릿속 소리가 다시 나에게 들리기 시작했다.
“사실은 유은설도 좋아할 거야.”
“너 같은 쓰레기 한 명을 잘 걸러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겠지.”
“사실 정말로 쓰레기가 맞지. 어떻게 자신을 생각해준 애한테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어?”
“맞아. 나는 구제 불능이네.”
모든 것이 유은설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녀도 나중에는 좋아할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곁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이 좋았고, 나는 그녀의 겉만을 맴도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오늘이 가기 전에 마지막 남은 사람에게 어떻게 말할지 고민했다.
**
숲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제는 교관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 연습 공간이 되어버렸을 뿐이었다.
어제의 일은 허상과 같이 지나갔고, 오늘은 별로 훈련할 기분도 아니었다.
활은 가져왔지만,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는 걸까 생각도 들었다.
혼자 남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나와 시야로 다가왔다.
한순간에 나무가 많은 숲은 보이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공간이 나를 반겼다.
그곳에서 나를 볼 수 있었다.
어두운 곳에 혼자 무릎을 끌어 머리를 박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하게 머리를 박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주위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말소리가 들림에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발소리가 들림에도 다가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저것이 내 미래를 뜻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죽을 것 같은 기분이 찾아오고, 말소리와 발소리는 이명으로 대체되었다.
“나는 이게 맞지.”
정신병자가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려고 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이렇게 환각이나 보는 미친놈임을 알면 다들 피할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눈을 뜨고 주위를살필 수 있었다.
“헉! 자고 있었구나.”
목을 조르는 느낌이 점점 사라지고, 이명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오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고, 별과 달이 정확하게 보였다.
곧 있으면 김세연이 이곳으로 올 것이다.
늘 오니까 믿고 있었다.
이것도 정말 이기적인 기다림이었다.
며칠은 그냥 가버린 날도 있었다.
그날도 김세연은 늘 찾아왔다.
곧 김세연이 나한테 찾아왔다.
“설화야!”
늘 그렇듯 나를 향해 밝게 불러줬다.
나도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보는 미소였다.
남을 웃게 해주는미소는 언제봐도 행복했다.
표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약해지면 안 됐다.
“응? 무슨 일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는 그녀들이 내 표정을 더 잘 아는 느낌이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걱정하는 표정을 보여줬다.
“아니. 없었어.”
김세연은 나를 데리고 숲을 나가고 있었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숲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내가 아무 말이 없는 것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앞을 보면서 걸었다.
가는 도중에도 별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의 연을 끊을준비를 했다.
그녀와 헤어질 때쯤에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왔다.
남자 기숙사 앞이었고, 그녀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김세연.”
“응?”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손을 내리고 쳐다봤다.
“이제 부담스러운데, 숲까지 안 와도 돼.”
“아니야. 괜찮아.”
“내가 부담스러워.”
“음… 그래?”
그녀는 내 말에 놀란 듯 쳐다봤다.
아마 평소의 나와 다른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 그만 가?”
“그게 아니고.”
김세연은 웃으며 쳐다봤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안에서 이빨끼리 부딪쳐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했다.
“그냥 아예 관심도 주지 말라고.”
“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만 만나자.”
연인이 헤어짐을 말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헤어짐을 말했다.
연인처럼 깊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이보다 어울리는 말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 있어?”
김세연은 끝까지 내 걱정뿐이었다.
그녀가 나한테 화를 낼 상황임에도 화를 낼 기색은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갑자기 왜 그래?”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행동이 큰 결과를 내놓는 경우가 있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냥 기숙사로 들어갔다.
김세연은 나를 붙잡으려고 손을 들이밀었지만, 다가오는 손을 쳐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김세연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슬픈 얼굴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웃고 있지 않을까?
내 방에 들어온 뒤 창문을 통해 밖을 봤다.
김세연은 아직도 그 자리에 돌처럼 서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사과하고 싶었다.
내가 잘못했다면서 그녀에게 사과를 전하고 싶었다.
몸을 늘어트려 창문을 통해 내 모습이 보이지 않게 했다.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미웠고, 역겨웠다.
한쪽 눈에서만흐르는 눈물은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입을 가로막아 소리 없이 울었다.
계속해서 창문 사이로 김세연을 확인했고,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한 시간이 지났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이 빨개져 잠을 자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눈을 감고 있음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옷을 챙겨입지 않고, 얇은 상의와 바지 하나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주위에 불빛을 비추는 곳만이 밝게 빛났고, 빛이 없는 곳은 앞조차 보이지 않았다.
빛이 없는 곳으로 점점 걸어갔다.
가로등이 있는 곳은 피하며 구석으로 들어갔다.
골목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니 그제야 추위가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추운 날씨가 아니었지만, 새벽 공기는 서늘했다.
골목을 돌아다니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에 이끌리듯 그쪽으로 향했다.
담배 냄새가 나한테도 맡아졌다.
성인임을 알고 있지만, 하랑의 생도 중에 담배나 술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걔 들었겠지?”
“매일 치료실 앞으로 오잖아. 당연하지.”
대화의 내용을 듣고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치료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했던 둘이었다.
그리고 둘의 대화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종현이가 알아서 괴롭히라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그 말을듣고,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꼭대기에 누가 서 있는지 알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당장 둘을 죽이고, 김종현도 죽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목숨은 그렇게 가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뒤를 돌아 도망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대항한다는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