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중간 평가
윤예진은 나와 대화를 한 뒤, 따로 미안하다고 연락을 줬다.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고 필요한 게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그 말에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누구 소행이었으려나… 역시 김종현이겠지?”
윤예진과 관련되고, 그녀가 믿고 일을 맡길 사람은 김종현밖에 없었다.
이제는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다고 했고, 윤예진을 믿는 방법밖에 없었다.
“설화야!”
훈련이 끝나는 시간대에 늘 오던 사람이 왔다.
인기척이 하나도 없던 숲에 한 명이 들어오자 생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오늘은 빨리 자야 하는 거 아니야?”
“됐어.”
“그래도… 내일이 중간 평가인데?”
그렇기에 더욱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저번처럼 실수해서는 안 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을 해나가야 했다.
“돌아갈 거지?”
김세연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애써 무시하며,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사이도 아닌데, 손을 잡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시했음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으며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내일은 무슨 평가일까? 지금까지 해온 거 생각하면, 규모가 조금 크려나?”
조금 수준이 아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배는 큰 것 같았다.
그만큼 하랑은 중요한 평가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실전을 위한다고 해도 교관이 투입되어 안전을 확보했지만, 이번시험장에는 한 곳을 제외하고 교관이 일절 투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죽는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돈을 많이 썼다는 얘기는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같이 협동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 그러면설화 너도 유리할 것 같은데.”
그렇게 옆에서 그녀가 중간 평가에 대해 조잘거리는 사이 기숙사에 도착했다.
기숙사에 들어가며, 그녀에게 짧게 손을 한 번 흔들어줬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데려다준 사람에게 인사 한번 없이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들어가.”
그녀는 나에게 웃으며 이야기 해줬다.
아직 어색한 것 같지만, 그녀도 별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조금만 더 다가갈 수 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에 대한 혐오감이 조금씩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이렇게 친절하게 다가오는데 손 인사 한번밖에 못 해주는 내가 못나 보였다.
평소처럼 말을 꺼낸다면 좋겠지만, 그녀에게만큼은 길게 몇 마디 얘기하는 것이 아직 힘들었다.
기숙사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내일을 생각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사건이었지만, 대부분 정리가 끝났다.
걸어오면서 좋은 생각도 하나 나왔다. 마지막 한 가지 톱니바퀴까지 맞물리고 나서야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났다.
핸드폰을 꺼내 윤예진한테 문자를 했다.
[필요한 게 있냐고 했지?]
그녀에게 문자를 보낸 지 몇 초가 지나고 바로 답장이 왔다.
[응?]
[뭐든지?]
[내 권한을 넘는 것만 아니면야.]
[그러면 내일 중간 평가 때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줘.]
[어?]
[도와줘.]
[그래… 뭐. 상관없겠지. 그것보다 도울 수 있다고 확정 짓고 말하는 것 같네?]
[도와준다고 했다.]
그녀에게 짧게 답장을 하고 핸드폰을 덮었다.
내일이 평생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런 소설 같은 일은 현실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생각한 대로만 흘러가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
아침 일찍부터 교실이 아니라 교관의 지도를 받아 다른 곳으로 등교를 했다.
다들 졸리다는 듯 하품을 하거나, 중간 평가에 대한 긴장감 때문인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이제부터 생도들은 모두 시험장에 들어가게됩니다.”
교관은 그 뒤에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대충 요약하자면, 그냥 한 섬에 생도들을 몰아넣고 살아남는 시험이었다.
모든 생도에게 옷을 하나씩 배부하고, 그 옷은 데미지 측정기 역할을 한다.
원리는 설명해주지도 않았고, 일정 이상의 상처를 입었을 때 교관이 있는 곳으로 자동 순간 이동하게된다.
물론, 만능은 아니다. 실제 전투에서도 사용한다면 사기라고 부를만한 장비겠지만, 특별한 장치가 있어야만 작동이 된다.
그렇기에 특별한 시험장을 마련한 것이다.
생도들은 옷을 받아들고 금방 입기 시작했다.
교관이 한 명씩 돌아가며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있었고, 이제부터 서로를 죽일 수 있다는 소리에 다들 긴장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노려보는 사람도 있었다.
윤예진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녀를 쳐다보자 입 모양으로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대답에 모르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녀에게만 말한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윤예진에게는 의심받을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럴 바에는 약간씩 밝히며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애초에 그녀에게 증거를 남길 생각은 없었다.
우리 말고도 다른 반 생도들도 많이 모여있었다.
1학년 인원을 생각한다면 꽤 많은 사람이 섬에 상주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옷의 능력이 발동된다면, 교관이 있는 곳으로 오게 된다. 섬 안에 있으니 그곳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유의하고 이동하도록.”
섬 안에는 순간 이동하는 장소가 마련되어있다.
그곳에는 많은 교관이 있었고, 빌런들의 침입에도 버티는 곳이었다.
“지금 보니 사제 무기를 가지고 있는 생도들이 몇몇 보이는데 반납하고 가도록. 무기는 탈락 장소에서 받을 수 있다.”
그 말에 여러 생도가 앞에 나가서 유물과 장비들을 제출하기 시작했다.
유은설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인검을 앞에 제출했다.
실습 훈련을 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입장하도록.”
교관의 말에 다들 한 발자국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정 선을 넘자 사람의 형체가 사라졌고, 나도 넘어가자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내가 알고 있는 곳과는 다른 곳이었다.
매일같이 연습했던 숲과 비슷한 지형에 떨어졌다.
“정신 차리자.”
놀고 있을 시간은 없으니까.
나는 빠르게 달려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유물은 착용하지 않았다. 교관들은 없었지만, 생도들을 감시하는 카메라는 존재했으니까.
가장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생도는 겁에 질려있어 보였다.
칼을 들고 앞을 보며 움직이고 있었다. 뒤를 돌아 나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의 인지 범위보다 내 시야가 좋다는 뜻일 것이다.
괴수를 상대할 때와 다른 점은 상대가무슨 무기를 들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당장 앞에만 보고 걷는생도를 뒤에서 저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럴 예정이었고.
활시위를 크게 당겨 칼을 쥔 생도의 뒷머리를 겨냥했다.
거리낌은 없었다. 죽는다고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악!”
약간의 비명을 지른 후 바로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픈 것은 맞겠지만.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숨이 턱턱 막혀오며, 몸이 쉬라고 소리쳤다.
쉴 시간은 없었고, 숨을 크게 쉬었다 내쉬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루. 하루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아침에 들어왔기에 시간이 많아 보였지만, 생각해보면 300명이 넘는 인원이 들어가 있는 섬에서 내가 알고 있는 인원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다름없었다.
간간히 사주경계를 하지 않는 생도의 뒤를 잡고, 화살을 쏴서 탈락을 시켰다.
사주경계를 하고 다니는 생도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 생도도 나를 알아차린 것 같았지만, 서로 무시하고 지나갔다.
지금 상황에서 싸우면 서로가 낭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달리고 달려 내가 찾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어느새 숲 지형은 넘어왔고, 갈대가 많이 자란 평원이 나를 반겼다.
“설화야!”
지금 상태에서는 김세연이 나보다 시야가 좋았다.
일단 경계를 하기로 했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 몸이었기에 활을 들어 그녀에게로 겨눴다.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김세연은 두 팔을 들어 항복의 표시를 내보이며,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설화야, 이거 같이 다녀도 되는 거야. 내가 조금 못 믿게 생겼나?”
그러면서 자기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동맹하자는 거야?”
“그렇지!”
그녀는 내 말에 신나 달려오기 시작했다.
“멈춰.”
“어? 같이 하자는 거 아니었어?”
“활 내려놔.”
김세연은 내 말에 바닥에 활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없음을 증명했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의 활은 손으로 잡기에 너무 멀리 있었다.
“이러면 됐지?”
“응. 이제 와.”
김세연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시험 전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빌런들의 침입에서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하는 법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리고 좋은 생각이 났다.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등장인물들을 모두 탈락시키면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탈락 지점에서 교관들의 보호를 받는 것이 제일 안전했다.
그리고 첫 번째 희생양은 그녀가 될 것이다.
화살을 더 이상 피하지 못할 거리가 되자 활시위를 놓아 그녀의 가슴으로 화살을 쏘았다.
“어?”
“미안.”
사과는 잊지 않았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가슴에 꽂힌 화살에 이상한듯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
분명히 아플 텐데 비명 대신 놀란 듯한 목소리였다.
“쓰레기가 된 기분이네.”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싫어하게 되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앞으로 죽여야 할 사람은 총 4명.
가면서 최대한 생도들을 죽여 구한다.
“죽이는데 구한다니.”
모순된 말이었다.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갈대가 길게 자란 평원을 지나 해안가로 들어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섬이 뭐 이리 넓은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속도로 달려도, 섬 전체를 달리지 못했다.
어느새 내머리 위에 떠 있던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다.
해안가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장기전으로 갈 것을 예상한 것인지 물을 떠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찾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거기 누구야!”
다가오는 나를 알아차린 생도가 먼저 외쳤다.
자신의 특기를 살려 많은 사람을 불러모았다.
아마 그녀가 있는 모임이 이 섬에서 가장 큰 무리를 형성하고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자기들끼리 싸우기로 한 모양인지, 똘똘 잘 뭉쳐있었다.
“윤예진 좀 볼 수 있을까?”
“윤예진?”
“나?”
내가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가 달려왔다.
“한설화?”
나를 보고 놀라는 것까지 예상한 대로였다.
“잠시 얘기 좀 할까?”
“잠시만.”
그녀는 나에게 말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질서는 잘 잡혀있었다.
‘괜히 길드를 이끌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
윤예진과 나는 무리에서 떨어져 따로 자리를 잡았다.
“너도 들어올래?”
“어떻게 할 예정인데.”
“어… 일단 경기장은 천천히 좁아지니까, 안쪽에 자리 잡았고, 그전에 물은 최대한 많이 만들어놓고…”
그녀는 계획을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좋은 생각이었지만, 나로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계획과 다름없었다.
“됐고, 도와줄 거지?”
“어… 물이나 식량이라도 줘?”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럼…?”
“김종현있지?”
그녀에게 말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등장인물 중에서 내가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김세연도 방심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내가 졌을 것이다.
방심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지금 당장 윤예진의 가슴을 찔러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할 일을 해줘야 했다.
여기서는 잔인해져야 했다.
낯을 가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실수할 때마다 한 명씩 죽어 나간다고 생각하면, 내 안위를 챙길 시간은 없었다.
자괴감에 빠져있을 시간도 없었고, 남을 배신한다고 자책할 시간도 없었다. 앞을 보고 달리기만 해도 벅찼다.
“그…렇지?”
윤예진은 그렇게 말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소리가 얼마나 큰지 내 귀에도 정확하게 들려왔다.
그녀의 무리에 김종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밤에 죽여. 그리고 여기서 만나자.”
“잠…잠시만!”
“왜?”
“그럴 수는 없어. 그러면 나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안되는 이유를말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말이 많아 보였다.
“안 해준다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지.”
“뭐든지 해준다며.”
“아니 그거랑은…”
“거짓말이었던 거야?”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녀에게 확답을 들어야 했다.
“거짓말은 아닌데…”
“너도 알고 있잖아. 걔가 나한테 한 짓을.”
“으음… 하아… 알겠어.”
한마디로 말하자면, 거짓말을 한 것이다.
확실히 김종현이 나를 뒷담화하게 시켰다는 증거도 없었다.
단지 그녀의 반응과 지금까지 들어온 이야기를 합쳐 내놓은 결과였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고, 윤예진은 결국 수락했다.
“그러면 이따가 열 시에 이 자리에서 만나자.”
“그건 너무 빠른데…”
그녀를 충분히 활용해야 했다.
지금 윤예진은 나의 카드 패 중 하나였다.
생도들을 최대한 죽일 수 있는 나만의 살인 병기였다.
그녀의 권총은 대인전에 특화된 무기였고, 웬만한 생도는 막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열한 시.”
“그 정도면…”
윤예진이 나를 이 정도로 돕는 것은 아마 어제 일 때문일 것이다.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사건의 원인인 김종현을 죽이는 것까지는 그녀에게 가능한 정도일 것이다.
따로 불러내 아무도 모르게 죽이면 완벽 범죄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남은 두 명을 찾아 나섰다.
지금쯤이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 둘은 평가에서도 팀을 이뤄 같이 있었으니까.
나는 처음 나왔던 숲을 향해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