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중간 평가
손가락을 빗처럼 사용하며 유은설의 머리카락을 풀고 있었다.
뒤통수에서 피가 나온 것인지 피 때문에 떡진 부분도 있었고, 급하게 나왔는지 눌린 부분도 많았다.
“으음…”
확실히 죽은 것은 아닌지 몸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입은 오물거리며 무언가를 씹는 것처럼 보였다.
입이 오물거리는 것이 많이 귀여웠다. 그녀의 외모는 객관적으로 봐도 많이 예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며,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폐공장 같은 곳에 따로 방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내 눈에 밟힌 것은 그녀의 검이었다.
반지에서 나온 조각들은 검에 부착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제 위치를 찾아간 것처럼 보였다.
아마 검의 능력이 전부 해방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아예 해와 달을 박지 않는 이상 사인검의 봉인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그 소리에 집어넣었던 활을 꺼냈다.
생도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들리는 발소리는 이 방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정상적인 생도라면, 이 난리가 일어났을 때 도망가거나, 숨죽이며 구조를 기다릴 것이다.
철문이 몇 번 두드리고 나서 잠시동안 조용해졌다가 단숨에 문을 부수고 세 명이 진입했다.
미리 시위에 걸었던 화살로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을 죽였고, 뒤이어 들어온 두 명도 상황을 파악하고 나에게 달려들었지만, 준비해놓고 있었던 내가 한 발 더 빨랐다.
“악!”
마지막 사람까지 죽이고, 앞을 바라보니 나머지 사람들도 들어오고 있었다.
긴장은 놓지 않았다. 유은설이 전부 죽인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 많은 수가 남아있었고, 나머지는 내가 처리해야 했다.
세 명이 죽고 난 뒤에 들어온 사람은 아예 벽을 부쉈다. 그 틈을 통해 다섯 명이 들어왔다.
세로로 활을 눕힌 상태에서 세 개의 화살을 동시에 쏘고, 달려오는 둘에게 화살을 쏘았다.
지금 이 방은 내 공간과 다름없었다.
미약 때문인지 민감해진 감각은 살갗에 닿는 공기마저 생생히 느껴졌다.
점점 약의 효과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이미 심각해질 대로 민감해진 몸은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활은 놓지 않았다.
빌런들의 수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죽어있는 민시연이 아닌 따로 지휘를 내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이렇게 죽음을 각오하며 달려들 이유가 없었다.
문 옆에 있는 벽이 하나둘 뚫리기 시작하며,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눈앞은 땀 때문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빌런들을 보며 유은설의 마지막 공격에 대해 생각했다.
유은설이 처음 몇 명을 베었을까.
많아봤자 30명?
눈먼 칼질에 죽었을 사람이 어느 정도나 될까.
섬에 침입한 빌런들이 생도들과 똑같은 수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면, 약 400명.
400명 중에 침입작전에서 죽었을 사람은 100명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서 들어오고 있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아직 다 뚫지도 않은 벽을 비집고한 명 두 명 들어오고 있었다.
어지간히 유은설이 위협적으로 보인 것 같았다.
자신들의 최대 전력을 죽인 사람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듯 내 화살을 맞으면서도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세는 필사적이었고, 나의 손은 기계처럼 통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고 쏘는 것을 반복했다.
어느덧 문 앞에 시체가 쌓여 들어오기 힘들 정도가 되자, 길이 막혀 처음처럼 많은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죽인 덕분에 내 화살통의 화살도 빈 통이 되었다.
활을 내려놓고 달려나가 나에게 가장 가까이 떨어진 검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생도용 활은 진작에 꺼내 바닥에 떨궈놓았기에 두개의 빈칸이 남아있었다.
달려나가며 가면을 유은설의 옆에 던졌다. 이제 활도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굳이 가면을 쓸 이유는 없었다.
연습은 했지만, 활처럼 잘 사용하지는 못했다. 실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쓰라고 준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사용해보니 그냥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천근 활도 내려놓았기에 활의 능력은 더 이상 받지 못해 몸이 약간 무거워졌다.
어느새 시체들을 치웠는지 처음 문 크기 정도의 빈 곳이 남아있었다.
그곳을 통해 달려오는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내 배를 향해찔러오는 검을 피하고, 손에 주웠던 검을 소환해 그대로 목을 사선으로 찔렀다.
쓰러지는 사람을 피하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검을 인벤에 넣었다.
그녀의 목에 박아넣었던 검을 꺼냈다.
‘나쁘지 않네.’
아무것도 없는 손에서 검에 소환되는 것을 보고 이런 방식을생각했다.
그녀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밖을 바라봤다.
빨간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빌런들의 뒤에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딱 보기에도 그녀가 이 집단을 이끄는 것처럼 보였다.
“신기한 걸 가지고 있네.”
“너 얘보다 강하냐?”
뒤에 누워있는 민시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알기론 여기에서 민시연보다 강한 사람은 없었다.
그녀보다 강한 사람은 참여하지 않았을 테고, 교관들과 동수를 이룰 정도라면 텐트가 있는 곳들을 습격했을 것이다.
“그 년이 강하긴 해도 이끄는 건 또 다른 문제거든.”
“너도 말 많네.”
장판파의 장비가 된 것 같았다.
수천의 군대가 앞에 있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백 명이 조금 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정도의 숫자만으로 나를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 문을 지키고 섰다.
“안에 있는 애지? 죽인 게? 걔만 주면 깔끔하게 떠날게. 나도 할 말은 있어야지.”
그녀는 안을 슬쩍 바라보며, 유은설을 가리켰다.
그녀에게 내가 해줄 대답은 하나였다. 내 오른손을 들어 그녀에게 중지를 펼쳤다.
“남자가 행동이 얌전해야지. 그러면 장가 못가.”
“너도 지랄이네. 말은 그만하고 들어와.”
내가 말하자 가장 먼저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달려왔다.
검을 피할 수는 있었다.
단지 검이 지나가면서 나에게 느껴지는 바람은 치명적이었다.
그놈의 약만 아니었어도.
검을 피하고, 찔러넣는 것의 반복이었다.
나도 움직일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기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달려오는 사람은 평범했다. 별로 쓸모있는 능력은 아닌지 평범한 칼질이었다.
옆구리가 칼에 베이며 상처가 났지만, 그녀의 목 옆에 손을 갖다 대고 칼을 꺼냈다.
살이 뜯어지는 소리가 나며, 단번에 즉사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천천히 앞에 쓰러져가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내 주위에 시체가 많아졌다.
한 명이 쓰러지자마자 날아오는 화살을 방비할 수는 없었다.
화살에 어깨가 맞아 왼쪽 팔은움직이지도 않았다. 피는 길게 흘러내려 손을 축축하게 만들었고, 바닥에는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부신 돌벽을 대체하는 시체들의벽 중앙에 서 있었다.
“이제 끝이야? 별거 없네.”
말은 태연하게 했지만, 내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활을 사용할 때 마력을 거의 다 사용해, 치유는 사용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 질문에 대답하며,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쇄도했다.
“그럴 리가.”
다음에 달려온 사람은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 앞에 쌓인 시체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고, 내 어깨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어깨로 향하는 그녀의 검을 막으려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을 들었지만, 어느새 내 어깨로 오던 검은 사라지고 내 배를 찌르고 있었다.
그게 그녀의 능력인지내 배를 찌르고 입은 웃고 있었다.
힘겹게 들어 올린 왼손으로 검을 꺼내 찔러온 검을 잡고 있는 두 손을 잘랐다.
배에 칼이 박혀있는 상태로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다행히도 깔끔하게 찔렸는지 피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은 내 얼굴에 상처를 늘리고 있었다.
전에는 땀이 내 눈을 가렸다면, 지금은 피가 내 눈을 가리고 있었다.
“아…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유은설이 앞으로 겪은 일도 도와줘야 할 텐데.
그녀 혼자서 헤쳐나가지 못하는 일도 있을 텐데.
다른 애들도 살려줘야 하는데.
다리에는 상처가 길게 늘어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만 발악하지?”
어느새 그녀는 내 앞까지 와 있었다.
깔끔한 용모에 적발을 흩날리며, 나를 향해 창을 들이밀고 있었다.
약에는 각성제도 섞여 있는 것인지,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오히려 처음에는 약이 악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는좋게만 느껴졌다.
고통이 쾌락으로 바뀌고, 그 쾌락은내가 정신을 잃지 않게 도와주고 있었다.
“풉… 지랄.”
후들거리는 다리를 최대한 진정시키고, 한 손에 들고 있는 검마저 인벤에 집어넣었다.
“죽어도 안 비켜.”
죽어도 같이 죽는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 모르겠다.
내가 원래 이렇게 남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남에게 쩔쩔맸던 내가남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한 적이 있었던가.
내 목숨 하나 아까워 자살하지 못했었는데.
언제 이렇게까지 왔을까.
내 몸은 한계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힘들다는 구간은 이미 지나 상쾌함이 느껴졌고, 상처는 더 이상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내 시야에는 적발을 가진 그녀와 나만이 서 있었다.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지금이 내가 겪었던 일 중에 가장 최고로 기분이 좋았다.
“그래?”
─퉤
그녀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들어와.”
그녀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마지막을 준비했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유은설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가 내 머리 옆으로 창을 찔렀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옆을 돌아봤다.
창은내 옆의 허공을 찌르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속도였다.
“나중에 보자. 기세는 좋았어. 그리고… 내가 쟤보다 강해.”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 나머지 빌런들을 데리고 뒤를 향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향해 중지 손가락을 펼쳤다.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가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빨리도 오네.”
몇 시간이 지났는데, 참 느리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잃었다.
**
“일어났어?”
옆에서 이야기가 들리고, 정신을 차렸다.
“화려하게 일을 벌였더라고.”
“으으…”
“이제는 부정하지도 못하겠지?”
팔이고 목이고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윤예진은 그런 내 상태를 알고 있는지 내 앞으로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이게 뭔 줄 알아?”
모르면 이상했다. 가면과 옷이었다.
“그렇게 부정하더니, 결국은 이게 뭐야.”
“내가…”
“조용히 해. 가면은 바닥에 있었어도, 옷은 제대로 입고 있더만.”
윤예진에게 꼼짝없이 들킨 것 같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유은설에게 들켰다면, 어떻게 해명할지 난감했을 것이다.
“우리 얘기좀 하자.”
누워있는 나를 상대로 윤예진의 목소리가 들렸다.